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모르게 핑돈 눈물에 한 쪽 뺨에 가느다란 소금 줄기가 생겼습니다. 이 책을 읽다가요. 작가의 감동적인 호소에 마음이 동하였기 때문입니다.
저자의 말에 키득거리거나 입가에 미소를 새기기도 하고, 때로는 눈시울도 적시고 말았습니다. 재미와 감동은 이런 책을 두고 하는 말 아니겠습니까.
책장을 덮으며 몸과 마음에 이롭다는 생각에 즐거움 가득합니다. 한여름을 견딜 보신을 미리 한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중과부적眾寡不敵
조카 학비 몇 푼 거드니 아이들 등록금이 빠듯하다.
마을금고 이자는 이쪽 카드로 빌려 내고 시골 노인들 팔순 오고 며칠 지나 관절염으로 장모 입원하신다. 다시 자동차세와 통신요금 내고 마치고 막 들어서자 처남 부도나서 집 넘어갔다고 아내 운다.
이쪽은 저쪽 카드로 돌려 막는다. 막자
은행카드 대출할부금 막고 있는데
오래 고생하던 고모 부고 온다. 문상
'젓가락은 두 자루, 펜은 한 자루...... 중과부적!*>
김사인
이라 적고 마치려는데, 다시 주차공간 미확보 과태료 날아오고 치과 다녀온 딸아이가 이를 세 개나 빼야 한다며 울상이다. 철렁하여 또 얼마냐 물으니 제가 어떻게 아느냐고 성을 낸다.
*마루야마 노보루 <루쉰>에서 빌려옴
- 《어린 당나귀 곁에서>(창비, 2015)
"대천大川 바다 한가운데 일천 석千石 실은 배에 노櫓도 잃고 닻도 끊고 용총도 걷고 키도 빠지고 바람 불어 물결치고 안개 뒤섞여 잦아진 날에 갈 길은 천리만리 남고 사면이 검어 어둑저뭇 천지적막 가치노을 떴는데 수적 水賊 만난 도사공都沙工의 안"이 바로 이 시와 같을 겁니다.
공감이 가시나요? 각자의 형편보다 더할 수도, 덜할 수도 있겠지만, 무슨 느낌인지는 다들 아실 겁니다. 나쁜 일은 깡패처럼 늘 몰려다니기도 하거니와, 실은 세상과의 포커게임은 늘 불리한 법이랍니다. 내가 아무리 이 카드로 저 카드 돌려막아도 세상은 나를 괴롭힐 카드가 언제나 더 많습니다.
25 생업
장모님 입원비도 내야 하고, 각종 세금과 요금을 내는 중에 고생만 하던 고모님께서 돌아가셨다니 부의금 들고 문상 안 갈 수 없고, 그런데 돌아오자마자 처남 부도났다고 아내는 울고, 주차공간 만들 돈 있으면 이런 고생하지도 않지 눈치도 없는 과태료는 왜 이럴 때 날아오고, 치과 치료비 걱정에 혼이 달아나려는데 딸아이조차 내게 성만 내고 앉았으니, 점입가경漸入佳境, 설상 가상雪上加霜이 이를 두고 나온 말이겠지요.
사오십 대들의 삶이 이렇습니다. 스트라이커 같은 인생은커니와 평생 골키퍼처럼 막기만 하는데, 적들의 파상공세波狀攻勢는 잦아드는 법이 없고 나를 도와줄 수비수는 온데 간데 보이질 않습니다. 그뿐입니까. 고된 일이야 참을 수 있지만, 그 고된 일이나마 언제까지 주어질지 알 수가 없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40대 직장인 열 명 중 일곱은 고용상태에 불안감을 느끼고, 평균 40.9세가 되면 은퇴를 생각할 때라고 여긴다고 합니다.
인생 이모작이니 삼모작이니 하는 것도 한 번의 기회 다음에 또 두 번째 기회가 있고, 두 번 했다가 안 되면 세 번째 기회가 있다는 의미이면 오죽이나 좋습니까. 하지만 아직은 어딘가 씁쓸하게 들리는 것이 현실입니다. 내가 이러려고 이 일을 했던가, 이렇게 되려고 그렇게 애쓰며 살았던가 하고 말이지요.
생업 27
이것은 일찍이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에서 감동적으로 그려진 바 있습니다.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걸 정부는 그저 속수무책으로 바라만 보고 있는 그때, 의사들은 목숨을 걸고 페스트와 맞서 싸웁니다. 의사 리외는 랑베르 기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모든 일은 영웅주의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성실성의 문제입니다. 아마 비웃음을 자아낼 만한 생각일지도 모르나,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리외에게 랑베르 기자는 다시 묻습니다. 그 성실성이란게 대체 뭐냐고, 의사 리외는 다시 답합니다.
"내 경우로 말하면, 그것은 자기가 맡은 직분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어떠신가요? 정말 현실 같은 소설이고, 소설 같은 현실 아닙니까? 소방관이나 의사만이 아니라 직업을 가진 누구나 이렇게 자기 직업과 직분의 본질을 지키며 사는 세상이 온다면, 우리는 비로소 살 만한 세상, 소설에서나 꿈꾸었던 세상에서 살게 될 것 입니다. 모두가 영웅이어서 영웅이 필요 없는 세상일 테니 말이죠. 하지만 아직은 먼 것 같습니다. 더도 덜도 말고 그저 업의 본질을 지킨다는 일이 정말 이렇게 힘든 일일까요?
생업 29
우리 직업의 본질이란, 이처럼 사람들이 모두 같이 살려고, 나도 살고, 너도 살리려는 데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느덧 그런 본질들은 다 사라지고 당장에 먹고살아야 하는 지겨운 밥벌이가 되어버린 것, 그렇게 살다 보니까 누구는 취업을 못해서 힘들고, 누구는 그 직업을 유지하느라 힘들어 하고, 누구는 유지하지 못해서 힘들어하게 된 것이 아닐까요?
내가 하는 어떤 일로 누군가의 이마를 덮어줄 수 있다면, 그 일이 그 순간 그렇게 지긋지긋하게 느껴지진 않을 겁니다. 우리도 서로의 이마에 손을 내밀고 그 손에 이마를 맡길 수 있는 존재들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게 우리 모든 업의 본질이 아닐까요.
33 생업
언젠가 스칸디나비아 항공을 이용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조그만 소금 봉지 같은 게 나왔는데 아무리 봐도 소금Salt이란 말이 보이질 않습니다.
거기에는 단지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The Color of Snow, The Taste of Tears!' 소금이 '눈의 색깔, 눈물의 맛'이라니요. 감동이었습니다.
항공사가 달리 보였습니다. 문학과 문화를 생활화하자고 백날 말만 하면 뭐합니까. 명품은 이런 디테일에 숨어 있더군요.
동서양을 막론하고 소금은 눈물의 맛입니다. 그냥 눈물의 성분이 짜기 때문에 그런게 아니고 소금은 눈물 없인 얻을 수 없는 귀한 존재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직장인을 샐러리맨이라고 부를 때, 그때 '샐sal'의 라틴어 어원이 바로 소금입니다. 초기 로마시대에는 소금이 화폐 역할을 했다고 하죠. 그래서 관리나 병사의 급료도 소금으로 지급했는데 그 급료를 '살라리움'salárium이라고 불렀고, 소금이 화폐로 대체된 뒤에도 지금껏 그 명칭은 살아남아 봉급을 샐러리salary라 부르고 있습니다. 병사를 뜻하는 영어 단어 soldier도 '소금을 주다'라는 뜻의 단어 saldare에서 비롯된 것이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오죽하면 '평안감사 보다 소금'이라는 속담이 있었겠습니까.
윤성학 시인의 <소금 시>에 따르면, 내 몸이 바로 그런 소금 입니다. 먹고살려고 내 몸속의 피와 땀과 눈물을 내줍니다. 귀한 소금을 내주는 겁니다. 그리고 그 대가로 귀한 소금을 받아 그걸로 몸을 만듭니다. 이 처절한 순환. 정말 울고 싶을 지경입니다. 하지만 울면 다 녹아버리는 게 소금입니다. 그러니 울지 말고 버티고 견뎌야 하는 겁니다. 마치 소금을 봉급으로 받던 로마 병사 처럼, 우리는 가족과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소금 방패를 들고 싸워 이겨내야 할 소금 병정인 셈입니다.
