왜 이 책이 그토록 사람들에게 많이 읽혔는지? 왜 이 책이 스페인 그리고 바르셀로나를 대표하는 소설이 되었는지?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다시 한번 곱씹게 됩니다.
그 소설 속 모든 인물이 내 안에 있는 누군가들의 조금씩의 합인 거 같다는 생각도 떠오릅니다. 도돌이표가 되어서 자꾸만 다시 생각나게 하는 주인공들 이야기의 중층구조가 각인됩니다.
내가 느낀 이 소설은 내 주변인들과 관련된 이야기의 종합 선물세트가 아닌가 합니다. 무대는 스페인 바르셀로나고요. 등장인물은 지금 여기의 젊은 나(다니엘)와 다른 시공간의 나(홀리안), 과거와 현재의 내 사랑, 내 딸, 내 동생, 친구들, 아버지, 어머니, 살면서 만나왔던 모든 사람들이 소설 속 등장인물과 맞춰 떠오릅니다.

"아저씨 말이라면 뭐든지 중요하게 여긴다는 거 알잖아요. 페르민."
"그럼 사제의 시동侍童 같은 그 옷에 붙은 먼지부터 좀 털자. 오늘 오후에 서점 문을 닫는 대로 산타 루시아 보호소에 있다는 할머니를 위문할 거니까. 그런데, 이제 얘기 좀 해봐. 어제 그 매력녀 하고는 어땠어? 나한테는 숨기지 마. 숨기면 나중에는 악성 뾰루지가 된다고."
나는 패배를 인정하는 한숨을 쉬고 하나하나 털어놓았다. 이야기가 끝나고, 내가 좀 모자란 학생의 존재론적 고뇌라고 확신했던 그 말을 다 들은 페르민이 나를 껴안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느닷없었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포옹이었다.
"사랑에 빠졌구나." 그가 내 등을 두드리며 감격하여 중얼거렸다. "불쌍한 녀석."
그날 오후 우리는 정확히 영업이 끝나는 시간에 서점을 나섰고, 그런 우리에게 아버지는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아버지는 이미 우리가 하도 들락날락해서 수상한 낌새를 채고 있었다. 페르민은 아직 처리하지 않은 일이 있다며 앞뒤가 맞지 않는 말로 얼버무렸고, 나는 그와 함께 재빨리 서점을 나왔다. 조만간 아버지에게도 이 일을 알려야 할 것이다. 정확히 어떤 부분을 말할지는 또 다른 문제지만.
그림자의 도시 15
나는 절망적인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말없이 고개를 저으며 자기에게 맡기라는 신호를 보냈다. 오르텐시아 수녀는 우리를 좁은 복도 끝에 있는, 바람도 통하지 않고 불빛도 없는 독방으로 안내했다. 그녀는 벽에 걸려 있던 가스등 하나를 우리에게 내밀었다.
"오래 걸릴까요? 전 할 일이 좀 있어서요."
"저희 걱정은 마시고, 수녀님은 수녀님 일을 하세요. 우리가 그를 데려갈 테니까요."
"좋아요. 전 지하 환자실에 있을 테니 필요한 게 있으면 불러요. 괜찮다면, 시신은 다른 사람들이 못 보게 뒷문으로 나가 주세요. 수용자들의 사기에 좋지 않으니까요."
"그렇게 하죠." 내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르텐시아 수녀는 잠시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가까이서 보니 그녀는 할머니라고 해도 좋을 만큼 나이가 꽤 들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곳에 수용된 사람들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요, 이 수습생은 이런 일을 하기엔 좀 젊지 않나요?"
"인생의 진실은 나이를 모르는 법이지요, 수녀님.” 페르민이 말했다.
그제야 수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보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 눈길에는 의심이 아닌 슬픔이 어려 있었다.
22 바람의 그림자 2
"그렇긴 해도."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녀는 물통을 들고 신부의 면사포처럼 그림자를 질질 끌며 어둠 속으로 멀어졌다. 페르민은 나를 얼른 독방 안으로 밀었다.
그곳은 축축한 동굴 벽을 깎아 만든 비참한 방이었다. 천장에는 끝이 갈고리로 된 사슬이 매달려 있고, 부서진 바닥은 배수구 철 망으로 사분四分되어 있었다. 방 중앙에는 우중충한 대리석 테이블 위에 공업용 포장재로 쓰는 나무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페르민이 등을 높이 들자, 짚을 채운 상자 속의 시신이 어렴풋이 보였다. 양피지 같은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이 쪼그라들어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부어오른 피부는 자줏빛이었으며, 달걀 껍데기처럼 허옇게 눈을 뜨고 있었다.
속이 메스꺼워 더는 볼 수가 없었다.
"자, 일하자." 페르민이 지시했다.
"미쳤어요?"
"내 말은 들키기 전에 하신타라는 여자를 찾아야 한다는 거야."
"어떻게요?"
"어떻게라니? 물어봐야지."
우리는 오르텐시아 수녀가 정말 갔는지 확인하려고 복도를 살폈다. 그러고 나서 조심조심 종종걸음으로 우리가 지나왔던 홀로 되돌아갔다. 비참한 몰골의 이들이 여전히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호기심과 두려움의 시선, 혹은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그림자의 도시 23
이 달뜬 할아버지의 요구뿐인 듯했다.
"약속할게요. 최선을 다할게요."
노인은 입이 귀에 걸리도록 웃었다. 이가 세 개뿐이었다.
"금발이어야 해, 염색한 머리라도. 가능하면 가슴이 크고 야한 말을 잘하는 여자였으면 좋겠어. 내 오감 중에 가장 쓸 만한 감각이 청각이거든."
"힘닿는 데까지 노력할게요. 이제 어디로 가면 하신타 코로나도를 만날 수 있는지 말해주세요."
31
"그 노인네한테 무슨 약속을 한 거야?"
"들었잖아요."
"농담이었길 바란다."
"난 죽을 날이 멀지 않은 노인한테 거짓말 안 해요. 아무리 그가 쌩쌩해진다고 해도요."
"그게 네 장점이야, 다니엘, 하지만 이 신성한 장소에 어떻게 창녀를 데리고 들어올 생각이야?"
"돈을 세 배로 줘야겠죠. 나머지 세부적인 건 아저씨한테 맡길게요."
30 바람의 그림자 2
페르민과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마주 보았다.
"결혼요? 그게 언제였어요, 하신타?"
"그를 처음 본 날이었지. 페넬로페는 열세 살이었고, 그가 누구고 이름이 뭔지도 몰랐어."
"그런데 그 남자와 결혼할지 어떻게 알았대요?"
"그를 봤었다. 꿈에서."
마리아 하신타 코로나도는 어린 시절 톨레도 근교가 세상의 끝이고 그 너머는 오로지 어둠과 불타는 바다뿐이라고 확신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네 살 때 목숨을 잃을 뻔한 열병에 시달리던 중에 꿈을 꾸면서부터였다. 어떤 사람들은 언젠가 딱 한 번 집에 나타났다가 그 후로 자취를 감춘 커다란 붉은 전갈에 물려서 그런 거라고 했고, 다른 이들은 아이들을 해치려고 밤에 몰래 숨어든 미친 수녀의 사악한 짓거리 때문이라고도 했다. 몇 년 뒤 그 수녀는 붉은 구름이 도시를 뒤덮고 죽은 딱정벌레의 폭풍이 쏟아질 때, 주기도문을 거꾸로 외우고는 눈알이 튀어나온 채로 조악한 교수대에서 죽었다. 꿈에서 하신타는 과거와 미래를 보았고, 때로는 톨레도의 구시가지의 비밀과 수수께끼도 어렴풋이 보았다. 꿈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 중 하나는 늘 검은 옷을 입고 숨을 쉴 때 유황 냄새를 풍기는 노란 눈의 검은 고양이를 데리고 다니는 천사 스가랴였다.
36 바람의 그림자 2
바다 사이에 사로잡혀서, 꿈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건물로 가득한 도시에서 나중에 하신타는 스가랴의 방문이 그녀의 또 다른 꿈이었는지, 아니면 실제로 주홍색 매니큐어를 손톱에 칠한 천사가 고양이를 데리고 톨레도 성당에 있는 그녀에게 왔었는지 알 수 없어졌다.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은 것은 그 예언의 진정성이었다. 바로 그날 오후에 그녀는 교구의 부제에게 상담을 했다. 그는 박식하고 넓은 세상을 본 사람(사람들은 그가 안도라까지 가봤고 서투르지만 바스크어를 할 줄 안다고 말했다)이었다. 부제는 하늘에 있는 날개 달린 군사들 중에서 스가랴 천사는 모른다고 했지만, 하신타의 환상에 대해서는 주의 깊게 들었다. 그는 그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고는, 하신타의 예지적인 이야기 중 초콜릿을 녹여 만든 커다란 빗처럼 보였다는 성당 같은 것에 대한 묘사를 듣고는, 깊이 생각한 후 그녀에게 말했다. "하신다. 네가 본 건 매혹의 도시 바르셀로나와 속죄 사위인 '성 가족 성당* 이란다......" 이 주 후, 하신타는 옷가지와 미사집을 챙겨 오 년 만에 처음으로 미소 지으며 바르셀로나를 향해 떠났다. 그 천사가 그녀에게 이야기해 주었던 모든 것이 실현되리라 확신하면서.
