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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독서정리

마흔두 번째 책 : 흑산 - 김훈

by 마파람94 2025. 9. 4.



어린 시절에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망해서 애달프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허나 지금은 왕조 실록의 역사적 사실이 아닌, 백성의 삶들을 살펴보면 망해야 하는 왕조였다는 생각이 차고 넘칩니다.

이 소설 흑산을 덮으며 다행히 조선이라는 나라가 망해서 잘 되었구나 라는 입장을 굳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불쌍한 죽음들이 주마등 처럼 스칩니다.

김훈 작가의 다른 책에서 두 사람의 천주교 신자인 황사영과 안중근을 이은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망하게 해 달라는 황사영이 보낸 백서와 그 나라를 망하게 한 자를 단죄하는 안중근의 입장을 교차해서 볼 수 있는 글을 만날 수 있었는데, 이 소설로 그 장면이 예전보다 선명해졌습니다.

한편  그 시절의 통치 이념이 불과 200년 만에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도 믿기 어려워집니다.

조선 왕조의 마지막 망국의 세월에 고달프고 애통하고 슬퍼했던 사람들을 생각하게 하는 글입니다.





솜옷을 지어 보내지 못하고 묵은 종이를 거두어 보 낸다. 여러 장을 겹쳐서 종이옷을 만들거나 잘게 썰어서 무명천 안쪽에 넣고 누벼서 입어라. 내 간절한 뜻으로 너희들의 몸을 가려라. 임금의 뜻으로 몸을 덮으면 추위도 견딜 만하지 않겠느냐. 견딜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이 금수와 다른 점이다. 견디면 또 봄이 올 것이니, 너희들은 종이를 보내는 내 마음을 헤아리고 또 헤아려라.

구례 강마을 백성들의 소장도 폐지가 되어서 서북면으로 갔다. 강마을 백성들은 늙은이와 젖먹이를 들것에 싣고 마을을 떠났다. 서남쪽에 먹을 것이 있다고 해서, 걸식하는 유민들은 무안 쪽으로 길을 잡았고 백성들이 떠난 빈 마을에는 다른 마을 유민들이 들어왔다. 주린 백성들이 걷기도 힘들 터인데, 한사코 노유老幼를 걸머지고 길로 나와 천리를 떠도는 까닭을, 비변사는 괴이하게 여겼다. 유민들은 울면서 따라오는 아이를 나무둥치에 묶어놓고 뒤돌아보면서 떠났는데, 묶인 아이가 숨을 거둘 무렵에 버리고 떠난 어미도 도랑에 쓰러져 죽었다. 여러 고을의 향청들이 양지쪽에 구덩이를 파서 거적을 깔고 새끼로 지붕을 엮어서 유민들을 한 움막으로 몰았다. 겉보리로 죽을 쑤어 아침저녁으로 두 끼를 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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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신들은 북경에서 천자의 궁전으로 가 황제를 알현하고 신년을 하례했다. 사신들은 수십 마리의 말에 싣고 간 수달피며 나전칠기, 모시, 명주와 진귀한 토산품들을 공물로 바쳤다.

천자는 답례로 신년 달력을 내려주었다. 입춘, 우수, 경칩....... 과 태양의 운행 시각을 표시한 달력이었다. 조선 사신은 천자의 달력을 받들고 돌아와 임금에게 올렸다. 천자가 내려주는 시간은 그렇게 해서 조선으로 흘러왔고, 그 시간 속에서 조선은 세 계의 질서에 편입될 수 있었다.

대륙에서 새 왕조가 옛 왕조를 몰아내는 풍운의 시절에 조선 사행은 두려움 속에서 한 걸음씩 숨죽이며 걸어갔다. 옛 왕조의 천자를 향해 걸어가면서, 새 왕조의 표정을 더듬느라고 사신들은 뒤통수가 근지러웠다. 청이 심양에 나라를 세우고 명이 아직 북경에 남아 있던 시절에 사행은 북경과 심양을 따로따로 오갔다. 그때 사행의 발걸음은 느리고 고요했다.

사신을 수행한 관원들은 지니고 간 은이나 인삼을 북경 유리창琉璃廠 시장에 풀어서 값비싼 비단이나 모피, 귀금속, 벼루, 종이를 사들였다. 관원들은 노비와 마부를 시켜서 짐바리를 꾸렸고 마부나 짐꾼들도 저마다 꾸러미를 챙겼다. 갈 때의 짐바리보 다올 때의 짐바리가 더 많고 무거웠다.

비가 와서 땅이 질척거리면 짐바리를 실은 말들은 대열에서 처졌다. 처지는 거리는 점점 멀어져서 선두와 이틀이나 사흘거리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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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행들은 평양에서 의주까지 급하게 달려갔다. 의주에서는 종사관이나 비장들이 서열도 품계도 없이 밤새도록 불러들여서, 기생들은 하룻밤에도 서너 명씩 사내들을 받아냈다. 많은 사내들을 여색 없는 먼 길로 데리고 가야 하는 서장관은 기생 오입의 북새통을 눈감아주었다. 사내들은 의주에서 탕정蕩精했다. 의주를 떠날 때, 아랫도리가 가벼워진 사내들은 이제 교접을 해도 액즙은 안 나오고 바람만 픽 나온다며 낄낄거렸다.

떠나는 자들보다 대여섯 달 만에 돌아오는 귀국 사행들은 더욱 다급하게 창기들을 파대고 몰아붙였다. 오랫동안 여색에 허기진 데다가 압록강을 건너왔다는 안도감이 겹쳐 있었다. 사내들은 맹렬한 기세로 여자들을 누르고 쌌다. 창기들은 떠나는 사내들보다 돌아온 사내들을 받아내기가 더 숨차고 짐승 같았지만, 돌아온 사내들이 일을 더 빨리 끝내주었고 화대를 더 많이 주었다. 창기들은 귀국 사행이 의주에 당도하는 날짜를 대충 짐작하고 있었다.

