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으면서 이렇게 숙연했던 적이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지만 떠오르는 책이 딱히 없습니다. 2차 대전 나치의 수용소 경험이 담긴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고 몇 가지를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특히 의미와 책임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두 번째 이 상황을 맞이하는 것처럼- 니체의 영원회귀와 같은 개념- 행동하라는 주장이 가슴속에 내려앉습니다. 저자가 로고테라피에서 반복해서 강조한 부분이라 더욱 기억에 남습니다.
제가 그은 밑줄입니다.
제1부
68. 강제 수용소에서의 체험
정신적인 측면에서 내면의 자아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비교적 적게 손상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혹한 현실로부터 빠져나와 내적인 풍요로움과 영적인 자유가 넘치는 세계로 도피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별로 건강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체력이 강한 사람보다 수용소에서 더 잘 견딘다는 지극히 역설적인 현상도 이것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게 해주는 일화 하나를 소개하겠다. 어느 날 아침 일찍 우리는 작업장을 향해 가고 있었다. 구령 소리가 들렸다.
"차렷! 앞으로 갓! 왼발 둘, 셋, 넷, 왼발 둘, 셋, 넷, 왼발 둘, 셋, 넷. 첫째 줄 주의! 왼발 그리고 왼발 그리고 오른발, 왼발, 모자 벗어!" 지금도 귀에 생생하게 들려오는 소리다.
'모자 벗어!'라는 구령이 떨어질 때, 우리는 마침 수용소 문을 통 과하고 있었다. 탐조등이 우리를 환하게 비추었다. 민첩하게 행진을 못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가차 없이 발길질이 가해졌다. 춥다고 허락 없이 모자를 귀까지 눌러쓴 사람은 더 큰 벌을 받았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큰 돌멩이를 넘고 커다란 웅덩이에 빠지면 서 수용소 밖으로 난 길을 따라 비틀거리며 걸었다. 호송하던 감시병들은 계속 고함을 지르면서 개머리판으로 우리를 위협했다. 다리가 아픈 사람은 옆 사람 팔에 의지해서 걸었다. 한마디도 하기가 힘들었다. 얼음같이 차가운 바람 때문에 누구든 입을 열 엄두를 내지 못했 다. 그런데 높이 세운 옷깃으로 입을 감싸고 있던 옆의 남자가 갑자기 이렇게 속삭였다.
"만약 마누라들이 우리가 지금 이러고 있는 꼴을 본다면 어떨까 요? 제발이지 마누라들이 수용소에 잘 있으면서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일을 몰랐으면 좋겠소."
그 말을 듣자 아내 생각이 났다. 빙판에 미끄러져 넘어지고, 수 없이 서로를 부축하고,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면서 몇 마일을 비틀거리며 걷는 동안 우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었다. 모두가 지금 아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때때로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들이 하나둘씩 빛을 잃어 가 고, 아침을 알리는 연분홍빛이 짙은 먹구름 뒤에서 서서히 퍼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온통 아내 모습뿐이었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아주 정확하게 머릿속으로 그렸다. 그녀가 대답하는 소리를 들었고, 그녀가 웃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진솔하면서도 용기를 주는 듯한 시선을 느꼈다. 실제든 아니든 그때 그녀의 모습은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태양보다도 더 밝게 빛났다.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내 머리를 관통했다. 생애 처음으로 나는 그렇게 많은 시인들이 시를 통해 노래하고, 그렇게 많은 사상가들이 최고의 지혜라고 외쳤던 하나의 진리를 깨달았다. 그 진리란 바로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이고 가장 숭고한 목표라는 것이었다. 나는 인간의 시와 사상과 믿음이 설파하는 숭고한 비밀의 의미를 간파했다.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
강제 수용소에서의 체험
73
어쩌면 바로 그런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토록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자연의 아름다움에 도취되곤 했다.