하신타는 몇 달을 몹시 고생하고 나서야 시우다델라 공원에 있는 1888년 국제 엑스포 기념관들 근처의 알다야 가 백화점들 가운데
*스페인 출신의 천재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의 작품.
그림자의 도시 39
계단을 통해 차고까지 내려가 그가 기억하는 한 가장 추운 밤거리로 나왔다.
이어진 날들은 최악이었다. 홀리안은 리카르도가 고용한 살인청부업자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러나 꿈에서조차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음 날 산 가브리엘 학교에서 그는 호르헤 알다야에게 아무런 변화가 없음을 알아차렸다. 괴로움에 견디다 못한 홀리안은 미켈 몰리네르에게 그 일을 털어놓았 다. 미켈은 여느 때처럼 냉정을 잃지 않고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너 제정신이 아니구나, 홀리안,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이상한 건 알다야 저택이 발칵 뒤집히지 않은 거야. 생각해 보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야. 만약 네 말대로 알다야 부인이 너희를 본 거라면, 그 아주머니 자신도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커. 난 그분과 지금까지 딱 세 번 이야기를 해봤는데, 그 대화에서 두 가지 결론을 얻었어. 하나는 알다야 부인의 정신연령이 열두 살이라는 거고, 또 하나는 부인에겐 고질적인 나르시시즘이 있어서 자기가 보고 싶거나 믿고 싶은 게 아니면 보지도 이해하지도 못한다는 거야. 특히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진단은 이제 됐어, 미켈."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아마 알다야 부인은 아직 무슨 말을 어떻게. 언제, 누구에게 해야 할지 모를 거리는 거야. 먼저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 후에 뒤따를 엄청난 스캔들과 남편의 분노 같은 결과들을 생각
64 바람의 그림자 2
바르셀로는 나에게 서재로 따라오라고 했다. 베르나르디는 브랜디와 충격 때문에 멍해진 채로 의자에 앉아 한숨을 쉬고 있었다.
"베르나르다. 좀 움직여봐. 커피 좀 만들어줘. 진하게."
"네, 주인님. 바로 준비할게요."
나는 바르셀로를 따라 서재로 갔다. 그곳은 책과 종이의 기둥들이 파이프 담배의 안갯속에 잠겨 있는 동굴이었다. 클라라가 치는 피아노 소리가 지독한 불협화음으로 들려왔다. 네리 선생의 레슨이 적어도 음악 분야에서는 별 효과가 없었던 게 분명했 다. 바르셀로는 나에게 앉으라고 하고는 파이프 담배를 피울 준 비를 했다.
"네 아버지한테는 페르민이 가벼운 사고를 당해 네가 여기로 데려왔다고 해뒀다."
"아버지께서 믿으시던가요?"
"그렇진 않은 것 같았다."
"그랬군요."
바르셀로는 파이프에 불을 붙이고는 자신의 메피스토펠레스적인 모습에 만족스러워하며 책상 뒤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아파트 저 끝에서 클라라가 드뷔시를 욕보이고 있었다. 그 소리에 바르셀로가 눈을 치켜떴다.
"그 음악 선생은 어떻게 됐어요?" 내가 물었다.
그림자의 도시 87
"그 반대야. 모자라는 사람들은 이야기를 하고, 겁쟁이들은 침묵하며, 현명한 이들은 이야기를 듣지."
"누가 한 말인가요? 세네카?"
"아니. 브라울리오 레콜론스, 아비뇽 가街에 있는 정육점 주인인데, 소시지와 재치 있는 경구를 만드는 일에 세상이 다 아는 재능을 가진 사람이지. 계속해. 그 활달한 아가씨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는데......"
"베아요. 그리고 그건 제 일이고 다른 것과는 상관없어요."
바르셀로는 살짝 웃었다. 내가 내 모험 이야기를 이어가려고 할 때 피곤한 기색의 닥터 솔데빌라가 헐떡거리며 서재 안으로 몸을 내밀었다.
"실례합니다. 이제 가보려고요. 환자는 괜찮습니다. 말하자면 에너지가 충만하다고 할 수 있죠. 이 신사분은 우리 모두보다도 더 오래 살 겁니다. 진정제가 머리끝까지 올라와서 최상의 컨디션이라고까지 하더군요. 쉬라고 하는데도 듣지 않고 내겐 밝히 고 싶지 않은 문제들에 대해 다니엘 씨와 얘기하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습니다. 자기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나, 그 사람 표현으로는, 위선적인 선서를 안 믿는다면서요.*"
*철자가 비슷한 두 단어 hipocrático (히포크라테스의)와 hipócrita(위선적인) 를 이용한 언어유희.
그림자의 도시 91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가 있었다. 그 유명한 페르민 로메로 데 토레스가 가진 옷 중 가장 좋은 것을 입고 싸구려 시가처럼 구부정한 자세로, 옷깃에는 싱싱한 카네이션을 달고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문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자리에 누워서 쉬고 있어야죠."
"누워서 쉬는 건 내 사전엔 없어. 난 행동파라고. 게다가 내가 여기 없으면 두 사람은 교리문답서 한 권도 못 팔잖아."
의사의 조언을 무시하고 페르민은 자기 자리로 돌아오리라 마음먹고 온 것이었다. 얼굴이 누렇게 뜬 데다 피멍이 든 그는 절룩거리며 망가진 인형처럼 부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지금 당장 침대에 가서 눕게, 페르민, 제발." 깜짝 놀란 아버지가 말했다.
"그런 말 마세요. 통계가 다 증명해 줘요. 참호 속에서보다 침대에서 죽는 사람이 더 많다고요."
우리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었다. 잠시 후 아버지가 물러섰다. 가엾은 페르민의 눈에서 비록 영혼까지 아프고 뼈가 쑤시긴 해도 고통스럽긴 하숙집 방에 혼자 있는 게 더하다는 뜻이 넌지시 비쳤기 때문이었다.
"좋아, 하지만 연필 말고 다른 걸 드는 게 보이면 잔소리 들을 줄 알라고."
"그렇게 합죠. 오늘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겠다고 약속...
102 바람의 그림자 2
몬주익 묘지 동쪽 비탈에 비 내리는 어느 오후, 불가해한 무덤들의 숲-입술도 눈도 없는 아이들의 얼굴과, 해골의 모습이 새겨진 비석과, 십자가의 숲으로 죽음의 악취가 풍기는 사이로 바다를 보고 있는, 비에 젖은 검은 정장들로만 기억되는 스무 명쯤 되는 어른들의 실루엣과, 그래야만 눈물을 참을 수 있다는 듯 내 손을 지나치게 꽉 쥔 아버지의 손. 한 신부의 공허한 말들은 얼굴 없는 세 명의 인부가 회색 관을 밀어 넣은 그 대리석 무덤으로 떨어지고, 소나기가 녹아버린 왁스처럼 관 위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나는 관 속에서 나를 부르며 그 어두운 돌 감옥에서 꺼내달라고 사정하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몸을 떨면서 손을 너무 세게 잡지 말라고, 아프다고, 들릴락 말락 작은 목소리로 아버지에게 중얼거리는 것뿐이었다. 재와 비가 뒤섞인 흙, 그 신선한 흙냄새가 죽음과 공허의 냄새를 비롯한 모든 것을 삼켜버리고 있었다.
나는 눈을 뜨고 무턱대고 계단을 내려갔다. 촛불은 어둠 속에서 불과 몇 센티미터 앞만을 밝혀줄 뿐이었다. 바닥에 이르러 촛불을 높이 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방도, 마른나무로 가득한 저장고도 발견하지 못했다. 내 앞에는 반원형 방으로 들어가는 좁은 통로가 열려 있었다. 그 방에는 조각상이 하나 서 있었는데, 얼굴은 뻥 뚫린 검은 두 눈에서 흘러나온 피눈물로 고랑이 파였고, 양팔은 날개처럼 펼쳤으며, 관자놀이에서는 가시가 돋친 뱀이 자라고 있었다. 나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러다 어느 순간 평정을 되찾았고,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어느 예배실 벽에 걸린 나무로 조각된 그리스도 상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몇 미터 더 앞으로 나아갔고 얼핏 유령 같은 모습을 보았다. 여인의 나신 토르소가 열두 개쯤 그 옛 예배실 구석에 쌓여 있었던 것이다. 머리와 팔이 없는 그것들을 삼각대가 받치고 있었다.