떠나는 자들과 돌아온 자들의 행렬이 의주에서 마주칠 때, 창기들은 뒷물도 제대로 치지 못한 채 밤새 객사와 주막을 오갔다. 압록강 물가의 밤에 사내와 여자들은 새벽까지 바빴고 숨찼다. 사행이 떠나고 나면 여자들은 제 고향으로 돌아갔고, 의주는 하 얀눈에 덮여 고요했다. 발해만의 밀물이 강물을 밀어붙여서 압록강은 물소리가 사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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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공

사공은 자주 날라리를 불었다. 날라리 소리는 바람에 쓸려갔다. 가늘어지는 소리의 끝자락이 수평선을 건너갔다. 사공은 날라리를 불어서 표적 없는 바다를 향해 말을 걸었다. 바다는 말을 돌려주지 않았다. 날라리 소리는 날라리를 부는 자에게만 들렸 다. 날라리 소리는 소리를 내는 자에게로 돌아오는 자기 위안인 듯싶었다. 도초도 날뿌리를 돌아나가자, 섬도 산도 보이지 않았고 배는 하늘과 물 사이에서 흔들렸다. 해가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하늘색과 물색이 같아서 배는 허공에 뜬 듯했다.

-나는 문풍세文風世요. 바다는 죽을 자리고, 배는 죽을 자리를 넘나드는 널빤지요. 배에서는 사공의 말에 따라야 하오. 귀양 가시는 선비도 장교도 마찬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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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떠오르자 바람은 흑산 쪽으로 불었다. 수탉이 울어서 아침을 알렸다.

거기, 그렇게 있을 수 없는, 물과 하늘 사이에 흑산은 있었다. 사철나무 숲이 섬을 뒤덮어서 흑산은 검은 산이었다. 멀리서부 터 검푸른 숲이 뿜어내는 윤기가 햇빛에 번쩍거렸다. 바람에 숲의 냄새가 끼쳐왔다.

배가 진리 포구 쪽으로 다가갔다. 땅 냄새를 맡았는지, 수탉이 또 목털을 세우고 울었다. 물가에서 미역을 말리던 백성들이 겁에 질려서 낯선 배를 바라보았다. 철릭 입은 장교가 아전과 역졸을 거느리고 선착장에 내리자 백성들은 말리던 미역을 싸들고 산으로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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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우리 어미 아비 자식이 한데 모여 살게 하소서.
주여, 겁 많은 우리를 주님의 나라로 부르지 마시고 우리들의 마을에 주님의 나라를 세우소서.
주여, 주를 배반한 자들을 모두 부르시고 거두시어 당신의 품에 안으소서.
주여, 우리 죄를 묻지 마옵시고 다만 사하여주소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얼굴을 보자.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얼굴에서 빛이 퍼져 나왔다. 소년은 임금의 얼굴을 마주 보면서 임금의 시선을 피하진 않았다. 늙은 승지가 민망해서 소년을 꾸짖었다.

-여보게, 진사, 전하를 뵐 때는 눈길을 허리 아래로……………….

임금이 승지를 말렸다.

-차차 알 것이다. 나무라지 말라.

진사라고 불린 소년은 열여섯 나이로 급제한 황사영이었다.

붉은 뺨에 엷은 웃음기가 떠올라 있었다. 웃음기는 몸속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기쁨과 자랑인 듯싶었다. 공손하면서도 두려움 없는 얼굴이었다. 한 번도 억눌리거나 비틀린 적이 없는, 타고난 모습 그대로였다. 눈이 맑고, 입술이 단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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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은 그 놀라움의 정체를 스스로 알 수 없었다. 아마도 그 놀라움에는 임금이 되어 옥좌에 앉은 운명에 대한 두려움이 숨어 있을 것이었다.

........내 백성 중에 저런 아이가 있었구나. 아, 평생 내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권세를 다투던 자들과는 어찌 저리 다른가. 어찌 저리 다를 수가 있단 말인가? 저 아이는 자라도 저럴 것인가?

임금은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래, 과거 답안에는 무슨 글을 썼느냐?

소년이 제 눈길을 임금의 시선에 부딪치면서 말했다.

-마음이 세상의 근본이며, 세상의 동력이어서, 시간이 세상을 바꾸지 못하고 세상이 저절로 바뀌지 못하며, 마음의 힘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고 썼습니다.

아하, 임금이 숨을 죽였다.

―어찌 그것을 알았느냐?

-제 스스로 제 마음을 들여다보았습니다.

一스스로? 스스로라니?

→마음을 들여다보고 물으니, 마음이 답하였습니다.

-아하, 너는 몇 살이냐?

-열여섯이옵니다.

-가까이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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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저쪽 물길에 도성은 펼쳐져 있었다.

황사영은 처가 마을 마재에 올 때마다, 산 위에 올라가서 오랫동안 강물을 들여다보았다. 강은 흐르고 또 흘러서 합쳐지고, 합쳐져서 더 큰 물을 이루어 앞으로 나아가 도성의 들을 적시고 먹이면서 바다에 닿았다. 강은 합쳐져서 스스로 새로워지면서 새로운 들과 새로운 시간 속으로 나아갔다. 흐르는 강물 위에서 시간과 공간이 합쳐져서 앞으로 나아갔고, 그 강물이 황사영의 마음속으로 흘렀다. 마음이 강물과 같아서, 마음이 세상으로 흘러 마음으로 세상을 이룰 때 세상은 새롭게 태어날 것이었다. 그것은 푸른 강물처럼 분명했다.

