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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독서정리

마흔네 번째 책 : 바람의 그림자 - 카를로스

by 마파람94 2025. 10. 3.


바르셀로나를 두 번 다녀왔고 두 번째 바르셀로나 행 비행기에서 이 책을 펼쳤습니다. 번역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장소와 장면의 묘사 그리고 이들을 빛나게 살려내는 수려한 문장들이 인상적입니다. 읽는 내도록 책 속과 실제 모습이 포개집니다.

마치 바르셀로나 도시가 상상이 되고, 그곳의 람블라스 거리를 걷는 듯한 느낌이 전해집니다. 그리고 고딕 지구와 그곳에 위치한 오래된 성당이 그려지고 보케리아 시장도 떠오릅니다.

소설 속에 나오는 바르셀로나는 바로 오늘 저녁에 그곳에 있었고 거기서 소설 속 등장인물과의 만남이 이뤄진 듯한 느낌입니다.

2권이 기대됩니다.




지금은 훈장을 많이 받은 유명한 수사관이고, 우리 아빠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말이야. 너도 짐작하겠지만, 엄만 몇 달 못가 돌아가셨어. 의사들은 심장 질환이라고 했는데, 그때만큼은 그들 말이 맞았다고 생각해. 엄마가 돌아가시자 난 바르셀로나에 있는 엄마의 유일한 혈육인 구스타보 삼촌과 살게 됐어. 난 우리 집에 올 때 늘 선물로 책을 가져오는 삼촌이 좋았어. 근래에는 내 유일한 가족이자 최고의 친구지. 좀 거만해 보이긴 해도 사실 그분의 영혼은 축성식의 빵과 같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밤마다 잠깐 동안이라도 내게 책을 읽어준단다. 꾸벅꾸벅 졸면서도 말이야."

"당신이 좋다면 내가 책을 읽어줄 수도 있어요." 나는 정중하게 제안했다가 곧바로 내 대담함을 후회했다. 농담할 때가 아니라면 클라라에게 내 도움은 성가시기만 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워, 다니엘." 그녀가 대답했다. "그래주면 좋겠어.”

"원하는 때 언제든 할게요."

그녀는 미소를 띤 채 나를 찾으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나한테 『붉은 집』이 없어." 그녀가 말했다. "

여기체크



잿빛 나날 51


서점 안쪽 방에 있을 때면 손님이 아버지에게 하는 농담 이 들려왔다.

“셈페레, 자네가 해야 할 일은 좋은 여자를 구하는 거네. 지금은 예쁘고 꽃다운 나이의 미망인이 넘쳐난다니까. 무슨 말인지 알지? 착한 여자는 인생을 안정시켜 준다네, 친구. 게다가 이십 년은 젊어 보이게 해주지. 젖꼭지 두 개가 할 수 없는 건......"

아버지는 그런 제안에 한 번도 대답하지 않았지만, 나는 갈수록 그 말이 현명한 것 같았다. 눈도 마주치지 않는 침묵의 전쟁터로 변해버린 우리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언젠가 나는 그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 제안을 내가 한다면 일이 쉽게 풀릴거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잘생겼고 깔끔하고 단정해 보여서 우리 동네에 사는 여자들 중 몇몇은 틀림없이 호감을 갖고 있을 터였다.

"넌 네 엄마를 대신할 사람을 찾는 게 아주 쉬웠을지 몰라도." 아버지는 고통스럽게 대답했다. “내겐 그런 사람은 없고 또 그런 사람을 찾고 싶지도 않구나.”

시간이 흐르면서 아버지와 베르나르다의 충고가, 그리고 바르셀로의 충고까지도 내게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내 안의 무언가가 내게 출구 없는 길에 빠져들고 있다고, 클라라가 나를 열 살 어린 소년 이상으로 보게 될 때를 기다릴 수 없다고 말했다. 그녀 곁에 있는 것이, 그녀의 손길을 견디는 것이, 산책할 때 그녀와 팔짱을 끼는 것이 나날이 더 어려워짐을 느꼈다. 급기야 단순히 그녀와 가까이 있는 것이 거의 육체적 고통을 의미하는 순간이 왔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클라라는 말할 것도 없었다.

"다니엘, 얘기 좀 해야 될 것 같아." 그녀가 말했다. "내가 네 게 잘못 처신한 것 같아………….."

나는 그녀가 말을 끝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는 그 방을 나와 도망쳤다. 시간에 맞서 불가능한 경주를 하고 있다고 믿었던 날들이었다. 내가 클라라 주변에 쌓았던 신기루 같은 세계가 끝을 향해 가는 것이 두려웠다. 내 고난은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80 바람의 그림자 1


