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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독서정리

두 번째 책 :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 페트릭 모디아노

by 마파람94 2025. 1. 12.

이 소설을 읽으면서 작정하고 20세- 23세의 잃어버린 기억을 떠올리는 노력을 의지적인 정성(?)으로 시도해 보았습니다.

그런 시도 때문에 잊힐 뻔한 인물들을(대학 앞 자취방 이름모를 주인, 훈련소 A조교, 아파트 가는길 횟집 주인, 삼명의 바뉘시 담당자, 코일을 정리하던 여자, 스쿠프와 소나타3을 타고 부산에서 오던 용접공-다후라 휠 교체 소개, 리바이스 청바지 매니아, 통근버스를 운전했던 분, 부경대 출신 과장님-나에게 책을 선물해 주었던, 호재의 여자친구, 정기 소개팅 파트너, 하사관 가려던 수인이 친구, 역앞 알바했던 덕이-N살 많은 남친, 삼성전관 갔다가 경대 컴공가 간 JY, 영어회화 학원에서 만난 두 사람) 다시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소설 속 내용과 겹쳐 생각해 봅니다. 그 시절 어느 시간 나타났다 반짝하고 있다 사라져 갔습니다.
 

 

 
 
하나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비가 멈추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위트와 헤어지는 순간부터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몇 시간 전 우리는 흥신소의 사무실에서 마지막으로 다시 만났다. 위트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육중한 책상 뒤에 앉아 있었지만 참으로 떠난다는 인상이 느껴질 만큼 망토를 그대로 입은 채였다. 나는 그의 앞, 손님용으로 쓰이는 가죽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우윳빛의 전등 불빛이 너무 세차게 쏟아져서 나는 눈이 부셨다.

"자, 그럼 기...... 다 끝났군."
위트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서류 하나가 책상 위에 남은 채 놓여 있었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9
 

나는 이야기의 줄거리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정신을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목소리가 매우 나지막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그녀는 프랑스로 떠났어요...... 그러고 나서 다시는 그 여자를 만나지 못했어요...... 그녀의 자살 소식을...... 듣게 되기까지.........

"그 소식을 어떻게 알았지요?"

"게이를 알고 있고 그 당시 파리에 와있었던 미국 친구를 통해서였지요. 그가 어떤 조그마한 신문기사를 내게 오려서 보내주었지

"그걸 간직하고 있습니까?"

"예, 우리 집 어떤 서랍에 분명히 들어 있을 겁니다."

우리는 트로카데로 공원에까지 왔다. 분수에는 조명이 되어 있었고 지나가는 차들이 많았다. 관광객들이 분수들 앞과 이에나 다리 위에 모여 있었다. 10월의 토요일 저녁이었지만 따뜻한 공기와 산보객들과 아직 잎이 지지 않은 나무들 때문에 마치 봄날의 어느 토요일 저녁 같았다.

"나는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사는데요……………….

우리는 공원들을 지나 뉴욕 가로 접어들었다. 거기 강변도로의 나무들 아래서 나는 악몽을 꾸고 있는 듯한 불쾌한 기분을 느꼈다. 나는 벌써 나의 삶을 다 살았고 이제는 이느 토요일 저녁의 따뜻한 공기 속에서 떠돌고 있는 유령에 불과했다. 무엇 때문에 이미 끊어진 관계들을 다시 맺고 오래전부터 막혀버린 통로를 찾으려 애쓴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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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위트에게 감히 그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 '해변의 사나이'는 바로 나라고 생각했다. 하기야 그 말을 위트에게 했다 해도 그는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모두 '해변의 사나이'들이며 '모래는 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우리들 발자국을 기껏해야 몇 초 동안밖에 간직하지 않는다'라고 위트는 늘 말하곤 했다.

