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과 같은 것 같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글이 그렇습니다. 절로 다시 손에 들게 되니까요.
책을 손에 든 시간이 3-4시간 인 듯합니다. 빠져들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프랑스어로 '크렘 드 라 크렘'이라는 말이 있는데, 아나?" 모른다고 나는 말했다. 프랑스어 같은 것은 전혀 모른다. "크림 중의 크림, 최고로 좋은 것이라는 뜻이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에센스-그게 '크렘 드 라 크렘'이야. 알겠나? 나머지는 죄다 하찮고 시시할 뿐이지."
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그때의 나는 잘 알 수 없었다. 크렘 드 라 크렘?
"자, 생각해보게나." 노인이 말했다. "다시 한번 눈을 감고, 열심히 생각하는거야. 중심이 여러개 있고 둘레를 갖지 않는 원을. 자네 머리는 말일세, 어려운 걸 생각하라고 있는 거야. 모르는 걸 어떻게든 알아내라고 있는거라고. 비슬비슬 늘어져 있으면 못써. 지금이 중요한 시기거든. 머리와 마음이 다져지고 빚어져 가는 시기니까."
나는 다시 한번 눈을 감고 그 원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려 애썼다. 비슬비슬 늘어져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중심이 여러개 있고, 나아가 둘레를 갖지 않는 원을 생각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진지하게 생각해도 그때의 나는 그 의미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아는 원이란 일정한 중심을 놓고 거기서부터 동거리에 있는 점을 연결한, 곡선의 둘레를 지니는 도형이었다. 컴퍼스로 그릴 수 있는 단순한 도형이다. 노인이 하는 말은 애당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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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남아 있다. 그때 일어났던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사의한 설명이 안 되는 사건이었고, 열여덟 살의 나를 깊은 당혹과 혼란에 빠뜨렸다. 잠깐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고 말 정도로 나는 말한다. "그래도 원리나 의도 같은 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어."
그 말에 그는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그게 무슨 일이었는지, 굳이 알 필요가 없다는 뜻인가요?"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인다.
아는 동생이 말한다. "그래도 나 같으면 무척 신경쓰일 것 같은데요. 왜 그렇게 됐는지, 일의 진상을 알고 싶을 것 같아요. 만약 같은 입장이었다면."
"나도 물론 그때는 무척 신경쓰였어." 내가 말했다. "대체 무슨 일인지 곱씹어보았지. 상처도 받았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멀찌감치 물러나 바라보니 전부 아무래도 상관없는 시시한 일처럼 느껴지기 시작했어. 인생의 크림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이 라고."
"인생의 크림." 그가 말한다.
내가 말한다. "우리 인생에는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나. 설명이 안 되고 이치에 맞지 않는, 그렇지만 마음만은 지독히 흐트러지는 사건이, 그런 때는 아무 생각 말고, 고민도 하지 말고, 그저 눈을 감고 지나가게 두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커다란 파도 믿을 빠져나갈 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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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동생은 한동안 말없이 그 커다란 파도를 생각한다. 경력이 오랜 서퍼인지라 파도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해볼 문제가 많은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입을 연다. "하지만 아무 생각 안하는 것도 쉽지 않을 테죠."
"그렇지, 쉽지 않을 거야."
이 세상에 어떤 가치가 있는 것치고 간단히 얻을 수 있는게 하나라도 있는가, 하고 그 노인은 말했다. 피타고라스가 정리에 대해 말할 때처럼, 흔들림 없는 확신과 함께
"그래서, 그 중심이 여러 개 있으면서 둘레를 갖지 않는 원말인데요." 아는 동생이 마지막에 묻는다. "해답이라 할 만한 건 찾았어요?"
"글쎄" 내가 말한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글쎄.