108 바람의 그림자 2
업신여기는 듯한 웃음을 띠고 나를 곁눈질하며 지나갔다. 뒤에서 천천히 따라가던 세 번째 여학생은 강의실을 나가기 전에 잠시 멈춰 서서 다른 여학생들이 보지 않는 걸 확인하고는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베아트리스는 금요일에도 안 왔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당신은 그 애 애인이 아니죠, 그렇죠?"
"네. 그냥 친구예요."
"아마 아픈 거 같아요."
"아프다고요?"
"그 애 집에 전화해 본 여자애 하나가 그랬어요. 이제 난 가봐야 해요."
고맙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그녀는 다른 두 친구를 찾아 서둘러 가버렸다. 그들은 회랑 저쪽 끝에서 매서운 눈을 하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니엘, 틀림없이 무슨 일이 있을 거야. 왕고모가 돌아가셨거나. 키우던 앵무새가 갑상선종에 걸렸거나, 엉덩이를 내놓고 하도 돌아다녀서 독감에 걸렸거나...... 하느님만 아시겠지. 네가 굳게 믿는 것과는 달리, 지구는 네 가랑이의 욕망 주변을 돌지 않아. 다른 요인들이 인류의 발전에 영향을 미치는 거라고."
126 바람의 그림자 2
현관홀에서 전화기를 붙들고 있는 아길라르 씨가 훤히 그려졌다. 내가 토마스와 오후를 함께 보내고 좀 늦는다고 아버지에게 알릴 때 여러 번 썼던 바로 그 전화기이리라. 나는 말없이 베아 아버지의 숨소리를 듣고 있었다. 혹시 그가 내 목소리를 알아차렸을까 걱정하면서.
"자식, 넌 말할 용기도 없나 보구나, 야비한 놈 같으니. 네가 한 짓거리는 그 어떤 마른 똥 같은 놈도 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사내 녀석이라면 적어도 얼굴을 내밀 용기는 있어야지. 나 같으면 열아홉 살짜리 여자애가 나보다 더 배짱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부끄러워서 얼굴도 못 들고 다닐 거다. 그 앤 네놈이 누군지 말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거니까. 난 그앨 안다. 네놈이 베아트리스를 위해 얼굴을 내밀 용기가 없다면, 그 애가 대가를 치러야 할 거다."
전화를 끊고 나니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전화 부스를 나와 서점으로 터벅터벅 돌아올 때까지 나는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닫지 못했다. 내 전화가 베아의 상황을 더 악화시킬 거라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의 유일한 관심사는 내가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용만 한 사람들을 부인하며 익명인 채로 얼굴을 감추는 것뿐이었다. 푸메로 경감이 페르민을 폭행했을 때 이미 그랬다. 그리고 베아를 그녀의 운명에 맡겨버리면서 또다시 그리고 말았다. 다시 그런 상황이 오면 나는 또 그럴 것이었다.
그림자의 도시 129
그날 밤 우리는 며칠 전 구스타보 바르셀로와 함께 계획했던. 효과가 불확실한 음모를 행동으로 옮겼다.
"네가 맞다는 확신을 갖는 게 제일 먼저야. 우린 경찰의 감시를 받고 있어. 이제 마지못해 나온 사람인 양 산책을 하면서 엘 스콰트레가츠까지 가보자. 그 작자가 지금도 우리를 엿보며 밖에 있는지 보자고. 하지만 네 아버지한테는 한 마디도 하지 마. 그랬다간 아버진 신장결석이 생기고 말 거야."
"그럼 아버지한테 뭐라고 하죠? 벌써 오래전부터 의심하고 계 신데."
"심심풀이로 까먹을 해바라기 씨나 푸딩 재료를 사러 간다고 말해."
"그런데 왜 굳이 엘스 콰트레 가츠까지 가야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곳에선 햄을 넣은 지름 오 킬로미터짜리 보카디 요를 먹을 수 있거든. 또 어디든 우리가 얘길 나눌 장소도 필요하잖아. 꼬치꼬치 따지지 말고 내 말대로 좀 해봐. 다니엘."
이런저런 생각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된 나는 고분고분 페르민의 말에 따랐다. 잠시 후 아버지에게는 저녁 먹기 전까지 돌아오겠다고 말하고 밖으로 나왔다. 푸에르타 델 앙헬 모퉁이에서 페르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와 합류하자마자. 그는 눈썹을 찡긋하며 계속 걸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림자의 도시 131
"그동안 난 그녀를 뒤쫓을 준비를 하고 있을게, 최신 위장술을 그녀에게 시험해 볼 계획이거든."
"잘 안 통할 거예요. 페르민,"
"믿음이 적은 자여, 두고 보자고. 그런데 그에 아버지가 너한테 무슨 말을 했길래 이 꼴이 된 거냐? 협박 때문에 그래? 그 사람한테 신경 쓰지 마. 어서 말해봐, 그 이상한 사람이 너한테 뭐라고 했는데?"
나는 생각 없이 대답했다.
"사실을 말했어요."
"순교자 성 다니엘이 말한 사실?"
"비웃고 싶으면 실컷 비웃어요. 난 그래도 싸요."
"비웃는 게 아냐, 다니엘. 네가 자책하는 걸 보니까 기분이 안 좋아서 그래. 누구라도 네가 힘들 거라고 말할 거야. 넌 잘못한 거 없어. 스스로를 질책하지 않아도 인생은 그 자체만으로 충분히 고통스러운 거야."
"경험에서 나온 말이에요?"
페르민은 어깨를 으쓱했다.
"푸메로를 어떻게 알게 됐는지 아저씨는 한 번도 얘기해 주지 않았어요.” 내가 말했다.
"충고가 될 만한 이야기가 듣고 싶냐?"
"아저씨가 얘기해주고 싶다면요."
그림자의 도시 135
"페넬로페라는 사람. 난 네 여자친구인 줄 알았는데."
팔라시오스는 시선을 내리고 황혼 속으로 사라졌다. 당황한 나는 그의 자동차 불빛이 푸른빛이 도는 붉은 어둠 속으로 사라 지는 것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러고는 콜론 산책로 쪽으로 걸으며 누리아 몽포르트의 마지막 말을 되뇌어봤지만 그 의미를 알 수 없었다. 포르탈 데 라파스 광장에 이르러 나는 항구를 보려고 유람선 선착장 옆에 멈춰 섰다.
그리고 탁한 물 쪽으로 경사진 계단에 앉았다. 그곳은 오래전 어느 날, 얼굴 없는 남자 라인 쿠베르를 처음 만났던 곳이었다.
"언어보다 더 지독한 감옥이 있다." 나는 중얼거렸다.
그제야 나는 누리아 몽포르트가 나에게 메시지를 보낸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페넬로페를 보내줘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 그녀의 마지막 말은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말없이 이십 년을 사랑했던 사람에게 남긴 것이었다. 홀리안 카락스.
44
산 펠리페 네리 광장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처음 누리아 몽포르트를 보았을 때 그녀가 앉아 있던 벤치는 가로등 아래 누워 있었다. 텅 빈 벤치에는 연인들의 이름과 욕설, 약속 등이 주머니칼로 새겨져 있었다. 4층에 있는 누리아 몽포르트의 집을 올려다보니 구릿빛 불빛이 가물거리고 있었다. 촛불이었다.
그림자의 도시 187
"그럴 필요 없어, 다니엘. 네가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걸 아니까." 이사크가 외투 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그날 오후 죽기 전에 누리아가 날 보러 왔었어. 지난 몇 년 동 안 그랬듯이 말이야. 우리가 과르디아 가街에 있는 한 카페로 종종 점심 식사를 하러 다녔던 게 기억나는군. 그 애가 어릴 때 내가 그리로 데려가곤 했었지. 우린 언제나 책 이야기를 했어. 고서들에 대해서. 그 앤 가끔 자기 일 얘기도 했어, 버스에서 모르는 사람에게나 할 법한 그런 사소한 얘기...... 한 번은 그 애가 나를 실망시켜서 미안하다고 하더군. 그래서 난 왜 그런 이상한 생각을 하냐고 물었지. 그때 그 애가 이렇게 말했어. '아버지 눈을 보면 알아요, 눈을 보면요.' 난 단 한 번도 내가 그 애를 더 크게 실망시켰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때때로 우린 사람들이 복권 같다고 생각하지. 우리의 말도 안 되는 꿈을 이뤄주기 위해 거기 있다고 말이야."
"이사크, 죄송하지만, 술을 너무 많이 마시셔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시는 것 같아요."
"포도주는 현자賢者를 멍청이로 만들지만 멍청이를 현자로 만들기도 하지. 내 딸이 한 번도 나를 신뢰하지 않았다는 것쯤은 충분히 알아. 널 더 신뢰했어, 다니엘. 겨우 두어 번밖에 보지 않은 널."
"아저씨가 잘못 알고 있는 거예요."