심장을 도려내는 것 같았고,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흔들렸다. 나는 푸에르타 델 앙헬에서부터 가만히 나를 바라보던 수상한 자를 눈치채지 못하고 정처 없이 걸었다. 그는 지난번과 똑같은 검은 양복 차림으로 오른손을 재킷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두 눈은 담배 불빛 속에 가느다란 빛줄기처럼 보였다. 그는 가볍게 다리를 절며 나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한 시간이 넘도록 거리를 헤매다가 콜럼버스 기념비 아래에 이르렀다. 그리고 길을 건너 항구로 가서 유람선 선착장 옆 탁한 물 쪽으로 경사진 돌계단 위에 앉았다. 누가 야간 유람선을 빌렸는지 내항에서 불빛과 반사광의 행렬이 웃음소리와 음악 소리를 실어 날랐다. 아버지와 함께 그 유람선을 타고 방파제가 있는데 까지 가곤 하던 때가 떠올랐다. 거기선 몬주익에 있는 묘지와 죽은 자들의 끝없는 도시를 볼 수 있었다. 나는 엄마가 아직 거기 있어서 우리가 지나가는 걸 본다고 생각하며 종종 손을 흔들어 인사했었다. 아버지도 손을 흔들었다. 우리가 유람선을 타지 않은 지도 벌써 수년이 됐지만, 나는 아버지가 이따금 혼자 탄다는 걸 알고 있었다.

"후회하기에 좋은 밤이군, 다니엘." 그림자로부터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담배 피울래?"

갑자기 한기가 느껴져 나는 벌떡 일어섰다. 어둠 속에서 손 하나가 내게 담배 한 개비를 권하고 있었다.

별 볼일 없는 일 89

“물론 그렇죠. 이 책은 여기 묻혀야 하거든요, 아무도 못 찾게.”

이사크는 경계하는 시선으로 거리를 살폈다. 그는 문을 좀 더 열고 내게 들어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운 현관에서 습기와 불에 그을린 밀랍 냄새가 훅 끼쳤다. 어둠 속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렸다. 이사크는 등잔을 건네며 외투에서 열쇠 한 다발을 꺼내는 동안 들고 있으라고 했다. 열쇠 다발은 교도소 간수도 부러워할 만했다. 그는 알 수 없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원하는 열쇠를 골라내서는 커다란 오르골 같은, 톱니바퀴와 쇠막대들로 가득한 유리 케이스 속의 자물쇠에 끼워 넣었다. 그가 손목을 한 번 돌리자 그 기괴한 기계장치는 로봇 내부에서 들릴 법한 딸깍 소리를 냈고, 지레와 지렛목들이 미끄러지듯 경이로운 역학적 발레를 마치자 돌벽의 구멍에 원을 그리며 박힌 쇠막대들이 대문을 잠갔다.

"스페인 국립은행도 이보다 더 나을 순 없을 거예요.” 감동을 받아 내가 말했다. “쥘 베른에게서 힌트를 얻었나 봐요.”

"카프카지.” 등잔을 다시 받아 들고 건물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가며 이사크가 바로잡았다. “책 장사는 별 볼일 없다는 걸 깨닫고 은행을 털거나 세우기로 결정하는 날, 그게 그거지만, 날 찾아오너라. 그럼 내가 자물쇠에 대한 몇 가지 비밀을 가르쳐주마."

나는 그를 따라 복도로 갔다. 내 기억에 그곳에는 천사들과 키 마이라를 그린 빛바랜 프레스코화가 있었다.

별 볼일 없는 일 109

이사크는 한숨을 쉬었다.

“하느님만이 아실 거다. 내가 알기로 카락스의 부모는 오래전에 헤어졌다. 그의 어머니는 남아메리카로 갔고, 거기서 재혼했다고 들었다. 파리로 떠난 후로 그는 아버지와도 대화가 없었을 거다."

"왜요?"

"글쎄다. 사람들은 마치 인생이 충분히 복잡하지 않다는 듯이 자기 삶을 복잡하게 만들려는 경향이 있단다."

"카락스의 아버지가 아직 살아 있는지는 아세요?”

“살아 있기를 바라지. 나보다 더 젊었으니까. 하지만 난 이제 외출도 거의 안 하고, 몇 년 전부터는 신문 부고란도 읽지 않는다. 아는 이들 대부분이 파리처럼 떨어져 죽는 마당에, 솔직히 말해서 남은 사람은 무서운 법이니까. 그건 그렇고, 카락스는 어머니 쪽 성姓이란다. 아버지 성은 포르투니였지. 포르투니는 론 다 데 산 안토니오에서 모자 가게를 하고 있었다. 내가 알기로 그는 아들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 카락스가 바르셀로나에 돌아왔을 때 아저씨 딸 누리아를 만나고 싶어 했을 수도 있겠네요? 둘 사이에는 친분이 있었고, 그는 자기 아버지랑 소원했으니까요.”

이사크는 쓴웃음을 지었다.

118 바람의 그림자 1

“아마 내가 그걸 아는 마지막 사람일 거다. 아무튼 난 그 애 아버지니까. 한 번은 1932년인가 33년에 누리아가 카베스타니 출 판사 일로 파리에 갔었는데, 홀리안 카락스의 집에서 이 주쯤 머 물렀던 걸로 안다. 카베스타니가 얘기해 줬지. 그 애는 자긴 호텔에 있었다고 하더구나. 내 딸은 그때 미혼이었는데, 나는 카락스가 그 애에게 반했다는 걸 눈치챘지. 우리 누리아는 한번 보기만 해도 남자의 심장을 멎게 하는 여자거든."

"그들이 연인이었다는 뜻인가요?"