수용소에서 일할 때도 우리는 종종 옆에서 일하는 동료의 눈을 돌려 바바리아 숲의 키 큰 나무 사이로 햇빛이 비치는 아름다운 풍경 (뒤러의 그 유명한 수채화처럼)을 바라보게 했다. 그 숲은 우리가 대규 모비밀 군수품 제조 공장을 짓는데 동원됐던 바로 그 숲이었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죽도록 피곤한 몸으로 막사 바닥에 앉아 수 프 그릇을 들고 있는 우리에게 동료 한 사람이 달려왔다. 그러더니 점호장으로 가서 해가 지는 멋진 풍경을 보라는 것이었다. 밖에 나가서 우리는 서쪽에 빛나고 있는, 짙은 청색에서 핏빛으로 끊임없이 색과 모양이 변하는 구름으로 살아 숨 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진흙 바닥에 패인 웅덩이에 비친 하늘의 빛나는 풍경이 잿빛으로 지어진 우리의 초라한 임시 막사와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감동으로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니!"
***
그날도 우리는 참호 속에서 일하고 있었다. 잿빛 새벽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우리 위에 있는 하늘도 잿빛이었고, 창백한 새벽빛에 반사되는 눈도 잿빛이었다. 동료가 걸치고 있는 넝마 같은 옷도 잿빛이었고, 얼굴도 잿빛이었다. 나는 또다시 아내와 침묵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쩌면 당시 나는 내 고통에 대한 그리고 내가 서서히 죽어 가야 하는 상황에 대한 정당한 '이유'를 찾으려고 애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곧 닥쳐올 절망적인 죽음에 대해 마지막으로 격렬하게 항의하고 있는 동안, 나는 내 영혼이 사방을 뒤 덮고 있는 음울한 빛을 뚫고 나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것이 절망적이고 의미 없는 세계를 뛰어넘는 것을 느꼈으며, 삶에 궁극적인 목적이 있는가라는 나의 질문에 어디선가 "그렇다"라고 하는 활기 찬 대답 소리를 들었다.
바로 그 순간 수평선 저 멀리에 그림처럼 서 있던 농가에 불이 들어왔다. 바바리아의 동트는 새벽의 초라한 잿빛을 뚫고 불이 켜진 것이다. "어둠 속에서도 빛은 있나니." 빛은 어둠 속에서 빛났다.
나는 몇 시간 동안 얼어붙은 땅을 파면서서 있었다. 감시병이 지나 가면서 욕을 했고, 나는 또 다시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자 점점 더 그녀가 곁에 있는 것 같이 느껴졌으며, 그녀는 정말로 내 곁에 있었다. 그녀를 만질 수 있을 것 같았고, 손을 뻗쳐서 그녀의 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이 너무 나 생생했다. 그녀가 정말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새 한 마리가 날아와 내가 파놓은 흙더미 위에 앉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나를 바라보았다.
제1부
82
상대적으로 운이 좋았다고 얘기하곤 했다. 한 번은 운 나쁘게도 내가 우연히 그런 작업반에 들어가게 됐다. 만약 두 시간 (그동안 감독이 줄곧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만에 공습경보가 울려 작업이 중단되고, 그 후 작업조가 다시 편성되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지쳐서 죽었거나 아니면 죽어 가는 사람들을 실어 나르는 대형 수레에 실려 수용소로 되돌아왔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사이렌 소리가 가져다주는 안도감이 어떤 것인지는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한 라운드가 끝나는 종소리를 듣고, 마지막 순간에 넉 아웃될 위기를 모면한 권투 선수의 심정이 바로 이런 것 아닐까.
우리는 아주 작은 은총에도 고마워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 이를 잡을 시간을 준다는 것도 반가운 일이었다. 물론 이를 잡는 일 자체는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이를 잡으려면 천장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린 추운 막사에서 옷을 벗고 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를 잡는 도중 공습경보가 울리지 않아 전등불이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만약 이 시간에 이를 제대로 잡지 못 하면 하룻밤의 절반을 꼬박 깨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수용소 생활에서 느끼는 작은 행복은 일종의 소극적인 행복(쇼 펜하우어가 '시련으로부터의 자유'라고 했던)이었고, 다른 것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상대적인 행복이었다. 진정한 의미의 행복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거의 없었다.
한 번은 즐거움에 대한 일종의 대차 대조표를 만들어 보았다. 그 결과 지난 수 주 동안 나에게 즐거운 순간이 딱 두 번밖에 없었다는...
강제 수용소에서의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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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원 점검이 진행되는 동안 외부인이 막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됐기 때문이다. 그때 내가 얼마나 그 친구에게 미안했는지 그리고 또 그 순간 그와 같은 처지에 있지 않고, 병에 걸려 병동에서 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기뻤는지! 그곳에서 보낸 이들이 그리고 그 이후에 주어진 또 다른 이틀이 내 생명을 보존하는 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됐는지 모른다.