건물의 정면들 중 하나는 버려진듯한 어느 광장의 경계를 이루고 있었다. 커다란 나무들, 잡목, 덤불, 오래전부터 풀을 깎아주지 않은 잔디밭. 어떤 어린아이 하나가 혼자서 햇빛 밝은 그 저녁나절에 쌓아 놓은 모래 무더기 앞에서 한가하게 놀고 있었다. 나는 잔디밭 가까운 곳에 앉아서 혹시 게이 오를로프의 유리창들은 이쪽으로 나있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건물 쪽으로 머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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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마다 이곳으로 돌아오던 시절은? 나는 입구와 직사각형의 커다란 침대 쿠션, 회색의 벽들, 그리고 구리로 된 테가 달린 둥근 천장 등을 알고 있었을까? 유리가 끼워진 문 뒤로 층계가 시작되는 부분이 보였다. 나는 전에 내가 하던 몸짓을 되풀이해 보고 옛날의 그 도정을 다시 밟아보기 위하여 그리로 천천히 다시 올라가 보고만 싶었다.

그 건물들의 입구에서는 아직도 옛날에 그곳을 건너질러 가는 습관을 익혔다가 그 후 사라져 버린 사람들이 남긴 발소리의 메아리가 들릴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들이 지나간 뒤에도 무엇인가 계속 진동하고 있는 것이다. 점점 더 약해져 가는 어떤 파동, 주의하여 귀를 기울이면 포착할 수 있는 어떤 파동이. 따지고 보면 나는 한 번도 그 페드로 맥케부아였던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었다. 그러나 그 파동들이 때로는 먼 곳에서 때로는 더 세게 나를 뚫고 지나갔었다. 그러다 차츰차츰 허공을 떠돌고 있던 그 모든 메아리들이 결정체를 이룬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나였다.

130

어떤 식탁에 앉을 때면 아직 해가 남아 있었다. 거기에는 기타를 연주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악기의 잘 올리는 소리, 정원에 내리는 황혼빛, 그리고 아마도 근처의 숲 속에서 풍겨오는 듯한 나뭇잎 냄새 이 모든 것이 그 시절의 신비와 우수를 북돋워주었다. 나는 그 러시아 식당을 다시 찾아내려고 애를 썼다. 헛된 일이었다. 미라보 가는 변하지 않았다. 영사관에 더 오래 남아 있게 되는 저녁이면 나는 베르사유 가를 지나 계속해서 길을 갔다. 지하철을 탈 수도 있었겠지만 차라리 밖을 걷는 것이 더 좋았다. 파시 강변로, 비르아켕 다리, 그다음에는 전날밤 내가 월도 블런트와 같이 따라갔던 뉴욕 가. 이제 나는 내가 왜 가슴이 찔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가를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알아차리지도 못한 채 내가 옛날에 걷던 곳을 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몇 번이나 뉴욕 가를 따라서 걸었던가..... 알마 광장, 첫 번째 오아시스 같은 곳, 그리고 쿠르 라렌의 나무들과 신선한 공기, 콩코르드 광장을 건너고 나면 거의 목적지에 이를 것이다. 루아얄 가. 나는 오른쪽으로 돌아 생토노래 가로 들어선다. 왼쪽에는 캉봉가.

어떤 상점 유리창에서 새어 나오는 듯한 보랏빛 감도는 반사 광선을 제외하고는 캉봉 가에는 빛 하나 없다. 나의 발걸음이 인도 위에서 올린다. 나는 혼자다. 다시 공포감이 나를 사로잡는다. 내가 미라보 가를 내려갈 때마다 느끼는 그 공포감. 누가 나를 알아보고 나를 세워서 증명서를 보자고 할 것만 같은 공포감. 목적지를 십여 미터 앞두고 그렇게 된다면 억울할 것이다. 특히 뛰어가서는 안 된다. 규칙적인 걸음으로 끝까지 걸어야 한다.

카스티유 호텔, 나는 문턱을 넘어선다. 프런트에는 아무도 없다. 나는 조그만 살롱을 지나며 잠시 숨을 돌리고 이마의 땀을 닦는다. 오늘 밤에도 나는 위험을 모면했다. 그 여자는 저 위에서 나를 기다린다.

그 여자는 나를 기다리고, 내가 이 도시에서 실종될 것을 걱정하는 유일한 여자다.