노동41
어쩌면 그것은 노동의 본질 또는 인간의 원초적인 정체성과 관련된 것일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힘든 퍼즐을 애써서 맞추고, 복잡하기 짝이 없는 조립 완구를 완성해놓고 마냥 행복해합니다. 그냥 충분히 먹을 만한데도 거기에 갖은 양념을 더하며 정성을 다한 끝에 비로소 마음에 드는 음식을 내놓고 흐뭇해합니다. 원인도 잘 모를 고장 난 차나, 이유도 알 수 없이 병든 환자를 고쳐서 움직이게 했을 때 뿌듯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그래서 리처드 세넷은 저작권 독점 없이 누구나 학습하고 수정 및 배포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에 참여하는 리눅스 프로그래머에게서도 장인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다시 말해, 별다른 보상 없이도 일 자체에서 깊은 보람을 느끼고 완벽주의자처럼 세심하고 까다롭게 일하는 인간, 즉 우리 안에 잊힌 장인의 원초적 정체성을 오늘날에도 복원해야 한다고 그는 요청하고 있는 것 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절름발이와 추남으로 태어난 대장간의 신, 헤파이스토스를 문명의 개척자이자 장인으로서 높이 찬양합니다. “굽은 발로 절룩거릴지라도 그 자신이 아니라 자기 일을 자랑스러워하는 헤파이스토스, 우리 자신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존엄한 인간의 모습이 바로 그일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50 밥벌이
직업이 꿈이런가
인간은 일을 통해 생계를 해결하고 존엄한 존재가 됩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1989)에 나오는 키팅 선생의 말, “의술, 법률, 사업, 기술, 이 모두가 고귀한 일이고 생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일이지만, 시, 아름다움, 낭만, 사랑, 이런 것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목적"이라는 대사를 즐겨 읽어주는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이런 말이 젊어서는 귀에 잘 안 들어오거든요. 당장 눈앞의 목표는 의사가 되고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고 취업이나 창업을 하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지금 당장엔 그렇게 중요하게 보이는 의술, 법률, 사업, 기술 따위야말로 생의 목적은 아니랍니다. 되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의사든 변호사든, 취업이든 창업이든, 빠르면 이십 대, 늦어도 삼십 대에는 이루어지든가, 아니면 영영 내 인생과는 인연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인생의 목표가 젊은 날 그렇게 일찍 이루어지거나 혹은 그렇게 일찍부터 목표 달성을 포기해야 한다면, 남은 긴 여생은 도대체 무얼하며 살아야 하는 겁니까.
우리의 꿈은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이어야 할지 모릅니다. 우리는 누구나 '무엇인가'가 되고 싶어 합니다. 그 무엇은 명사겠지요. 의사, 교사, 공무원, 회사원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 가령 명사 '교사'는 정말 이삼십 대 안에 되든지 안 되든지가 결정이 납니다. 하지만 가령 형용사 '존경스러운' 교사는 정년까지도, 아니 평생토록 이루기 힘듭니다.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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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목표는 그런게 되어야 하지 않을는지요. 어쩌면 '존경스러운' 사람이 되는게 내 인생의 꿈이고, '교사'나 '의사' 따위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수단들일지도 모릅니다. '의사'가 되었어도 환자나 주변으로 부터 평생 존경을 얻지 못했다면 그 인생을 어찌 성공한 인생이라 하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라면 시 같은, 아름다운, 낭만적인, 사랑이 넘치는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우리 인생의 목표여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이런 강의를 하다보면 가끔은 부작용도 생기고는 합니다. 몇 해 전의 일입니다. 그때만 해도 학기말이면 훌륭한 리포트를 낸 친구들 대여섯 명을 골라다가 한 사람씩 연구실로 불러서 환담을 나누는 시간을 갖곤 했습니다. 200명 가까운 수강생 가운데 그 학기에 가장 뛰어난 글을 쓴 친구는 공대 건축학과 4학 년 남학생이었습니다. 가까이서 보니 심지어 잘 생기기까지 합니다. 원두커피를 갈아 정성껏 내려주며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 보인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가 이러는 거예요. 그렇잖아도 자기 꿈이 문학이었노라고.
그럴 때면 가슴이 섬뜩해집니다. 남의 집 귀한 자식이 졸업을 앞두고 교양 강의 하나 잘못 듣는 바람에 멀쩡한 건축사의 길을 버릴 생각을 하다니요. 그래서 그 친구의 손을 덥석 잡고 이렇게 답해줬습니다. "꿈은, 간직하는 거야!"라고. 그리고 덧붙였습니다. "자네 내 말을 오해했군. 내가 의술, 법률, 사업, 기술 그만두고 시, 아름다움, 낭만, 사랑 찾으라고 하지 않았네. 그것들도 다 고귀하고 필요한 일이라니깐! 다만 무슨 일을 하든 시를 잊지 말라는 것뿐일세.” 제 속을 알아차렸다는 듯이 그 친구는 하얀 미소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끝내 제 말을 듣지는 않았고, 그리하여 지금 그는 우리나라에서 아주 훌륭한 그림동화 작가가 되어 있습니다. 시인이 된 것이죠. 아마도 그는 행복할 것입니다. 그를 바라보는 저도 무척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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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딸에게, 딸이 엄마에게
'톡투유'라는 TV 프로그램을 녹화할 때였습니다. 그날 저와 함께 한 패널은 그룹 소녀시대 유리와 가수 폴킴이었고, 게스트는 가수 양희은이었습니다. 늘 하던 대로 방청객과 함께 이야기와 시를 나누고 나서, 녹화 마무리 단계에 이르러 양희은과 폴킴 만 무대에 남고, 저와 유리는 객석으로 내려와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원로급의 대가수 옆에, 당시에는 신인이나 다름 없던 폴킴이 마치 모자母子처럼 나란히 앉아 듀엣곡을 들려주었 습니다. 그런데 절반도 지나지 않았는데 제 곁에 유리가 펑펑 울 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은 그때까지 저도 코끝이 시큰하 게 올라오는 걸 꾹 참고 있었는데 말이죠. 결국 이 객석의 부녀父 ☆마저 두 눈이 벌게지고 말았습니다.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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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자식을 모두 울려 버린 노래, 양희은의 <엄마가 딸에게>(양희은·김창기 작사, 김창기 작곡)였습니다.
난 잠시 눈을 붙인 줄만 알았는데 벌써 늙어 있었고.
넌 항상 어린 아이일 줄만 알았는데 벌써 어른이 다 되었고.
정말 그렇습니다. 그저 눈 몇 번 붙였다가 떴더니 어른이라는 겁니다. 물론 나이 들면 나도 모르게 어른스러워지는 점도 있겠지만, 속마음을 돌아다보면 영락없는 철부지 같고, 아니 그대로 철부지였으면 하는 바람도 여전한데, 어른이라니까 어른스럽게 처신해야지 할 뿐, 딱히 내가 어른답다는 자신은 없기 때 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나이는 자기만 드는 줄 알죠. 후배나 제자 나이를 물을 때마다 놀라지 않을 때가 없을 정도인데, 그러니 자식은 오죽하겠습니까. 늘 아이인 줄만 알았는데, 한 번 눈 떠보니 사춘기, 또 한 번 눈 떠보니 어른입니다.
난 삶에 대해 아직도 잘 모르기에
너에게 해 줄 말이 없지만,
네가 좀 더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마음에
내 가슴속을 뒤져 할 말을 찾지.
나이만 들었지, 우리 부모들 역시 아직도 삶이 뭔지 잘 모릅니다. 그러면 입 다물고 잔소리, 꼰대소리 하지 말아야 하겠지요. 그런데 그럼 남이게요? 거저 나이 드는 법은 없다고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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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돌봄
아이가 행복해지는 데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에 겨우 겨우 할 말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 좀 멋진 말이 나와야 하는데 아무리 뒤져봐도 수준이 고작 이렇습니다.
공부해라. 아냐, 그건 너무 교과서야.
성실해라. 나도 그렇지 못했잖아.
사랑해라. 아냐, 그건 너무 어려워.
너의 삶을 살아라!
공부해라, 성실해라, 사랑해라. 마땅히 부모로서 해야 할 말 입니다. 하지만 먼 훗날 자녀에게 “내가 한 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게 뭐니?”, “내가 너에게 제일 많이 한 말이 뭐니?”라고 물었 을 때, '공부하라'는 말이었다는 답을 듣게 된다면 얼마나 부끄럽고 속상할까요. 아무리 너를 위해서 한 말이라 해도, 네가 오죽 공부를 안 했으면 그랬겠냐고 변명을 해봐도, 부모로서 참 면이 안 서는 일이 아닐까. 자녀가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에 가슴속까지 뒤져가면서 찾은 말이 고작 그래서야 쓰겠습니까.
한데, 그러고 보니 막상 할 말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집니다. 되돌아보면 나도 그 나이 땐 부모가 아무리 좋은 말을 해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아니, 또 어떤 이는 부모님 말씀대로 살아서 그 바람에 오히려 내 삶이 이 모양이라며 불평 할 수도 있을 겁니다.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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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아무리 가슴속을 뒤져봐도 이 말 저 말 다 뻔해 보이고, 다 잔소리처럼 들리고, 내가 다음 세대의 삶에 대해 뭘 안다고, 그들이 어련히 알아서 잘 살까 싶은 마음에 그만 할 말이 없어지는 겁니다. 이제야 깨단하게 되다니, 노래 속 부모는 모든 말 접고 딱 이 한 마디, 자식의 편에서 자식을 믿으며 어렵게, 그러나 간절히, 건네보는 겁니다. 너의 삶을 살라고.