"넌 싸구려 연재소설을 많이 봤구나, 그렇지? 난 말이다. 누리아의 사생활에는 한 번도 간섭한 적이 없다. 나도 사생활이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건 아니니까. 언젠가 너에게도 딸이 생기게 되면...... 딸은 축복이지만, 누구에게도 권해주고 싶지 않은 축복이란다. 그 딸이 조만간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게 인생의 법칙이니까. 어쨌든 내가 하려던 말은, 언젠가 너에게도 딸이 생기면, 너도 모르는 사이에 남자를 두 부류로 나누기 시작할 거란 얘기야. 네 딸과 잤을 것 같은 놈들과 아닌 녀석들로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거짓말이지. 난 카락스가 첫 번째 부류라고 의심했고, 그래서 녀석이 천재든 불쌍한 놈이든 상관없었다. 내게 그 녀석은 언제나 악당이었으니까."

"아마 아저씨가 잘못 아셨을 거예요."

"기분 나쁘게 듣지 마라, 넌 아직 너무 어려서 여자에 대해선 내가 성탄절 과자 굽는 것에 대해 아는 것만큼이나 아는 게 없단다."

별 볼일 없는 일 119

"속임수요?"

"얘야, 넌 이해가 더디구나, 그렇지? 미노타우로스를 생각해 봐라."

그의 제안을 이해하는 데는 몇 초가 걸렸다. 이사크는 주머니에서 주머니칼을 꺼내 내게 건넸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구석에 표시를 해둬. 너만 알아볼 수 있는 자국 말이다. 나무가 낡아서 이미 흠집과 홈이 많으니 아무도 몰라볼 거다. 찾는 게 뭔지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나는 그의 조언에 따라 다시 그 구조물의 심장부로 들어갔다.

그리고 방향을 틀 때마다 나를 인도하는 통로 한쪽에 멈춰 서서 책장에 C자와 X자로 표시를 해두었다. 이십 분 뒤에는 탑 깊숙 한 곳에서 완전히 길을 잃었고, 우연히도 내가 처음 카락스의 소설을 묻으려던 장소 앞에 서 있었다. 내 오른편으로 유명한 호베 야노스에 의해 작성된 교회 재산의 한정 상속권 해제에 관한 책 들이 한 줄로 늘어선 것이 보였다. 나 같은 소년의 눈에도 그러 한 위장이라면 최고의 솜씨를 가진 사람까지 속일 수 있을 것 같 았다. 나는 몇 권을 꺼내고 화강암 같은 산문散文의 벽들 뒤에 숨 겨진 두 번째 줄을 살펴보았다.

* 18세기에 활동했던 스페인의 계몽주의자.
**스페인의 극작가.

별 볼일 없는 일 125

작은 먼지 구름 사이로 모라틴**의 다양한 희극작품들과 갓 출판된 듯 보이는 『쿠리알과 구엘파』*가 스피노자의 『신학 정치론』과 교제하고 있었다. 나는 안락사를 시 키듯, 카락스의 책을 1901년 헤로나 시민법정의 판결 연감과 후 안 발레라**의 소설 선집 사이에 유배하기로 했다. 공간을 확보하 기 위해 그 사이에 있던 스페인 황금 세기***의 시집을 가져가기로 했고, 그 자리에 『바람의 그림자』를 밀어 넣었다. 나는 윙크로 소설과 작별하고 호베야노스 선집을 있던 자리에 되돌려놓아 앞줄을 성벽처럼 만들었다.

나는 지체 없이 그곳을 떠나 들어올 때 표시해 두었던 칼자국을 따라 걸었다. 어스름 속에서 책들의 터널을 걸어 나올 때 크나큰 슬픔과 실망감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내가 아주 우연히 저 무한한 묘지에 묻힌 이름 모를 한 권의 책에서 온 우주를 발견했다면, 수만 권의 다른 책은 알려지지 않고 영원히 잊힌 채 남게 될 거라는 생각을 피할 수 없었다. 나는 버려진 수백만의 페이지들, 주인 없는 영혼들과 세계들에 둘러싸인 것 같았다. 도서관 바깥의 약동하는 세상이 잊으면 잊을수록 현명해진다는 믿음으로 날마다 부지불식간에 기억을 잃어가는 동안 그것들은 어두운 대양大洋에 가라앉고 있었다.

* 익명의 작가에 의해 15세기에 쓰인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기사소설.
** 스페인의 소설가.
*** 스페인 문학이 번성했던 16, 17세기를 뜻함.

126 바람의 그림자 1

카리브식으로 하게 되지...... 굉장히 좋은 걸세."

“고맙지만 사양할래요. 하지만 옆에 있어드릴게요. 한잔 하시는 동안 얘기나 좀 들려주세요."