지금까지 살면서 설명이 안 되고 이치에 맞지 않는, 그렇지만 마음이 지독히 흐트러지는 일이 일어날 때마다(자주라고 할 정도는 아니어도 및 번쯤 그런 일이 있었다) 나는 언제나 그 원에 대해 중심이 여러 개 있고 둘레를 갖지 않는 원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열여덟 살 때 그 정자의 벤치에서 그랬듯이, 눈을 감고 심장박동에 귀 기울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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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인지 대충 알겠다 싶을 때도 있었지만, 더 깊이 생각하다보면 다시 알 수 없어졌다. 그러기를 되풀이한다. 아마 그것은 구체적인 도형으로서의 원이 아니라, 사람의 의식 속에만 존재하는 원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를테면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무언가에 깊은 연민을 느끼거나, 이 세상의 이상적인 모습을 그리거나, 신앙(혹은 신앙 비슷한 것)을 발견하거나 할 때, 우리는 지극히 당연하게 그 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게 아닐까 어디까지나 나의 막연한 추론일 뿐이지만.
자네 머리는 말일세. 어려운 걸 생각하라고 있는 거야. 모르는걸 어떻게든 알아내라고 있는거라고. 그것이 고스란히 인생의 크림이 되거든. 나머지는 죄다 하찮고 시시할 뿐이지. 백발의 노인은 그렇게 말했다. 가을이 끝나가는 흐린 일요일 오후, 고베의 산 위에서. 그때 나는 작고 빨간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그 특별한 원에 대해, 혹은 하찮고 시시한 것에 대해, 그리고 또 내 안에 있을 특별 한 크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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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일단 여기서 끝난다. 지금부터는 후일담이다. 학창 시절 내가 그런 글을 썼다는 사실 자체를 오랫동안 까맣게 잊고 지냈다. 그 뒤로 내 인생은 뜻하지 않게 분주해졌고, 어차피 그 가상의 음악 평론은 젊은 날의 무책임하고 속 편한 조크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약 십오년 후, 그 글은 생각지 못한 형태로 나에게 되돌아오게 된다. 마치 허공에 던져놓고 잊어버렸던 부메랑이 예상도 못한 순간에 되돌아오듯이.
일 때문에 뉴욕 시내에 머물 때다. 시간이 나서 숙박 중인 호텔 근처를 산책하다가 이스트 14번지에 있는 작은 중고 레코드 가게에 들어갔다. 그리고 찰리 파커 코너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웬 걸, 'Charlie Parker Plays Bossa Nova'라는 타이틀의 레코드였다. 개인이 만든 해적판 같은 레코드였다. 흰색 재킷에 그림도 사진도 없이 검은 글씨로 제목만 무뚝뚝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뒷면에는 곡명과 참가자가 적혀 있다. 놀랍게도 곡명과 연주자 명단 모두 내가 학창 시절 혼자서 지어냈던 것과 한 치도 다르지 않았다. 딱 두 곡에서 카를루스 조빙 대신 행크 존스가 피아노를 맡았다.
나는 레코드를 손에 든 채 우두커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 61
그 1964년 가을 어둑한 학교 복도에서 맞닥뜨린 빛나는 한순간을-다시 한번 내 안에 되살리기를 무의식적으로 희구했던 것 같다. 조용하게 뛰는 딱딱한 심장, 가쁜 숨, 귓속에서 들려오는 작은 종소리를.
어떤 때는 그 감각을 얻었고, 어떤 때는 좀처럼 얻기 힘들었다 (안타깝게도 종이 만족스럽게 울린 적은 없다). 또 어떤 때는 손에 쥐고도 어느 갈림길에서 허무하게 놓쳐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어떤 경우건 그 재현의 감각은 내게 항상 이른바 '동경의 수준기 역할을 해왔다.
그리고 현실세계에서 그런 감각을 쉽사리 얻지 못할 때는 과거에 느꼈던 그 기억을 내 안에 조용히 소환했다. 그렇게 기억이란 때때로 내게 가장 귀중한 감정적 자산 중 하나가 되었고, 살아가기 위한 실마리가 되기도 했다. 큼직한 외투 주머니에 가만히 잠재워둔 따뜻한 새끼 고양이처럼.
