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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독서정리

서른 여섯 번째 책 : 죽는것 보다 늙는게 걱정인

by 마파람94 2022. 9. 22.


도널드 홀의 글입니다. 우리한테는 생소한 이름이지만 미국에서는 엄청난 유명세를 날리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 과거형인 이유는 더 이상 살아계시지 않기 때문이죠. 그는 계관시인이면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절에 대단한 훈장을 받은 이력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그의 나이 여든을 넘긴 어느 시점에 그가 남긴 에세이입니다. 나이 듦에 관하여 짠한 마음이 들 정도로 애틋한 내용도 있는 반면, 나이 팔십이 넘게도 소년의 마음이 뭇어나는 얘기도 있습니다.

어렴풋이 나도 늙게 되면 이런 모습이겠구나를 간접 경험하는 내용도 많습니다.

밑줄로 가보겠습니다.




제인과 함께 이사했다. 커비는 재혼하지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 정신분석을 받은 다음 심리상담가가 되었다. 내 가 교수로 재직하던 앤아버에서 매우 높은 평가를 받는 상담가였다. 커비는 독립적이고 능동적이고 정치적인 사람이 되었다. 두 아이가 성년이 될 때까지 우리는 서로 연락하고 지냈다. 커비는 1991년 미시간을 떠나 동부에 자리를 잡았다. 아이들과 손주들 가까이에 살기 위해서였다. 아이들이 뉴잉글랜드에서 대학을 다니고 직장을 다녔기 때문이었다. 서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았건만 12년이 넘도록 우리는 만나지 않았다. 아이들이나 손주들의 생일엔 커비와 나를 위해 파티가 두 번씩 열렸다.

그러다가 커비가 병이 났고 점점 심해졌다. 아이들과 손주가 깊은 슬픔에 잠겼다. 나는 우울했고 후회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리고 감사하게도, 커비의 상태는 우리를 다시 만나게 해주었다. 커비 옆에 앉아 옛날 일들을 회고하면서 위안을 받았다. 우리는 옥스퍼드에서 아테네까지 여행했던 얘기를 했다. 그러나 행복한 결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행복하다면 아직 끝난게 아니기 때문이다. 커비는 일흔여섯 살이던 2008년 암으로 사망했다. 나는 여든을 넘겨 생존하고 있다. 글을 쓰면서 신기하게도 쾌활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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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뻐하는 건 괜찮다. 하지만 그걸 사실로 믿으면 안 된다. 어떤 여성은 내 낭송이 이제까지 들었던 것들 중 최고였다고 한다. 어떤 남성은 지난 30년 동안 내 시들을 읽어왔다고 하면서 내가 미국 문학계의 거성이라고 한다.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물론 찬사를 바치는 많은 사람이 그런 극찬을 하는 순간에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기도 할 것이다. 따라서 그들과 언쟁을 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들에게 내가 지면에서 받았던 수모에 대해 말해줄 수도 있다. 내가 받지 못했던 상들, 내 시들이 누락되었던 명시 선집들을 열거해 보일 수도 있다. 제일 좋은 방법은 찬사를 전해주는 사람의 마음은 받고 찬사는 잊어버리는 것이다.

오늘날 상을 받고 찬사를 받는 시인 열 명 중 아홉 명의 시는 30년 후면 읽히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그 시대에 가장 많은 박수를 받고, 모든 장소에서 황제처럼, 혹은 황제의 동상처럼 대접받는다. 시인이 정말 훌륭하다면 시를 듣는 사람들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시인들은 자기네가 오래갈지 금방 사라질지 알지 못한다.

시인들 스스로 자기들의 시가 영원불멸이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우울증에 걸렸거나 거짓말을 하는 것이거나 정신병자일 것이다. 나는 T. S. 엘리엇을 인터뷰했을 때 제일 마지막에 가장 발칙한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스스로 좋은 시인 인지 알 수 있습니까?" 수정되어 지면에 인쇄된 그의 대답은 좀 더 차분했다. 그 자리에서의 그는 직설적이었다. "세상에, 아니요! 당신은 그래요? 지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 자신이 뭐든 진짜 잘하는지 알 수가 없는 거예요." 계관시인들의 불쌍한 행진을 보라.