이 모든 일들이 잡지에 실린 사진을 보는 순간 마음속에 떠올랐 다. 나는 이 이야기를 상대방에게 들려주었고, 그때서야 그는 내가 그 사진을 그렇게 끔찍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됐다. 사진 속에 있는 사람들이 어쩌면 전혀 불행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병동에 누워 있은 지 사흘째 되는 날, 나는 야근 당번에 편성됐 다. 그런데 바로 그때 주치의가 달려와 발진티푸스 환자를 수용하고 있는 다른 수용소에서 의료 자원봉사자로 일하지 않겠냐고 물어왔다. 친구의 간곡한 만류에도(그리고 내 동료 의사 중에 이런 일에 자원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음에도) 나는 가기로 결심했다. 나는 내가 작업반에 들어갈 경우, 짧은 시간 내에 죽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내가 죽어야 한다면 나는 내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의사로서 동료들을 돕다가 죽는 것이 그전처럼 비생산적인 일을 하는 노동자로 무기력하게 살다가 죽는 것보다 확실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이것은 단순한 계산이지 희생이 아니었다. 그때 위생사 관이 비밀리에 발진 티푸스 병동으로 자원해 가는 우리들을 특별히...
제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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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슬픈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다네. 나는 갈 거야."
그러자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를 진정시키려 고 애썼다. 그런 다음 할 일이 있었다. 유언을 하는 것이었다.
"잘 듣게. 오토, 만약 내가 집에 있는 아내에게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면 그리고 자네가 아내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녀에게 이렇게 전해 주게. 내가 매일같이 매 시간마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을. 잘 기억하게. 두 번째로 내가 어느 누구보다 그녀를 사랑했다는 것. 세 번째로 내가 그녀와 함께했던 그 짧은 결혼 생활이 이 세상의 모든 것, 심지어는 여기서 겪었던 그 모든 일보다 나에게 소중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전해 주게.”
오토. 자네는 지금 어디에 있나? 아직 살아 있나? 우리가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낸 후 자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 자네 아내를 다시 만났나? 그리고 기억하나? 자네가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리는 동안에도 내가 자네에게 내 유언을 한마디 한마디 외우게 했던 것을.
테헤란에서의 죽음
이튿날 아침, 나는 호송자들과 함께 그곳을 떠났다. 이번에는 속임수가 아니었다. 가스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요양소로 가는 것이었다. 나를 불쌍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은 우리가 새로 들어간 수용소 보다 훨씬 혹독한 기근에 시달렸던 그 수용소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강제 수용소에서의 체험
그들은 자기 자신을 구하고자 발버둥 쳤지만, 결국 자신의 정해진 운명을 확인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나 수용소에서 풀려난 후, 나는 그전 수용소에 있던 한 친구를 만났다. 수용소 보안원이었던 그는 시체 더미에서 없어진 인육 조각을 어떻게 찾아냈는지 나에게 말해 주었다. 요리 중 인 냄비 안에서 찾아내 압수했다는 것이다. 기아에 시달린 나머지 드디어 수용소 안에서 인육을 먹는 사태까지 발생했던 모양이다. 내가 때맞추어 그 수용소를 잘 떠난 셈이다.
이것이 '테헤란에서의 죽음'이라는 이야기를 연상시키지 않는 가? 돈 많고 권력 있는 페르시아 사람이 어느 날 하인과 함께 자기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인이 갑자기 비명을 지르면서 방금 죽음의 신을 보았다고 했다. 죽음의 신이 자기를 데려가겠다고 위협했다는 것이다. 하인은 주인에게 가장 빨리 달리는 말을 빌려 달라고 애원했다. 그 말을 타고 오늘 밤 안으로 갈 수 있는 테헤란으로 도망을 치겠다는 것이었다. 주인은 승낙했다.
하인이 허겁지겁 말을 타고 떠났다. 주인이 발길을 돌려 자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가 죽음의 신과 마주치게 됐다. 그러자 주인이 죽음의 신에게 물었다.
“왜 그대는 내 하인을 겁주고 위협했는가?"
그러자 죽음의 신이 대답했다.