비틀스 이야기를 하자.
비틀스가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것은 내가 그 소녀를 보기 한 해 전이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4년 4월, 빌보드 차트 1위부터 5위까지 비틀스가 독점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물론 팝뮤직의 세계에서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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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브 로스트 댓 러빙 필링>, 비치보이스의 <헬프미, 론다> 등이 자주 나왔다. 다이애나 로스 앤드 더 슈프림스도 싱글을 속속 히트 차트에 올려놓았다. 파나소닉 트랜지스터 라디오는 그렇게 가슴 두근거리는 근사한 곡을 쉴새 없이 내 등 뒤에 울려주었다. 팝 뮤직의 관점에서 보면 실로 숨 막히게 멋진 해였다.
팝송이 가장 깊숙이, 착실하고 자연스럽게 마음에 스미는 시절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정말로 그런지도 모른다. 혹은 그렇지 않은지도 모른다. 팝송은 그래봐야 그저 팝송일 뿐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은 결국. 그저 요란하게 꾸민 소모품일 뿐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집은 내가 즐겨 듣던 고베 라디오 방송국 근처에 있었다. 아버지는 의료기기 수입인지 수출 관련 일을 했지 싶다. 자세히는 모른다. 어쨌든 자기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이었는데 보아하니 나름대로 사업이 번창하는 모양이었다. 집은 바닷가에서 가까운 솔숲 안에 있었다. 옛날에는 어느 기업인의 여름 별장이었던 건물을 사들여 개축했다고 했다. 바닷바람이 여름 오후의 솔숲을 사각사각 흔들어댔다. <어 서머 플레이스>를 듣기에는 최적의 환경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훨씬 나중에 가서, <피서지에서 생긴 일>이라는 미국 영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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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에 비해 키가 너무 자란 여자애들이 대개 그렇듯이 특별히 예쁘장한 편은 아니었다. 알이 두꺼운 안경도 꼈다. 그래도 내 여자 친구는 동생을 무척 예뻐하는 눈치였다. "걔는 성적이 엄청 좋아"라고 그녀는 말했다. 참고로 그녀의 성적은 좋지도 나쁘 지도 않은 정도였던 것 같다. 아마 내 성적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한 번은 그 여동생까지 셋이서 영화를 보러 간 적이 있었다. 그날은 꼭 그래야 할 무슨 사정이 있었다. <사운드 오브 뮤직>이라는 뮤지컬 영화였다. 영화관에 사람이 무척 많아서 활처럼 굽은 70밀리 대형 스크린을 앞자리에서 봐야 했는데, 다 보고 나니 눈 쪽 근육이 욱신거렸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여자 친구는 그 뮤지컬 영화의 음악을 몹시 마음에 들어 했다. 사운드트랙 음반도 사서 몇 번씩 들었다. 나는 존 콜트레인이 연주하는 예의 마술 같은 <마이 페이버릿 싱즈>가 더 취향에 맞았지만 말한다고 뭐가 달 라지는 것도 아니고, 그녀 앞에서 굳이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다.
여동생은 내게 별로 호의적이지 않은 듯했다. 마주칠 때마다 묘하게 무표정한 눈으로 냉장고 안쪽에 오랫동안 처박혀 있던 건어물이 아직 먹을 만한지 점검하는 듯한 눈으로-나를 보았다. 그리고 그 눈빛은 항상 내게 어딘가 켕기는 기분을 안겨주었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 애는 나를 쳐다볼 때 외모는 거의 무시하다시피 하고(하긴 그렇게 볼만한 외모도 아니었지만) 나라는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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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장은 누가 뭐라 하든 일본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장이다. 입장권을 움켜쥐고, 담쟁이 덩굴이 얽힌 입구를 지나, 어둑한 콘크리트 계단을 잰걸음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외야의 천연 잔디가 시야에 뛰어들면, 그 선명한 초록 바다를 느닷없이 마주하면, 소년인 나의 가슴은 소리 나게 떨렸다. 마치 한 무리의 씩씩한 난쟁이들이 내 조그만 갈비뼈 안에서 번지점프 연습을 하는 것처럼.
