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타나타노트를 대학 다닐때 읽었습니다. 세월이 한참 지난 뒤에도 그 소설이 남긴 이미지가 지워지지 않고 낡은 필름인화 사진 같이 기억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 당시 죽음을 여행한다는 작가의 아이디어에 찬사를 보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번 소설도 타나타노트의 기억을 떠오르게 합니다. 뇌에 대한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찻주전자를 레인지 위에 올려놓는다.
그는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고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떤다.
「무슨 근거로 그게 계획적인 살인이라고 말하는 거죠?」
「내가 알고 있는 사건 중에 이와 유사한 것이 있어서 그래요.
<사랑에 치여> 죽었다는 사람은 사뮈엘 핀처가 처음이 아니에요.
1899년에 프랑스 공화국의 대통령 펠릭스 포르가 고급 창녀들의 매춘을 알선하는 어떤 호텔에서 횡사했습니다. 그 사건을 두고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이런 얘기를 해요. 신고를 받고 달려온 형사들이 뚜쟁이 여주인에게 물었답니다. <각하에게 아직 의식이 있소?>라고 말이에요. 그러자 여주인이 대답하더랍니다. <의식이 무슨 낯짝으로 아직 남아 있겠소? 달아나도 벌써 한참 전에 뒷문으로 달아났겠지> 하고.」
뤼크레스는 웃지 않는다.
「대관절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거죠?」
「경찰은 대통령이 심장 마비로 서거했다고 간단히 발표하고, 그 사건을 비밀에 부쳤어요. 그 비밀이 경찰권 밖으로 새어나간 것은 한참 뒤의 일입니다. 하지만 그 죽음의 <추잡한〉 측면 때문에 조사다운 조사가 이루어질 수 없었어요. 매음굴에서 한창 방사를 벌이다가 죽는다는 건 조롱거리가 되고도 남을 일이니까요. 결국 아무도 그 사건을 진지하게 분석하지 않았지요.」
「당신은 예외라는 얘기로군요.」
「나는 학창 시절에 그냥 호기심에서 그 사건을 범죄학 논문 주제로 선택했어요. 관련 기록을 다시 뒤지고 증언을 재검토해 봤지요. 그러다가 살인 동기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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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펠릭스 포르는 부정부패를 일소하는 캠페인을 전개하려던 참이었어요. 그는 자기 수하에 있던 정보 기관의 내부에서조차 그 캠페인을 벌이려 했습니다.」
뤼크레스 넴로드는 찻주전자를 들어 커다란 잔 두 개에 향긋한 차를 가득 따른다.
「나타샤 안데르센은 자기가 사뮈엘 핀처를 죽였다고 자백했어요. 내가 잘못 알고 있나요?」
이지도르는 차를 너무 빨리 마시려고 하다가 혓바닥을 델 정도로 뜨겁다는 것을 알고는 차를 호호 불기 시작한다.
「그녀는 자기가 그를 죽인 것으로 믿고 있는 겁니다.」
이지도르는 차가 너무 뜨거워서 혓바닥을 델 뻔했던 것을 내색하지 않고 숟가락을 하나 달라고 한다. 그러더니 찻잔에 숟가락을 넣어 열심히 돌리기 시작한다. 팽이 효과로 차를 식히려는 모양이다.
「그리고 두고 보면 알겠지만, 이제부터 그녀와 자보려고 치근거리는 남자들이 아주 많이 생길 겁니다.」
「마조히즘 때문인가요?」
뤼크레스는 뜨거운 차를 아무렇지도 않게 한 모금 후루룩 마시고는 그렇게 묻는다.
「호기심 때문이죠. 사랑의 신 에로스와 죽음의 신 타나토스가 하나로 뒤섞이는 상황에 끌리는 겁니다. 게다가 사마귀의 세계에서 보는 것처럼 수컷이 암컷에게 잡아먹히는 일은 생물학적 원형의 하나예요. 이 원형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강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마귀 암컷이 교미 도중에 수컷의 머리를 뽑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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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맛보는 휴식과 침묵의 시간이다.
뤼크레스는 문득 어떤 사람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생각하지만, 그 생각 중에서 표현되는 것은 너무나 적다. 그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정보가 실종된다. 우리는 사람들의 생각 중에서 단지 그들이 표현하는 것만을 알 뿐이다.
이지도르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갑자기 손목시계를 본다.
「빨리, 뉴스 시간이에요!」
「뭐가 그리 긴급한게 있다고 그래요?」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 필요가 있어요.」
타이틀은 이미 지나갔고, 이제 각각의 소식을 상세하게 전해주는 시간이다.
<고등학교 교사들이 파업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봉급 인상 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시위 장면이 화면에 나타난다.