"위협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오늘밤 그를 테헤란에서 만나기로 계획을 세웠는데, 그가 아직 여기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표시했을뿐...."
제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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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기 행동의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을 입증해 주는 예(이런 이야기는 종종 영웅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데), 즉 무감각 증세를 극복하고 불안감을 제압한 경우는 얼마든지 많이 있다. 가혹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받는 환경에서도 인간은 정신적인 독립과 영적인 자유의 자취를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강제 수용소에 있었던 우리들은 막사를 지나가면서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마지막 남은 빵을 나누어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물론 그런 사람이 아주 극소수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다음과 같은 진리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그 진리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수용소에서는 항상 선택해야 했다. 매일같이, 매 시간마다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찾아왔다. 그 결정이란 당신으로부터 자아와 내적인 자유를 빼앗아 가겠다고 위협하는 저 부당한 권력에 복종할 것 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것이었다. 그 결정은 당신이 보통 수감자와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 자유와 존엄성을 포기하고 환경의 노리개가 되느냐 마느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이 보이는 심리적 반 웅은 어떤 물리적, 사회적 조건에 대한 단순한 표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수면 부족과 식량 부족, 다양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
제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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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의 의미
적극적인 삶은 인간에게 창조적인 일을 통해 가치를 실현할 기회를 주는데 그 목적이 있다. 반면 즐거움을 추구하는 소극적인 삶은 인간에게 아름다움과 예술, 혹은 자연을 체험함으로써 충족감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러나 창조와 즐거움 두 가지가 거의 메말라 있는 삶에도, 외부적인 힘에 의해 오로지 존재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지고의 도덕성을 요구하는 삶에도 목적은 있다. 물론 그에게는 창조적인 삶과 향락적인 삶이 모두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창조와 즐거움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곳에 삶의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시련이 주는 의미일 것이다. 시련은 운명과 죽음처럼 우리 삶의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다. 시련과 죽음 없이 인간의 삶은 완성될 수 없다.
사람이 자기 운명과 그에 따르는 시련을 받아들이는 과정, 다시 말해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아가는 과정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삶에 보다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폭넓은 기회 심지어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도를 제공한다. 그 삶이 용감하고, 품위 있고, 헌신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아니면 이와는 반대로 자기 보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고 동물과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여기에 힘든 상황이 선물로 주는 도덕적 가치를 획득할 기회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선택권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 그리고 이 결정은 그가 자신의 시련을 가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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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수용소에서의 체험
미래에 대한 믿음의 상실은 죽음을 부른다.
언젠가 나는 미래에 대한 믿음의 상실과 이런 위험한 자포자기가 서로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아주 극적인 사례를 보았다.
우리 구역의 고참 관리인 F는 꽤 유명한 작곡가이자 작사가였 다. 그가 어느 날 나에게 고백했다.
"의사 선생, 선생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상한 꿈을 꾸었 어요. 꿈에서 어떤 목소리가 소원을 말하라는 거예요. 내가 알고 싶은 것을 말하래요. 그러면 질문에 모두 대답을 해 줄 거라고 하더군 요. 그래서 제가 무얼 물어보았는지 아십니까? 나를 위해서 이 전쟁이 언제 끝날 것이냐고 물어보았지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소. 의사 양반? 나를 위해서 말이요. 저는 언제 우리가 수용소가 해방될 것인 지, 우리의 고통이 언제 끝날 것인지 알고 싶었어요."
"언제 그런 꿈을 꾸었습니까?"
내가 물었다.
“1945년 2월에요."
그가 대답했다. 그때는 3월이 막 시작됐을 때였다.
"그래, 꿈속의 목소리가 뭐라고 대답했나요?" 그가 내 귀에 나직하게 속삭였다.
"3월 30일이래요." F는 희망에 차 있었고 꿈속의 목소리가 하는 말이 맞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약속의 날이 다가왔을 때 우리 수용소로 들어온 전쟁소 식을 들어 보면 그날 자유의 몸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3월 29일, F는 갑자기 아프기 시작했고 열이 아주 높게 올랐다. 3월 30일, 예언자가 그에게 말해 주었던 것처럼 그에게서 전쟁과 고통이 떠나갔다. 헛소리를 하다가 그만 의식을 잃은 것이다. 3월 31일에 그는 죽었다. 사망의 직접적인 요인은 발진티푸스였다.