사실 이 노래는 엄마와 딸이 주고받는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시간적 선후 관계로 볼 수는 없습니다. 순차적이라기보다는 병치로 봐야지요. 마치 영화에서 화면을 반으로 갈라 서로 다른 입장의 인물이 등장하는 장면처럼, 이 노래의 엄마와 딸은 서로가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상상하건대 이 노래 속 엄마와 딸은 대화가 원만하게 이루어지지는 않는 상황입니다. 대화를 하면 서로에게 상처만 주고받기 때문이죠. 속마음 진심은 이런게 아닌데 대화만 하면 이상하게 오해되고 오해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노래를 듣고 있는 우리는 양쪽의 진실을 알 수 있죠. 드라마의 방백처럼 우리는 엄마와 딸 각자의 솔직 한 생각을 엿듣는 셈이니까요. 사실은 서로가 얼마나 서로를 생 각하고 있는지, 서로가 각자 얼마나 힘들어하고 있는지를 말입 니다.
현실에서도 그렇게 소통이 되면 오죽 좋겠습니까. 하지만 드라마 속 등장인물이 정작 자신들의 진실을 알지 못하고 관객만 이 그들의 진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막상 내가 저 엄마와 딸자리에 서게 되면 이해와 공감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66 돌봄
노래가 진행될수록 우리는 그 모녀의 모습에 동화되어 가슴이 답답해져옵니다. 답답한 가슴을 안고, 그래, 그랬구나,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다가, 좀 더 좋은 엄마가 되지 못했던 것에 용서를 구하는 엄마에게, 딸아이가 엄마처럼 좋은 엄마가 되는 게 내 꿈이라고 외치는 그 마지막 순간, 참고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오고 맙니다.
자식에게서 "엄마, 참 좋은 엄마였어"라는 말을 듣는 것처럼 복된 일이 있을까요? 사실 이런 주제가 나오면 저는 아직도 마음이 아려옵니다.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께 어떤 말씀을 드려야 제일 좋아하실까, 병실 침상 곁에서 내내 고민했던 기억 때 문입니다. 자식한테 해줄 말만 찾기 힘든게 아니었습니다. "아버지, 고마워요." 그건 너무 뻔한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 사랑해요." 그것도 뭐 자주는 아니어도 적잖이 해드린 말. 근데 가슴속 을 뒤져보니 정작 내가 아빠한테 못했던 말이 있더군요.
그래서 입술에 힘을 주어, 머잖아 헤어지게 될 아버지께 비로소 말했습니다. “아버지, 존경합니다.” 그 말 하고서 내가 더 울었습니다. 펑펑 울었습니다. 내가 아빠를 존경하고 있었다는 걸, 그때 가슴 깊이 깨달았고, 진작 이런 말씀을 드리지 못한 걸 후회하고 또 후회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뻔뻔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저 또한 자녀의 아비로서 부모의 마음을 제법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
67
아이는 취급 설명서와 오지 않는다
알랭 드 보통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아기보다는 일반 가전제품이 더 상세한 취급 설명서와 함께 온다." 육아에 이어 교육은 또 어떤가요? 정말이지, 가전제품과 비교하면 자식은 손이 참 많이 가는 아주 부실한 제품이죠. 말도 더럽게 안 듣고, 때로 는 도대체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감조차 안 잡히기 일쑤입니다. 특히 사춘기에 이르면 도대체 어디가 어떻게 고장나서 갑자기 저 모양인지 당황스럽고 놀랍고 심지어 두렵기까지 하답니다.
사실 우리는 다 압니다. 문제의 원인이 우리 아이들에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사춘기에게도 죄가 없습니다. 다만 아침부터 자녀를 깨워 전쟁터로 내모는데 부모들이 지쳤을 뿐입니다. 부모들도 자기 아이의 성공만을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잠도 못 자고 아침도 거르고, 빈부 격차에 가슴 앓고 사교육에 찌들며, 친구 간에 경쟁만 하고 가족의 평화도 사라지는 땅에서 우리 아이들이 자라나는 걸 어느 부모도 원치 않을 것입니다.
아이를 키우는 사용설명서 같은 게 있으면 더 잘 키웠을까요? 아닙니다. 우리 아이들이 가전제품 같았으면 말 안 듣는 사춘기가 오자마자 진작 신상으로 갈아타지 않았을까요? 농담입니다. 아이가 가전제품 같지 않다는 말은 그만큼 우리 아이는 대체 불가능한 존재라는 뜻일 겁니다. 그래서 귀한 내 자식인 것이죠.
아이
75
어른이 돼서 늙는 게 아니고, 늙은 다음에서야 서서히 어른이 되는 거더라고요. 사춘기 자녀를 키우던 사십 대도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나이였습니다. 훌륭한 부모가 되기 엔 너무 깜냥이 모자랐고, 지혜와 인내도 모자란 때였습니다. 지금의 경륜을 갖고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정말 멋진 부모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많이 아쉽고 후회되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시영 시인의 <성장>이라는 시를 나눠드려 볼 게요. 잘 들어보세요.
성장
-이시영
바다가 가까워지자 어린 강물은 엄마 손을 더욱 꼭 그러쥔 채 놓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거대한 파도의 뱃속으로 뛰어드는 꿈을 꾸다 엄마 손을 아득히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래 잘 가거라 내 아들 아. 이제부터는 크고 다른 삶을 살아야 된단다. 엄마 강물은 새벽 강에 시린 몸을 한번 뒤채고는 오리처럼 곧 순한 머리를 돌려 반짝이는 은어들의 길을 따라 산골로 조용히 돌아왔습니다.
-<은빛 호각>(창비, 2003)
이랬어야 되지 않았나. 손을 꼭 잡은 채 한 순간도 놓치지 않으며 돌보던 우리 아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던 우리 아이, 그러다가 어느 순간, '그래 잘 가거라, 내 아들, 내 딸아' 하며 이제 부터는 너의 삶을 살라고, 품을 떠나가는 아이를 흐뭇하게 바라 보다가, 속울음 삼키며 단호히 돌아서야 하는 것. 자녀의 올곧은 성장을 위해 돌봄과 기다림과 떠남의 과정까지 감당해야 하는 것이 부모의 몫 아니었을까. 흐르는 강물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어린 강물은 기억할 것입니다. 엄마는 참 좋은 엄마였다고. 그리고 아빠를 존경한다고.
80
2장 돌봄

엄마가 다시 돌아온다면
효도하고자 하는 그 마음은 가득해도, 하지만 그런 것은 소원이 아닙니다. 그 본질의 태반은 후회일 뿐입니다. 나이도 들만 큼 들고 살림도 살만큼 살게 된, 어른 다 된 자식들의 때늦은 깨 달음과 아쉬움이라고나 할까요. 하지만 잘해드리려고 천국에서 잘 계신 엄마를 소환한다는 건 말이 되질 않습니다. 엄마를 만 나고픈 간절한 소원, 하늘나라 계신 엄마를 불러야 할 때는 이 럴 때입니다.
부모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정채봉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시간도 안 된다면
단 5분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
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
엄마와 눈맞춤을 하고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 번만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 내어 불러 보고
숨겨 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샘터, 2006)
자식은 어른이 되어도 어린 자식입니다. 센 척하며 살고 있지만 엄마 품이 그립고, 그 품속에 들어가 아기처럼 위로받고 싶고, 살다가 겪은, 누구한테 말 한번 못한 억울한 일, 엄마한테 속 시원히 일러바치고 그냥 엉엉 울고 싶은 때가 있는 겁니다. 나이가 드니까 그렇게 맘 놓고 일러바칠 사람이 없네요. 엄마가 계셨더라면 아마도 엄마는 무조건 내 편을 들어주었을 겁니다. 자초지종 따지지 않고, 입바른 소리는 뒤로 돌린 채, 일단은 “아이고, 내 새끼~" 하며 내 눈물 콧물 당신 손으로 닦아주었을 겁니다. 하늘나라 엄마가 휴가만 나온다면요.
동화작가이자 시인 정채봉은 정작 어머니에 대한 저런 살뜰 한 기억이 없다고 합니다. 시인의 나이 세 살 때, 스무 살 어머니는 여동생을 낳은 후 돌아가셨다죠. 그래 시인은 엄마의 얼굴도 모르고, 엄마라 부른 기억도 없고, 다만 부엌에서 해송 타는 냄 새 비슷한 엄마의 내음만 기억한다고 했다는데, 그것도 그다지 믿을 만하지는 않아 보입니다.