「교사들의 시위도 동기는 똑같네요.」
뤼크레스는 흥미 없다는 듯이 냉소를 흘린다.
「당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어요. 사실, 저들이 원하는 건 돈이 아니라 존경이에요. 예전엔 교사의 사회적 지위가 높았어요. 교사가 된다는 건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람이 된다는 뜻이었지요. 오늘날 교사들은 자기들을 더 이상 존경하지 않는 학생들과 씨름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그들에게 승산 없는 싸움을 벌이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부모 역할을 포기한 사람들 대신 부모 노릇까지 하라는 겁니다. 뉴스에서는 교사들을 마치 휴가와 특권에 굶주린 사람들로 묘사하고 있지만, 그들이 원하는건 그저 조금 더 많은 인정과 존경입니다. 내가 보기엔, 그들은 할 수 만 있다면 플래카드에 <봉급 인상)이 아니라 <더 많은 존중>이라는 요구를 내걸 겁니다. 사실, 사람들이 겉으로 내세우는 동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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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아파요, 이지도르?」
내가 너무 예민한가 봐요.」
그녀는 텔레비전을 끈다.
그는 짜증을 내듯이 얼른 텔레비전을 다시 켠다.
「현실을 외면하면, 내가 너무 안일하고 비겁하다는 느낌이 들 것 같아요. 이 세상에 단 하나라도 야만적인 행위가 존재하는 한, 나는 진정으로 편안할 수가 없을 거예요. 위험이 닥치면 모래에 머리를 묻어 버림으로써 위험을 보지 않으려 한다는 타조처럼 우리 눈앞의 엄정한 현실을 외면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녀가 귀엣말을 하듯이 나직하게 말한다.
「우리는 모든 세상사에 관해 고민하려고 여기에 내려온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하나의 살인 사건에 관해 조사하려고 왔어요.」
「바로 그거예요. 살인 사건에 관해 조사를 하다 보니까 저런 걸 보면서 생각이 더 많아지는 거지요. 매일 수천 명의 사람들이 훨씬 더 비참한 상황에서 살해당하고 있는데, 한 사람의 죽음에 관해 조사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은 거죠.」
「만일 지금 우리가 그 죽음에 관해 조사하지 않는다면, 매일 부당하게 살해당하는 사람들의 수가 수천에서 하나 더 늘어날 거예요. 모두가 어떻게 하든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살인이 날로 증가하고 진정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는 거죠.」
이지도르는 그녀의 설득에 마음이 바뀌어 스스로 텔레비전을 끈다. 그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다가 조용히 말문을 연다.
「내 동기가 뭐냐고 물었죠? 크게 보면 공포가 아닌가 싶어요. 나는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 행동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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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온몸이 후끈거리고 욱신거렸다. 피복이 벗겨진 전선을 손으로 만졌다가 220볼트의 전기에 충격을 받았던 때와 비슷했다. 후진하던 자동차가 그의 발끝 위로 지나갔던 때와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그는 그 순간들의 고통을 기억하고 있었다. 정수리까지 짜르르 하게 쑤시고 올라왔다가 안면의 신경망을 자극하여 얼굴이 타버릴 듯한 느낌을 주던 그 고통을. 갑작스럽고 격렬했던 다른 고통들의 기억까지 덩달아 뇌리에 떠 오르고 있었다. 말에서 떨어져 팔이 부러졌던 일. 문의 돌쩌귀에 손가락이 끼였던 일. 손톱 하나가 살 속으로 파고들었던 일. 학교에서 휴식 시간에 장난을 치던 중에 어떤 아이가 갑자기 그의 머리카락을 홱 잡아당겼던 일. 그런 고통의 순간에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단 하나뿐이다. 우리는 그저 그 순간이 맺기를, 그 순간 이 당장에 중단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가 공중에 튕겨 올랐다가 다시 길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번개처럼 그의 뇌리를 스친 또 하나의 생각이 있었다. 그건 <나는 죽는 게 두렵다>는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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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 법의학 연구소. 그라스 대로 223번지, 칸 시내를 내려다보 는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장식에 공을 들인 건물이라서 밖에서 보면 죽음의 장소라기보다 아름다운 빌라 같은 느낌을 준다. 죽음과 애도를 상징하는 사이프러스 울타리가 계수나무로 장식된 정원을 둘러싸고 있다. 파리에서 온 두 기자는 건물 안으로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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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를 이행하고 있고, 그것을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있어요」
뤼크레스는 수첩을 꺼내어 적으며 동기의 목록을 다시 나열 한다.
「첫째, 고통을 멎게 하는 것. 둘째,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것. 셋째, 생존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 넷째, 안락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 다섯째, 의무감.」
이지도르가 말끝을 단다.