인간의 정신 상태 용기와 희망 혹은 그것의 상실과 육체의 면역력이 얼마나 밀접한 연관이 있는지 아는 사람은 희망과 용기의 갑작스러운 상실이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지 이해할 것이다. 내 친구의 죽음을 초래한 결정적인 요인은 기대했던 해방의 날이 오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그는 몹시 절망했으며, 잠재해 있던 발진 티푸스균에 대항하던 저항력이 갑자기 떨어진 것이다. 미래에 대한 믿음과 살고자 하는 의지는 마비됐고, 그의 몸은 병마의 희생양이 됐다. 결과적으로 꿈속 목소리가 했던 말이 맞기는 맞았던 것이다.
내가 이 경우를 통해 관찰하고 도출해 낸 결론은 후에 수용소 주 치의에게 들었던 말과도 일치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1944년 성탄절부터 1945년 새해에 이르기까지 일주일간 사망률이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추세로 급격히 증가했다는 것이다. 주치의는 이에 사망률이 증가한 것은 보다 가혹해진 노동 조건, 식량 사정 악화, 기후 변화, 새로운 전염병 때문이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대부분의 수감자들이 성탄절에는 집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
제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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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람에게 어떤 대답을 해 주어야 할까? 가장 필요한 것은 삶에 대한 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공부해야 했고, 더 나아가 좌절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에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 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 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인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과제들, 즉 삶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고, 때에 따라 다르 다. 따라서 일반적인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포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삶이 우리에게 던져 준 과제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바로 이것이 개개인마다 다른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 어떤 사람도, 어떤 운명도, 그와는 다른 사람, 그와는 다른 운명과 비교할 수 없다.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되는 경우는 하나도 없으며, 각각의 상황은 서로 다른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때로는 그가 처해 있는 상황이 그에게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행동에 들어갈 것을 요구할 수도 있다.
제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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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과 피를 가진 인간으로서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그런 일, 수 용소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당했다고 말하는 바로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을까? 수용소 안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또 실제로 그런 일들이 벌어졌다고 믿는 사람들은 모두 정신 의학적으로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의문을 품는다. 이 질문에 상세한 대답을 하기 전 몇 가지 사실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첫째, 감시병 중에는 사디스트, 정신 의학적인 의미에서 정말로 순수한 사디스트가 있었다.
둘째, 이 사디스트들은 아주 잔인한 감시병이 필요한 경우에 선 발됐다. 비록 몇 분 동안이지만 작업장의 작은 가지와 나무토막으로 불을 지핀 따뜻한 난로 앞에서 몸을 녹일 수 있도록 허락받는다는(추운 날씨에 밖에서 2시간 동안 일하고 나면) 것은 정말로 기쁜 일이었다. 그러나 감독 중에는 우리가 누리는 이런 안락함을 빼앗는 것에서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꼭 있었다. 우리에게 불을 쬐지 못하게 하고, 난로를 뒤엎고, 그토록 사랑스런 불씨를 눈 속으로 던질 때 그들의 얼굴에서 생생한 쾌감의 빛을 읽을 수 있었다. 만약 나치 대원이 어떤 사람을 싫어한다고 하자. 그런데 감독 중에는 이런 일에 아주 열정을 갖는 사람, 가학적인 고문에 아주 정통해 있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면 그 수감자는 불행하게도 바로 그 사람에게 보내진다.
셋째, 대다수 감시병들은 감정이 메말라 있는 상태라는 점이다. 몇 년 동안 수용소에서 점점 심해지는 야만적 행위를 보면서 지내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도덕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메마른 사람들은
제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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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으로 자기 행위를 정당화시킨다. 이런 일은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에서 자주 발생한다.
어느 날 나는 다른 친구와 함께 들을 가로질러 수용소로 돌아가 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 앞에 농작물이 자라고 있는 밭이 나타났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친구가 내 팔을 잡고 밭으로 끌고 들어갔다. 나는 더듬거리면서 어린 농작물을 짓밟지 말자는 취지의 말을 했다. 그러자 그는 짜증을 냈다. 화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그런 말 하지 말게. 그만큼 빼앗았으면 충분한 거 아니야? 내아 내와 아이는 가스실에서 죽었어. 그것으로 더 이상 할 말 없는 거 아니야? 그런데도 자네는 내가 귀리 몇 포기 밟는다고 뭐라고 하다니!