진사로 급제한 뒤에 황사영의 혼담은 빠르게 익어갔다. 황사영은 처가 마을 마재로 가서 장인 정약현을 만났다. 혼인하기 전에 신랑이 신부 집에 오는 것은 풍속이 아니었으나, 정약현은 사람을 보내 어린 사윗감을 마재로 불렀다. 정약현은 풍속이나 범절에 구애되지 않았으며 풍속과 범절을 해치지 않았다. 정약현은 마흔 살이 못 된 연부역강 한 나이에 첫 사위를 맞았다. 젊은 시절부터 그의 심신에는 노성老成한 사려와 처신이 배어 있었다. 정 씨 문중의 노인들은 젊은 정약현을 오히려 어렵게 여겨서, 장자長子의 핏줄은 따로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마재 물가의 세거지에서 정약현은 장성한 남동생 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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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을 물가 마을에서 자랐다. 정약현은 젊은 사윗감을 마재 마을로 불러서 강물이 만나서 새로워지는 흐름을 보여주고 싶었다. 정약현은 그 어린 진사가 경서가 아니라 사물에 접하여 스스로 깨닫는 자득의 인간이기를 원했다.

-소년등고少年登高로구먼.

사윗감을 물가 마을로 불러들인 자리에서 정약현은 그렇게 말했다.

어린 나이에 높은 지위에 오르는 일과 재주가 좋아서 문장을 잘 짓는 일高才能文이 인간의 큰 불행이라는 『소학』의 글귀가 황사영의 머리에 스쳤다. 주희가 『소학』을 엮으면서 정이천의 말을 옮겨놓은 문장이었다.

황사영이 고개를 들었다. 정약현은 어린 진사의 얼굴을 빨려 들듯이 들여다보았다. 혼인이나 급제, 출사나 영달 같은 세속잡 사들과는 아무 관련도 없을 듯한 얼굴이었다. 저 얼굴이 어찌 소년등고를 하였던가. 소년등고로구먼…………… 이라고 말할 때 정약 현의 어조는 그것이 불행이라는 말인지 축복이라는 말인지를 가늠할 수 없도록 무심했다. 황사영이 말했다.

-말씀하시는 뜻을 꾸지람으로 알겠습니다.

정약현이 껄껄 웃었다.

-이천伊川 선생 말씀이 마음이 지위에 가득 차지 못함을 경계한 것이지, 어찌 꾸지람이기야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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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재에서 돌아온 저녁에 황사영은 오른손의 비단을 풀어버렸다. 황사영은 인편에 글월을 올려 싸개를 풀어버린 전말을 정약현에게 고했다. 정약현은 말을 알아듣는 어린 사위의 총명에 웃음 지었다. 정약현은 딸에게도 『대학』과 『중용』과 의서醫書를 가르쳤고, 아들에게도 밭일과 장 담그는 일을 가르쳤다. 신부 명련은 겨울에는 개밥을 데워서 먹였다. 개에게 먹이를 던져주 지 않았고, 밥을 줄 때는 나무그릇이나 깨진 사기그릇에 담지 않고 질그릇에 담아서 주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 뒤란 장독대의 오지항아리 뚜껑을 피마자 기름으로 닦아서 윤을 냈고, 여자의 빨래는 그 안쪽에 널었다. 명련은 어린 남편의 밝음을 사랑했고 소매가 넓은 남편의 옷을 귀하게 여겼다. 사랑은 본래 그러한 것인 양 빨래해서 풀 먹일 때와 마당 쓸고 설거지할 때 저절로 솟아났다. 밤중에 어린 부부는 조바심과 놀라움으로 서로의 몸을 더듬었다.

처가 마을에서 신접을 마치고 서울로 살림을 옮긴 후에도 황사영은 마재의 처가에 자주 내왕했다. 장인 정약현은 집안의 대소사에 어린 사위를 불렀고, 부름이 없을 때도 처가 어른들의 생신날을 알아서 황사영이 먼저 인사를 차렸다. 처가에 갈 때는 송파나루를 지나는 강변길을 따라서 걸어가거나 말을 탔고 돌아올 때는 여주 쪽에서 내려오는 장삿배를 타고 두미협을 지나고 광나루를 지나서 마포나루에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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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에 드러내지 않았는데, 그 또한 정약현의 위엄에서 나온 것이었다.

황사영이 마을 앞 강물에 대해 이야기할 때, 처숙부 중에 맏이인 정약전은 이 어린 조카사위가 사물로부터 직접 배우고 그 감춰진 뜻을 바로 깨달으니 더 이상 가르칠 필요가 없는 소년이라고 생각했다.

둘째 처숙부 정약종은 황사영의 마음이 쓰임새에 닿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겼다. 아, 저 맑음을 어찌하랴. 저것이 세상의 환란에서 부지될 수 있을런가. 거기에 쓰임새를 마련해 준다는 것은 살아 있는 동안의 세상에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닐 듯도 싶었다.

셋째 처숙부 정약용은 경전이나 인륜으로 채울 수 없는 아득하고 넓은 땅이 그 소년의 마음에 날것으로 펼쳐져 있음을 알았지만, 정약용의 눈길은 늘 세상의 굴곡에 닿아 있어서 날것이 날개 치는 그 멀고 드넓은 땅이 깊이 들여다보이지는 않았다.