88
2장 돌봄
그러기에 저 시는 오히려 사실보 다 더 강렬하게 들립니다. 평생토록 삼키고 삼켰다가 토해낸 소원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원은 이런 겁니다. 절박하기로 말하면 일자리를 구하거나 급전을 마련하거나 하는 일 따위가 절박해 보이지만, 마음먹기로 하면 그런 일도 까짓것 지금 당장이 힘들 뿐 이루지 못할 일은 아닙니다. 일자리나 급전이 하늘나라에서 휴가까지 얻어 나 온 엄마에게 바랄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에 비하면 고작 억울 했던 일을 일러바치는 게 무슨 대수겠습니까만은, 엄마 아니고는 그런 말 받아줄 사람이 없으니 그게 더 절박한 일이 되는 집니다. 아니 어쩌면 그것도 별것 아닙니다. 그냥 엄마 하고 소리 내어 불러보는 일, 엄마랑 눈 맞추고 품에 안기어 젖가슴 만지는 일, 아니 아니 엄마가 오 분만 다시 살아 돌아와 만나는 일, 그게 가장 절박하고 순박한 소원인 겁니다.
이 시를 아침 라디오 방송 <김영철의 파워FM〉에 출연해 낭송을 한 적이 있습니다. 늘 활기차고 밝은 디제이 김영철이 울음을 터뜨리더니 급기야 스튜디오는 물론 애청자들의 출근길마저 눈물바다가 되고 말았다고 합니다. 우리들의 엄마는 아니 계시거나, 계셔도 예전 같지가 않으십니다. 어릴 적 부모님을 떠올리면 언제나 우산처럼 나를 든든하게 보호해주던 존재였는데, 어느덧 부모님이 늙고 쇠약해지셨습니다. 나보다 힘도 약하고 지식도 모자라고 돈도 없어 봅니다.
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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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톱을 깎아드렸어야 했는데, 그 못 난 발톱을 고이 깎아드렸어야 했는데....
발톱 맡길 이를 둔 사람도, 누군가의 발톱을 깎아줘본 사람도 다 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발톱을 맡긴다는 게 쉽지 않은 일 이거든요. 모르긴 몰라도 이 시 속의 어머니 또한 기운이 조금만 더 있었어도 자식에게 발톱을 맡기려 하진 않았을 겁니다. 발톱은 내어놓기가 괜히 부끄럽습니다. 낯선 이가 있는 마루에 맨발로 다닐라치면 나도 모르게 발톱을 오므리고 다니게 되곤 하지 않습니까. 그런 발톱을 어머니가 자식에게 내맡깁니다. 자식은 공처럼 둥글게 등을 말아 쪼그린 채 말 없이 어머니 발톱을 깎습니다. 말을 잃어버린 어머니도 말 대신 가슴팍에 다가온 자식의 머리를 만지고 감싸안습니다. 그렇게 서로 돌보는 겁니다. 어려서는 엄마가, 나이 들어서는 자식이 그렇게 서로 돌봐야 하는 겁니다.
박완서의 단편소설 <길고 재미없는 영화가 끝나갈 때〉는 그러한 엄마와 딸 사이의 녹진녹진한 관계를 기막히게 잘 표현한 작품입니다. 위암 수술을 받은 어머니, 개복해보니 이미 다른 장기로 전이가 돼 반년을 넘기지 못하리라던 어머니를 집으로 모신 것은 딸이었습니다. 맞벌이하는 오빠 부부가 못 모실 게 뻔해 말도 안 꺼내었건만, 오빠는 여동생이 모시는 것도 반대합니다. 남들의 눈치가 보였겠죠. 한데 말기 암환자의 마지막은 웬만한 간병인도 감당하기 힘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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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우리는 그걸 몰랐습니다. 아버지가 꼬리 내린 걸 본 적이 없으니까요. 아무래도 자신의 꼬리는 딸아이에게 들킨 것 같은데, 아버지는 그 꼬리를 어쩌면 그렇게 다 감출 수 있었을까. 시인은 그것이 몹시도 궁금하고 부럽고 미안하고 안쓰럽습 니다. 아배의 꼬리는 그러한데, 그렇다면 자식의 꼬리는 어떡할까요? “제가 어떻게든 알아서 해볼테니 아버지 어머니는 아무 걱정 말고 건강하기만 하세요"라고 말씀드리며 세상에 나가서 내릴 꼬리 들키지 않고 티 내지 않을 자신 있으신지요.
양육으로서의 돌봄만큼이나 봉양으로서의 돌봄도 참 힘든 겁니다. 효도도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준비하 고 연습해야 하는 거죠. 아니, 준비와 자세를 다 갖추었어도 다른 가족의 동의는 물론 주변의 정황이 다 맞아떨어져야 가능한 거랍니다.
행복이란 누구나 언제든 취할 수 있는 정상 상태가 아니죠. 분투노력해서 얻은 결과이든 우연히 얻은 것이든 감사해 마지 않아야 할 특별한 상태입니다. 좋은 부모와 자식 관계도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라는 이름으로, 혹은 자식이라는 이름 때문에 무조건 희생해야 하는 것도 마땅한 일이 아닙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굉장히 감사해야 할 복인겁니다.
부모라고 해서 다 사랑의 능력이 있거나 자녀에게 자애롭지는 않습니다. 나쁜 부모도 있습니다. 물론 자녀도 마찬가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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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어 부모도 좋은 사람이고 자녀도 좋은 사람인데 부모 자식 사이가 안 좋을 수도 있는 거고요. 부모와 자식 관계도 뭔가 뜻 하지 않은 이유로 상처를 주고받다가 끝내 그것을 극복하지 못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개인의 인격과는 또 다른 문제일 때가 많습니다. 어느 쪽의 잘잘못을 따져서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닌 겁니다. 운명은 때로 아주 고약하니까요.
하지만 그런 것도 다 젊어서의 일이고, 잘했든 잘못했든, 노년의 부모들은 애잔하기만 합니다. 자녀에게도 지시나 명령을 하지 않고 언제부턴가 슬슬 눈치를 보며 부탁을 하십니다. 부탁 이란 말은 곱씹을수록 참 짠한 단어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짠해 야 진짜 부탁입니다. 염치 없이 아무에게나 쉽고 편하게 부탁하 는 사람을 보면, 무례해 보입니다. 늙는다는게 잘못도 아니고 죄도 아니지만, 늙어서 무례하면 답이 없습니다. 나이 들수록 고집이 세지면 대책이 없어서, 주위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말은 듣겠지만 존경받기는 글렀습니다. 그래서 노인다운 노인은 애 써 부탁하는 겁니다. 노인의 부탁은, 그래서 더욱 애잔한 겁니 다. 다시 소설 《엄마를 부탁해》로 돌아가봅시다.
스무 살에 만나 오십년이 흘러 이 나이가 되는 동안 아내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게 좀 천천히 가자는 말이었다. 평생을 아내로부터 천천히 좀 가자는 말을 들으면서도 어째 그리 천천히 가주지 않았을 까. 저 앞에 먼저 가서 기다려주는 일은 있었어도 아내가 원한 것,
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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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해주자, 나도 좀 챙겨주자 하는 생각이 슬슬 위기 감과 더불어 늘어갑니다. 고혈압, 당뇨 따위의 성인병 걱정에 이런저런 운동도 할까 생각해보고, 몸에 좋다는 비타민, 영양제 같은 건강보조제도 꼬박꼬박 챙겨보려 하고, 흰머리, 탈모, 주름 살, 점, 잡티, 기미 등등 미용에 관한 관심도 커져 갑니다.
쉰 넘어보니 딴 거 없습니다. 내 몸이 나입니다. 웰비잉 Well- being하지 않으면 웰다잉well-dying도 없습니다. 돈 벌고 일하느라 애쓴 내 몸, 남들 위해 바친 내 몸, 내가 아니면 누가 돌보겠습니까. 잘 먹고 잘 살아야지. 이 말을 참 오랜만에 꺼내보는 나이인 겁니다.
그러나 막상 건강을 챙기고 보기 좋게 몸을 관리하는 일이 결코 호락호락하지가 않습니다. 좋은 것 먹고 나쁜 것 안 먹기, 뭐든 적당히 먹기, 이게 뭐 어려울까 싶은데 진짜 잘 먹고 잘 살려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죠. 살은 찌는 건 참 자연스럽게 찌면서 빠지는 건 왜 그리도 부자연스러운 건지요. 그래서들 하는 말이 있죠. 원래 다이어트는 내일부터라고. 금연도, 금주도 늘 내일부터입니다.
119 건강
산다는 것은 먹는다는 것이고 먹는다는 것은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시인은 식사법을 말한다면서 우리에게 사는 법을 강론講論하고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살기 위해 먹는다는 것은 매우 경건한 일입니다. 먹는 것처럼 산다는 것도 그리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도, 끝까지 푹 익혀 먹는 콩나물처럼, 그렇게 익혀야 합니다. 쌀 한 톨도 흘리지 말아야 하듯 삶 속에서 고요한 순간들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설탕처럼 달지 않은 인생이라도 끝까지 묵묵히 사는게 인생이며, 식빵 가장자리를 떼어버리지 말아야 하듯 고통이라고 해서 그것을 인생으로부터 제거하려 해도 안 됩니다.