이런 사람들은 아주 천천히 평범한 진리로 돌아올 수 있도록 지 도해 주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옳지 못한 짓을 했다 하더 라도 자기가 그들에게 옳지 못한 짓을 할 권리는 어느 누구에게도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 주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이 이런 진리로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귀리 수천 포기를 잃는 것보다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한 친구가 소매를 걷어붙이고 오른손 주먹을 내 코 밑에 갖다 대며 이렇게 소리치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집으로 돌아가는 날, 내가 이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다면 내 손을 잘라 버릴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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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수용소에서의 체험
가 그동안 겪었던 시련을 보상해 줄 만한 속세의 행복은 없을 것이라고 당시 우리가 바라던 것은 행복이 아니었다. 행복을 바라면서 스스로 용기를 얻고, 우리가 겪는 시련과 희생과 죽음에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불행을 견딜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적지 않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이런 환멸 현상은 극복하기가 아주 어려운 것이며, 나 같은 정신과 의사도 도와주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낙담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자극을 받는다.
지금 이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언젠가는 그때를 돌아보며 자기가 그 모든 시련을 어떻게 견뎠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날이 올 것이다. 마침내 해방의 날이 찾아와 모든 일들이 아름다운 꿈처럼 여겨진 것과 같이 수용소에서 겪었던 모든 시련들이 언젠가는 하나의 악몽으로 생각될 날이 올 것이다.
살아 돌아온 사람이 시련을 통해 얻은 가장 값진 체험은 모든 시 련을 겪고 난 후 이 세상에서 신 이외에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경이로운 느낌을 갖게 된 것이다.
로고테라피의 기본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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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취되어야 할 실존의 잠재적 의미까지도 고려 대상이 된다. 어떤 종류의 분석이든, 심지어 치료 과정에서 정신론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 분석일지라도 환자가 자기 존재의 깊숙한 곳에서 정말로 소망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는 것은 중요하다.
로고테라피에서는 인간을 그저 충동과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쾌 락을 얻거나 서로 갈등하고 있는 이드와 자아, 초자아를 절충시키거나 혹은 사회와 환경에 그저 순응하고 적응하는 데에만 관심을 갖는 존재로 보지 않는다. 그보다는 주된 관심사가 어떤 의미를 성취하는 데 있다고 보고, 그런 점에서 로고테라피는 정신 분석과 구별된다.
정신의 역동성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이 마음에 평온을 가져오기보다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내면의 긴장은 정신 건강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삶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보다 최악의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도 참고 견딘다' 라는 니체의 말에는 이런 예지가 담겨 있다. 이 말에서 정신 치료에도 유용한 어떤 좌우명을 찾을 수 있다.
나치 강제 수용소에 있었던 사람들은 수감자 중에서 자기가 해 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더 잘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제2부
164
질문을 받고 있으며, 그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짐으로써만 삶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오로지 책임감을 갖는 것을 통 해서만 삶에 응답할 수 있다. 따라서 로고테라피에서는 책임감을 인간 존재의 본질로 본다.
존재의 본질
로고테라피에서 책임감을 강조한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로고테라피의 행동 강령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인생을 두 번째로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지금 당신이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 번째 인생에서 이미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이 말처럼 인간의 책임감을 자극하기에 좋은 말도 없다는 생각 이 든다. 이 말을 듣는 사람은 첫째 현재가 지나간 과거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고, 둘째 지나간 과거가 아직도 변경되고 수정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런 교훈은 인간으로 하여금 삶의 '유한성'은 물론, 그가 자신과 자신의 삶으로부터 성취해 낸 성과의 '궁극성'과도 대면하게 만든다.
로고테라피는 환자가 무엇을 책임져야 하는지 분명히 깨닫도록 하고자 노력한다. 무엇을 위해, 무엇에 대해, 혹은 누구에게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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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말했다.
"오 세상에! 아내에게는 아주 끔찍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걸 어떻게 견디겠어요?"
내가 말했다.