그라운드에서 수비 연습을 하는 선수들의 아직 얼룩 한점 없는 유니폼, 눈을 찌르는 순백색의 볼, 수비 연습용 배트가 한가운데로 볼을 쳐내는 행복한 소리, 맥주 판매원의 야무진 외침, 경기 직전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스코어보드-그곳에는 이제부터 전개될 줄거리의 예감이 가득하고, 환성과 한숨과 구호가 소홀함 없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렇다. 그렇게 내 안에서, 야구를 보는 일과 구장으로 발길을 옮기는 일은 의문을 품을 새도 없이 정확히 일체화되었다.
그래서 열여덟 살에 대학 진학을 위해 한신칸을 떠나 도쿄에 왔을 때, 나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진구 구장에서 산케이 아톰스를 응원하기로 결정했다. 사는 곳에서 최단 거리에 있는 구장에서, 그 홈팀을 응원한다-내게 야구 관전이란 모름지기 그런 것이었다. 순수하게 거리를 따지면 진구 구장보다 고라쿠엔 구장 쪽이 조금 가까웠던 것 같지만...... 아무리. 그건 아니지. 사람에게는 지켜야 할 도리라는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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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할 수 있었다. 간소한 제본, 일련번호를 기입한 오 백부에 일일이 사인펜으로 또박또박 서명했다.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하루키∙∙∙∙∙∙ 하지만 예상대로 거의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았다. 그런 것을 돈 내고 산다면 어지간히 별난 인간이다. 실제로 팔린 것은 삼백 부쯤 될까. 나머지는 친구들과 지인들에게 기념품 삼아 나누어주었다. 그것이 지금은 희귀한 컬렉터스 아이템이 되어, 놀랄 만큼 비싸게 거래되고 있다. 세상일 알 수 없다. 내 수중에는 두 부 밖에 남아 있지 않다. 더 많이 남겨뒀으면 부자가 됐을 텐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를 마치고 사촌형제 세 명과 맥주를 엄청 퍼마셨다. 친사촌 둘(나와 나이가 거의 비슷하다), 외사촌(나보다 열다섯 살쯤 적지 싶다), 나, 이렇게 넷이 한밤중까지 맥주를 마셨다. 맥주 말고는 아무것도 마시지 않았다. 안주도 전혀 없었다. 오로지 맥주만 장장 쉴 새 없이 들이켰다. 그렇게 많은 맥주를 마셔보기는 처음이었다. 기린 병맥주 큰 병으로 전부 스무 병쯤 비웠다. 용케 방광에 탈이 안 났구나 싶다. 게다가 맥주를 마시다 말고, 나는 또 장례식장 근처에서 발견한 재즈 바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 135
뭐가 어쨌건, 세상 모든 야구장 중에서도 나는 진구 구장에 앉아 있을 때가 제일 좋다. 1루 쪽 내야석 아니면 우익 외야석. 그곳에서 잡다한 소리를 듣고, 잡다한 냄새를 맡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이 좋다. 불어오는 바람을 피부로 느끼고, 시원한 맥주를 마시고, 주위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이 좋다. 팀이 이기고 있건 지고 있건, 나는 그곳에서 보내는 시간을 무한히 사랑한다.
물론 지는 것보다야 이기는 쪽이 훨씬 좋다.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경기의 승패에 따라 시간의 가치나 무게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시간은 어디까지나 똑같은 시간이다. 일 분은 일 분이고, 한 시간은 한 시간이다. 우리는 누가 뭐라 하든 그것을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 시간과 잘 타협해서, 최대한 멋진 기억을 뒤에 남기는 것-그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나는 야구장 좌석에 앉으면 제일 먼저 흑맥주를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흑맥주 판매원은 썩 많지 않다. 발견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마침내 눈에 띄면 손을 높이 들어 부른다. 판매원이 다가온다. 앳되고 야윈 남자애다. 영양이 부족해 보인다. 머리는 길다. 아마도 고등학생 아르바이트생 이리라. 그는 나에 게 다가와서 우선 사과부터 한다. "죄송합니다. 저기 이거 흑맥주인데요."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 147
"죄송할 필요 없어요. 전혀." 나는 그렇게 말하며 그를 안심시킨다. "아까부터 흑맥주가 오기를 기다렸거든요."