「바로 그 <의무감>에서 사람들은 전쟁터에 나가는 것을 받아들이고 희생을 견뎌 내죠. 사람들은 양떼 속에 들어 있는 한 마리 어린 양처럼 길들여집니다. 그러고 나면 다시는 무리를 떠날 수 없게 되고, 무리 속의 다른 양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행동하지요. 바로 그런 이유로 누구나 표창을 받으려 하는 것이고, 임금 인상 이나 신문 기사 등을 통해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것 입니다. 안락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소비는 부분적으로 이 의무감이라는 개념과 연결되어 있어요. 사람들이 텔레비전이나 자동차를 사는 까닭은 꼭 그것들이 필요해서가 아닙니다. 자기가 똑같은 무리에 속해 있다는 것을 이웃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사는 경우도 있지요. 사람들은 가장 멋진 텔레비전이나 가장 멋있는 자동차를 가지려고 애쓰기도 합니다. 그건 자기가 부유하다는 것, 자기가 무리를 구성하는 가치 있는 요소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 그러는 겁니다.」
조르다노 교수가 돌아온다. 머리에 스프레이를 뿌리고 빗질을 한결 정성스럽게 한 티가 난다. 가운도 새것으로 갈아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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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제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나라입니다. 사람은 똑똑해지고 사고력이 높아질수록 심성이 여려지게 마련이죠. 서구의 정치 지도자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신 병원을 거쳐 갔는지를 안다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나는 성 마르그리트 병원에 머물던 시절과 관련해서 대단히 기분좋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바닷가의 아름다운 자연 속에 있다 보면, 몸과 마음의 피로가 싹 풀리지요. 녹음이 짙고 꽃이 흐드러진 섬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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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탱씨 마르탱씨 내 말 들려요?」 이 소리들이 귓바퀴를 지나고 바깥귀길을 지나서, 귀지에 닿았다. 귀지란 고막을 보호하고 고막의 탄력성을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노르스름하고 약간 기름기가 있는 물질이다. 소리의 파동은 이 장애물을 돌아 엄밀한 의미에서의 고막을 진동시켰다. 고막 뒤에는 공기로 채워진 빈 공간, 즉 고실(鼓室)이 있다. 고실 안에는 귓속뼈 세 개가 관절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맨 앞의 망치뼈는 고막에 붙어 있어서 고막의 진동을 그대로 전달한다. 이 진동은 다음 뼈인 모루뼈에 전달되고, 다시 이 모루뼈는 맨 끝의 뼈를 움직인다. 이 셋째 뼈는 생김새가 말을 탈 때 발을 디디는 장치인 등자를 닮았다 해서 등자뼈라 불린다. 이 세 귓속뼈가 소리 자극을 기계적으로 증대시킴으로써 의사의 너무 약하다 싶은 목소리가 증폭되었다.
파동은 다시 속귀로 전달되었다. 속귀에는 달팽이 껍질처럼 생겼다 해서 와우각(蝸牛殼) 18)이라 불리는 기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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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모가 달린 1만 5천여 개의 신경 세포를 품고 있는 이 기관이 바로 진짜 청각 수용기다. 파동은 여기서부터 전기 신호로 변화되어 청각 신경을 타고 거슬러 오르다가 대뇌 관자엽'의 가로관자이랑20) 에 도달했다. 거기에는 각각의 소리에 하나의 의미를 부여하는 소리 사전이 있었다.
「마르탱 씨(이건 나다), 마르탱 씨(이 사람이 자꾸 나를 부르 는 건 내가 자기 목소리를 듣지 못할까 봐 걱정하고 있다는 뜻이다), 내 말 들려요?(이 사람은 내 쪽에서 어떤 대답이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어떻게 하지?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데!)」
그는 참담한 심정으로 눈꺼풀을 깜박였다.
「깨어나셨군요. 안녕하세요? 나는 사뮈엘 핀처라는 의사입니 다. 이제부터 내가 마르탱 씨를 돌볼 거예요. 좋은 소식 하나와 나쁜 소식 하나가 있어요. 좋은 소식이란, 마르탱 씨가 사고를 당 하고도 살아남았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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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크레스가 잘라 말한다.
웨이터는 그들 자리를 떠나기 전에 식탁을 장식하는 초 두개 에 불을 붙인다. 식탁을 사이에 두고 그들이 마주앉아 있는 이곳 은 레스토랑 겸 나이트클럽 <즐거운 부엉이>다.
별로 크지 않은 홀을 수백 개의 가면들이 장식하고 있다.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사람 얼굴 모양의 가면들이 벽들이며 천장을 뒤 덮고 있으니, 군중이 모든 각도에서 손님들을 관찰하고 있는 듯 한 느낌이 든다.