모두들 모자 기술자라고 부르는 안토니 포르투니가 소피 카락스를 알게 된 건 1899년 바르셀로나 성당 계단 앞에서였다. 그는 성 에우스타키오에게 서원을 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성 에우스타키오는 개별 예배실이 있는 모든 성자들 중에서 사랑의 기적을 허락하는데 가장 부지런하고 가장 덜 까다롭다고 알려져 있었다. 벌써 서른 이 넘은 노총각이었던 안토니 포르투니는 아내를 원했고 이미 소피를 사랑하고 있었다. 소피는 리에라 알타가의 젊은 여성들을 위한 하숙집에 사는 프랑스 아가씨로,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명망 있는 집 안의 자제들에게 솔페주**와 피아노 개인 레슨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가족도 물려받은 재산도 없었다. 님***에 있는 어느 극장 피아니스 트였던 아버지가 1886년 결핵으로 죽기 전에 남겨주었던 음악 교육과 젊음이 그녀가 가진 전부였다. 반면 안토니 포르투니는 전도유망했다. 최근에 아버지가 운영하던 론다 데 산 안토니오에 있는 평판 좋은 모자 가게를 물려받았다.

* 카탈루냐 지방의 도시.
** 음악 기초 교육 가운데 시창력, 독보력, 청음 능력 따위를 기르는 교과과정.
***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고대 유적 도시.

208 바람의 그림자 1

거기서 그는 사업을 배웠고 언젠가는 아들에게도 가르쳐주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 섬세하고 아름답고 젊고 고분고분하면서 아이도 잘 낳을 것 같은 소피 카락스에게 그는 반해버렸다. 성 에우스타키오는 명성에 걸맞게 그의 소원을 이뤄주었다. 사 개월 동안 끈질기게 따라다니자 소피가 청혼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할아버지 포르투니의 친구였던 몰린스 씨는 안토니에게 잘 모르는 여자와 결혼하는 거라고 주의를 주었다. 소피가 좋은 아가씨 같긴 하지만 아마도 그 결혼은 그녀에게 지나치게 유리할 것이고 적어도 일 년 정도는 기다려보는 것이 좋지 않겠냐고 충고했던 것이다. 안토니 포르투니는 미래의 아내에 대해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피노의 예배당에서 결혼했고, 몽가트 해수욕장 근처의 온천으로 사흘간의 신혼여행을 떠났다. 떠나는 날 아침에 포르투니는 몰린스 씨에게 첫날밤 침실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터놓고 물었다. 몰린스는 그런 건 신부에게 물어보라며 빈정거렸다. 포르투니 부부는 이틀도 지나지 않아 서 바르셀로나로 돌아왔다. 이웃들은 소피가 건물로 들어올 때 울고 있었다고 했다. 몇 년 뒤에 비센테타는 소피가 자신에게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해주었다고 맹세했다. 포르투니는 소피의 몸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고, 그를 유혹하려 하는 소피를 창녀 대하듯 하며 그녀가 하려는 음란한 짓을 거부했다는 것이었다. 육 개월 후 소피는 남편에게 아이를 가졌다고 알렸다. 다른 남자의 아이를.

그림자의 도시 209

아버지가 엄마를 때리는 것을 수없이 보고 자란 안토니 포르투니는 그 역시 아버지와 똑같이 행동했다. 한 대 더 패면 죽겠다 싶을 때까지 아내를 때렸다. 그렇게 맞으면서도 소피는 배 속에 있는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 밝히지 않았다. 안토니 포르투니는 자기의 독특한 논리를 적용해 그것은 악마의 소행으로, 아이는 죄악의 자식이고 그 죄악의 아버지는 악마일 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죄악이 자기 집에 스며들어 아내의 사타구니 사이로 들어왔다고 확신한 그는 집 안 구석구석에 십자가상을 걸어놓았다. 벽과 모든 방문, 그리고 천장에도. 자기를 가둔 침실에 포르투니가 십자가를 뿌리는 걸 보고 점점 더 두려워져 소피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에게 미쳤냐고 했다. 분노에 눈이 먼 그는 돌아서서 그녀의 따귀를 때렸다. “창녀 같은 년, 너도 다른 년들과 똑같아.” 가죽 허리띠로 실컷 때린 후, 그는 욕을 퍼붓고 난폭하게 그녀를 층계참으로 패대기치고는 침을 퉤 뱉었다. 다음 날 안토니 포르투니가 가게로 내려가려고 문을 열었을 때, 소피는 여전히 그곳에서 온몸이 마른 피로 뒤덮인 채 추위에 떨고 있었다. 의사들은 그녀의 오른손 골절을 온전하게 치료할 수 없었다. 소피 카락스는 이제 다시는 피아노를 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사내아이를 낳았고, 아이에게 자기 생의 다른 모든 것처럼 너무도 일찍 잃어버린 아버지를 추억하며 홀리안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원래 포르투니는 그녀를 집에서 쫓아낼 생각이었지만 그런 추문은 사업상 좋지 않을 거라고 결론을 내렸다. 오쟁이 진 남자에게서 모자를 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210 바람의 그림자 1

“그러니까 딱지 맞았단 얘기군요."

“그 어떤 여자도 페르민 로메로 데 토레스에게 딱지를 놓을 순 없어. 사실 남자란, 프로이트로 돌아가 은유법을 사용하자면 백열등처럼 달아오르지. 한순간에 발갛게 달아올랐다가 훅 바람이 불면 차가워져. 반면 여자는 다리미처럼 달아올라. 과학적으로 확실한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조금씩 조금씩, 약한 불로 말이야. 맛있는 크리스마스 스튜를 만들 때처럼. 하지만 한번 열을 받았다 하면 막을 길이 없지. 비스카야**의 용광로 같단 말이야."