마재 물가 마을에서, 처숙부들은 황사영에게 낮은 목소리로 천주교 교리를 설명해 주었다. 황사영에게는 갈 수 없는 먼 나라의 새벽 강물 소리 같기도 했고, 또 다급한 육신의 목마름 같기도 했다.

둘째 처숙부 정약종의 가르침이 가장 뜨겁고 분명했다. 이 세계에는 시공을 초월해서 스스로 근원이 되는 존재가 있으며, 그 존재가 만물을 주재한다는 것은 셋에다 넷을 더하면 일곱이 되는 것과 같아서 증명할 필요가 없고 언설로 다투어야 할 일도 없이 인간의 이성으로 스스로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선과 사랑은 세계를 주재하는 자의 원리이며 악과 증오는 그 원리에서 벗어 난 자의 타락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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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확실한 존재에 대한 느낌이 떠오르는 것이 모든 앎과 학문의 시초이다, 라고 정약종은 가르쳤다. 황 사영은 처숙부가 말하는 신이란 강물과 같아서 현재를 모두 거느리고 흘러서 미래의 시간으로 생성되는 지속성으로 여겼다. 그때 황사영은 글이나 말을 통하지 않고 사물을 자신의 마음으로 직접 이해했고, 몸으로 받았다.

임금과 조정이 스스로를 세계의 원리로 내세우며 스스로 자기 근원이며 질서의 원천으로 군림하면서 현실을 넘어서는 주재자의 신성을 부정할 때, 인간 세상은 한갓 남루한 왕조일 뿐이며, 창검으로 무장하고 가두고 때리면서 빼앗고 빼앗기는 해골의 골짜기다, 그리고 이 무지몽매가 지상에 창궐하는 모든 악의 원천이라는 것, 이 또한 삼 더하기 사처럼 자명하다, 아 사람들아, 눈을 뜨고 자명한 것의 자명함을 보라……………….

말하는 정약종은 목소리를 낮추었고 듣는 황사영은 두려움에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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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음은 이 집 저 집으로 번져갔다. 여인네들의 울음소리는 어둠을 찢었고 늙은이의 울음은 메말라서 버석거렸다. 마을은 밤새 울었고, 놀란 개들이 짖어댔다.

슬픔은 비빌 곳이 없어서 지층처럼 사람들의 마음 밑바닥에 쌓였고, 사람들은 다시 바다로 나아갔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는 사내들이 먹던 밥그릇과 숟가락을 간직해서 시렁 위에 얹어놓았다. 무당이 돌아오지 않는 사내들의 넋을 건질 때 물가에 그 밥그릇을 들고나가 숟가락으로 두드리며 넋을 불렀다. 떠난 지 오래지 않은 넋은 더러 돌아왔다. 돌아온 넋은 대나무 끝에 붙어서 끽끽 울었고 떠난 지 오랜 넋은 밥그릇을 때려도 돌아오지 않았다.

섬사람들은 물가에 밀려와 바위를 끌어안고 모래 바닥을 핥는 물결을 바다에서 죽은 사내들의 넋이라고 여겼다. 넋이 아니고서야, 그렇게 먼바다를 건너와서 살던 마을의 가장자리에 매달리고 그 물가를 핥아먹을 수가 없을 것이었다. 고기를 많이 잡 아서 돌아오는 저녁에 사내들은 뱃전을 두들기며 노래했다.

넋이야 넋이야 넋이로구나
밥이야 밥이야 밥이로구나
고기야 고기야 고기로구나
저 물결은 뉘 넋이며 저 고기는 뉘 밥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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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는 혼자서 아비의 무덤을 팠다. 이두는 물가에 묻혔다.

육손이는 뱃심으로 일했다. 삼 등을 한번 밟으면 삽날이 두 뼘 씩 땅에 박혔고 허리를 돌려서 흙을 던졌다. 육손이는 오감이 날카로웠다. 강 건너 물가에 사람 지나다니는 기척을 알아보았고 먼 데서 암탉이 알 낳고 구구거리는 소리가 육손이 귀에는 들렸 다. 사십이 넘어도 육손이는 오감이 무디어지지 않았다.

사위 내외가 서울로 살림을 옮길 때 정약현은 나루터에 나와 전송했다. 배에 오르기 전에 육손이가 땅에 엎드려 정약현에게 절하면서 울었다. 정약현이 사위에게 말했다.

-육손이는 제 부모가 낳은 자식일세. 그걸 잊지 말게.

서울로 가는 강선에서 황사영은 그 말의 단순성에 놀랐다. 육 손이는 노꾼도 아니면서 노를 저었다.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국내로 잠입한 것이 이미 오 년 전이라는 사실에 비변사는 경악했다. 오 년이 아니라 육 년 전이라는 말도 있었다. 놀라움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전라도 농사짓는 마을에서 『소학』을 배우고 유건을 쓴 자들이 삿된 망령에 들려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웠다. 모조리 붙잡아 곤장을 쳐 죽인 것이 바로 주문모가 국경을 넘기 몇 달 전이었다. 서울로 끌고 와서 비틀고 지져서 죽이면 선왕들이 이룩한 도성에 피냄새와 누린내가 배어서 상서롭지 못하고, 산 것을 살리려는 군왕의 뜻에 맞지 않을 것이므로, 되도록이면 향청에서 처단하고 그 결과만을 문서로 보고하라고 조정은 지방 수령들에게 시달했었다. 너덜거리는 시체를 향리에 조리돌려서 국금國禁을 보여도 패려悖戾한 무리들은 점점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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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언에, 천주의 아들 야소가 신유辛酉 생으로 닭띠인데 갑년이 서른 번 돌아서 다시 닭띠가 되는 삼 년 후에 큰 배들이 바다를 건너와서 강화, 인천, 부평, 소사, 남양에 정박하고 도성을 향해 대포를 쏘아대니 이성계의 운수는 임술년에 끝난다고 하였다.