무대 위에는 <최면술사 파스칼 선생>이라고 쓴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이지도르, 저거 믿어요? 최면술 말이에요.」
「나는 암시의 힘을 믿어요.」
「암시라는 게 뭐죠?」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무슨 색깔이죠?」
「흰색이요.」
「이 종이는 무슨 색깔이죠?」
「흰색이요.」
「그럼 젖소는 뭘 마시죠?」
「우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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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가요, 뤼크레스, 당신이 나보다 빠르니까 먼저 가요. 나도 뒤따라갈게요.」
그런 말은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그가 무어라고 하기 도전에 벌써 달음박질을 시작한 터다.
그녀의 심장이 아주 빠르게 박동하면서 피를 동맥으로 보낸다. 피는 소동맥으로 퍼져나간 다음 장딴지 근육의 모세 혈관으로 들어간다. 그녀의 발가락들은 몸이 더 민첩하게 앞으로 돌진하도록 길바닥에서 가장 디디기 좋은 곳들을 찾아 나간다.
파스칼 핀처 역시 숨을 헐떡거리면서 달리고 있다. 그가 다다른 곳은 달빛이 은은한 텅빈 백사장이다. 세 군인은 거기에서 그 를 붙잡아 땅바닥에 쓰러뜨린다.
「쪽빛 목련.」
최면술사는 자신감을 잃은 채 에멜무지로 그렇게 되뉜다.
그러나 상대는 귀를 막은 채 소리를 지른다.
「내 머릿속에서 그놈의 것을 없애 버려야해. 지금 당장. 그 공연을 보았거나 그 얘기를 들은 사람을 만날 때마다 신발 한 짝을 들고 바보 노릇을 해야 할 판이야. 평생 그렇게 살 수는 없어.」
최면술사는 천천히 다시 일어선다.
「이제 귀 막지 말고 내 말 들어요. 내가 해결해 줄게요.」
「속임수 쓰면 안 돼, 알았지?」
군인은 귓바퀴에서 손가락을 빼낸다. 하지만 여차하면 다시 귓 구멍을 막으려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아브라카다브라, 28) 당신을 <쪽빛 목련>에서 풀어 주겠소, 이 제부터(그는 한 손을 쏙 움직여 보인다), 당신은 (쪽빛 목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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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묘한 힘을 지니고 있다. 무뚝뚝하던 뱃사람이 나긋나긋해진다.
「타시오. 파스칼 핀처의 친구분들이라니까 그냥 눈감아 주겠소」
모터가 웅웅거리기 시작한다. 뱃사람은 배를 묶고 있던 밧줄을 푼다.
「저 아저씨는 또 다른 욕구에 따라 움직이고 있어요. 우리 목록에 일곱째 항목을 추가해야겠어요.」
뱃사람은 자기 손님들에게 깊은 인상을 줄 양으로 하얀 연기를 조금 더 많이 내보낸다. 배의 이물이 가볍게 들린다.
뤼크레스는 수첩을 펴들고 〈여섯째 동기: 분노> 다음에 <일곱 째 동기: 성애>를 추가한다.
이지도르는 재킷에서 책 크기만 한 소형 컴퓨터를 꺼내어 그 목록을 베껴 둔다. 그는 자판을 두드려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한 다음, 인터넷에 접속한다.
뤼크레스가 몸을 기울여 들여다본다.
「지난번에 저수탑을 개조한 은신처에서 당신을 만났을 때는,텔레비전이며 전화며 컴퓨터 따위와는 담쌓고 사는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었나요?」
「생각을 바꾸지 않는 건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죠.」
그는 장난감 같은 소형 컴퓨터를 그녀 쪽으로 내밀어 그것의 성능을 보여 준다. 인터넷에 접속된 컴퓨터 화면에 마침 움베르토 로시의 사회 보험 카드에 기록된 신상 정보가 나타나고 있다. 54세, 골프 쥐앙34)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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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랭스의 두 섬이 수평선에 모습을 드러낸다. 먼저 나타난 것은 선착장과 그 왼쪽에 요새를 거느리고 있는 성 마르그리트 섬 이다. 바로 그 뒤에는 시토 수도회의 수도원을 품고 있는 성 오노라 섬이 있다.
<카론>은 그리 빠른 배가 아니라서, 칸 항구에서 성 마르그리트 섬으로 건너가는데에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린다.
움베르토는 바다의 요정 세이렌들의 얼싸안은 모습이 조각된 커다란 해포석 파이프를 흔들며 소리친다.
「저 뭍에 어떤 세상이 있는지 생각해 보시오! 사람들은 행복하게 사는데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지고 있지만, 자기들의 자유를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고 있소. 그래서 그들의 의심과 회의는 갈수록 깊어져 가고 있소. 그 무수한 질문들이 뒤엉켜 결국 누구도 풀 수 없는 매듭이 되고 말았소.」
그는 파이프에 불을 붙이고 담배 연기를 몇 모금 뱉어 낸다. 매캐한 담배 연기의 소용돌이가 요오드를 많이 함유한 공기와 뒤섞인다.