그림자의 도시 191
"그럴 필요 없어, 다니엘. 네가 사실을 말하고 있다는 걸 아니까." 이사크가 외투 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그날 오후 죽기 전에 누리아가 날 보러 왔었어. 지난 몇 년 동 안 그랬듯이 말이야. 우리가 과르디아 가街에 있는 한 카페로 종 종 점심 식사를 하러 다녔던 게 기억나는군. 그 애가 어릴 때 내 가 그리로 데려가곤 했었지. 우린 언제나 책 이야기를 했어. 고 서들에 대해서. 그 앤 가끔 자기 일 얘기도 했어, 버스에서 모르는 사람에게나 할 법한 그런 사소한 얘기...... 한 번은 그 애가 나를 실망시켜서 미안하다고 하더군. 그래서 난 왜 그런 이상한 생각을 하냐고 물었지. 그때 그 애가 이렇게 말했어. '아버지 눈을 보면 알아요, 눈을 보면요.' 난 단 한 번도 내가 그 애를 더 크게 실망시켰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때때로 우린 사람들이 복권 같다고 생각하지. 우리의 말도 안 되는 꿈을 이뤄주기 위해 거기 있다고 말이야."
"이사크, 죄송하지만, 술을 너무 많이 마시셔서 무슨 말을 하 는지 모르시는 것 같아요."
"포도주는 현자賢者를 멍청이로 만들지만 멍청이를 현자로 만 들기도 하지. 내 딸이 한 번도 나를 신뢰하지 않았다는 것쯤은 충분히 알아. 널 더 신뢰했어, 다니엘. 겨우 두어 번밖에 보지 않 은 널."
"아저씨가 잘못 알고 있는 거예요."
그림자의 도시 191
사줄 돈을 저축해 놓겠다고 약속했는데, 빅토르 위고의 만년 필이 내 면사포를 가져가버린 셈이었지. 그게 미친 짓이란 건 알았지만, 나는 그만큼 만족스럽게 돈을 써본 적은 없었어. 기가 막히게 멋진 케이스를 들고 전당포를 나왔을 때, 한 여자가 나를 따라오고 있는 걸 알아차렸어. 은발에 내가 본 눈 중에 가장 파란, 기품이 넘치는 여자였지. 그녀는 내게 다가와 자기를 소개했어. 홀리안의 후견인 이렌 마르소였지. 가이드인 에르베가 그녀에게 내 얘기를 한 거였어. 그녀는 그저 나를 만나고 싶었고 또 내가 그 오랜 세월 동안 홀리안이 기다려왔던 그 여자인지 물어보고 싶었다고 했지.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할 필요가 없었어. 이렌은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는 내 볼에 입을 맞췄어. 그때 나는 길 아래로 멀어지는 그녀를 보며 홀리안은 결코 내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시작도 하기 전에 그를 잃었다는 것을 깨달았지. 핸드백에 만년필 케이스를 숨기고 다락방으로 돌아왔어. 잠에서 깬 훌리안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지. 그는 말없이 내 옷을 벗겼고, 우리는 마지막으로 사랑을 나눴어. 왜 우느냐고 그가 물었을 때, 나는 행복의 눈물이라고 말해주었어. 얼마 후 홀리안이 먹을 걸 사러 내려갔을 때 나는 짐을 꾸리고 그의 타자기 위에 만년필 케이스를 놓아두었어. 그리고 소설 원고를 가방에 넣고는 홀리 안이 돌아오기 전에 그곳을 떠났지. 층계참에서 나는 키스를 받는 대가로 젊은 아가씨들의 손금을 봐주는 늙은 점쟁이 다르시외 씨와 마주쳤어. 그는 내 왼손을 잡더니 슬픈 눈으로 나를 보 았지.
"당신은 가슴에 독을 담고 있군요, 마드무아젤."
내가 점을 쳐준 값을 치르려고 하자. 그는 점잖게 고개를 저었어. 대신 내 손에 입을 맞추었지.
나는 바르셀로나행 열두 시 기차를 타기 위해 겨우 시간에 맞춰 오스테를리츠 역에 도착했어. 표를 판 검표원이 내게 괜찮으냐고 묻더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기차의 칸막이 객실에 틀어박혔어. 멀리 창밖으로 플랫폼에 나타난 홀리안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기차는 이미 출발한 뒤였어. 그는 내가 처음 그를 보 았던 바로 그 자리에 있었지. 나는 눈을 감고 기차가 역과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그 매혹적인 도시를 벗어날 때까지 뜨지 않았어. 다음 날 동이 터올 무렵 바르셀로나에 도착했어. 그날은 내 스물네 번째 생일이었고, 내 생애 최고의 날들은 이미 지나가버렸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어.
누리아 몽포르트-망령들에 대한 기억 215
"그 앤 알고 있어." 그녀가 중얼거렸지. "불쌍한 것. 페넬로페는 알고 있어
"알다니요. 뭘요?" 미켈이 물었어.
"내 잘못이야." 소피가 말했어. "내 잘못이야."
미셸은 영문을 모른 채 그녀의 손을 잡았지. 소피는 그를 마주 보지 못했대.
"페넬로페와 홀리안은 남매지간이란다." 그녀가 중얼거렸어.
3
안토니 포르투니의 노예가 되기 오래전에 소피 카락스는 자신의 재능으로 살아가던 여인이었지. 그녀는 채 열아홉도 되지 않은 나이에 유망한 직업을 찾아 바르셀로나에 왔지만 꿈을 이루진 못했어, 죽기 전에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바르셀로나에 징 최한 알자스 출신의 부유한 상인 집안인 베나렌스 가에서 일하는 데 필요한 신용 보증서를 얻어주었지.
"내가 죽으면," 그가 그녀에게 강하게 말했지. "그들을 찾아가. 널 딸처럼 대해줄 거야."
그러나 그녀가 받은 환대가 문제가 됐어. 베나렌스 씨는 쌍수를 들어 그녀를 받아들였는데, 실은 엉큼한 생각을 품고 있었던 거지.
228 바탕의 그림자 2
자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누군가를 만난 것은, 감히 자기에게 도전하고 자기를 조롱하기까지 하는 누군가를 만난 것은 십오 넌 만에 처음이었지. 그는 아이에게서 멍청이들은 보지 못하는 늠름함과 잠재된 야망을 보았어. 신께서 다시 그에게 젊음을 돌려주었던 거야. 기억 속 여인의 자취에 불과한 소피는 그들 사이에 끼어들 여지조차 없었지. 모자 기술자는 허수아비일 뿐이었는데, 심술궂고 성마른 그 무지렁이와의 공모는 알다야가 얼마든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었어. 그는 훌리안을 그 숨쉬기도 힘든, 가난에 찌든 보통 사람들의 답답한 세상에서 끄집어내 재정적인 천국의 문을 열어주기로 결심했지. 그는 이제 산 가브리엘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자신의 격에 맞는 모든 특권을 누리며 자기를 위해 아버지가 골라놓은 길을 걷게 될 터였어. 리카르도는 자신에게 어울리는 후계자를 원했지. 호르헤는 늘 응석이나 부리고 무능력하게 특권의 그늘 아래서 살 그릇밖엔 안 됐어. 페넬로페, 그 아름다운 페넬로페는 천생 여자여서 보석 자체였지 보석 관리자는 아니었지. 시인의 영혼을, 곧 살인자의 영혼을 가진 훌리안은 모든 필요조건을 충족시켰어. 그건 단지 시간의 문제였지. 리카르도는 십 년 안에 그 소년에게 자신의 모습을 새겨 넣을 수 있으리라 추정했어. 홀리안이 알다야 가 사람들과 가족처럼 (또 선택받은 자로) 함께 지냈던 그 모든 시간 동안, 그는 훌리안이 자기한테서 바라는 것은 페넬로페뿐이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어.
236 바람의 그림자 2
리카르도는 홀리안의 죽음이 사고사로 처리되도록 군대에 지시할 참이었지.
그는 자신과 아내를 제외한 그 누구도 의사, 하인, 가족들조차 도-페넬로페가 죽음과 질병의 냄새가 나는 그 방에 갇혀 있는 몇 달 동안 그녀를 보지 못하게 했어. 그즈음에 이미 동업자들은 비밀리에 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그에게서 권력을 뺏기 위 해 리카르도가 그들에게 제공했던 돈을 사용하며 등뒤에서 음모를 꾸미고 있었지. 그 무렵 알다야 제국은 마드리드 어느 복도에서의 비밀스러운 이사회와 제네바 소재 은행들에서 소리 없이 무너지고 있었던 거야. 홀리안은 리카르도 알다야가 의심한 대로 도망쳐버렸지. 리카르도는 훌리안이 죽기를 바랐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몰래 그 아이를 자랑스러워했어. 자기도 그 처지였다면 그렇게 했을 테니까. 다른 누군가가 훌리안이 저지른 일의 대가를 지불할 것이었지.