희미한 녹색의 벽이 있는 방. 붉은 커튼이 쳐져 있다. 빛은 침대의 왼쪽 머리말의 등에서 비치고 있다. 나는 그녀의 향수 냄새를, 약간 톡 쏘는 냄새를 맡는다. 눈에 보이는 것은 피부의 주근깨들과 오른쪽 엉덩이에 난 사마귀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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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 장소는 그 시대의 독서실의 매력을 간직하고 있지요.
나는 그곳에서 약간 잊어버린 러시아 말을 읽으면서 오랜 시간들을 보내곤 한답니다.

교회를 따라 커다란 종려수들과 유칼리나무들의 그늘에 덮인 공원이 하나 펼쳐져 있습니다. 이 열대식물들 사이에는 금빛 나무등 걸을 가진 자작나무가 한 그루 서 있지요. 사람들은 우리의 머나먼 러시아를 상기시키기 위하여 그 나무를 이곳에 심어놓은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친애하는 기, 내가 도서관 사서 자리에 지원했다는 사실을 말해도 좋을는지요. 만약 일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된다면 나는 내 어린 시절의 한 장소로 당신을 맞아들일 수 있게 되어 매우 기쁘겠습니다.

여러가지 어려운 과정을 거치고 난 후(나는 신부님에게 내가 사설탐정 노릇을 했었노라고는 감히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나는 원천으로 되돌아온 것입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라고 한 당신의 말은 옳았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물어온 문제에 대해서는 '가족 간의 이해(理解) 옹호 위원회'에 문의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막 당신의 질문에 대답하는데 적합한 위치에 있다고 여겨지는 드스베르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는 당신에게 빨리 정보를 보내줄 것입니다.

-당신의 위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183

서른일곱

이제는 두 눈을 감기만 하면 된다. 우리들 모두가 므제브로 떠나기 전에 일어난 일들이 조각조각 기억 속에 되살아난다. 그것은 오슈가에 있는 옛날 자하로프 호텔의 불켜진 커다란 유리창들, 빌드메르의 조각조각난 말들, '루비로사'처럼 분홍빛으로 반짝거리는 이름, '올레그드 브레데'처럼 희끗한 이름, 그리고 그 밖에 손에 잡히지 않는 사소한 일들 목쉬고 거의 들리지도 않는 빌드메르의 목소리 같은- 이다. 그 모든 것들이 내게 아리아드네의 실이 되어준다.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크레타의 왕 미노스의 딸,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와 사랑에 빠지고 그에게 실 또는 반짝이는 보석들을 주었다고 한다. 테세우스는 미노스가 라비린토스에 집어넣은, 반은 황소이고 반은 인간인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뒤, 그 실 덕분에 라비린토스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218

전날 오후가 끝나갈 무렵 나는 바로 옛 자하로프 호텔 이층에 있었다. 사람들이 많았다. 여느 때처럼 그들은 외투를 벗지도 않은 채로였다. 나는 외투를 입지 않고 있었다. 나는 중앙에 있는 큰 방을 지나갔는데 그곳에는 열댓 명의 사람들이 전화기 옆에 서거나 가죽제 안락의자에 앉아서 상담을 하고 있었다. 내가 만나기로 되어 있었던 남자는 벌써 그곳에 와 있었다. 나는 조그만 사무실로 슬쩍 들어가서 등뒤로 문을 닫았다. 그는 나를 방 한구석으로 데리고 갔고 낮은 탁자로 나누어진 두 개의 안락의자에 우리는 각각 앉았다. 나는 그곳에 신문지로 싼 금화들을 내려놓았다. 그는 여러 다발의 은행권들을 곧 나에게 내밀었고 나는 그것을 셀 겨를도 없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는 보석에 관심이 없었다. 우리는 다같이 테이블을, 그리고 그 모든 사람들이 외투를 입은 채 왕래하는 광경이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그 큰 방을 떠났다. 인도 위에서 그는 보석들을 혹시 살지도 모를 어떤 여자의 주소를 주었다. 말레르브 광장 근처였다. 그리고 그는 그 사람에게 자기의 소개를 받아서 왔노라고 말하라고 암시했다. 눈이 오고 있었지만 나는 걸어서 그곳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처음에 드니즈와 나는 자주 그 길을 따라가곤 했었다. 세월이 변한 것이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고 나는 헐벗은 나무와 건물들의 꺼먼 전면이 보이는 그대로를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몽소 공원의 철책을 따라갈 때 이제는 쥐똥나무 향기가 나지 않았고 오직 젖은 땅 냄새와 썩은 냄새만이 났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219