"감사합니다"라고 그가 말한다. 그러고는 기쁜 듯 싱긋 웃는다. 흑맥주를 파는 소년은 그날 밤 분명 많은 사람에게 잇따라 사과해야 할 것이다. "죄송합니다. 저기. 이거 흑맥주인데요"라 고. 대부분의 관객은 흑맥주가 아니라 보통 라거 맥주를 찾을 테 니까. 나는 값을 치르고, 그에게 소소한 축복을 보낸다. "수고해요" 하면서.
나도 소설을 쓰면서 그 소년과 똑같은 기분을 맛볼 때가 종종 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 하나하나에게 사과하고 싶어 진다. "죄송합니다. 저기 이거 흑맥주인데요"라고
그래도 뭐, 그건 됐다. 소설 생각은 접어두자. 슬슬 오늘 밤의 경기가 시작될 참이다. 자, 팀이 이기기를 빌어보자. 그리고 동 시에 (남몰래) 지는 것에 대비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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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다. 저기를 잘 고치면 한결 낫지 않을까, 하는 유의 문제가 전혀 아니다. 한 부분 한 부분에는 이렇다 할 결함이 없다. 하지만 그 부분들이 하나로 조합되면 누가 봐도 틀림없는, 유기적이고도 종합적인 추함이 생겨난다(좀 이상한 비유지만 그 과정은 비너스의 탄생을 연상케 한다). 그리고 그 총체로서의 추함을 언어나 논리로 풀어내기란 거의 불가능하고, 아마 성공한다 해도 대단한 의미는 갖지 못할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눈앞의 상황을 '원래 그런 것'으로 무조건 수용하든가, 아니면 처음부터 아예 거부하든가, 두 가지 선택지뿐이다. 포로를 취하지 않기로 합의한 전쟁과도 같다.
톨스토이는 소설 「안나 카레니나 첫머리에서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사정이 다르다고 썼는데, 여자 얼굴의 미추에 대해서도 거의 같은 말을 할 수 있지 싶다. 내 생각에 (어디까지나 개인적 견해로 받아들여주었으면 하는데), 아름다운 여자는 대부분 '아름답다'는 공통항으로 한데 묶을 수 있다. 그녀들은 저마다 황금빛 털을 지닌 아름다운 원숭이를 한 마리씩 등에 업고 있다. 원숭이들의 털의 광택이며 빛깔은 조금씩 다르지만, 그들이 발하는 눈부신 빛에 결국은 다 비슷해 보인다.
그에 비해 못생긴 여자들은 한 사람 한 사람 독자적으로 거친...
사육제(Carnaval) 157
한 카니발의 가면을 쓰고서. 일대에는 불길한 봄바람이 불고 있어. 그리고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기가 모든 이에게 대접되지. 사육제, 이건 바로 그런 유의 음악이야."
"그러므로 연주자는 등장인물들의 가면과 그 아래 얼굴 양쪽 모두를 음악적으로 표현해야 한다-그런 뜻이야?" 내가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거야. 바로 그거. 그것이 표현되지 못한다면 이 곡을 연주하는 의미가 전혀 없다는 게 내 생각이야. 이 작품은 어찌 보면 환락의 극치에 있는 음악이지만, 말하자면, 환락이 있기에 비로소 정신의 밑바닥에 생식生하는 사악한 것들이 얼굴을 내밀 수 있는 거야. 그들은 암흑 속에 있다가 환락의 음색에 이끌려 밖으로 나오지."