나는 페르민의 열역학 이론을 저울질했다.

“그게 아저씨가 베르나르다한테 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물었다. "다리미를 달구는 거요?"

페르민이 내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녀는 분화 직전의 활화산이야. 불타오르는 마그마의 리비도와 성녀의 마음을 가지고 있지.” 입맛을 다시며 그가 말했다. “솔직히 비교하자면, 그녀를 보면 아바나에 있는 매우 신실한 물라토 아가씨가 생각나. 그런데 사실 난 구식 신사여서 그녀를 어 쩌지 못하고 뺨에 순결한 키스를 한 것으로 만족했었지. 난 서두르지 않으니까, 알겠니? 좋은 건 기다렸다가 하는 거야.

* 투우의 최종 단계. 투우사가 기술을 과시하기 위해 죽기 직전의 소를 연속해서 찌르는 일.

** 제철업으로 이름 높은 스페인 북부 지방.

220 바람의 그림자 1

엉덩이에 손을 대도 여자가 아무 말하지 않으면 동의한 것으로 아는 얼뜨기들이 있지. 아마추어들이야. 여자의 마음은 속임수를 쓰는 남자의 버릇없는 정신에 도전하는 섬세한 미로지. 네가 진정으로 한 여자를 소유하고 싶다면, 그 여자처럼 생각해야 돼. 그리고 그녀의 영혼을 얻는 게 우선이지. 나머지 것들, 즉 감각과 미덕을 빼앗아가는 달콤하고 부드러운 포장은 보너스로 오는 거야."

나는 그의 연설에 진심 어린 박수를 보냈다.

"아저씨는 시인이에요, 페르민."

"아냐, 난 오르테가파派야. 실용주의자고. 시는 아름답지만 거짓을 말하잖아. 그런데 내가 하는 말은 토마토를 곁들인 빵보다 더 진실되거든. 오르테가가 이렇게 말했지. 내게 돈 후안을 보여 주시오, 그럼 난 당신에게 그가 가면 쓴 호모라는 걸 보여드리지요. 나는 꾸준하고 영원한 쪽이야. 너를 증인 삼아 말하는데, 난 베르나르다를 여자로 만들어줄 거야. 이미 정직한 사람이니 정직한 여자로 만들어줄 순 없지만, 적어도 행복하게 해 줄 수는 있을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미소를 보냈다. 그의 열광은 전염되는 것이었고 그의 운율은 무적無敵이었다.

"그녀를 잘 돌봐줘요, 페르민, 베르나르다는 정말 마음씨가 좋은데, 지금껏 고생을 너무 많이 했거든요."

"내가 그걸 모른다고 생각해? 전쟁미망인 후원자 증명서처럼 그녀 이마에 쓰여 있다니까. 날 믿어. 난 개 같은 연애 경험이 엄청나게 많아. 난 그녀를 아주 행복하게 해 줄 거야. 비록 그게 이 세상에서 내가 하는 마지막 일일지라도.”

“약속해요?"

그는 템플 기사단원처럼 침착하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잡았다.

“페르민 로메로 데 토레스의 약속이야."

그림자의 도시 221

네가 내 쪽에 서든 반대쪽에 서든. 그런게 인생이지. 아주 간단해. 어느 쪽에 서겠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푸메로는 또다시 그 억지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좋아, 셈페레. 네가 결정해라. 너와 난 시작이 썩 좋지 않구나. 문제를 원하면, 갖게 될 거다. 사는 건 소설 같지 않거든. 알지? 인생에선 한쪽을 선택해야 돼. 그리고 네가 어느 쪽을 선택했는지는 분명하군. 멍청이들 때문에 손해 보는 쪽이지."

“부탁이니 가주세요, 제발."

그는 그 불가사의한 웃음을 흘리며 문쪽으로 멀어져 갔다.

“우린 다시 보게 될 거다. 네 친구한테 푸메로 경감이 지켜보고 있다고 전해. 그리고 안부 전한다고도."

그 불길한 경감의 방문과 그의 말이 남긴 여운이 내 오후를 망쳐버렸다. 계산대 뒤에서 십오 분을 서성거리다가 창자가 조여들며 꼬이는 것 같아 평소보다 일찍 서점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 걷기로 했다.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동안에도 그 백정 같은 자의 암시와 협박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아버지와 페르민에게 그자의 방문에 대해 알려야 할지 고민스러웠지만, 그게 바로 푸메로의 의도라고 생각했다. 우리 사이에 의심과 괴로움, 두려 움과 불안의 씨앗을 뿌리는 것. 나는 그의 장난에 놀아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한편 페르민의 과거에 대한 시사는 놀라웠다.