"그것 보세요. 선생님, 부인께서는 그런 고통을 면하신 겁니다. 부인이 그런 고통을 겪지 않게 한 게 바로 선생님입니다. 그 대가로 지금 선생께서 살아남아 부인을 애도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는 조용히 일어서서 내게 악수를 청한 후 진료실을 나갔다. 어 떤 의미에서 시련은 그것의 의미 희생의 의미 같은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시련이기를 멈춘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정상적인 의미의 치료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첫째 그의 절망은 병이 아니었으며, 둘째 내가 그의 운명을 바꿀 수 없었 고, 그의 아내를 살릴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나는 바뀔 수 없는 운명에 대한 그의 태도를 바꾸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이제 그는 최소한 자기가 겪고 있는 시련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됐다.
인간의 주된 관심이 쾌락을 얻거나 고통을 피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는데 있다는 것은 로고테라피의 기본 신조 중 하나이다. 자기 시련이 어떤 의미를 갖는 상황에서 인간이 기꺼이 그 시련을 견디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확실하게 밝혀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의미를 발견 하는데 시련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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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속에서는 모든 것이 고정된 상태로 보존된다. 따라서 삶이 일회적이라고 해서 그것이 의미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삶의 일회성이 우리 책임 아래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일회적인 잠재 가능성을 우리가 어떻게 실현시키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사람 은 수많은 현재의 가능성 중에서 끊임없이 어떤 선택을 해야만 한다. 이 중에서 어떤 것을 무위로 돌리고, 어떤 것을 실현시킬까? 어떤 선택이 단 한 번의 실현을 '시간의 모래 위에 불멸의 발자국'으로 만들 것인가? 언제나 인간은 좋든 싫든 자기 존재의 기념비가 될 만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인간은 대개 그루터기 밖에 남지 않은 일회성이라는 밭만 보고, 그 행동과 기쁨, 심지어는 고통까지도 구원해 준 과거라는 곡창은 그냥 지나치는 경향이 있다. 과거에서는 모든 것이 이미 이루어져 있으며, 그 어느 것도 사라질 수 없다. 과거에 '그랬다'라는 것처럼 확실한 존재 방식도 없을 것이다.
인간 존재가 본질적으로 일회적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는 로고테라피는 염세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인 것이다. 이것을 비유를 들어 설명해 보자. 염세주의자는 매일같이 벽에 걸린 달력을 찢어 내면서 날이 갈수록 그것이 얇아지는 것을 두려움과 슬픔으로 바라보는 사람과 비슷하다. 반면 삶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사람은 떼어 낸 달력 뒷장에 중요한 일과를 적어 놓고, 그것을 순서대로 깔끔하게 차곡차곡 쌓아 놓는 사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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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만약 커다란 방에 들어가 많은 사 람들과 마주치면 얼굴이 빨개지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사람은 실제로 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훨씬 더 얼굴이 빨개지는 경향을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는 '소원은 생각의 아버지'라는 말을 '공포는 사건의 어머니'라는 말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공포 때문에 진짜로 두려워하던 일이 일어나 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꼭 하고 싶다는 강한 의욕이 그 일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이런 과도한 의도, 즉 과잉 의도hyper-inten- tion는 성적인 문제로 고생하는 환자에게서 자주 발견된다. 남자가 자기정력을 과시하려고 하면 할수록, 여자가 오르가즘에 이르는 능력을 보여 주려고 하면 할수록 점점 더 성공할 확률이 떨어진다. 쾌락은 어떤 행위의 부산물이자 파생물로 얻어지는 것이고, 또 그렇게 얻어져야만 한다.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면 그것은 파괴되고 망가진다.
과잉 의도 외에도 지나친 주의 집중, 즉 로고테라피에서 말하는 과잉 투사hyper-reflection 가 발병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말하자면 병을 일으키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다음과 같은 임상 보고를 보면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날 한 젊은 여성이 나를 찾아와 불감증을 호소했다. 병력을 살펴보니 그녀는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성적 학대를 받은 것으로 나왔다. 하지만 그녀가 불감증을 느끼는 것은 충격적인 경험 그 자체 때문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환자가 그동안 정신 분석에 관한 책을 읽 고자가 충격적인 경험이 언젠가는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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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도덕적 차원에 도달해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감옥에 그렇게 오래 있는 동안 내가 사귄 사람 중에서 가장 좋은 친구였습니다."