그녀는 한동안 침묵에 잠겼다. 그러고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린 누구나 많건 적건 가면을 쓰고 살아가. 가면을 전혀 쓰지 않고 이 치열한 세상을 살아가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니까. 악령의 가면 밑에는 천사의 민낯이 있고, 천사의 가면 밑에는 악령의 민낯이 있어. 어느 한쪽만 있을 수는 없어. 그게 우리야. 그게 카니발이고, 그리고 슈만은 사람들의 그런 여러 얼굴을 동시에 볼 줄 알았어-가면과 민낯 양쪽을. 왜냐하면 스스로 영혼을 깊이 분열시킨 인간이었으니까. 가면과 민낯의 숨 막히는 틈새에서 살던 사람이니까."
사육제(Carnaval) 169
외모를 묘사하는 사이, 갑자기 그때 일이 머릿속에 되살아나 다. 무척 생생하게.
스무 살 가을이 끝나갈 무렵, 나는 그 수려하지 않은 외모의 여자애와 딱 한 번 데이트하고, 해 질 녘 공원을 함께 산책했다. 커피를 마시면서, 아트 페퍼의 알토 색소폰이 때때로 얼마나 근사하게 삐걱거리는지 자세히 설명했다. 어쩌다 음이 흐트러져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 그에게는 하나의 중요한 심적 상황의 표현이라고(그렇다. '심적 상황의 표현'이라고 나는 그때 실제로 말했다). 그리고 그 뒤에 헤어지면서 받은 그녀의 전화번호 쪽지를, 나는 어딘가에서 영원히 잃어버리고 말았다. 말할 필요도 없이, 영원이란 매우 긴 시간이다.
그것들은 사사로운 내 인생에서 일어난 한 쌍의 작은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와서 보면 약간 길을 돌아간 정도의 에피소드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해도 내 인생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기억들은 어느 날, 아마도 멀고 긴 통로를 지나, 내가 있는 곳을 찾아온다. 그리고 내 마음을 신기할 정도로 강하게 뒤흔든다. 숲의 나뭇잎을 휘감아올리고, 억새밭을 한꺼번에 눕혀버리고, 집집의 문을 거세게 두드리 고 지나가는 가을 끄트머리의 밤바람처럼,
사육제(Carnaval) 181
"그리고 그 여자의 이름이 적힌 물건과 염력을 써서 상대의 몸을 훔친다."
"그렇지요. 그것에 적힌 이름을 오랫동안 응시하면서, 정신을 오로지 한 점에 집중하고, 사랑하는 이의 이름을 의식 속으로 고스란히 거둬들입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정신적 육체적 소모도 크지만, 일심불란하게 어떻게든 해냅니다. 그렇게 그녀의 일부는 저의 일부가 됩니다. 그리하여 저의 갈 곳 없는 연정은 나름대로 무사히 충족되는 셈이지요."
"육체적 행위 없이?"
원숭이는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어디까지나 원숭이지만, 절대 천박한 짓은 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자의 이름을 내 것으로 삼는다-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분명 성적 욕망이 깔린 악행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지극히 깨끗하고 플라토닉 한 행위이기도 합니다. 저는 마음속에 있는 그 이름을 그저 남 몰래 혼자 사랑할 뿐입니다. 마치 부드러운 바람이 초원을 가만히 훑고 지나가듯이.'
"흐음." 나는 감탄해서 말했다. "하긴, 어찌 보면 궁극의 연애라고도 할 수 있겠어."