임술년에 먼 섬에서 진인眞ㅅ이 태어나서 강장한 군사를 거느리고 육지로 건너와 빗자루로 쓸어내고 새 세상을 세우는데, 그때 천하 만민의 원통함이 풀리리라. 그때, 하늘에서 내려온 신유년의 닭이 울어서 계명산천鷄鳴山川이 밝아온다. 새들이 펼쳐지 고 새 목숨들이 움터서 마을을 이루리라. 사람이 움트고 마소가 움트고 풀이 움터서 세상이 움터오는구나. 말세의 환란에는 마 음만이 피난처니 신유 닭이 울 때까지 마음 밭을 잘 가꾸라.

밭 전 자 가운데 들어 있는 십자가가 새 세상의 깃발로 펄럭이고 밭 전자 속에 숨어 있던 하느님이 세상으로 건너와서 새 밭을 이루니 사람들의 밭이 하느님의 마당이 되니라.

밭이여 밭이여 밭이로구나. 논이여 논이여 논이로구나.

하느님이 소가 되어 착한 사람들의 밭에 강림하시니, 어미 소가 새끼 소를 부르는 소리가 하느님의 소리요, 마음 밭에 소 울 음소리가 퍼지니 아름답다. 우성牛性은 하늘의 도이며 땅의 이로움이라, 우성이 들에 노닐어서, 소 울음소리 퍼지는 들에 목 숨이 움트는구나. 밭이여 밭이여 밭이로구나.

그때 하느님의 마당에 사람의 자식이 태어나 첫돌이 지나서 걸음마를 하는데

도리 도리 도리에 세상을 돌아보고
섬마 섬마 섬마로 혼자 일어서서
따로 따로 따로에 첫걸음을 떼니
사람의 자식들이 아장걸음을 걸어서 바른 길로 들어오는구나

따로 따로 따로에 섬마 섬마 섬마로구나
밭이여 밭이여 밭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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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신기한 놀이인 줄 알았고 그 때문에 제사를 폐하지도 않았다.

......아니다. 내가 저자에게 영세를 줄 때 저자는 눈물을 흘리며 고요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진실로 심열성복心悅誠服訃 는 자의 단정함과 경건함이 있었다.

묶여서 발버둥 치던 자들은 심문 중에 물고가 나거나 매를 다 맞고 나서 정형正刑되었다.

정약용이 그 지옥을 똑바로 쳐다보며 통과하고 있었다. 형틀에 묶여서, 정약용은 진술했다.

-주문모에게 세례 받은 자중에 황사영이 있다. 사영은 나의 조카사위다. 그를 잡으면, 토시討邪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황사영과 그 일당들은 깊이 숨어서 잡기 어렵고 죽어도 불 변할 자들이다. 그들 주변에서 물이 덜 든 노복이나 학동을 붙잡아 형문 하면 그 상전의 행방을 혹 알 수도 있을 것이다.

봄에 죽은 정약종과 가을에 살아남은 정약용은 똑같이 단호했다. 둘은 정약전에게 천주 교리를 배워서 이 세상 너머를 엿보았다. 그때 세상의 근원은 세상에 있지 않았다. 그리고 둘은 제 갈 길을 갔다. 정약종은 그 너머로 갔고 정약용은 세상으로 돌아갔다. 그 둘은 돌이킬 수 없는 길을 돌이키지 않았다. 형틀에 묶여서, 두 동생과 조카사위 황사영의 맑은 얼굴을 생각하면서 정약전은 기진맥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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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물소리가 들렸다. 처가 마을의 강물은 농경지와 높이를 나란히 해서 흘러갔고, 들에 소 울음소리가 들렸다. 마재의 소들은 두 돌이 지나면 일을 배웠는데, 종자가 순해서 밭에 나온 지 보름이면 때리지 않아도 쟁기를 끌었다. 강물에 노을이 내리는 저녁 무렵에 들에 나온 소들이 집을 향해서 울었고, 외양간에 묶인 송아지들이 들을 향해 울었다. 소 울음소리는 낮은 산들을 쓰다듬듯이 넘어가서 마을에서 마을로 퍼져갔다. 처갓집은 흐 르는 강물 옆에서 소가 우는 마을이었고, 거기서 새로운 시간이 움트는 마을이었다.

형제들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 정약현은 급제해서 출사한 동생들의 고담高談에 끼어들지 않았고, 가끔씩 고개를 끄덕이며 듣기만 했다. 정약현은 집안의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말할 때는 가끔씩 이야기에 끼어들어서

-억지로 키우려고 공들이지 말고 스스로 되도록 공들여야 한다. 키워서 길러내는 것은 스스로 됨만 못하다.

는 말을 했다. 황사영은 장인의 가슴속에 무슨 생각이 숨어 있는지는 알지 못했으나 장인은 늘 어렵고도 따스했다. 어른 생신날 부모를 떠나서 모이는 어린 사촌들은 일 년에 한 번 만나 도어제 헤어진 동무들처럼 스스럼없이 어울려 놀았다. 나이 든 아이는 항렬을 존중했고 항렬이 높은 아이는 연차를 존중해서 스스럼없는 중에도 저절로 순서가 있었다.