「한번은 세상의 모든 번뇌를 끊을 수 있고 생각하는 것조차 멈출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만난적이 있소. 선(禪)을 하는 수도자였지요. 그는 눈을 이렇게 감고 가만히 앉아 있더니, 자기 머릿속이 완전히 비어 있다고 주장했소. 나도 그를 따라서 해보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소.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를 생각하게 마련이오. <아, 마침내,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구나!>
34) 칸 근처, 앙티브 곶과 레랭스 섬 사이의 만에 자리 잡은 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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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행복감을 느끼며 눈을 감는다. 그는 니코틴을 빨리 빨아들이려고 급하게 연기를 들이마신다.
「담배 없는 정신 병원이라니, 놀랍군요. 내가 방문해 본 다른 정신 병원에서는 담배 피우는 사람들을 언제나 볼 수 있었거든 여
「정작 핀처 박사 자신은 담배를 피우지 않았나요? 딥 블루 IV 와 체스를 둘 때 담배를 피웠던 것 같은데.」
뤼크레스가 덧붙인다.
「그건 규칙을 공고히 하는 예외죠. 대국에 집중하느라고 신경 의 흥분이 극에 달했던 겁니다. 자칫하면 그냥 무너져 버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요.」
뤼크레스는 수첩을 다시 꺼내어 아주 빠른 손놀림으로 〈여덟 째 동기: 담배?>라고 쓴다.
이지도르는 그녀의 어깨 너머로 훔쳐보다가 이렇게 귀엣말을 한다.
「아니에요. 더 넓은 개념에 포함시켜야 돼요. 담배, 술, 마약 등을 함께 묶어 봅시다. 습관성 물질이나 향정신성 약물이라고 하면 되겠네요. 자아, 정리해 봐요. 5) 의무감, 6) 분노, 7) 성애. 8) 습관성 물질.」
로베르는 완전히 행복감에 젖어 있다. <니코 씨의 풀>38)로 자기 피를 더럽히고도 마냥 행복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가 피운 담 배가 연기 검출기를 작동시킨 탓에 난데없이 벨이 울리기 시작한다. 그는 불안한 표정으로 서둘러 담배를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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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동생 사미에게 동기를 부여한 것이 무엇이었냐고요? 좋은 질문입니다.」
<즐거운 부엉이>의 최면술사는 대화를 나누면서, 당근 하나를 들고 하얀 토끼 한 마리를 놀리고 있다. 토끼가 당근을 먹으려고 다가들 때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얼른 당근을 뒤로 뺀다.
「무언가에 열정을 불태우며 자아를 실현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에게 삶의 의욕을 고취시키는 강력한 동기지요. 우리는 누구나 저마다의 재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찾아내고 계발하는 것이지요. 그 재능을 계발하는 과정에서 열정이 생겨납니다. 이 열정이 우리를 이끌고, 모든 시련을 견딜 수 있게 하고,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돈이니 사랑이니 명예니 하는 것들은 덧없는 보상일 뿐이지요.」
뤼크레스는 얼른 수첩을 꺼내어 이렇게 적는다.
<아홉째 동기: 개인적인 열정.>
「사미의 말에 따르면, 우울증의 대부분은 개인적인 열정이 없는데서 생겨난다고 합니다. 체스나 브리지나 바둑에 푹 빠져 있는 사람, 음악이나 무용이나 독서에 심취해 있는 사람, 아니면 버들고리나 레이스, 우표 수집, 골프, 복싱, 도자기 같은 것에라도 취미를 붙이고 있는 사람은 우울증에 걸리지 않습니다.」
최면술사는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 당근을 가지고 토끼를 놀린다. 토끼는 노력의 대가를 얻지 못해서 더욱더 안달을 한다.
「왜 토끼에게 그런 장난을 치는 거예요?」
뤼크레스가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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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당근을 보게 되면, 나에게 순종해야만 그것을 먹을 수 있 다고 생각하게 될 겁니다.」
「모자 속에서 악몽 같은 시간을 견디도록 훈련시키는거로 군요.」
「우리 사회가 우리로 하여금 출퇴근 시간에 콩나물 시루 같은 지하철을 견디도록 훈련시키는 것도 이것과 별반 다를 게 없지 요. 다른 점이 있다면, 토끼처럼 당근을 얻는 대신 우리는 봉급을 받는다는 것이지요. 파리 사람들은 그걸 알아야 해요.」
흰 토끼는 이제 욕구가 절정에 달해 있다. 귀를 바짝 세우고 콧 수염을 바르르 떨면서 저의 간절한 욕구를 더욱더 애처롭게 표현 한다. 심지어는 이지도르와 뤼크레스에게 눈짓을 하기까지 한다. 마치 당근을 얻을 수 있도록 제 편을 들어 달라고 부탁이라도 하 는 듯한 눈빛이다.