그림자의 도시 229

아버지의 신경을 건드렸지만 그 선율에 페르민이 그리운 쿠바를 떠올렸기에 꾹 참고 있었다. 매주 반복되는 장면이었다. 아버지는 라디오 소리가 들리지 않는 척하고, 페르민은 광고가 나올 때마다 아바나에서 겪은 모험 이야기를 하면서 단손의 리듬에 맞춰 엉덩이를 흔드는 일에 빠져들었다. 열어놓은 가게 문으로 갓 구운 빵과 낙천주의로 초대하는 커피의 달콤한 향이 흘러들었다. 잠시 후 보케리아 시장에서 장을 보고 돌아오는 이웃 메르세디타스가 진열장 앞에 멈춰 서더니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셈페레 씨.” 그녀가 콧노래를 불렀다.

아버지는 얼굴을 붉히며 그녀에게 미소 지었다. 내가 볼 때 아버지는 메르세디타스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수도승 같은 윤리 의식이 당신을 굳은 침묵 속에 가둬놓고 있었다. 페르민은 방금 문으로 들어온 것이 케이크라도 되는 양, 엉덩이를 부드럽게 흔들어대고 입맛을 다시며 그녀를 곁눈질했다. 메르세디타스는 종이봉투를 열고 우리에게 반들거리는 사과 세 개를 주었다. 내 생각에 그녀는 지금도 서점에서 일하고 싶어 하며 그 자리를 뺏어버린 페르민에 대한 반감을 애써 감추려 하지 않는 것 같 앗다.

"얼마나 예쁜지 보세요. 이 사과들을 보며 셈페레 부자를 위한

* 쿠바에서 유래한 춤의 일종.

그림자의 도시 247


고개를 끄덕이는 베아의 눈썹이 아치 모양으로 휘었다.

"좋아. 이건 책에 대한 이야기야."

"책?"

"저주받은 책에 대한, 그 책을 쓴 사람에 대한 이야기, 소설을 불태우려고 소설 밖으로 나온 인물에 대한 이야기고, 배신과 사라진 우정에 대한 이야기지. 사랑과 증오의 이야기고, 바람의 그 림자에 사는 꿈들의 이야기이기도 해."

"일 두로짜리 싸구려 소설책의 날개에 쓰인 것처럼 말하는구나, 다니엘."

“서점에서 일하는 데다가 소설을 너무 많이 봐서 그럴 거야. 하지만 이건 진짜 이야기야. 방금 나온 이 빵이 적어도 사흘은 지난 거라는 사실처럼 정말 틀림없는 이야기지. 그리고 모든 진짜 이야기들처럼 묘지에서 시작해서 묘지에서 끝나. 비록 네가 상상하는 그런 종류의 묘지는 아니지만."

그녀는 수수께끼나 마술의 속임수를 기대하는 아이들처럼 웃었다.

"난 열심히 듣고 있어."

커피를 마지막 한 모금까지 마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투명하지만 막연한 두려움이 어린 그녀의 도피하는 듯한 눈에 내가 얼마나 빠져들고 싶은지를. 그녀와 함께 있기 위한 속임수도 이야기도 다 떨어져,

294 바람의 그림자 1

어둠을 향해 난 출입구 같은 좁은 통로에 들어섰다. 나는 마지막 책장 옆에 무릎을 꿇고 등잔 불빛에 서리처럼 빛나는 먼지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온통 먼지가 앉은 일련의 책들 뒤에서 마침내 숨겨둔 내 오랜 친구를 찾아냈다. 나는 책을 집어 베아에게 내밀었다.

“홀리안 카락스를 소개할게.”

“바람의 그림자.” 베아가 표지의 색 바랜 글자를 쓰다듬으며 소리 내어 읽었다.

"내가 가져가도 돼?” 그녀가 물었다.

“아무 책이나 가져갈 수 있지만 이것만은 안 돼."

"그건 옳지 않아. 네 얘기를 듣고 나서부터 내가 원하는 건 오 로지 이 책뿐이었어."

"나중에. 오늘은 안 돼."

나는 그녀의 손에서 책을 뺏어다가 도로 제자리에 숨겨놓았다.

“나 혼자 와서 몰래 가져갈 거야.” 그녀가 장난치듯 말했다.

“천 년이 지나도 못 찾아낼걸.”

“그건 네 생각이지. 네가 해놓은 표시를 벌써 봐뒀는걸. 나도 미노타우로스의 이야기를 알아."

“이사크가 널 들여보내주지 않을 거야."

“그건 네 착각이야. 그 사람은 너보다 날 더 맘에 들어하거든."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림자의 도시 299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말해볼게. 네가 괜찮다면 이번 일요일에 가볍게 산 가브리엘 학교에 들러서 카락스와 그 부잣집 아이의 우정의 기원에 대해 좀 조사해 보자."

"알다야예요."

"너도 보게 될 테지만, 내가 좀 신부들을 다룰 줄 알아. 비록 내 모습이 껄렁껄렁한 사제 같아서이긴 하지만 말이야. 내가 아부를 좀 하면 신부들은 다 넘어오게 돼 있거든."

"확실해요?"

"이 녀석아, 확실하지! 그 사람들이 몬세랏 수도원의 어린이 합창단처럼 노래할 거라고 장담하마."