1919년 9월 26일 페넬로페 알다야는 사내아이를 사산했어.
만약 의사가 그녀를 진찰할 수 있었다면, 태아가 이미 며칠 동안 위험한 상태라 제왕절개 수술을 해야 한다고 말했을 거야. 만약 의사가 있었다면, 아마도 잠긴 문을 손톱으로 긁으며 비명을 지르던 페넬로페의 생명을 앗아가 버린 출혈을 멈출 수 있었을 거야. 그 문 바깥에서 그녀의 아버지는 소리 없이 울었고 어머니는 공포에 떨며 남편을 바라보고 있었지. 피투성이가 된 그 어두운 독방의 모습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없었기 때문에, 만약 의사가 있었다면, 리카르도 알다야를 살인죄로 고발했을 거야. 그러나 그곳엔 아무도 없었고, 결국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을 때 페넬로페는 자줏빛으로 빛나는 아기를 안고 자기가 흘린 피 웅덩이에 누운 채 죽어 있었지. 아무도 입을 떼지 못했어. 두 사체는 예식도 증인도 없이 지하 묘소에 매장되었어. 침대 시트와 탯줄은 보일러 속으로 던져졌고, 그 방은 벽돌담으로 봉인되었어.
238 바람의 그림자 2
"경찰이라는 건 직업이 아냐. 사명이지." 두란은 이렇게 말했다.
"스페인에는 용기 있는 자들이 더 필요하고 말 많은 놈들은 좀 줄어야 돼."
불행하게도 두란 경위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바르셀로네타 지역의 일망타진 작전 때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무정부주의자들과의 혼잡한 충돌 과정에서 5층 채광창에서 떨어져 내장이 카네이션처럼 터져 죽었던 것이다. 스페인이 위대한 인물 이요.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가진 애국자요, 행동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색가를 잃었다는 데 모두가 동의했다. 푸메로는 당당하게 그의 후임이 되었다. 그는 두란이 그런 일을 하기엔 너무 늙어서 자기가 그를 밀어뜨린 것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푸메로는 근육이 있든 없든 장애인이나 집시 또는 동성애자들과 마찬가지로 노인들을 역겨워했던 것이다. 때때로 신은 실수를 했다. 그런 작은 실수들을 바로잡고 세상을 모양 좋게 유지하는 건 고상한 시민들의 의무였다.
노베다데스 카페에서 그를 만난 지 일주일 뒤인 1934년 3월, 호르헤 알다야는 몸이 회복되기 시작했고 푸메로에게 마음을 열었다. 그는 어린 시절 그를 함부로 대했던 것에 대해 용서를 구했고,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의 이야기를 전부 들려주었다. 푸메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러면서 그는 당장 알다야를 죽여야 할지...
누리아 몽포르트 망령들에 대한 기억 245
그들은 레온 13세 가를 내려와 산 헤르바시오 산책로에 이르렀지. 거기 한 카페에 불이 켜져 있었어. 그들은 입구와 창가에 서 멀리 떨어진 구석 자리로 몸을 숨겼지. 단골 두 명이 바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라디오를 듣고 있었어. 왁스처럼 창백한 피부에 눈을 내리깐 웨이터가 그들의 주문을 받았지. 그들은 따뜻한 브랜디와 커피, 그리고 먹을 것을 좀 시켰어.
미켈은 전혀 먹지 않았어. 배가 고팠던 홀리안은 게걸스레 두 사람 몫을 먹어치웠고, 두 친구는 카페의 끈적끈적한 불빛 아래 서 시간의 마법에 넋을 잃은 채 서로를 바라보았어. 그들이 마지막으로 얼굴을 마주한 것은 지금 나이의 절반이었을 때였어. 그들은 소년이었을 때 헤어졌고, 이제 인생은 한 사람은 도망자로, 또 한 사람은 죽어가는 남자로 만들어놓았어. 두 사람 다 그것이 인생이 자기들에게 돌렸던 카드 때문인지, 아니면 그들이 그 카드를 갖고 배팅을 했던 방법 때문인지 궁금해했지.
"지난 세월 동안 넌 날 위해 많은 일을 해주었는데 난 한 번도 고맙다는 인사를 한 적이 없구나, 미켈."
"그럴 필요 없어. 난 내가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을 했을 뿐이야. 고마워할 거 없어."
"누리아는 어떻게 지내?"
"네가 버려둔 그대로."
카락스는 눈길을 떨어뜨렸어.
268 바람의 그림자 2
"인생에서 진정한 사랑은 단 한 번뿐이다. 홀리안. 비록 그걸 깨닫지 못한다 해도 말이야."
포르투니는 불행하게 얽힌 일생을 풀기 위한 시간과의 경주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았어. 그는 페넬로페가 아들의 인생에서 유일한 사랑임을 의심하지 않았고, 자기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만약 자기가 홀리안이 그녀를 찾는 걸 도와주면 자기도 잃어버 린 무언가를 되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저주 같은 분노로 살과 뼈를 짓누르는 그 공허함을 만회할 수 있을 거라고 말이야.
강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절망스럽게도, 포르투니는 곧 바르셀로나 일대에서 페넬로페 알다야나 그녀의 가족이 자취를 감추었 다는 걸 알게 됐지.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그럭저럭 먹고살기 위해 평생 일을 해야 했던 포르투니는 돈과 혈통은 절대 소멸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십오 년 동안의 몰락과 궁핍은 지상에서 저택과 기업, 명문가의 흔적을 지우기에 충분했지. 알다야 라는 이름을 언급했을 때 들어본 적이 있다는 사람은 많았어도 그 의미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어. 미켈 몰리네르와 내가 모자 가게에 가서 홀리안에 대해 물어봤던 날, 포르투니는 우리가 푸메로의 부하들이라고 확신했어. 아무도 그에게서 다시 아들을 빼앗아갈 수는 없었어. 이번에는 하늘에서 전능하신 하느님이 내려올 수도 있었지. 평생 그의 기도를 외면했던 그 하느님이, 그리고 만일 그분이 한 번 더 홀리안을 자신의 난파된 인생에서 멀리 데려간다면 그는 기꺼이 그분의 눈이라도 빼버릴 더였어.
272 바람의 그림자 2
꽃행상이 며칠 전에 봤다고 기억한, 티비다보 애비뉴의 저택 주변을 배회하던 사람이 포르투니였지. 그 꽃장수가 '성질 한번 더럽다'고 해석한 것은. 늦게라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하는 편이 나은 인생의 목표를 발견해 잃어버린 시간을 만회하려는 사람들 이 겪는 긴장, 바로 그것이었어. 불행하게도 신께서는 이 마지막 순간까지 모자 기술자의 간절한 바람을 들어주려 하지 않았지. 이미 절망의 문턱은 넘어섰지만, 그는 아들과 그 자신의 구원에 필요한 것을 찾을 수가 없었어.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고 또 알려진 게 전혀 없는 한 소녀의 자취 말이야. 주님, 당신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길 잃은 영혼이 얼마나 많이 필요한 겁니 까? 포르투니는 이렇게 물었지. 신은 그 끊임없는 침묵 속에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어.
"그 애를 못 찾았다. 홀리안...... 맹세하건대……"
"걱정 마세요. 아버지. 이건 제가 해야 할 일이에요. 아버진 이미 충분히 도와주셨어요."
그날 밤 홀리안은 결국 직접 페넬로페를 찾기로 결심하고 거리로 나섰지.
누리아 몽포르트 망령들에 대한 기억 273
이 소리와 사물들의 색깔을 지우며 그를 유리창으로 날려버렸지. 창문을 뚫고 나가며 그는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극심한 한기를, 바람 속에 먼지처럼 흩어지는 빛을 느꼈지, 미켈 몰리네르는 마지막으로 눈길을 돌려 친구 홀리안이 거리 아래쪽으로 뛰 어가는 걸 보았어. 미켈은 서른여섯 살이었고, 자신의 바람보다 더 오래 살았지. 피 묻은 유리 조각들이 뿌려진 보도 위로 쓰러지기도 전에 그는 이미 숨이 끊어졌어.
9
그날 밤 홀리안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동안 정체를 알 수 없는 밴 한 대가 미켈을 죽인 경찰의 신고를 받고 왔지. 나는 그의 이름을 알지 못했고 그도 자기가 누굴 죽였는지 몰랐다고 생각해. 모든 전쟁처럼, 개인적이든 공적이든, 그것은 꼭두각시놀음 같은 것이었지. 두 남자는 죽은 경찰들의 시신을 처리하고 바주 인에게 거기서 일어난 일을 잊으라고 했어. 안 그러면 심각한 문제가 생길 거라면서. 전쟁이 일깨운 망각의 재능을 절대 과소평가하지 마. 다니엘. 미켈의 시신은 그의 죽음과 두 경찰의 죽음 이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열두 시간 뒤 라발 지구의 어느 골목길에 버려졌지. 그의 시신이 마침내 시체공시소에 도착했을 때는 죽은 지 이미 이틀이나 지난 후였어. 미켈은 자신의 신원을 증명할 만한 것은 모두 집에 두고 나갔었지. 시체공시 소 직원들이 발견한 것은 홀리안 카락스의 이름으로 돼 있는 사진이 손상된 여권과 『바람의 그림자』 한 권뿐이었어. 경찰은 죽은 자가 카락스라고 결론을 내렸어. 여권의 주소지는 아직 론다 데 산 안토니오에 있는 포르투니의 아파트였지.