죽을 때까지 밥을 먹듯, 죽기까지 성실하게 사는 것, 그것이 인생입니다. 그러기에 살다보면 입안에 돌이 서걱거리기도 하고, 멸치똥 같은 날이 이어지기도 하지만, 푸성귀처럼 유순한 눈 빛도 키워야 한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좌절이 있다 하더라도 생선뼈 마디마디 발라내듯이 미끈하게 빠져나올 줄도 알아야 하고, 그러면서 늘 수저 한 벌마냥 가지런히 몸과 마음을 가눌 줄 알아야 합니다. 식후 한 모금 물마시며 한 끼 한 끼 먹어 넘기듯, 그렇게 잘 넘기고 넘어가는 게 우리의 사는 법 아니겠습니까.
121 몸
그 부정적인 의미조차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겁니다. 보일러를 고치다가 오늘은 이 정도 따뜻한게 최선이라고 하면 어쩔 수 없이 현실을 받아들이며 견딜 수도 있을 테니까요.
그런 의미에서라면 저도 소위 긍정의 힘을 믿고 싶습니다. 가령 2016년 리우올림픽 남자 펜싱 에페 종목 결승전에서 박상영 선수가 패전으로 기울어가는 그 절체절명의 시간, 거의 모든 국민들이 이젠 끝났구나 낙담하는 그 찰나, 그 고독한 순간에 오직 자신만이 스스로에게 '할 수 있다'고 되뇌면서 몸과 마음을 새로이 추스리고 도전한 끝에 기필코 역전승을 이끌어내어 금메달을 따는 극적인 장면을 눈앞에서 바라보게 되었을 때, 역시 긍정적인 자세와 마음가짐이 소중하구나 하는 생각을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매번 일어나지는 않는다는 것도 우리는 인정해야 할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긍정의 힘은 믿어도 긍정 의 미신은 믿기 싫습니다. 모든 게 마음먹기 달렸고, 그래서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모든게 잘될 거라는 믿음, 그것은 헛될 뿐만 아니라 위험합니다. 생각이 현실이 된다는 주장은 사이비에 가깝습니다.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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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요, 파도소리를 제대로 듣지 않은 사람은 아름다운 소리로만 기억하고, 파도소리에 귀 기울여 본 사람은 거기서 비명을 듣는 반면, 파도소리만이 아니라 깊은 바다 속의 고요마저 귀담아들은 시인은 이를 아름다운 비명이라 부르고 있음에 유념 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는 바다가 아름답다고 끝을 맺습니다. 아픔이 있기에 아름다운 거라고, 그러기에 파도소리는 비명은 비명이되 아름다운 비명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시인에게는 파도소리가 시 처럼 들렸나 봅니다. 시인의 고통을 먹고 사는 아름다운 시 말입니다.
우리 인생도 그럴까요? 소리 내어 울어도 본 그 아픔들,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가슴에 묻어둔 그 고통들이 언젠가는 아름다운 꽃으로, 아름다운 시로 피어날 수 있는 걸까요? 인생은 희극입니까, 비극입니까?
인생은 롱숏으로
"인생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찰리 채플린의 명언으로 알려진 말입니다. 들을수록 참 근사한 말입니다. 그런데 번역도 그럴싸하지만, 원래의 영어 문장이 더 재미있습니다. “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 직역하자면 이렇습니다.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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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클로즈업으로 보면 비극이지만, 롱숏으로 보면 희극이다."
희극 영화의 감독답게 실제로 채플린은 자신의 영화에서 클 로즈업 기법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관객들은 카메라의 시점에 몰입해 카메라가 보여주는 대로 따라가게 되어 있는데, 코미디의 웃음은 전체 상황을 관망하면서 보아야 웃음이 극대화되기 때문이죠.
반면에 정서적 효과를 극대화하고 싶을 때 감독들은 클로즈 업 기법을 구사합니다. 채플린 자신이 주연, 감독한 영화 〈시티 라이트〉(1931)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감독 채플린도 배우 채플린의 모습에 클로즈업으로 다가갑니다. 눈 먼 소녀의 꽃을 받아 들고 채플린이 환하게 미소 짓는 유명한 장면이지요. 아, 그는 웃는데 우리는 눈물이 납니다.
그렇습니다. 영화처럼, 영화의 카메라처럼, 우리 인생도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인 겁니다. 다른 사람들, 남의 집을 보면 다 잘 사는 것처럼, 다들 행복하게 사는 것처 럼 보입니다. 멀리서 보니까요. 하지만 나 자신, 우리 집을 보면 우울해집니다. 속속들이 들여다보면 비극적인 부분만 돋보입니다. 가까이서 보니까요. 마찬가지로 자기 인생도 지금 당장의 가까운 시점에서 보면 비극입니다. 하지만 며칠, 몇 달, 몇 년이 지 난 후 멀찌감치 돌이켜보면 별거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행복 하려면 자기 자신을 약간 떨어진 자리에서, 좀 더 객관적인 시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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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아예 도시락을 싸울 수 없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그런 친구는 그냥 숟가락 하나 만 가져오면 되었습니다. 가운데가 포크 모양으로 되어 있는 일 체형 수저로 모든 급우들의 밥과 반찬을 먹을 수 있는 권리가 그에게 주어졌던 시절이었습니다. 물론, 그 친구라고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숫기가 없는 친구들은 그러지도 못하고 정말 밖에 나가서 물로 배를 채워왔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무상 급식을 받는 시대, 이제 학교에서 남몰래 배곯을 아이는 없겠지만, 급식만으로는 뭔가 부족합니 다. 분배와 나눔은 다른 법. 이 광고를 통해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교실은 '사람을 살리는 곳', '같이 나누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안 가르쳐줬지만 우리는 그것을 배웠습니다. 진정한 교육은 교과서보다, 학원보다, 삶과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런 점에서 이 광고의 진짜 주인공은 빈 도시락을 가져온 가엾은 그 친구가 아니라, 자신의 음식을 나누어 그의 도시락을 채운 친구들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특히 그 짝꿍이 단연코 주연 급입니다. 당근이나 포도를 나눠준 다른 친구들은 연기가 서툴러서 자기가 줬다는 티를 감추지 못하는 반면, 저 짝꿍은 영상에서 클로즈업 한 번 없이 아주 짧게 지나가는 존재이지만, 정작 샌드위치를 뚝 떼어주고도 곁눈조차 주지 않은 채 시크하게 앞 만 바라보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멋진 녀석을 어디선가 또 본 적이 있는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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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에 나오는 선재 같은 친구가 아까 그 짝꿍 같은 친구일 겁니다. 붕어빵을 나눠주는 친구, 그것도 “야, 이 붕어빵 내가 사 줬다"가 아니라, "야, 네 가방 지퍼 열렸다” 하면서 가방 속으로 슬쩍 붕어빵 넣어주는 그런 친구 말입니다. 그런 친구가 없다면, 열여섯이 아니라 쉰여섯이 되어도 이토록 따뜻한 저녁은 만나기 쉽지 않을 겁니다. 눈물 젖은 빵도 이런 빵 같으면 매일 먹고도 힘이 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시는 분석할 필요도 없이, 그저 “하, 선재 저자 식 참…!" 하면서 눈물 반 웃음 반 지어 읽으면 그만이겠습니다만, 갑자기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게 하나 있습니다. 하필이면 붕어빵이 왜 다섯 마리일까요? 천 원에 다섯 마리 주던 시절이었기 때문이겠죠. 선재는 먹다 남은 붕어빵을 준게 아니라, 온전히 친구를 위해 천 원짜리 붕어빵 다섯 개를 사다가 그걸 그대로 가방 속에 넣어준 겁니다.
내친 김에 한 발짝만 더 나아가볼까요. 붕어빵이라 하면 붕어는 물고기니 고기 어魚요, 빵은 서양 떡이니 떡 병餅이요, 다섯 마리라 했으니 다섯 오五, 합치면 오병이어五餅二魚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봐도 되지 않겠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이적異 蹟!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의 굶주린 무리를 먹였다는 기적! 그렇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꼭 신만이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저 시처럼, 저 광고처럼, 한국과 노르웨이 교실의 어린 친구들처럼, 우리 누구나 할 수 있고, 실제로해왔고, 앞으로도 해야만 하는 그런 것일 뿐입니다.
지금까지의 이 짧은 이야기 안에서도 우리는 많은 세렌디피티를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노르웨이의 도시락, 대한민국의 붕어빵, 이들이 이렇게 우연히 만나다니 말입니다.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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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워들은 "인생은 짧고 예술 [기술]은 길다 Ars Longa, Vita Brevis 라는 히포크라테스의 말도 생각나고, 중학교 한문 시간에 그 비슷한 걸 배운 기억도 났습니다. 주자의 말씀이죠. 少年易老學難成 (소년이로학난성) 一寸光陰不可輕(일촌광음불가경)이라. "젊은이는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렵나니 한 순간도 가벼이 여겨서는 아니 된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죠. 아무렴, 얼마나 힘들게 들어온 대학인데 열심히 공부해야지.