「우리는 모두 어떤 자극에 조건 반응을 일으키도록 길들여져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조건 반응을 쉽게 일으킬 수 있는 존재들 이지요……………….
「정신을 바짝 차리고 경계를 하고 있을 때는 그렇지 않아요. 나는 이지도르에게 속아 넘어간 적도 있고, 지난번에는 최면에 걸리기도 했지만, 이젠 더 이상 당하지 않을 거예요. 정신만 바짝 차리면 그럴 일이 없어요.」
「아 그래요? 그럼 어디 한번 해볼까요? 〈보크〉라는 말을 열 번 되풀이해 보세요.」
그녀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그가 시키는 대로 한다. 그녀가 열 번째로 <보크>를 되뇌자마자, 그가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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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프를 무엇으로 먹죠?」
포크요
그녀는 (보크>라는 말이 다시 튀어나오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그렇게 분명하게 소리를 냈다.
다음 순간, 아차 하면서 대답을 번복하려 하지만 이미 때가 늦 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숟가락이라는 뜻이었어요. 당연히 숟
가락이죠......젠장! 내가 졌어요.」
「이주 간단하게 조건 반응을 유도할 수 있는 예죠. 대부분의 사람들이 속아 넘어가요. 주위 사람들을 상대로 한번 시험해 보세요.」
이지도르는 방안을 찬찬히 둘러본다. 모든 장식이 뇌를 주제로 삼고 있다. 방 한쪽에 모아 놓은 중국제의 작은 장난감들은 플라 스틱 뇌와 다리로 이루어져 있다. 태엽을 감아 주면 깡충깡충 뛰 어다니는 장난감이다. 석고로 된 뇌들도 있다. 공상 과학 영화에 나음 직한 로봇 괴물들도 보인다. 머리가 열려 있고 뇌가 투명하 게 보이는 괴물들이다.
흰 토끼는 이제 다소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한다. 파스칼은 토끼를 진정시키기 위해 우리 안에 도로 집어넣는다. 토끼의 흥분이 점점 고조된다.
「내 아우는 몇 년 간의 무언증(無言症) 단계를 겪은 적이 있습 니다. 우리 아버지 때문이었어요. 아버지는 감수성이 아주 예민한 의사였지요. 문제는 알코올 중독이었어요. 아버지는 술만 마시면 잔인하고 자학적인 사람으로 변했어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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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재력을 지닌 경우에는 인간 스스로에 의해 제거되기도 한다.〉
마르탱은 성한 한쪽 눈으로 자기 주위의 다른 환자들을 바라 본다.
<가엾은 사람들. 옛날에 인간은 아마도 정신 감응 능력을 지닌 존재였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를 이루어 사는 삶이 그런 능력을 잃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어둠 속에 갇혀 지내던 시기를 겪으면서 예민해진 그의 귀로 멀리서 간호사들이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그 자리에 없는 어떤 사람을 놓고 혹독한 비판을 가하는 중이었다.
<저들은 자기들의 말이 남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걸 안다면, 저렇게 말을 허비하지는 않을 것 이다.>
마르탱은 관념을 주제로 해서 많은 생각을 하고, 그것을 글로 정리하였다.
몇 주일이 지나자, 그렇게 모인 글이 8백 페이지 가까운 원고가 되었다. 핀처 박사는 원고를 읽어 보고는 내용이 좋다는 생각이 들어 그것을 파리의 여러 출판사에 보냈다. 하지만 출판사들의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그런 주제는 이미 한물갔다는 거였다. 1997년에 장 도미니크 보비라는 파리의 언론인이 심장 혈관계의 갑작스런 이상으로 리스 환자가 된 바 있었다. 그는 자기 병을 주 제로 해서 『잠수복과 나비』라는 책을 썼다. 그런데, 그가 책을 쓴 방법은 장 루이 마르탱이 컴퓨터의 안구 인터페이스를 이용한 것 보다 한결 감동적이었다. 즉, 그의 병실에 파견된 한 여직원이 그 의 눈꺼풀 신호에 맞추어 알파벳 46)을 한 자 한 자 받아 적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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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해지기를 기다리지 말고 그전에 웃어야 한다. 자칫하다가는 웃어 보지도 못하고 죽게 된다>라는 말도 보인다. 17세기의 작가라 브뤼예르의 말이다.