그전에 그 소식은 이미 푸메로의 귀에 들어갔고, 그는 홀리안과 작별하기 위해 시체공시소로 왔어. 거기서 그는 경찰이 시신 확인을 위해 찾아다녔던 모자 기술자를 보았지. 이틀이나 훌리안을 보지 못한 포르투니 씨는 최악의 경우를 두려워하고 있었어. 그런데 그게 일주일 전에 홀리안을 찾아 자기 집 문을 두드렸던 남자(푸메로의 부하라고 생각했던)의 시신이라는 걸 알아보고, 그는 갑자기 비명을 지르더니 그곳을 떠나버렸지. 경찰은 그의 반응을 아들의 시신이 맞다고 인정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그곳에 있던 푸메로는 시신 쪽으로 다가가 말없이 살펴보았어. 그는 십칠 년 동안이나 훌리안 카락스를 보지 못했었지. 그 의문의 시신이 미켈 몰리네르임을 알아보았을 때 그는 미소 짓더니 홀리안 카락스라고 법정 보고서에 서명했을 뿐이었어. 그러고는 시체를 즉시 몬주익의 공동묘지로 옮기라고 명령했지.
누리아 몽포르트 망령들에 대한 기억 277
"이건 당신과 아무 상관없는 일이야, 누리아. 이건 오로지 내 문제라고."
그는 자신의 말이 내게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 정말 모르는 걸까, 아니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걸까, 나는 궁금했어.
"그건 당신 생각이에요."
그는 내 뺨을 어루만지려 했지만, 나는 그의 손을 뿌리쳤어.
"당신은 날 증오해야 돼, 누리아. 그래야 당신에게 행운이 올 거야."
"그래요, 나도 알아요."
우리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시트와 살 냄새가 밴 아파트의 숨 막히는 어둠에서 벗어나 밖에서 하루를 보냈지. 홀리안은 바다를 보고 싶어 했어. 나는 바르셀로네타 지역까지 그와 함께 갔고, 우리는 인적이 드문 해변을 따라 걸었지. 그곳은 안개 속에 용해된 모래 빛 환영 같았어. 우리는 어린 아이나 노인들처럼 해변 모래사장에 앉았지. 홀리안은 추억에 잠겨 말없이 미소 짓고 있었어.
해 질 무렵 우리는 수족관 근처에서 전차를 타고 비아 라예타나를 지나 그라시아 산책로까지 올라갔다가, 레셉스 광장과 레 푸블리카 아르헨티나 거리를 거쳐 종점까지 갔어. 홀리안은 전차를 타고 여러 곳을 지나는 동안 마치 바르셀로나를 잃어버릴 까봐 두려운 사람처럼 조용히 거리들을 바라보았지.
누리아 몽포르트-망령들에 대한 기억 283
줄의 베일에 덮인 묘비 두 개가 라이터 불빛에 드러났어. 하얀 대리석은 습기의 검은 눈물에 패어 있었어. 그 눈물은 마치 조각 가의 끝이 남긴 갈라진 틈에서 흐르는 피처럼 보였어. 그것들은 사슬로 묶인 저주처럼 나란히 놓여 있었지.
페넬로페 알다야 1902~1919
다비드 알다야 1919
11
나는 여러 번 하던 일을 멈추고 그 침묵의 순간에 대해 생각했었어. 십칠 년 동안이나 기다려온 여인이 죽었고, 자신들의 아이도 그녀와 함께 가버렸고, 자신이 꿈꾸었던 자신을 숨쉬게 해 주었던 유일한 삶이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걸 확인했을 때 홀리안의 기분이 어땠을지 상상해보려 하면서, 우리 대부분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인생이 서서히 무너져내리는 걸 보는 행운 혹은 불행을 겪지, 홀리안에게는 그 분명한 사실이 한순간에 몰려왔지만. 나는 잠시 계단을 뛰어올라가 그 저주받은 곳에서 도망쳐 나와 다시는 그를 보지 말자고 생각했었어. 어쩌면 그 편이 나았을 텐데.
290 바람의 그림자 2
맥없이 욱신거리는 상처 같은 전투를 겪으며 교전과 폭격과 기아의 몇 달을 보내고 있었지. 살인과 전투, 음모의 망령이 몇 년 동안이나 도시의 영혼을 좀먹고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전쟁이 아직 먼 곳에 있다고, 그것은 곧 지나갈 풍랑이라고 믿고 싶어 했어. 기다림은 피할 수 없는 것을 어느 정도는 더 나쁘게 만들어버렸지. 고통은 눈을 뜨자마자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어. 전쟁만큼 망각을 길러내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다니엘. 우리는 모두 입을 다물고, 그들은 우리가 보았던 것, 우리가 했던 것. 우리가 스스로와 다른 이들에 대해서 배웠던 것은 환상이라고, 지나가는 악몽이라고 열심히 우리를 설득하지. 전쟁은 추억이 없어.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야기하는 목소리들이 남지 않을 때까지, 우리가 전쟁을 인정하지 않아 그것이 다른 얼굴, 다른 이름으로 돌아와 예전에 남기고 간 것들을 먹어치우는 순간이 올 때까지, 전쟁을 이해하려는 용기를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지.
그때는 이미 홀리안이 불태울 책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지. 아버지의 죽음 그 이야기는 한 번도 입에 올린 적이 없어-은 그를 불구자로 만들었어. 처음에 그를 사로잡았던 분노와 증오는 다 써버리고 없었지. 우리는 사람들과 떨어져 소문만 듣고 살았어. 푸메로가 전쟁 중에 자기가 출세하도록 도와준 사람들을 배신하고 지금은 승리자들 편에 서 있다는 얘기도 들었지.
306 바람의 그림자 2
불경한 행동이 소름 끼친다고도 생각지 않아. 그저 비극일 뿐. 그곳에서 그를 보게 될 땐 불 옆에 앉아 몇 시간 동안 이야기를 했어. 훌리안은 다시 글을 쓰려고 애써봤지만 그럴 수 없었다고 고백했지. 그는 자기 책들을 흐릿하게 기억했어. 마치 우연히 읽게 된 다른 사람의 작품인 것처럼. 다시 글을 쓰려는 시도의 고통이 눈에 보였지. 나는 우리가 만나지 못하는 동안 그가 격렬하게 써 내려간 자신의 글들을 불태워버린다는 걸 알게 됐어. 한 번은 그가 없는 틈을 타 재 속에서 원고 뭉치 하나를 건져냈어. 너 에 대한 이야기였어. 언젠가 홀리안은 내게 이야기란 작가가 다른 방법으로는 할 수 없는 것들을 이야기하기 위해 자기 자신에게 쓰는 편지라고 말했던 적이 있지. 오래전부터 홀리안은 자신이 이성을 잃은 건 아닌지 궁금해하고 있었어. 미친 사람이 자기 가 미쳤다는 걸 알까? 아니면, 미친 사람들이란 망상에 빠진 자기 존재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자신의 비이성을 납득시키려는 사람들일까? 홀리안은 너를 관찰하고 네가 성장하는 걸 보며 네가 누구인지 궁금해했어. 네 존재가 어쩌면 기적일지도 모른다고, 자기가 저질렀던 잘못들을 저지르지 않도록 네게 가르쳐줌으로써 스스로를 위해 얻어내야 할 용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거지. 몇 번이나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어. 홀리안이 자기 세계의 왜곡된 논리로 널 자신이 잃어버린 아들이라고, 자기가 만들어낼 수는 없지만 기억할 수는 있는 그 이야기를 다시 시작
누리아 몽포르트-망령들에 대한 기억 331
믿어본 적 없는 신에게 네가 이 글을 읽게 되는 일이 없길 간구하지만, 내 뜻과 헛된 바람에도 불구하고 네게 이 이야기를 건네는 것이 내 운명임을 예감하고 있단다. 그리고 네 운명은, 네 젊음과 순수함에도 불구하고, 그걸 자유롭게 해 주는 거지.