166

세상에는 근본이 있다. 그것은 선善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임금보다 더 높은 심판자가 있다. 그래서 다스림은 선해야 하고, 선하지 않은 다스림은 지금 당장 멸해야 한다. 너의 이웃을 사랑하라. 죄를 뉘우쳐라. 참된 뉘우침으로 삶을 깨끗이 하라. 높은 심판자 앞에서 인간은 누구나 귀하고 누구나 천하지 않다. 그러므로 사람을 때리지 말고, 그 생명에 해악을 가하지 마라. 때가 되면, 수많은 배들이 바다를 건너와 심판자의 뜻을 세우리라.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지만, 마노리에게는 그 뜻이 분명하고 손에 잡힐 듯이 확실했다. 마노리는 그 분명함에 놀랐다. 황사영의 말을 듣기 전부터 마노리는 그 말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알고 있었지만, 그 앎이 드러나지 않고 몸속 깊은 어둠 속에 묻혀 있었던 것 같았다. 그것은 목마른 자가 저절로 물을 찾고,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이 사람의 마음속에서 저절로 솟아나서 사람이 사람을 찾아가는 것처럼 분명했다. 마노리는 그것을, 자신도 모르는 중에 알고 있었다는 것이 놀랍고 신기했다.

-서울에 오면 꼭 들러라. 혹시 내가 숨게 되면 인편을 보내겠다. 마노리야, 마부는 귀한 사람이다. 잊지 마라.

마노리가 떠날 때 황사영은 그렇게 말했다. 황사영은 떠나는 마노리에게 길양식 한 말과 엽전 다섯 냥을 주었다. 힘을 되찾 은 말은 콧구멍이 차가웠고 갈기가 빛났다.

174

범벅이 되어 취기 속에서 들끓었다.

......여기서 살자. 여기서 사는 수밖에 없다. 고등어와 더불 어, 오칠구와 더불어 창대와 장팔수와 더불어, 여기서 살자. 섬에서 살자.

울음 같은 말들이, 말에 미달한 채로 정약전의 마음속에서 치밀어 올랐다.

장팔수를 데려다가 천주교를 가르치려느냐던 오칠구의 조롱이, 참수형으로 죽은 동생 정약종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사실, 정약종에게 천주교를 가르쳐준 것은 정약전 자신이었다. 한 문으로 번역된 서양의 서책들이 북경 사행 편에 국내로 반입되었는데, 정약전은 그 책에서 읽은 교리에 자신의 생각을 보태서 동생 정약종 앞에 펼쳐놓았고, 정약종이 스스로 그 안으로 몸과 영혼을 던진 것이었다.

하늘의 선한 뜻은 권력의 작용이 아니라 인간의 실천을 통해서 일상의 땅 위에 실현할 수 있으며, 그 실천의 방법은 사랑이다. 그러므로 네 이웃을 사랑하고 죄를 뉘우치고 뉘우침의 진정 위에 새날을 맞이하라. 크고 두려운 날들이 다가온다.

목마른 자가 저절로 물을 찾듯이 정약종에게 새날은 저절로 스며들었다. 정약전이 멈칫거리면서 배교하고 세속으로 돌아갈 때도 정약종은 애초에 정약전에게서 인도받은 그 길을 끝까지 걸어서 서소문 사형장으로 갔다.

200


북경에서 반입된 『기하원본幾何原本이라는 서양 수리서數理書를 정약전은 약종에게 설 명해준 적이 있었다.

두 개의 점을 잇는 직선은 유일무이하다.

직선 밖의 한 점을 지나서 이 직선에 평행한 직선은 유일무 이하다.

정약종은 이 단순하고 명료한 언어에 기뻐했다. 언어가 아니라 존재하는 것들의 감추어진 모습이었다. 모두 드러나 있되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던 것이었다. 눈에 띄었어도 그 안쪽을 들여다보지 못하던 것이었다. 그것은 인간의 언어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언어에 의한 증명이 필요 없이 사람의 생각으로 본래 스스로 그러함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단순 명료한 공리 몇 개가 얽혀서 원과 삼각형과 입체들의 비밀의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정약전이 『기하원본』을 설명해 줄 때 정약종의 얼굴에는 고요한 웃음이 번져 있었다. 배교하고 돌아서던 무렵에, 정약전은 『기하원본』에 기뻐하던 정약종의 웃음에는 그 단순 명료한 발견 들에서 실체를 본 자의 확신이 배어 있던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확실치는 않지만, 아마도 그러할 것이라고 정약종이 죽은 후에 도 정약전은 늘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201

관찰사가 아니라 역졸감이다. 파직하고, 먼 섬으로 귀양 보내라.

함경도 장진에서 가짜 황사영이 주리를 마흔 번 틀리고 죽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전국에 퍼졌다.

황사영은 아들의 이름을 경한景漢으로 지었다. 경한을 안으면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입에서 젖이 삭는 냄새가 났다. 경한의 어미 명련의 몸 냄새와 경한의 몸 냄새는 똑같았다. 명련의 냄새가 더 깊었고 경한의 냄새가 더 달았지만, 대체로 비슷한 냄새였다. 황사영은 경한을 천주로부터 인간의 부모에게 맡겨진 아이로 여겼다.

경한의 첫돌은 잔치 없이 지나갔다. 기찰이 삼엄해서 황사영은 교인을 불러 모을 수 없었다. 돌날, 황사영 부부는 아기를 목욕시켜서 깨끗이 빤 옷을 입혔다. 아기는 목욕이 곤해서 잠들었 다. 부부는 잠든 아기 앞에 꿇어앉아서 기도를 올렸다.