「19세기의 위대한 진화론자들, 예컨대 허버트 스펜서나 알렉산더 베인 같은 사람들은 쾌락을 추구하는 능력이 자연도태의 한 요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시대에 벌써 그들은 〈즐기는 능력이 가장 뛰어난 자가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의 개념을 확립했습니다. <가장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보다 훨씬 더 예리한 개념 이죠.」
미샤는 커다란 서가 하나를 보여 준다. 서가에 진열된 책들의 제목이 대단히 암시적이다. 이 책들은 몇 개의 열(列)로 분류되 어 있고, 각 열에는 <단순한 쾌락>, <복잡한 쾌락〉, 〈혼자서 얻는 쾌락>, <집단적으로 얻는 쾌락> 등의 이름이 붙어 있다.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들은 무한히 많습니다. 우리는 저 마다 특유의 쾌감을 가져다 주는 그 모든 것들의 완전한 목록을 작성하려 합니다. 모기에게 물린 곳을 긁는 것부터 우주 여행에 이르기까지, 카페에서 신문 읽기, 강가에서 산책하기, 암탕나귀 젖 속에서 목욕하기, 조약돌로 물수제비뜨기 등 모든 즐거움이 망라되어 있는 목록을 만들겠다는 것이지요. 에피쿠로스주의자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겸허함입니다. 성공한 인생이란 쾌락 의 작은 순간들을 모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쩌면 쾌락이라는 개념의 최대 난적은 행복이라는 개념일지 도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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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여자들과 돌아가면서 사랑을 나눈 뒤에.
샴페인을 홀짝거리면서 바다와 하늘의 풍광을 바라보고 있었습 니다. 멀리 보이는 야자수로 덮인 섬들과 청록색 바다와 오렌지 빛 석양을 구경하고 있었지요.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뇌리를 스 쳤습니다. <그건 그렇고, 이젠 뭘 하지?> 그러자 갑자기 울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나는 인간 사회가 나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의 정점에 있기 때문에 더 높이 올라갈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나는 만점을 받는 바람에 더 나은 점수를 받을 가능성을 잃 어버린 학생과 같았어요. 그런 깨달음은 나를 의기소침하게 만들 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도달한 꼭대기 위에 뭔가 다른 것이 없을 까 하고 찾아보았지요. 그러다가 찾아낸 것이 바로 시엘입니다.」
미샤가 샴페인 한 병을 꺼내어 모두에게 따라 준다. 그들은 일
제히 술잔을 들어 올린다.
「시엘을 위하여!」
「에피쿠로스를 위하여!」
「사미를 위하여........
제롬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을 잇는다.
「나는 사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잘 압니다. 그는 대단히 의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이 모든 점에서 기계보다 우수하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 체스에까지 남다른 의욕을 보였으니까요. 고 상한 대의명분을 위해 싸우는 행운을 누린 사람이지요. 미샤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우리가 여기에서 만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에피쿠로스주의와 이기주의를 혼동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사미는 그런 멍청한 에피쿠로스주의자가 아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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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미래에 유용할 것으로 예상되는 온갖 종류의 지혜가 이 인공 지능 프로그램에 집성되기에 이르렀다. 마르탱과 핀처 박사는 끝으로 미래의 인류를 염두에 둔 자기들 나름의 몇 가지 원칙들을 덧붙였다. 정신의 자유로움과 차이의 수용, 새로운 것 에 대한 관심, 모든 문제를 대화로 풀어 가는 태도 등을 강조한 원칙들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그렇게 내용이 풍부해짐으로써 마르탱의 전자 (電子) 무의식이 되었다.
핀처 박사는 이 프로그램에 아테나라는 이름을 붙였다. 오뒤세우스의 조언자 역할을 한 지혜의 여신 아테나를 염두에 둔 것이 었다.
마르탱은 그렇듯 <컴퓨터의 지원을 받는 도덕〉으로 무장하고, 움베르토로시를 어떻게 처리할까 하는 문제로 다시 돌아갔다. 그가 뭐라고 물어보기도 전에, 아테나는 마치 보드라운 깃털로 그의 대뇌 피질을 쓰다듬어 주기라도 하듯 도움말을 살그머니 뚱겨 주었다. <노자가 말하기를, 《누가 너에게 해악을 끼치더라도 앙갚음을 하려 들지 말라. 강가에 가만히 앉아서 그의 주검이 떠 내려가기를 기다려라>라고 했어요.>
마르탱은 움베르토 로시가 이미 삶이 내리는 벌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설령 마르탱 자신이 직접 응징을 했다 해도 그보다 더 따끔한 벌을 주지는 못했을 거였다.