네가 이 글을, 이 추억의 감옥을 읽게 된다면, 그건 내가 바랐던 대로 너와 작별할 수 없다는 걸, 우리를, 특히 훌리안을 용서해 달라고, 또 나를 대신해 그를 돌봐달라는 부탁을 네게 직접 할 수 없다는 걸 의미하겠지. 나는 네게 몸조심하라는 말밖엔 아무것도 부탁할 수 없다는 걸 잘 알아. 이렇게 긴 글을 쓰면서 나는 깨닫게 된 것 같아. 무슨 일이 일어나든 넌 언제나 내 친구라는 걸, 너만이 내 유일한 희망, 진정한 희망이라는 걸. 홀리안의 모든 글 중에서 늘 내 마음에 가장 와닿았던 것이 있어. 누군가 우리를 기억하는 한, 우리는 계속 살아 있는 거라는, 훌리안을 만나기 전의 세월 동안에도 그에게 그랬던 것처럼, 내가 누군가를 신뢰할 수 있다면 그건 너일 거라는 느낌, 널 잘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구나. 나를 기억해 줘, 다니엘, 마음 한구석에 숨겨서 라도 날 떠나보내지 말아 줘.
누리아 몽포르트
334 바람의 그림자 2
나는 문가에서 나는 발소리에 눈을 떴다. 침대 발치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본 것 같기도 했다. 아니면 내가 회복된 건 분명 기적이라며 내게서 눈을 떼지 않던 멘도사 박사였을지도. 방문객은 침대를 돌아 아버지의 의자에 앉았다. 나는 입이 말랐고 말하기가 힘들었다. 홀리안 카락스는 내게 물 한 잔을 가져다주었고 내가 입술을 적시는 동안 내 머리를 받쳐주었다. 그의 눈은 작별을 고하고 있었다. 나는 그의 눈을 보고 페넬로페가 진정 누구였는지 그가 알아내지 못했다는 걸 알았다. 그가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 그의 목소리가 어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내 손을 잡았던 것과 자기를 위해 살아달라고 부탁한 것처럼 느꼈던 것, 다시는 자기를 볼 수 없을 거라고 말했던 것은 안다. 내가 그에게 했던 말은 잊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만년필을 가져가라고, 그건 늘 그의 것이었다고, 다시 글을 쓰라고 말했다.
깨어나보니 베아가 화장수를 적신 천으로 내 이마를 식혀주고 있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카락스는 어디 있냐고 물었다. 그녀는 어리 둥절해하며 나를 보더니 카락스는 눈 위에 핏자국을 남기고는 팔일 전에 폭풍 속으로 사라졌다고, 그래서 모두 그가 죽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그렇지 않다고, 불과 몇 초 전에 바로 여기 나와 함께 있었다고 말했다. 베아는 말없이 미소 지어 보였다. 내 맥박을 재던 간호사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내가 여섯 시간 동안이나 잠들어 있었다고, 그동안 자기가 병실 문 앞 책상에 내내 앉아 있었다고, 그리고 병실에 들어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날 밤, 잠을 청하며 베개를 베고 머리를 돌리다가 만년필 케이스가 열려 있는 걸 보았다. 만년필은 사라지고 없었다.
370 바람의 그림자 2
이핀을 선물하고 나와 악수를 했다.
"베아는 내가 평생 했던 일 중에서 유일하게 선한 일이네." 그가 내게 말했다. “날 위해 그앨 잘 보살펴주게나."
아버지는 문까지 그를 배웅하고 산타아나 가로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함께 늙어가고 있다는 걸 아는 남자들-늙어가는 것에 대해 아무도 그들에게 양해를 구하지 않았다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서글픔으로.
"나쁜 사람은 아니다. 다니엘." 아버지가 말했다. “우린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사랑하는 거니까."
내가 삼십 분 이상 서 있을 수 있을지 걱정했던 멘도사 박사는 결혼식의 분주함과 그 모든 준비과정이 수술실에 심장을 두고 올 뻔했던 사람을 치료하는 최고의 약은 아니라고 내게 경고했다.
"걱정 마세요.” 나는 그를 안심시켰다. "사람들은 저한테 아무것도 못 하게 하니까요."
거짓말이 아니었다. 페르민 로메로 데 토레스가 결혼식과 연회, 그 밖의 여러 세세한 문제들의 절대적인 독재자이자 잡역부 역할을 자청했던 것이다. 성당의 교구 사제는 신부가 임신한 채로 제단에 오른다는 걸 알고는 결혼식 주재를 단호히 거절했다. 또 종교재판을 열어 결혼식을 취소해 버리겠다며 협박까지 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페르민은 그를 성당 밖으로 끌고 나와서는 온 동네 사람들에게 그자는 사제복을 입을 자격도, 교구를 맡을 자격도 없다고 소리치며, 그 사제가 눈썹을 치켜세우는 것만 큼 자기도 주교 관할 지역에 그에 대한 험담을 퍼뜨려 최소한 그가 지브롤터의 바위산으로 추방되어 원숭이들에게나 복음을 전하도록 만들겠다고 맹세했다. 많은 행인들이 박수를 쳤고, 광장의 꽃행상은 페르민에게 하얀 카네이션을 선물했다. 그 꽃은 꽃 잎이 셔츠 칼라 색깔과 같아질 때까지 그의 옷깃에 꽂혀 있었다. 사제만 빼고 모든 준비가 끝나자 페르민은 산 가브리엘 학교에 가서 페르난도 라모스 신부에게 도움을 청했다. 페르난도 신부의 전공은 차례대로 라틴어와 삼각법, 체조였고, 평생 단 한 번도 결혼식을 주재해 본 적이 없었다.
“신부님, 신랑이 지금 너무 기운이 없는데 제가 또다시 실망시킬 수는 없어요. 그는 신부님을 성 토마스, 성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파티마 성녀님과 함께, 저 위에 계신, 교회의 위대한 사제들이 환생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신부님께서 보시듯이 다니엘은 저처럼 신실하거든요. 거의 신비주의자 수준이에요. 제가 그에게 신부님께서 제 기대를 저버렸다고 말한다면 우린 결혼식 대신 장례식을 치러야 할 거예요."
376 바람의 그림자 2
세월은 그녀를 강하고 현명하게 만들었다. 나는 종종 그녀가 말없이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있는 걸 보지만, 그녀는 과거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는다. 훌리안은 제 엄마를 아주 좋아한다. 나는 그들이 함께 있는 것을 지켜보며 내가 겨우 이해하기 시작한, 보이지 않는 매듭으로 그들이 연결돼 있다는 걸 깨닫는다. 나는 내가 그들의 섬의 일부라고 느끼며 내가 얼마나 운이 좋은지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서점 수입은 우리가 그럭저럭 먹고살 만큼은 된다. 그리고 나는 다른 일을 하는 나를 상상할 수 없다. 매상은 해가 갈수록 줄어든다. 낙천주의자인 나는 오른 것은 내려가고 내려간 것은 언젠가 오를 거라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베아는 말한다. 독서라는 예술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고, 그것은 내밀한 의식이라고, 책은 우리가 이미 우리 안에 지니고 있는 것만을 보여주는 거울이라고, 독서할 때 우리는 정신과 영혼을 건다고, 위대한 독서가들은 날마다 더 드물어져가고 있다고. 우리는 매달 서점을 팔라는 제의를 받는다. 서점을 텔레비전이나 거들 또는 에스파드리유를 파는 가게로 바꾸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잡아 끌어내지 않는 한 우리를 이곳에서 내 보내지는 못할 것이다.
페르민과 베르나르다는 1958년에 결혼했는데, 벌써 아이가 넷이다. 모두 사내아이고 코와 귀는 하나같이 제 아버지를 닮았다. 지금도 가끔은 새벽에 방파제로 함께 산책을 나가 세상사를 정리해보기도 하지만, 페르민과 나는 전보다는 자주 만나지 않는다. 페르민은 몇 년 전에 서점 일을 그만두었고, 이사크 몽포르트가 세상을 떠나자 그를 이어 '잊힌 책들의 묘지'의 관리인이 되었다. 이사크는 몬주익에 있는 누리아 옆에 묻혔다. 나는 종종 그들을 보리 가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누리아의 무덤 위에 는 언제나 싱싱한 꽃들이 놓여 있다.
내 오랜 친구 토마스 아길라르는 독일로 건너가 산업용 기계를 만드는 회사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며 나는 결코 이해하지 못할 놀라운 것들을 발명하고 있다. 가끔 누나인 베아 앞으로 편지를 보내온다. 이 년 전 결혼한 그는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딸이 하나 있다. 그는 항상 내게 안부를 전하지만, 나는 오래전에 그 끈을 발목에 감고 신는 캔버스화.
등장인물 391
나는 몇 년 전 그라시아 산책로에서 팔라시오스 경위와 마주쳤다. 그는 경찰을 떠나 지금은 보나노바 지구의 한 학교에서 체육 수업을 맡고 있다. 그는 푸메로를 기념하는 기념패가 지금도 비아 라예타나의 중앙수사본부 지하에 있지만, 동전을 넣는 새 음료수 자판기에 완전히 가려졌다는 얘기를 해주었다.