"네, 그것은 어찌 보면 궁극의 연애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동시에 궁극의 고독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동전의 양면인 셈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 201
빼놓을 수 없는 연료입니다. 그 사랑은 언젠가 끝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결실을 맺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설령 사랑이 사라져도,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 해도, 내가 누군가를 사랑했다. 연모했다는 기억은 변함없이 간직할 수 있습니다. 그것 또한 우리에게 귀중한 열원이 됩니다. 만약 그런 열원이 없다면 사람의 마음은 그리고 원숭이의 마음도 풀 한 포기 없는 혹한의 황야가 되고 말겠지요. 그 대지에는 온종일 해가 비치지 않고, 안녕이라는 풀꽃도, 희망이라는 수목도 자라지 않겠지요. 저는 이렇게 이 마음에 (라고 말하면서 원숭이는 털투성이 가슴에 손바닥을 댔다), 한때 연모했던 아름다운 일곱 명의 여자 이름을 소중히 품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저 나름의 소소한 연료 삼아, 추운 밤이면 근근이 몸을 덥히면서, 남은 인생을 그럭저럭 살아볼 생각입니다."
그러고는 원숭이는 또 쿡쿡 웃었다. 그리고 몇 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말이네요. 모순이라고 할까요. '원숭이의 인생'이라니. 후후후."
병맥주 두 병을 다 비우고 나니 시간은 어느새 열한 시 반이었다. 슬슬 실례해야겠네요, 하고 원숭이는 말했다.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 203
시나가와 원숭이가 다시 활동을 시작한 걸까? 아니면 그의 수법을 모방한 다른 원숭이의 범행일까(카피 멍키)? 그것도 아니면 원숭이 아닌 무언가의 소행일까?
시나가와 원숭이가 다시 '이름 훔치기'를 시작했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일곱 명의 여자 이름을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앞으로는 이 군마현의 작은 온천 마을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싶다. 고 그 원숭이는 담담히 말했었다. 그것은 진심에서 우러난 말처럼 들렸다. 하지만 그 원숭이는 이성으로는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정신적 고질병을 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병이, 그리고 그의 도파민이 "괜찮아, 저질러버려" 하며 그의 등을 거세게 밀어붙였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그를 다시 시나 가와로 돌려보내고 또 악행을 저지르게 했는지도 모른다.
나 스스로도 언젠가 그것을 시험해볼지 모른다-잠이 오지 않는 밤, 뜬금없이 그렇게 부질없는 생각을 품어볼 때가 있다. 나는 연모하는 여자의 신분증이나 이름표를 구해와서, 의식을 '일심불란하게' 집중해서 그 이름을 내 안에 거둬들이고, 그녀의 일부를 남몰래 소유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과연 어떤 기분 일까? 아니, 아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워낙에 손재주가 없고, 남이 가진 무언가를 몰래 훔쳐낸다는 게 가능할...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 213
나오지도 않고, 조명도 적당하고, 독서 환경으로는 거의 흠잡을 데가 없었다. 아마도 내가 아까부터 느껴온 막연한 위화감 탓인 것 같았다. 뭔가 미묘하게 어긋난 느낌이었다. 나라는 내용물이 지금의 그릇에 잘 맞지 않는다. 혹은 마땅히 존재해야 할 정합성이 어디서부턴가 손상돼버렸다는 감각이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카운터 건너편에는 갖가지 술병이 늘어선 선반이 있었다. 그 뒷면의 벽은 커다란 거울이었고, 내 모습이 비쳤다. 가만히 바라보자니 당연히 거울 속의 나도 이쪽의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때 나는 문득 이런 감각에 휩싸였다. 나는 인생의 회로 어딘 가에서 길을 잘못 들어서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슈트를 입 고 넥타이를 맨 내 모습을 바라보는 사이 그 감각은 점점 강렬해졌다. 보면 볼수록 그것이 나 자신이 아니라, 처음 보는 다른 누 군가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곳에 비친 이가 만약 나 자신이 아니라면 대체 누구란 말인가?
지금까지 내 인생에는 아마 대개의 인생이 그러하듯이- 중요한 분기점이 몇 곳 있었다. 오른쪽이나 왼쪽, 어느 쪽으로든 갈 수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오른쪽을 선택하거나 왼쪽을 선택했다(한쪽을 택하는 명백한 이유가 존재한 적도 있지만, 그런게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경우가 오히려 많았는지도 모른다.
일인칭 단수 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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