이것이 '스타인호프의 도살자' 박사의 이야기이다.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감히 인간 행동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겠는가? 기계나 자동 장치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예측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인간 정신'의 메커니즘이나 역동성에 대해 예측하려고 노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은 정신을 넘어선 존재이다.
그렇다고 자유가 결론은 아니다. 자유는 이야기의 부분이고, 절 반의 진실에 지나지 않는다. 책임이라는 적극적인 측면의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소극적인 측면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책임이 전제되지 않는 자유는 방종으로 전락할 위험을 안고 있다. 내가 동부 해안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에 보완이 되도록 서부 해안에 책임의 여신상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신 의학도의 신조
인간에게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 상황은 있을 수 없다.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신경증 환자나 노이로제 환자에게도 자유는 있다. 정신병도 인간 실존의 가장 깊은 곳까지 침투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psyche, 개인을 움직이는 원동력으로서의 정신적, 심리적 구조
제3부
212
무너지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겠다고 결심했다.
물론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시련을 가져다주는 상황을 창조 적으로 변화시키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 '시련에 대처하는 방법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 보통 사람들, 글 자 그대로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모두 이 말에 동의하고 있다 는 실제적인 증거가 있다.
최근 오스트리아에서 실시한 여론 조사를 보면 조사에 응한 대 부분의 사람들로부터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사람은 유명한 예술가도 아니고 유명한 과학자도 아니었다. 유명한 정치가도 아니고, 유명한 운동선수도 아니었다. 그들로부터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사람은 당당하게 곤경을 이겨 낸 사람들이었다.
이제 비극의 세 가지 요소 중 두 번째에 해당되는 죄에 관한 논 의를 시작하려고 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죄는 신학적인 개념의 죄와는 거리가 멀다. 나는 소위 '죄의 미스터리mysterium iniquitatis'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는데, 이것은 죄를 발생시킨 생물적, 심리 적 그리고 사회적 배경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으면 죄에 대한 최종 분석에서도 여전히 그 죄가 해석 불가능한 것으로 남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의 범죄 그 자체에 대해서만 설명하는 것은 죄에 대한 변명에 지나지 않고, 죄지은 사람을 자유 의지와 책임을 지닌 하나의 인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수리해야 할 기계로 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심지어 범죄자들조차도 이런 식으로 취급받는 것을 싫어한다. 그들은 오히려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해 책임지기를...
비극 속에서의 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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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각 순간을 최대한 활용해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분명 그렇다. 따라서 나는 이렇게 권한다.
두 번째 인생을 사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당신이 지금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 번째 인생에서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적절하게 행동할 기회와 의미를 성취할 수 있는 잠재력은 실제로 우리 삶이 돌이킬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에 영향을 받는다. 물론 잠재적 가능성 그 자체도 큰 영향을 받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 기회를 써버리자마자 그리고 잠재적인 의미를 실현시키자마자 단번에 모든 일을 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과거 속으로 보내고, 그것은 그 속에서 안전하게 전달되고 보존된다. 과거 속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오히려 그 반대로 모든 것들이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저장되고 보존된다. 사람들은 그루터기만 남은 일회성이라는 밭만 보고, 자기 인생의 수확물을 쌓아 놓은 과거라는 충만한 곡물 창고를 간과하고 잃어버리려는 경향이 있다. 수확물에는 그가 해 놓은 일, 사랑했던 사람 그리고 용기와 품위를 가지고 견딘 시련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견지에서 본다면 나이 든 사람을 불쌍하게 여길 이유가 전 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젊은 사람들은 나이 든 사람들을 부러워해야...
제3부
220
그러나 모든 위대한 것은 그것을 발견하는 것만큼 이나 실현시키는 것도 힘들다. Sed omnia praeclara tam difficilia quam rara sunt. 스피노자 《윤리학》 마지막 문장이다.
여러분은 우리가 굳이 '성자'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 하 는 의문을 가질 것이다. 그저 '훌륭한 사람에 대해 얘기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소수인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그런 사람들은 언제나 소수일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나는 소수의 반열에 합류하려는 도전 의지를 본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지금 아주 좋지 않은 상태에 있고, 우리 각자가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더욱더 나빠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경계심을 갖자. 두 가지 측면에서의 경계심을.
아우슈비츠 이후 우리는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게 됐다. 그리고 히로시마 이후 우리는 무엇이 위험한지 알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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