23

나는 서점 계산대 뒤에 닻을 내리고서 베아가 불쑥 서점 문을 열고 들어오리라는 희망으로 넋이 나간 채 토요일을 보냈다.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전화를 받으려고 뛰어갔고, 아버지나 페르민에게서 수화기를 빼앗아 들었다. 고객들에게서 스무 통 정도 전화가 오고 베아에게선 아무 소식도 없던 오후 무렵, 나는 세상과 내 존재의 비참함이 그 끝에 이르렀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림자의 도시 313

우리를 자랑스러워하실 거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모자 제작 기술에서 가장 까다로운 공정 가운데 하나는 기술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치수 재기였다. 리카르도 알다야의 머리는, 훌리안의 말로는, 멜론처럼 생긴 데다 울퉁불퉁했다. 포르투니는 그 거물의 머리를 보자마자 제작이 어려우리라 간파했다. 그날 저녁 홀리안이 그의 머리가 몬세랏 산의 봉우리를 연상시킨다고 말했을 때 포르투니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죄송하지만, 치수를 재는 건 제가 아버지보다 낫다는 거 아시죠? 아버지는 긴장하시잖아요. 그러니 제가 치수를 재게 해주세요." 포르투 니는 기꺼이 허락했다. 다음 날 알다야가 메르세데스 벤츠를 타고 왔을 때 홀리안이 그를 맞이해 작업실로 안내했다. 알다야는 열네 살짜리 소년이 자신의 머리 치수를 잰다는 걸 알고 화를 냈다. “아니,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이 어린 녀석이 치수를 잰다고? 당신들 지금 내 머리를 갖고 장난치는 건가?” 훌리안은 그 고객의 사회적 지위를 잘 알고 있었지만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고 대답했다. “알다야 사장님, 장난칠 머리가 별로 없습니다. 사장님 머리 윗부분은 플라 사데 아레나스 투우장처럼 황량해서 저희가 서둘러 모자를 만들어 드리지 않으면 사람들은 선생님 머리를 바르셀로나의 신도시 계획 때 만든 도로와 혼동할 거예요." 이 말을 들은 포르투니는 이제 죽었다고 생각했다. 알다야는 침착하게 훌리안을 응시했다. 그리고 모두 가 놀라도록, 마치 몇 년 동안 웃지 않았던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그림자의 도시 339

내 아들 호르세는 억지로라도 서재에 들어가는 법이 없다. 우리 집에서 생각을 하고 책을 읽는 사람은 내 딸 페넬로페뿐이란다. 그래서 그 모든 책들 이 썩고 있구나. 그 책들을 보고 싶니?"

홀리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포르투니는 왠지 모를 불안을 느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뿐이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소설이란 여자들이나 할 일 없는 사람들이 보는 것이었다. 『암흑의 핵심』은 그에게는 적어도 구원받을 수 없는 큰 죄악처럼 들렸다.

“포르투나토, 자네 아들은 나와 함께 가네. 이 아이를 내 아들 호르헤에게 소개해주고 싶어. 걱정 말게, 나중에 돌려보낼 테니까. 말해봐라, 얘야, 메르세데스 벤츠를 타본 적이 있니?"

훌리안은 그것이 그 사업가가 이동할 때 이용하는 장엄한 기계의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이제 타보면 되겠구나. 천국에 가는 기분이 든단다. 하지만 죽을 필요는 없지."

안토니 포르투니는 엄청나게 화려한 차를 타고 떠나는 그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가 가슴속에서 찾을 수 있는 건 슬픔뿐이었다. 그날 밤, 소피(그녀는 새 옷을 입고 새 구두를 신고 있었고, 멍이나 상처도 거의 없었다)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 자신이 이번에는 무슨 실수를 했는지 자문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아들을 돌려준 바로 그때, 알다야가 그 애를 빼앗아가 버린 것이었다.

그림자의 도시 343

다니엘. 너한테 최면을 걸었던 그 변함없는 여성의 향기가 내게 위력을 발휘하진 못할 테니까. 내 나이가 되면 머리로 가는 피가 거시기 쪽으로 가는 피보다 빠르거든.”

"어련하시겠어요."

페르민은 지갑을 꺼내 돈을 세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지갑에 전 재산을 넣어 다니네요." 내가 말했다. “그게 다 오늘 아침의 그 거스름돈이에요?"

"일부는, 나머지는 합법적인 거다. 실은 오늘 우리 베르나르다와 외출을 하려고 하거든. 그녀가 뭐라고 하건 거절할 수가 없구 나. 필요하다면 스페인 국립은행이라도 털어서 그녀의 온갖 변덕을 충족시켜주고 싶어. 넌 오늘 뭘 할 거냐?"

“특별한 계획 없어요."

“그럼 그 여자애는 어쩌고?"

"어떤 여자애요?”

"어떤 여자겠니? 아길라르의 누나지."

"몰라요.”

"너한테 없는 건, 간단히 말하면, 황소의 뿔을 잡을 수 있는 용기야."

그때 피곤한 표정의 검표원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는 마치 서커스라도 하듯 능숙하게 잇새로 이쑤시개를 돌리고 뒤집고 있었다.

그림자의 도시 373



"죄송합니다만, 저쪽에 있는 부인들께서 당신들이 좀 더 점잖 은 말을 쓸 수는 없는지 궁금해하네요."