문득 움베르토 로시가 죽음보다 더 나쁜 벌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미 쓰레기 같은 존재로 전락해 있었고, 그런 처지에 대해 스스로도 수치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에게는 한 순간 한 순간이 고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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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핀처 박사가 <당신의 변화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군요>라 고 한 말을 다시 떠올렸다. 핀처 박사는 이미 그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기 시작한 터였다. 이 정도에서 머물지 말고 더 멀리 나아가 야 했다. 핀처 박사를 더욱 놀라게 할 만한 일을 해야 했다. 용서 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 원수를 구해 주는 것. 그건 분명히 감동적인 일이었다.
<누가 너에게 해악을 끼치더라도 앙갚음을 하려 들지 말라. 강 가에 가만히 앉아서 그의 주검이 떠내려가기를 기다려라>라고 그러나 만일 그가 아직 노자는 말했다. 마르탱은 그 말에 < 살아서 허우적거리고 있다면, 익사 위기에서 그를 구해 줘라>라는 말을 보탰다.
아테나의 지혜가 그의 정신과 융합함으로써, 그의 머릿속에서 아주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움베르토 로시를 구하는 것은 내가 분노나 원한과 같은 감정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나는 이 용서를 출발점으로 삼아서 나 자신과 내 운명의 지배자가 되 고자 합니다.>
그는 핀처에게 그렇게 자기 생각을 써보이고, 움베르토 로시에 관해서 이야기했다.
<그 사람에게 일자리를 구해 주어야 합니다. 그도 왕년에는 훌륭한 신경 외과 의사였습니다. 불행을 잇달아 겪으면서 존엄성을 잃고 이성을 잃고 만 것이지요. 이제는 양심의 가책도 별로 느끼지 않으면서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부탁입니다. 그를 위해서 무언가를 해주세요, 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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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전문가들이 발견한 바에 따르면, 조증이 나타나는 시기에 환자들은 노르아드레날린을 비정상적으로 많이 분비한다. 이 신경 전달 물질이 많이 분비되면 신경의 정보 전달이 한결 신속하게 이루어질 수 있고, 이것이 창조적인 능력을 고양시킬 수도 있다.
<박사님,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세요?>
「아뇨, 마르탱 씨는 단지 무엇에 열중해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그 열정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자 마르탱은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것 두 가지를 핀처에게 알려 주었다. 그것은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과 체스였다. 마르탱은 컴퓨터 화면에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 하나가 나타나게 했다.
<이 그림을 보세요. 「성 십자가 후안의 그리스도」입니다. 달리는 부감 촬영을 하듯 위에서 내려다본 그리스도를 그리는 것에 착안했습니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관점에서 본 그리스도를 형상 화하겠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달리 이전에는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화제가 체스로 넘어가자 마르탱의 글은 더욱 유창해졌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체스는 인간에게 아주 중요한 것을 일깨워 주는 수단이었다. 다시 말해서, 체스는 인간 자신이 어떤 거대한 게임 속에서 규칙도 모르는채 이리저리 움직여지는 하나의 말일 수도
60) 1951년 작품. 스페인 카르멜 수도회의 개혁가이자 시인인 성 십자 가 후안(스페인 말로 산 후안 델라 크루스San Juan de la Cruz)이 환상을 바탕으로 그렸다는 16세기의 한 그림에서 영감을 받았다 해서 이런 제목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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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의 공격이군요.>
「트로이아를 떠난 오뒤세우스 일행은 몇 차례의 모험을 겪고 표류를 거듭한 끝에, 아테나의 인도를 따라 아이올로스 섬에 닿았습니다. 바람의 신 아이올로스는 그들의 선단이 고국으로 무사 히 귀환할 수 있게 해주겠다면서, 항해에 방해가 되는 바람을 모두 자루에 넣어 은사슬로 주둥이를 동여맨 다음 오뒤세우스에게 건네주었지요.」
<백의 반격이군요.>
「하지만 오뒤세우스의 부하들은 그 자루에 보물이 들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가 너무 지쳐 잠든 사이에 자루를 풀어 버렸 어요. 그러자 폭풍이 미친 듯이 몰아쳤지요.」
<다시 흑의 공격이군요.>
「결국 오뒤세우스 일행은 본래의 항로에서 너무 멀리 벗어났고, 오뒤세우스는 부하들을 모두 잃은 채 집을 떠난 지 20년 만에야 고국 이타케로 돌아가게 됩니다.」
<소중한 사람들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만드는 불의의 사고를 당한 것과 같군요.>
니스 신용 은행의 법무 담당 직원이었던 마르탱은 경이감을 느끼며 오뒤세우스 이야기를 재발견하였다. 그는 그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핀처의 입을 통해서 다시 들으니, 그 고대의 영웅이 겪은 사건 하나하나가 새로운 의미로 다가 왔다.
오뒤세우스가 초라한 거지 행색을 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는 대목에서, 핀처의 목소리가 약간 잦아들었다. 핀처는 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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