알다야 저택은 그 모든 예언에 맞서며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결국 아길라르 씨의 부동산 회사에서 매각에 성공한 것이다. 저택은 완전히 복구되었고, 천사상들은 자갈로 분쇄되어 저택의 정원이었던 곳에 만든 주차장을 포장하는 데 쓰였다. 지금 그곳에는 면양말과 푸딩 가루, 그리고 제트기를 타고 비즈니스를 하는 이들이 타고 다니는 스포츠카의 영광을 노래하는 특별한 시를 만들고 선전하는 광고 회사가 자리 잡고 있다. 언젠가 그곳에 가서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며 집을 둘러볼 수 있냐고 물어봤던 걸 고백해야겠다. 내가 목숨을 잃을 뻔했던 옛 도서관은 지금은 기적 같은 효과가 있다는 탈취제와 세제의 포스터들로 장식된 회의실로 탈바꿈했다. 베아와 내가 홀리안을 만들었던 방은 현재 사장의 화장실로 쓰인다.
그날 옛 알다야 저택을 방문했다가 서점에 돌아와 보니 파리 소인이 찍힌 소포가 와 있었다. 보리스 로렌이라는 사람이 쓴 『안개의 천사』라는 소설책이었다. 나는 새 책 특유의 매혹적인 향기를 들이마시며 가볍게 책장을 넘기다가 눈을 사로잡는 첫 문장을 읽기 위해 시선을 고정했다. 나는 누가 그 책을 썼는지 금세 알아차렸다. 나는 놀라지 않고 첫 페이지로 돌아갔다. 거기 엔 내가 어릴 때 그토록 아끼고 좋아했던 그 만년필의 파란색 획들로 다음과 같은 헌사가 쓰여 있었다.
내게 목소리와 만년필을 돌려준 내 친구 다니엘에게 그리고 우리 둘에게 목숨을 돌려준 베아트리스에게
394 바람의 그림자 2
옮긴이의 말
어느 겨울의 끝 무렵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과 『바람의 그림자』 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이 작품을 읽으며 한동안 딱딱한 논문들과 의무적인(?) 고전에 한정되어 있던 나의 독서는 오랜만에 책 읽기의 행복을 느껴보았다. 작중 어느 인물의 말대로 "영혼을 향해 열린 공간들을 탐험하는 즐거움, 허구의 이야기와 언어가 지닌 신비로움과 아름다움, 그리고 상상력에 자신을 내맡기는 즐거움을 만끽했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그것은 참으로 가슴 설레는 고전적인 행복이었다. 한 번 읽은 것은 좀처 럼 다시 읽기 싫어하는 못된 나의 독서 습관에도 불구하고 출판을 위한 교정의 과정이 그런대로 견딜 만했던 것도 모두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그러한 장점 때문이리라.
옮긴이의 말 399
『바람의 그림자』는 패자부활전을 통해 올라온 작품이다. 2000년 스페인의 '페르난도 라라 소설 문학상'의 최종 후보작이었으나 마지막 순간에 심사위원들의 눈에 들지 못했는지 수상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다음 해 출판된 후 독자들 사이에서 유명세를 치르기 시작했고 그 결과, 독일과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 번역 출간되어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들게 되었다. 그것도 스페인 작가의 작품으로는 보기 드문 초대형 베스트셀러로 우뚝 서 지금까지 전 세계 42개국에서 출판되었고 1200만 부 이상이 판매되었다. 베스트셀러란 것을 그저 판매 부수라는 가시적 의미 내에서만 해석하려 한다면 달리 할 말은 없겠지만, 보다 따뜻한 시선으로 본다면 여러 계층과 다양한 연령대의 독자들이 공감하고 또 그런 사실이 검증된 매력적인 작품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스페인 바르셀로나라는 국지적인 무대와 스페인 내전 전 후의 상황을 시간으로 설정하고 있지만 『바람의 그림자』에는 사랑과 우정, 증오, 복수, 유머, 부재와 상실,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등 많은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다양한 주제들과 보편적인 요소들이 함축되어 있다. 그것도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로 화려하게 포장되어서 말이다. 각각의 독자는 아마도 어느 정도는 기호나 취향의 문제일 이런 요소들 중의 한 가지 또는 몇 가지를 이 작품의 최대 장점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은 다니엘의 순수함이나 훌리안의 운명과도 같은, 그러나 운명처럼 이룰 수 없는 그 사랑 또는 성처럼 견고한 미켈의 우정을 이 작품 최고의 미덕으로 여겼으리라.
400 바람의 그림자 2
나 역시 다니엘에게서 어린 시절 나의 일부분을 발견했고, 홀리안과 미켈에게서 젊은 날의 좌절과 희망을 추억했다. 그러나 이제 두 아이의 아버지로서 읽는 『바람의 그림자』는 또 다른 인물에의 주목을 허용했는데 그가 바로 다니엘의 아버지였다. 사폰은 좋은 아버지의 덕목을 페르민을 통해 요약하고 있다. 페르민의 말대로 "머리와 가슴과 영혼이 있는 남자" "자식의 말을 경청할 줄 알고, 자식을 이끌어주면서도 동시에 존중할 줄 아는 남자, 하지만 자기 결점을 자식한테서 보상받으려 하지 않는 남자" "자식이 그저 아버지라서 좋아해 주는 남자 말고 인간 됨됨이 때문에 존경하는 남자, 아이가 닮고 싶어 하는 남자"가 좋은 아버지임은 틀림없다. 다니엘의 아버지는 리카르도 알다야나 이사크 몽포르트, 안토니 포르투니 또는 토마스의 아버지처럼 실패한(?) 아버지들 사이에 자리 잡고 있어 더욱 빛났다. 그런 아버지가 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는 나이이기에 그가 더욱 존경스럽고 호감 가는 인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에게서, 특히 아들에게서 사랑과 존경을 받는 그런 아버지는 얼마나 드물고 또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옮긴이의 말 401
『바람의 그림자』의 성공에는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특징이자 원동력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마술적 사실주의'도 커다란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소설의 무대가 되는 바르셀로나는 지극히 현실적인 공간이지만 사폰은 그 안에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을 연상시키는 '잊힌 책들의 묘지'라든지 기이한 일들이 벌어지는 '안개의 천사' '테네브라리움' 등을 소설의 중심공간으로 설계해 놓음으로써 스페인 문학의 전통이라고 할 수 있는 사실적 묘사와 구도에서 벗어나 마술적 사실주의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 다. 마술적 사실주의의 요소는 공간에만 국한되지 않고 작품을 이끌어가는 여러 모티프들과도 관계하는데, 그 결과 『바람의 그림자』는 현실과 환상, 사실과 허구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었고, 범세계성을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
스페인에서 수년을 살았었지만 정작 바르셀로나에는 여행 중 한나절만 머물렀었다. 오랫동안 'F.C. 바르셀로나'의 팬이지만 그 연고지가 그토록 아름다운 곳인 줄은 몰랐었다. 그러다가 『바람의 그림자』로 인해 다시 바르셀로나를 찾아 며칠을 머무르며 나만의 '바람의 그림자 투어'를 했었다. 다니엘과 아버지의 서점이 있는 산타아나 가와 클라라의 레알 광장, 오랜 시간의 흐름에도 품위를 유지하고 있는 아테네오, 고독한 포르투니의 론다 데 산 안토니오, 아직도 비둘기가 많이 노니는 카탈루냐 광장, 그리고 불행한 누리아의 누추한 집이 있는 산 펠리페 네리 광장.
402 바람의 그림자 2
여전히 옛 영화의 자태를 간직한 티비다보 애비뉴에 오르는 파란색 전차를 탄 나는 홀리안을 추억하며 32번지 근처를 배회하기도 했었다. 티비다보 언덕에서 바라보던 해 질 녘의 바르셀로나는 잊기 어려울 것이다. 허구인 문학이 이렇듯 근사한 현실로 변 화되는 마력, 그 신성한 유희에 새삼 가슴이 뭉클했다. 이 거짓말 같은 세상, 이 남루한 세계를 위해 허락된 그 진실이 너무 마음에 든다.
스페인어로 쓰인 명작인 『돈키호테』와 『백 년 동안의 고독의 첫 문장은 모두 '기억하다'라는 동사로 시작한다. "나는 지금도 아버지가 '잊힌 책들의 묘지'로 나를 처음 데려간 그 새벽을 기억한다”로 시작되는 『바람의 그림자』가 독자들에게 그 '기억'의 고전들처럼 오랫동안 추억되길 기원한다. 그리하여 기억되는 동안에는 살아 있는 거라는 홀리안의 말처럼 오랫동안 남기를, 사폰의 『바람의 그림자』는 카락스의 『바람의 그림자』와는 달리 보다 행복한 길을 걸어가기를.
2012년 연구년 중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at Chapel Hill에서
정동섭
옮긴이의 말 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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