"엿 먹으라고 하죠.” 페르민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검표원은 세 부인 쪽으로 몸을 돌리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 기는 할 만큼 했고 또 언어의 의미론적인 문제로 싸움에 휘말리 고 싶지 않다는 의사 표시를 했다.

“심심한 사람들은 항상 남의 일에 참견하기 마련이지.” 페르 민이 중얼거렸다. “우리가 무슨 얘기를 하다 말았지?"

"내가 배짱이 없다는 얘기요."

“맞아, 교과서적인 케이스지. 들어봐. 그 여자애를 찾아가. 인생은 화살 같은 거야. 살아볼 가치가 있는 부분은 특히 더 그렇지. 그 신부가 하는 이야기 들었잖아. 전광석화 같다고."

“하지만 그녀는 내 여자가 아닌걸요.”

“그럼 다른 놈이 데려가기 전에 네 걸로 만들어. 특히 그 납으로 만든 병정이 데려가기 전에 말이야."

"베아가 무슨 트로피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네요.”

"아니, 그녀가 축복인 것처럼 말하는 거야.” 페르민이 바로잡았다. "이봐, 다니엘. 운명은 보통 도둑놈이나 창녀, 복권 판매원처럼 가까운 곳에 있기 마련이야. 이 세 가지가 운명의 가장 일반적인 구현이지. 하지만 운명의 손길이 미처 닿지 못하는 부분 이 있는데, 그건 바로 집으로 찾아가는 거지. 넌 운명을 위해 가야 해.

374 바람의 그림자 1

나는 버스에서의 나머지 시간을 이 진주 같은 철학적 지혜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며 보냈다. 그동안 페르민은 다시 졸기 시작했다. 나폴레옹 같은 재능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빛을 삼켜버린 납빛 하늘 아래 그란 비아와 그라시아 산책로가 만나는 모퉁이에서 우리는 내렸다. 페르민은 레인코트의 단추를 목까지 잠그고서 베르나르다와 만나려면 몸치장을 좀 해야 한다며 전속력으로 하숙집까지 뛰어가겠다고 했다.

"나처럼 외모가 대체로 품위 있는 사람도 기본적인 치장에 적어도 한 시간 반은 걸린다는 걸 알아둬. 육신 없이는 천재도 없는 거야. 그게 이 광대 같은 시대의 슬픈 현실이지. 바니타스 페카타 문디*."

나는 그란비아로 멀어져 가는 그를 보았다. 그 모습은 고작 누더기 깃발처럼 바람에 펄럭이는 칙칙한 레인코트에 몸을 숨긴 한 작은 사내의 스케치일 뿐이었다. 나는 집으로 향했다. 좋은 책 한 권을 골라 세상에서 몸을 감출 생각이었다. 푸에르타 델 앙헬과 산타아나 가의 모퉁이를 돌았을 때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늘 그랬듯이, 페르민의 말이 옳았다. 운명은 새 구두에 실 크 스타킹을 신고, 딱 붙는 회색 모직 정장을 입고 서점 앞에서

* Vanitas pecata mundi, '사람들이 허영의 죄를 짓는 세상'이라는 뜻의 라틴어.

그림자의 도시 375

그녀를 껴안았다. 목에 와닿는 그녀의 숨결이 느껴졌다.

"더 꽉 안아줘, 다니엘." 그녀가 중얼거렸다.

내가 아는 가장 현명한 사람 페르민 로메로 데 토레스는 언젠가 내게 남자가 처음으로 한 여자의 옷을 벗기는 순간과 비교할 만한 경험이 인생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현명한 그는 내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진실을 전부 다 말해준 것도 아니었다. 단추를 하나하나 푸는 일을, 지퍼를 하나하나 내리는 일을 대단히 어렵게 하는 그 이상한 손떨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백하게 떨리는 살결의 마술이나 입술의 첫 감촉, 또는 피부의 모공 하나하나에서 피어오르는 듯한 황홀경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 모든 것에 대해 아무 이야기도 해주지 않았다. 기적은 단 한 번만 일어난다는 걸, 그리고 그 기적은 드러나자마자 영원히 자취를 감춰버리는 비밀의 언어로 말한다는 걸 그는 알았기 때문이었다. 수천 번도 넘 게, 나는 빗소리가 세상을 다 씻어내 버렸던 티비다보 애비뉴의 그 저택에서 베아와 함께했던 첫 번째 오후를 되찾고 싶었다. 수 천 번도 넘게, 나는 추억 속으로 되돌아가 그곳에서 헤매고 싶었다. 그 추억 속에서 나는 불의 열기에 도둑맞았던 단 하나의 이 미지만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빗물에 반짝이는 베아가 벌거벗은 채, 그날 이후로 나를 따라다닌 그 눈을 뜨고 불 옆에 누워 있는 이미지. 나는 그녀에게로 몸을 숙여 손끝으로 그녀의 배를 훑었다. 베아는 눈꺼풀을 내리고 굳게 결심한 듯 미소 지었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녀가 속삭였다.

그녀는 열아홉 살이었고, 그녀의 전 생애가 그 입술 위에서 빛 나고 있었다.

400 바람의 그림자 1

(2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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