한데 그 아래에 밝혀놓은 이 구절의 출전을 보니 《장자莊子》 <양생주편養生主篇〉이라지 않겠습니까? 어라? 예나 제나 당구풍 월堂狗風月이라, 서당개가 풍월을 읊는 수준이어서 본디 문자 속 이 깊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장자라고 하면 '무위자연無爲自然'정도는 상식으로 알고 있던 터, 아무래도 이게 영 그분이 하실 만한 말씀은 아니지 않나 싶어서 그 길로 대학 도서관을 찾아갔지요. 아직 학생증도 안 나온 저는 갓 상경한 촌사람처럼 어리둥절 헤매다가 어렵사리 노자 장자 책을 처음 찾아보았습니다. 그랬더니만, 놀랍게도 그 문구 다음에는 이런 문장이 이어져 있는 것 이었습니다.
以有涯隨无涯 殆已
'이유애수무애 태이'라, 즉 "끝이 있는 것으로 끝이 없는 것을 좇으면 위태로울 뿐이다"라는 겁니다. 아직 끝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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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또 하나의 문장.
已而爲知者 殆而已矣
'이이위지자 태이이의'라, "그런데도 앎을 추구하는 놈은 더 더욱 위태로울 뿐이다." 잉? 이쯤 되면, 우리 인생에는 끝이 있고 배움의 세계는 끝이 없으니, 더 공부해서 뭐하느냐는 뜻 아니 겠습니까? 그럼 그렇지. 이래야 장자답지. 역시 장자님 말씀다워. 세상에 이런 복음이 있나! 저는 영혼의 위로라도 받은 양, 실로 오랜만에 공부의 중압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끝이 있는 인생, 그것도 쉽게 늙는다는 이 젊은 날에, 일촌광음 인들 허투루 여겨 행여 그런 위태로운 일을 하게 되면 어찌 되겠습니까? 하마터면 열심히 공부할 뻔 하지 않았습니까?
그날 저는 《장자> 책장을 기쁜 마음으로 덮으며 도서관을 나섰고, 그날 그 덕에 이날 이때까지 위태로움에 빠지지 않고서 안전히 살아왔으니 오직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러고 저는 이제 중년의 노트에 이렇게 씁니다. “지금 나는 후회한다. 그때 책장 덮은 것을."
알 만큼 알게 된 나이가 되어, 이제 다시 옛 노트를 펼쳐봅니다. 내 젊음의 노트, 추억 속의 대학노트를 말이지요. 위태로울 정도로 열심히 학문을 닦지는 못했지만, 다시 돌아보니 그래도 그 젊은 시절, 그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는지,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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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과 감사를 보내게 되는 겁니다. 앵두도 그리 되는 겁니다. 크지 않아도, 위대하지 않아도, 밤하늘의 성좌가 못 되어도, 우리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는 겁니다. 긴 시간 견디어 이루어낸 모든 앵두들에게 우리가 경의를 표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길이 나를 만들었다
하지만 아직은 이릅니다. 앵두가 익을 무렵은 오뉴월입니다. 가을이 아닙니다. 앵두만 한 결실, 그 크기가 아니라 철이 문제 인 것. 그때도 견딜 만은 하지만 간신히 견딜 만할 뿐입니다. 가을을 맞이했더라면 앵두가 아니라 감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더 넉넉히 성숙했을지 모릅니다.
아, 그리 생각하면 역시 장자를 읽었어야 했습니다. 장자 탓 이 아닙니다. 장자를 오해한 탓입니다. 끝이 있는 것으로 끝이 없는 것을 좇는 것이 아무리 위태로워도 아예 좇지 아니하거나 중도에 멈추는 것보다야 위태하겠습니까? 내 생애 끝이 있는 줄 알면서 겸허히 끝이 없는 지체의 세계를 궁구해 나갔더라면 지금보다 한발은 더 나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요?
장자가 말하고자 함은 삶에 대한 겸손이 아니었을까. 마치 세상 진리를 다 아는 듯 철없이 굴었던 젊은 시절에도 지 앞에서 겸손하지 못했고, 이제 겸손할 줄 아는 나이는 되었으나 돌아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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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배움
어릴 적 어른들은 곧잘 인생을 나그네 길에 비유하곤 했습 니다. 하지만 내가 장돌뱅이처럼 살 리도 없으니 그때는 그 말을 실감할 수가 없었죠. 그런데 내가 택한 학문의 세계마저도 나그네와 다를 바가 없었음을 아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습니다. 정처가 없으니 어디든 갈 수 있지만 어디서도 반겨 줄이 없는 나그네나, 좋아하는 책을 읽고 공부할 수 있는 자유를 택한 대가로 아무도 대신해주지 않는 글쓰기의 외로움을 감당해야 하는 내 신세나 매양 한 가지이니 말입니다.
그러니 이 시에 나오는 길처럼 학문의 길도 순순히 사람의 뜻을 따라주진 않는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벼랑 앞에 서기도 하고, 때로는 먼 길을 돌아가게 만들고, 그럴 때마다 공부 확 때 려치울까, 나는 공부랑 안 맞나 보다 등등 오만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왜 학문은, 인생은 뜻대로 되지 않는 겁니까?
시인은 이렇게 답해주는 듯합니다. 자, 여기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길이 있습니다. 언뜻 보면, 그 길이 사람들에게 세상 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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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배움
예를 들어 하늘길을 지휘하는 항공교통관제 사의 경우, 정보처리 속도는 젊은이가 빠르지만 충돌 피하기 같은 위기관리 능력은 중년의 관제사가 더 낫다는 것이지요. 중년에 이르러서야 인생의 경험이 축적되면서 비로소 모든 조각들이 하나로 합쳐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나이가 들수록 성실성, 자신감, 배려, 평정심도 발달한다고 하지요. 중년의 뇌는 의도적으로 긍정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도록 노력하기 때문에 감정에 대한 통제력이 증가되어 훨씬 더 침착하고 낙관적으로 사태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겁니다. 웬만한 일은 다 겪어봤으니까요. 감정의 통제력이 나아진 나이이기에 중년은 사랑보다는 역시 공부하기 딱 좋은 나이인 겁니다.
물론 사람마다 다 다르다고 하면 할 말이 없을 겁니다. 배려 없이 고집만 센 늙은이, 평정심 없이 화만 잘 내는 늙은이, 감정 과잉의 목소리 큰 늙은이도 많지요. 하지만 이는 새롭게 변화될 자신이 없어 고집부리고, 자신이 틀린 걸 받아들이기 힘들어 화 내고, 논리로 당해낼 재간이 없어 목소리 높이는 것일 때가 많습니다. 아무튼 그런 증상이 보이면 무조건 학교에 가야 합니다. '나무학교'에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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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가 없이 인간은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관계가 구속을 의미한다면, 인간은 누구나 구속되어 사는 겁니다. 아이가 자라 성인이 되면, “자립하고 싶어. 자유롭게 살고 싶어. 이제 집에서 나갈 거야"라고 노래를 부릅니다. 하지만 자립은 없습니다. 아무의존 관계가 없는 삶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때의 자립이란 부모라는 특정한 구속 관계로부터 벗어나되 자기가 독립적으로 다른 관계를 구축하는 것을 뜻할 따름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자유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구속을 택할 것인가 하는 자유뿐 일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A라는 구속을 택한다면, 그것은 A 아닌 것으로 부터의 자유를 선택하는 아주 적극적인 행위입니다. 진리에 구속된다는 것은 거짓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에게 구속되어 다른 선택으로 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그 한 사람만 사랑하면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자유롭습니까.
구속될 것을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 사랑입니다. 선택은 책임을 동반합니다. 상대방의 자유를 구속한 대가를 기꺼이 지불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일시적이고 충동적인 것이 아니라, 길들이고 길들여질 충분한 시간을 기울여서 이루어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서로 생각하고 생각하며, 사모하고 사모해서 계약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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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사랑
내가 꿈꿔온, 실재하지 않은 이상형을 투사한 결과 이니 말이지요. 그래서 알랭 드 보통은, 사랑은 보답받을 수 없기 때문에 욕망이 더 커진다는, 아주 우울하게 오랫동안 전해 내려오는 전통들이 있다면서 이렇게 소개합니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사랑은 방향일 뿐 공간은 아니다. (중략) 몽테뉴는 말했다. “사랑에는 우리를 피해서 달아나는 것을 미친 듯이 쫓아가는 욕망밖에 없다” 아나톨 프랑스 역시 "우리가 이미 가진 것을 사랑하는 것은 관례적이지 않다”는 말로 같은 입장을 보여주었다. 스탕달은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기초로 해서만 생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드니 드루주몽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가장 넘기 힘든 장애를 가장 좋아한다. 그것이 정열을 강하게 불태우는 데에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다?” 롤랑 바르트는 욕망을 정의상 얻을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으로 한정시켰다.