내가 함수호 가에 얼마 동안이나 남아 있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나는 프레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니다. 그는 분명히 바다에서 실종되지는 않았다. 그는 아마도 마지막 밧줄을 끊고 어느 산호초 속에 숨기로 결정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결국 그를 찾아내고야 말 것이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 시도를 해볼 필요가 있었다. 즉 로마에 있는 나의 옛 주소,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2번지'에 가볼 필요가 있었다.

저녁 어둠이 내렸다. 그 초록빛이 줄어들어감에 따라 함수호의 빛이 흐려져갔다. 물 위에는 아직도 희미한 광채를 내면서 보랏빛 감도는 그림자들이 스치고 있었다.

나는 기계적으로 내가 프레디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우리들의 사진들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그 사진들 속에는 어린 시절의 게이오를로프의 사진도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그 여자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었다. 그녀가 눈썹을 찡그리고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잠시 동안 나의 생각은 함수호로부터 멀리 세계의 다른 끝, 오랜 옛날에 그 사진을 찍었던 러시아의 남쪽 어느 휴양지로 나를 실어갔다. 한 어린 소녀가 황혼 녘에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해변에서 돌아온다. 그 아이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계속해서 더 놀고 싶었기 때문에 울고 있다. 그 소녀는 멀어져 간다. 그녀는 벌써 길모퉁이를 돌아갔다. 그런데 우리들의 삶 또한 그 어린아이의 슬픔과 마찬가지로 저녁 속으로 빨리 지워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262

해설

텍스트가 모디아노의 자전적 삶의 일부 같은가 하면 그것은 어느새 그 위에 덧 쓰여진 다른 소설적 텍스트와 닮아 있다. 그러나 그 어 느 것도 동일하지 않고 완전하게 복원된 것도 아니다.

겉보기에는 이 소설은 과거를 찾아 헤매는 한 기억 상실자의 이야기다. 어떤 흥신소의 퇴역 탐정인 작중 화자는 마치 다른 인물인 것처럼 자신의 과거에 대한 추적에 나선다. 한 장의 귀 떨어진 사진과 부고(訃告)를 단서로 바의 피아니스트, 어떤 정원사, 사진사 등을 차례로 만나게 되고 그들의 단편적이고 불확실한 증언이 1940년대, 밀수와 가짜 증명서와 배반으로 가득 찬 어느 그룹을 환기시킨다. 그러면 그 기억 상실자인 탐정과 '페드로'라는 인물은 결국 같은 사람일까? 그는 과연 저 신비스러운 '드니즈', 패션모델을 하다가 전쟁 말기에 스위스로 잠적한 '드니즈'를 사랑한 일이 있는가? 과연 그것은 그의 과거일까? 아니면 어떤 다른 사람의 과거일까? 사실 기 롤랑이 정말 자신의 과거를 되찾는가 혹은 그가 되찾는 과거는 과연 그 자신의 과거인가 하는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의 기억이 그를 한 집단과 이어주는 끈이라는 사실, 그의 기억의 모험이 그 인물 자신을 초월하는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 낸다는 사실이다.

그는 집요하게 계속된 인터뷰의 목록들이 구성하는 저 허구 같은 과거 속으로 조금씩 들어가 살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어떤 향기는 과거에 이미 맡아본 냄새와 같다고 기억된다. 어깨를 따끔하게 꼬집힌 듯한 느낌은 막연히 가슴을 떨며 지나온 길을 상기시킨다. 어느 거리에 가면 옛날에 들었던 발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어떤 창문은 지난날 오랫동안 기다렸던 장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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