첫돌이 지난 다음 날, 서울에 올라와 있던 육손이가 황사영의 집에 들렀다. 육손이는 벌꿀 한 되를 가져왔다. 육손이 함경도 장진에서 가짜 황사영이 마흔 번 주리 틀려서 죽었고 대비가 금부도사를 보내 장진 부사를 죽였다는 소식을 전했다. 황사영은 주리질 마흔 번으로 으스러지는 가짜 황사영의 몸을 생각했다. 그가 주리 틀리면서 소 울음소리를 냈다는데, 그 울음소리가 황사영의 귀에 들렸다. 가짜 황사영은 죽어서 소가 되어서 인간의 들로 돌아와 밭을 갈면서 소울음을 울겠구나.....……

황사영이 말했다.

-내가 죽은 것과 다름없구먼.

육손이가 머리를 숙였다.

-어찌 그런 말씀을....... 이제 몸을 피하심이 옳을 듯하옵니다.

-그럴 것이다. 아직은 잡힐 때가 아니다.

황사영은 서울을 떠나야 할 때가 왔음을 알았다.

254

문풍세는 옥섬에서 데리고 와서 풀어준 사람들의 뒷소식을 듣지 못했다.

문풍세는 돛배의 노꾼들이 옥섬 죄인의 일을 말하지 못하도록 입을 막았다. 노꾼은 여덟 명이었는데, 다섯 명은 젊어서 도망쳐 나온 노비들이었고 나머지는 본래 양민이었으나 향리에서 내쫓긴 자들이었다. 문풍세가 입을 막기도 했지만 노꾼들은 천출의 눈치로 말해서는 안 될 일을 스스로 알았다. 노꾼들에게 추쇄推刷 기찰이 다가오는 낌새가 보이면 문풍세가 돈으로 틀어막거나 관아에 선을 대서 사망으로 처리했다.

문풍세는 더 늙어서 배를 탈 수 없게 되면 모아놓은 돈으로 조선소를 차려서 배를 만들 생각이었다. 지금 쓰는 배보다 폭을 줄이고 길이를 늘이고 이물 쪽에 꼬리 돛 한 개를 더 세워서, 적재량이 좀 줄더라도 바람과 물결에 기민하고 유연하게 대응하는 장거리 항해용 돛배를 만드는 도면이 문풍세의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배를 개량할 수만 있다면 어물 거간이나 육지의 부자들을 상대로 팔 수 있었다. 조선소가 어느 정도 굴러가게 되면 청지기를 두어서 관리를 맡기고 자신은 양지바른 마당에 닭장을 크게 짓고 배에서 기르는 수탉 종자를 훈련시켜서 배마다 한 마리씩 나누어주자는 것이 문풍세의 노후 계획이었다. 문풍세의 수탉은 무안으로 돌아오면 암탉 열 마리와 교미했다.

흑산에서 문풍세는 오칠구에게 정약전의 안부를 묻지 않았다.

275


수평선 너머 육지의 세상을 알지 못했는데 정약전은 거기에서 온 사내였다.

물결 높은 날에 정약전은 흑산에서 도망쳐 나간 장팔수를 생각했다. 정약전의 생각은 바다를 건너가지 못했다. 장팔수의 가묘마저 뭉개졌으므로 그가 흑산에서 태어나서 흑산에서 늙도록 살았던 생애는 바닷바람에 쓸려갔다. 장팔수는 바다를 건 너서 어디로 간 것인가. 바다 너머의 흑산이 아닌 곳이 있었을까. 장팔수는 황사영에게로 가서 천주교인이 되었을까. 형틀에 서 맞고 또 서소문에서 죽어서, 살기를 끝내 버리고 끊어서, 죽고 또 죽어서 흑산이 아닌 곳으로 갔을까. 아니면 여전히 흑산 인, 바다 건너편의 어느 포구로 갔을까. 장팔수의 행방에 마음 이 쏠렸을 때 정약전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고, 바다는 물결이 높았다.

문풍세는 옥섬에 갇힌 자들을 빼돌려서 대체 무엇을 얻자는 것이었을까. 수군진 별장 오칠구에게 돈을 쥐여 주면서 동시에 오칠구를 겁박하는 문풍세는 바다와 물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내였는데, 그가 옥섬에 갇힌 죄인들을 몰래 실어내는 뜻 은 그만이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것은 먼바다를 건너고 먼 길을 오가는 자의 속내였다. 문풍세는 흑산 뿐 아니라 대마도를 돛배로 오가며 교역을 하고 있으며 어느 해 태풍에는 유구琉球까지 표류했다가 거기서 배를 수리해서 반년 만에 돌아왔다는 소 문도 있었다.

298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문풍세가 다시 돛배를 몰고 흑산에 와서 섬을 빠져나가기를 제안하는 일이 없기를 정약전은 바랐다. 장팔수가 흑산을 빠져나가자 정약전의 눈에는 흑산이 보이는 듯싶었다. 살 수 없는 자리에서 정약전은 눌러앉아 살아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흑산에 들어온 뒤로 정약전의 주량은 크게 늘었다. 조껍데기 술이 몸에 스밀 때 창자를 따라 전류가 흐르듯이 찡했고 술기운이 뒷골까지 치밀었지만 정약전은 취하지 않았다.

정약전은 창대와 마셨고 조 풍헌과 마셨고 수군진 수졸과 마셨고 어부들과 마셨다. 순매는 가끔씩 상을 차려 냈지만 자리에 앉지 않았고 말을 섞지 않았다.

정약전이 순매를 배첩으로 삼아서 조 풍헌의 행랑채를 늘려 살림을 차린 일을 흑산 사람들은 순리로 받아들였다. 흑산사람 들은 그 일을 입에 담지는 않았고 정약전의 유배지 신접살림은 흑산의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죽음은 바다 위에 널려 있어서 삶이 무상한 만큼 죽음은 유상 했고, 그 반대로 말해도 틀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자들끼리 살아 있는 동안 붙어서 살고 번식하는 일은, 그것이 다시 무상하고 또 가혹한 죽음을 불러들이는 결과가 될지라도, 늘 그러한 일이어서 피할 수 없었다.