- 알랭 드 보통,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청미래, 2007) 중에서
저 주체들은 사랑을 욕망으로, 욕망을 소유와 등치시키는 어리석은, 혹은 어쩔 수 없는 어린아이나 짐승들 같습니다. 그들에게 욕망은 유예되고 연기될수록 강렬해집니다. “키스해도 될까요?"라는 말에 "아니오”라는 답 보다는 “다음에요"라는 말에 온 몸을 바칠 각오를 합니다. 그 '다음', 또 그 '다음'을 향해 충실히 달려가는 겁니다. 그것이 알랭 드 보통이 말한 '사랑은 방향일
238
"어리석은 자는 한 평생 다하도록 현명한 이를 가까이 섬겨도 참다운 법을 깨닫지 못한다. 국자가 국 맛을 모르듯이.” 혀는 국 맛을 알지만 국자는 국 맛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국자 신세는 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식은게 아니라 바르게 된 것이고, 변해서가 아니라 변치 않아서 익숙해 진 것이고, 그 덕에 우리는 동상도, 화상도 입지 않고 평생을 동거하며 공존해올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그저 오래 같이 지내다보니까 익숙해지는 권태처럼 오해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시인은 말합니다. '몰입하는 일'이라고, 행복한 결혼 생활의 비결은 대장장이처럼, 장인의 책무처럼, 정성을 다하며 몰입하는 일을 거듭할 때만이 얻을 수 있는 비급祕笈인 것입니다.
꿈꾸는 당신과 함께 별을
그렇다고 몰입하는 관계가 완벽해질 거라곤 생각하지 마십 시오. 한 평생을 함께해도 채워지지 않는 게 있을 테니까요. 가슴이 좀 아프지만 승인해야 합니다. 그이가 돌아누워서 신음하고 있으면 그냥 "아, 뭔가 내가 채워줄 수 없는 무엇 때문에 저러고 있겠구나" 하고서는 그 떠는 어깨를 실눈 뜨고 바라만 봐야 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뭔지도 모르지만 그냥 일단 토닥여줘
동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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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뒤처져 보일 때
대학교수라는 직업이 묘한 게, 제자들은 늘 이십 대이고 저 만 혼자 늙어간다는 겁니다. 아무리 해가 바뀌어도 신입생은 늘 스무 살 안팎인 것이지요. 청년 제자들과 호흡을 같이하려면 늘 애를 써야 합니다. 이미 화석이 되어버린 말을 신조어랍시고 써 먹었다간 더 뒤쳐져 보일 뿐. 그래서 최신 유행어도 귀동냥해가며 공부해봅니다만, 그것도 적당히 해야지 남용하면 오히려 역 효과, 주책없다는 소리만 듣기 십상입니다. 그러니까 '인싸' 정도만 돼야지 '핵인싸' 흉내를 내서는 곤란하다는 소립니다.
일거수일투족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SNS 속의 '인사이더' 들. 늘 분위기 좋은 곳에서 비싸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제집 드나들 듯 해외여행을 다니는 사람들.
인사이더 249
그들을 보며 나도 언젠간 저기에 가봐야지 마음먹으며 스크랩까지 해보지만 그 순간만 인싸들과 동일시할 뿐, 그 꿈이 실현된 적은 잘 없습니다. 그런 경험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 언제부턴가는 부러움을 넘어 은근히 부아가 올라옵니다. 내 삶은, 아무래도 너무 초라한 것 같습니다. 오랜 준비와 노력 끝에 드디어 어쩌다 그 인싸의 삶 가운데 하나를 겨우 흉내 내어 보는 건데, 그땐 이미 그곳은 더 이상 '핫 플'이 아닙니다. SNS에는 그새 새로운 인싸의 삶이 가득 올라와 있습니다. 누군가에겐 기본이지만 내겐 목표 너머에 있는 그 기 준, 그것이 인싸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유행이라는 건 늘 존재해왔지만, SNS 시대에는 유행의 유통기한이 너무 짧아졌습니다. 도대체 누가 만든지도 모르는 유행을 실시간으로 따라가느라 우리는 쉴 틈 없이 타인 의 삶에 촉각을 세우며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타인의 쇼핑, 타 인의 취미, 타인의 여행, 타인의 음식, 심지어 타인의 반려견과 자녀와 손주에 이르기까지 이것저것 무차별적으로 살포되는 이 미지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말입니다.
피곤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그 속으로 들어왔더니만, 과시와 엿보기와 모방과 찬양의 부채질에 휘둘리며 허파에 바람만 잔뜩 들어가버리고 마는 세계인 겁니다. 매일 새롭고 매일 그럴 듯한 '셀럽'들과 함께 소통하는 듯해 괜히 신이 나지만, 나도 모르게 어딘가 빠르게 소모되어버리는 듯한 느낌이 드는 곳, 그곳 은 인싸인 듯 인싸 아닌 인싸 같은 묘한 분위기, 거기에 취해 살짝 공중에 들린 듯 살아가는 매트릭스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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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관계
작가는 그 거지에 대해 측은지심을 갖고 바라본 게 틀림없습니다.
한번 질문방식을 이렇게 바꿔보고 싶습니다. 만일 각전 여섯 닢을 잃어버렸을 경우와 은전 한 닢을 잃어버렸을 경우를 비교 한다면, 어느 쪽이 더 아까울까요? 소유나 사용의 관점이 아니라 상실의 관점에서 보면 가치는 달라집니다. 저도 요즘 제가 가진 것 중 가장 소중한 게 뭘까 봤더니 자꾸 줄어들기만 하는 모 발 아닌가 싶더라고요. 잃고난 뒤에야 가치를 깨달을 때가 많지 않습니까. 자, 그렇다면 이 경우에도 각전 여섯 닢이나 은전 한 닢이나 어차피 그 매력이 동일한 만큼 가치의 상실 정도도 동일 하다고 여겼을까요?
아닐 겁니다. 돈을 잃어버린 건 동일하지만, 은전을 잃어버린 건 돈만이 아니라 자신의 소망과 시간과 정성과 노력까지 상실한 것이니까요. 그러니, 희소성이나 환금성 같은 화폐가치는 계산에 넣지 않더라도, 당연히 은전 한 닢이 훨씬 소중했을 겁니다. 거지의 노력이 충분히 가상하게 여겨지는 대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전 한 닢에 그토록 집착하는 것은 여전히 무의미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무리 저마다 지향하는 가치가 다를 수 있고, 거지의 형편에서도 저런 소망을 누릴 가치가 있다 하더라도, 사용가치로나 교환가치로나 동일한 화폐일 뿐인데 단지 물질의 소유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은 걸 두고 바람직한 소망이라 말하기는 어려우니까요. 돈은 쓰기 위해 소유하는 것이지, 소유 그 자체를 위해 쌓아둘 건 아니지...
가진 것
301
소비를 위해 소유하거나 소유를 위해 소비하는 정도가 아니라, 실은 소유를 위해 소유하는, 상실이 두려워 소유를 하는 강박증 환자들입니다. 그렇게 쓰기만 하다 죽고, 그렇게 쓰지도 못하고 죽습니다. 그러고 보면 저 상해의 거지와 우리가 다를 게 무엇이 있겠는지요.
이처럼 소유라는 문제는 늘 생각을 오락가락하게 만드는 주제입니다. 한편으로는 나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아주 필수불가 결한 선한 행위로 인정되다가도, 다른 한편으로는 내 삶의 진수를 망가뜨리는 악한 행위인 양 받아들여지기도 하는 거죠. 그러기에 해마다 발표되는 세계 부호 순위 명단에 부럽기도 하면서 속으로는, 그래도 행복 순위는 그들이 우리보다 못할 거라 우기고 싶어지지 않습니까?
그나저나 궁금한게 하나 있습니다. 부자라고 하면 그 사람이 축적한 재산이 얼마인가를 기준으로 하던데, 하지만 돈은 쓰기 위한 것 아닙니까? 그러면 지난 한 해 동안 누가 제일 많이 썼느냐 이런 걸 기준으로 부자를 선정하면 결과가 어떻게 나올까요? 농담처럼 친구들끼리도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해봅니다. 내 돈이라 함은 평생 내가 번 게 아니라 내가 쓴 것 아닐까. 평생 10억 벌어 1억 쓴 사람이 있고 3억 벌어 2억 쓴 사람이 있다면 누가 더 부자겠는가? 물론 결론은, 그러니 오늘 네가 한턱 쏘라는 겁 니다.
306
당신의 버킷리스트
여러분의 '버킷리스트'는 무엇인가요? 저는 '유재석과 아이유 만나기' 빼고 다른 건 소박한 편입니다. 가족하고, 친구들하고, 그리고 혼자, 소박하게 배낭 하나만 들고 세계의 이곳저곳을 여행했으면 좋겠습니다. 기왕이면 달러만 가득 들어 있는 배낭이 좋겠군요.