299

순매가 묻자 조 풍헌은, 그래 알았다, 라고 대답했다.

조 풍헌은 새로 지은 행랑채의 아궁이와 굴뚝을 살폈다. 조 풍헌은 순매에게 물었다.

-불이 안 내더냐?

→잘 들었습니다.

-연기도?

-네.

-더울 때도 가끔 때라. 고래가 길들어야 윗목까지 덥다.

그렇게 해서, 조 풍헌은 정약전의 신접살림을 오래된 일상으로 자리 잡아주었다. 정약전은 조 풍헌의 늙음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보름달 빛이 바다에 가득 차고 고요한 물 위에 달무리가 뜨 는 밤에, 원양에서 뒤집히는 파도가 섬으로 밀려오는 밤에, 안 개에 덮여서 물과 하늘이 보이지 않는 밤에, 순매는 정약전의 몸을 깊이 받았다.

304

-물가라도, 육지로 가시니 좋으시겠소.

-정 선비도 대처로 돌아가실 날이 있을 것이오. 그동안 내 가 목민하랴 방수防守하랴, 선비를 잘 모시지 못했소. 떠나게 되 니, 그게 걸리는구려.

오칠구가 술상을 내려놓고 물러가는 순매를 힐긋 쳐다보았다.

-신접 차리셨다는데 인사도 못 드렸소이다.

정약전은 대꾸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수령이 또 바뀌니, 섬 백성들이 힘들어하겠소.

오칠구는, 말뜻을 알아듣기 어려워서 움찔했다. 묘한 말이로구나. 말이 꼬여 있구나...... 말에 날이 서 있어.......

오칠구가 대답했다.

-그야, 늘 그렇지요. 별장도 섬에서 늙어 죽을 수는 없지 않 소. 별장은 귀양 온 사람이 아니오.

정약전은 무참했다. 오칠구가 정약전의 잔에 술을 따르면 서 말했다.

-육지에서 천주교 때문에 온통 난리가 났다고 들었소. 그게 종자가 질겨서 대비마마의 근심이 깊은 모양이오.

오칠구는 말하면서 정약전의 안색을 살폈다. 정약전은 오칠구의 시선을 피해서 수평선 쪽을 바라보았다. 바다로 잠기는 노을이 마지막 고비를 넘기고 있었다. 정약전의 마음속에서, 두물머리 마재의 강이 흘렀다. 황사영은 잡혔을까.

334

정약전은 그 무서움의 안쪽을 스스로 들여다보았는데, 돌아가고 싶은 그리움의 흔적이 거기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듯도 했다. 돌아갈 곳이 없이, 모두 무서운 세상인데, 그래도 돌아가고 싶은 마음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은 고향 마재 마을 개울의 게와 흑산 개울의 민물 게가 모양새가 같기 때문일 것이라고 정약전은 스스로에게 설명해 주었다.

흑산에 대한 무서움 속에는 흑산 바다 물고기의 생김새와 사는 꼴을 글로 써야 한다는 소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물고기의 사는 꼴을 글로 써서 흑산의 두려움을 떨쳐낼 수도 없고 위로할 수도 없을 테지만, 물고기를 글로 써서 두려움이나 기다림이나 그리움이 전혀 생겨나지 않은, 본래 스스로 그러한 세상을 티끌 만치나마 인간 쪽으로 끌어당겨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물고기의 사는 꼴을 적은 글은, 사장詞章이 아니라 다만 물고기이기를, 그리고 물고기들의 언어에 조금씩 다가가는 인간의 언어이 기를 정약전은 바랐다.

정약전은 창대를 불러 앉히고 그 두려움을 말하려는데, 말은 잘 이어지지 않았다.

-나는 흑산을 자산玆山으로 바꾸어 살려한다.

정약전은 종이에 검을 자玆를 써서 창대에게 보여주었다. 창대가 고개를 들었다.

-같은 뜻일 터인데……………

337

-같지 않다. 자는 흐리고 어둡고 깊다는 뜻이다. 혹은 너무 캄캄하다. 자는 또, 지금, 이제, 여기라는 뜻도 있으니 좋지 않으냐. 너와 내가 지금 여기에서 사는 섬이 자산이다.

-바꾸시는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

-혹은 무섭다. 흑산은 여기가 유배지라는 걸 끊임없이 깨우 친다. 자 속에는 희미하지만 빛이 있다. 여기를 향해서 다가오는 빛이다. 그렇게 느껴진다. 이 바다의 물고기는 모두 자산의 물고기다. 나는 그렇게 여긴다.

-그쪽이 편안하시겠습니까?

창대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정약전은 자산 바다의 물고기들의 종류와 생김새와 사는 꼴을 글로 적어나갔다. 글이 물고기를 몰아가지 못했고, 물고기가 글을 끌고 나갔다. 끌려가던 글 이 물고기와 나란히 갔다.

바다가 잔잔한 날 정약전은 검은 여 너머를 떼 지어 건너가는 물고기들의 파문을 살폈다. 물고기들은 잔물결을 일으키며 해 지는 수평선 너머로 몰려갔다. 새들이 물고기 떼를 내리 쪼면서 멀리 나갔다가 돌아왔다. 물고기들은 종족끼리 움직였고 새들도 그러했다. 먼바다를 다녀온 어부들이 물고기들의 심술이며 장난질을 정약전에게 말해주었다. 자산은 흑산과는 다른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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