'버킷리스트 bucket list'라는 말은 마치 소원을 가득 담은 바구 니처럼 근사하게 들리지만, 어원을 알고 나면 섬뜩합니다. 중세 시대에 교수형에 처하거나 목을 매어 자살할 때면 양동이, 영어로 버킷bucket을 뒤집어놓고 그 위에 올라서서 올가미를 목에 두 른 다음, 발을 굴러 양동이를 참으로써 끝을 맺었죠. 이를 '킥더 버킷 kick the bucket'이라 하는데, 그래서 이로부터 '죽기 전에 꼭 해 야 할 일 또는 하고픈 일들의 목록'이란 의미로 만들어진 말이 버킷 리스트 라는 겁니다.
잃은 것
323
용서야 받든 못 받든 그건 내 몫이 아니고, 다만 그때 그랬어야 했는데 하지 못한 일들에 관해 죽을 용기 내어 매듭짓고 싶을 따름입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는 지우고 싶은 후회들이 참 많이도 남는 다고 합니다. 천 명의 죽음을 지켜본 한 호스피스가 쓴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 가지》라는 책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죽을 때 가장 많이 후회하는 것 중 첫 번째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맙다 는 말을 많이 했더라면 좋았을 텐데'였답니다.
그 다음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했더라면',
'조금만 더 겸손했더라면',
'친절을 베풀었더라면',
'나쁜 짓을 하지 않았더라면',
'꿈을 이루려 노력했더라면',
'감정에 휘둘리지 않았더라면',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났더라면',
'기억에 남는 연애를 했더라면',
'죽도록 일만 하지 않았더라면',
'가고 싶은 곳으로 여행을 떠났더라면',
'고향을 찾아가 보았더라면',
'맛있는 음식을 많이 맛보았더라면',
'결혼했더라면',
'자식이 있었더라면'....
아마도 저 목록들을 뒤집어놓으면 그게 바로 버킷리스트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잘 보면, 저 항목 하나하나 되게 쉬워 보이지 않나요? 진작 마땅히 해야 했던 것들 아닌가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하기가 뭐가 그렇게 힘들었을까요? 당장 하면 되는 건데, 너무 당연해서 오히려 안 하는 겁니다. 그러고 후회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나요? 우리는 특별한 어떤 것이 아니라 삶의 가장 평범한 일들을 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326
7장 소유
죽음이란 내가 가장 사랑하던 사람을 영영 만나지 못하게 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별이 그렇긴 하죠. 대충 사랑한 사이라면 헤어져도 그만, 어쩌다 다시 볼 수도 있고, 그래도 그만저만 살아갈 수 있을텐데, 가장 사랑하던 사람은 이별해서 다시 만나기 힘듭니다. 끝내 영영 못 만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어디선가 살아만 있으면 언젠가는 또 만날 수도 있고, 그러리라는 바람이라도 가질 수 있겠지요. 하지만 죽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죽는다는 건 영영 만나지도 못하고, 만 날 기대조차 영영 못하게 되는 겁니다.
메멘토모리 Memento mori! '죽는다는 걸 잊지 마라.' '우리는 언젠가 죽는 존재라는걸 잊지 마라.' 간단히 말해 '죽음을 잊지 마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이 말은 로마공화정 시절의 개선식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승전해 돌아온 장군은 얼굴을 붉은 색으로 칠하고 백마가 이끄는 전차를 타면서 시내를 가로질렀습니다. 군중의 열렬한 환호를 한 몸에 받으며 개선문을 통과하면 아마도 그는 자신이 마치 신으로 숭배받는 듯한 벅찬 감동에 휩싸였 을 겁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 개선식의 마차에는 항상 노예, 그것도 아주 비천한 노예 한 명을 옆에 탑승시켰다고 합니다. 개선식이 이어지는 동안 이 노예는 끊임없이 이 장군의 귓가에 속삭여주어야 했다는군요. “메멘토모리, 메멘토모리...." 그러니까 죽음을 잊지 말라고 계속 이야기했다는 겁니다.
죽음을 조심하라는 이야기였을까요? 아니죠. “야, 나대지마. 너무 우쭐해하지마. 지금 네가 이렇게 대접받지만 너는 신이 아닌 인간일 뿐이야. 너도 죽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마"라고 끊임없이 경각심을 일깨 웠던것이죠. 그 뒤 이 말은 현세에서의 쾌락이나 부귀나 영예가 부질없고 공허하다는 의미로, 즉 다소 허무주의적인 의미로 변질되어 쓰이기 시작합니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뫼만 높다 하는 나태와 의지박약도 문제지만, 무턱대고 오르고 또 오르면 뭐하겠느냐는 지적인 셈이지요.
잃은 것
333
이야기였을까요? 아니죠. "야, 나대지 마. 너무 우쭐해하지마. 지금 네가 이렇게 대접받지만 너는 신이 아닌 인간일 뿐이야. 너도 죽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마"라고 끊임없이 경각심을 일깨웠던 것이죠. 그 뒤 이 말은 현세에서의 쾌락이나 부귀나 영예가 부질없고 공허하다는 의미로, 즉 다소 허무주의적인 의미로 변 질되어 쓰이기 시작합니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뫼만 높다 하는 나태와 의지박약도 문제지만, 무턱대고 오르고 또 오르면 뭐하겠느냐는 지적인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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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에서 -이성선
사람들은 히말라야를 꿈꾼다
설산
갠지스강의 발원
저 높은 곳을 바라보고
생의 꽃봉우리로 오른다
그러나
그 산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생의 끝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가기 위하여
많은 짐을 지고 이 고생이다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세계사, 2000)
히말라야를 꿈꾸는 사람이 있습니다. 갠지스 강의 발원지, 설산 저 높은 곳을 향해 오르고 또 오릅니다. 그러나 정상에 올라와보니 정상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여기에 오려고 그 많은 등짐을 지고 이 고생을 했단 말인가. 알피니스트 여러분 괜히 흥분하지 마시고, 이 시의 히말라야를 부디 헛된 욕망, 맹목적인 인생의 목표 지점 정도로 읽어주세요. 더 이상 오를 데가 없는 죽음도 마찬가지, 아무것도 남김없이 다 놓고 빈 몸으로 가는 건데, 평생 뭐 하러 그렇게 많은 짐을 지고 고생해 왔던가 생각해보라는 겁니다. 정상에 오르지도 못하고 설령 오른들 어차피 그 끝에는 허무, 빌 허虛, 없을 무無, 말 그대로 텅비고 아무것도 없을 텐데 말이죠.
그러나 죽음은 단순한 허무 그 이상입니다. 로마시대 황제 이자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마치 수천 년을 살 것처럼 살아가지 말라. 와야 할 것이 이미 너를 향해 오고 있다. 살아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선한 자가 되라.” 허무한데 왜 최선을 다해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단 말일까요?
잃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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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관해 생각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삶을 생각하는 것 입니다. 그냥 정신없이 살 때는 삶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요, 그 냥 삶을 사는 거지. 그런데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비로소 산다는 게 뭔지를 생각하는 것이죠. 이렇게 사는게 과연 의미 있는 건 가? 그런가 하면 타인의 죽음을 보면서 자신의 죽음도 깨닫게 되죠. 죽음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사랑하는 사람도 언젠간 죽을 것입니다. 이 절대적인 사실을 통해 '아, 나도 죽는구나' 하는 삶의 본질을 깨닫습니다.
인생이란, 요약하면, 살다가 죽는 것 아닐까요. 이렇게 인생에 대한 설명이 단순해져버리는 순간 오히려 삶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는 역설도 만들어집니다. 스티브 잡스의 유명한 스탠퍼드 대학 졸업 축사의 일부입니다.
죽을 날이 그리 멀지 않음을 기억하는 것은 인생의 중대한 결정들을 내리는 데 도움이 되는 도구들 중 가장 중요한 겁니다.
왜냐하면 거의 모든 것들, 모든 외부로부터의 기대, 자존심, 당혹감이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 등 이 모든 것들은 죽음 앞에서 맥을 추지 못하며 정말 중요한 것만 가려내주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여러분이 무언가를 잃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함정을 피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이미 가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가슴으로 느끼는 대로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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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얼뜬 표정으로 아이들이 정말로 사진에 귀를 기울이자 키팅 선생은 사진 속, 아니 무덤 속 선배들을 대신해 속삭입니 다. "카르페디엠 Carpe diem! 카르페디엠!"
선배들은 이미 죽었습니다. 모두 잘나간 사람들이지만 지금은 흙으로 돌아가 수선화의 비료가 되었죠. 허무합니다. 그래서 선배들이 안타까이 후배들에게 말해주고픈 겁니다. 카르페디엠, 카르페디엠.
이 말의 원조 격인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그대가 현명하다면 포도주는 바로 오늘 체에 거르라고, 짧기만 한 인생에서 먼 희망은 접으라고, 시간은 우리를 시샘하며 흘러가 버리니 내일은 믿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카르페디엠을 '오늘을 즐겨라'라고 번역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 말은 때를 놓치지 말라는 뜻에서 그리 멀지 않습니다. 그러니 지금 이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생각해보라는 의미에서 볼 때 카르페디엠은 메멘토모리와 상통하는 말입니다. 카르페디엠과 메멘토모리는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한 교훈인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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