관객 수가 3,000명이 아닐 수도 있다. 내 친구는 행사장에 도착해 관객이 단 한명인 걸 발견했다. 둘은 맥주를 마시러 갔다. 또 다른 시인은 두 명의 관중 앞에 서게 됐다. 개의치 않고 연단에 서서 용감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낭송을 마친 그녀는 이들과 악수를 하기 위해 내려왔다. 한 명은 그새 죽어 있었다.

젊었을 때는 소리가 멀리 퍼져 나갔다. 지금은 마이크를 안 쓰면 앞에서 열 번째 줄에서도 내 목소리가 안 들린다. 단순히 노화에 따른 퇴행만은 아니다. 습관적으로 마이크를 사용하면 발성이 미치는 거리가 줄어든다. (연극배우들이 20년 동안 무대를 떠나 영화를 만들다가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로 돌아오면 객석에서 발성이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인위적인 증폭이 좋은 점도 있다 내 시 중에는 내가 소처럼 '무우(우리 말로는 '음메'에 해당한다_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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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면 얼른 응급실로 가라고 일러줬다. 야구는 관전이 답이다. 4월부터 10월이 될 때까지 매일 밤 나는 보스턴 레드삭스의 경기를 관전한다. (좀 더 어두운 계절에는 다른 스포츠를 챙겨 본다.) 나는 뭘 쓰지도 않고 그냥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저녁 식사 후에는 전형적인 미국인 남성이 된다. 하지만 내 생각에 뭔가 한 가지는 하는 것 같다. 내가 외람되게 비교하는 걸 너그럽게 봐주길 바란다.

예이츠는 매일 밤 잠들기 전에 서부극 소설을 읽었다. T. S. 엘리엇은 시 쓰기와 교정을 다 마쳤을 땐 추리소설을 읽었다. 하루 종일 집중해서 일하는 사람들은 저녁때가 되면 머리를 식히는 단순한 활동을 해줘야 한다. 때로는 그것이 제인 그레이Zame Grey 일 수도, 애거사 크리스티일 수도, 보스턴 레드삭스일 수도 있다.

70대 중반이 넘어가면서 다리의 힘이 빠졌다. 고르지 않은 바닥 위를 걷기가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살아남으려면 뭔가 해야 했다. 나는 실내 헬스 자전거를 구입해 텔레비전 앞에 설치했다. 테이프에 담긴 켄 번즈 Ken Burns의 <남북전쟁Diecial War)을 보면서 하루에 7분씩은 페달을 밟았다. 결국에는 자전거에서 내려오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자전거가 내 위로 쓰러졌다. 치아 한 개가 빠져버렸다.

제 불건강


"근데 얼마나 더 살고 싶으신 건데요?"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냥 아무 숫자나 갖다 댔다. "어, 여든까지요." 여든넷이 되던 생일날 나는 조용히 안도했다.

여든이 넘어가면서 나의 하루는 좁아졌다. 그러는게 당연 하지만 말이다. 매일 같은 층에서만 생활하면서 냉동 식사류를 먹는다. 우편배달을 하는 루이스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우편물을 의자 위에 떨어뜨리고 간다.

난 비교적 잘 돌아다닌다. 침실, 욕실, 부엌, 창 옆에 놓인 새로 산 의자, 야구 경기를 시청할 때 쓰는 눕히고 올리는 전동의자 사이로 말이다. 경련을 일으키면서 바퀴가 넷 달린 수레를 밀어서 한 곳에서 다른 위치로 움직인다. 목을 부러 뜨리지 않도록 조심한다. 편지를 쓰고, 낮잠을 자고, 에세이를 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내 죽음을 슬퍼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 애통해해 줄 수가 없다. 내가 남기고 갈 감각이 없는 물건들을 생각하면 울적해진다.

유족들은 내 잡동사니들을 비닐봉지에 담아 쓰레기 매립장에 묻을 것이다.

'앤디 워홀들'은 걱정도 안 된다. 마음이 쓰이는 건 내 딸이 연못에서 건진 줄무늬가 있는 돌멩이, 아버지가 대학에서 쓰시던 탁자용 램프, 낙농업 시대 때 우리 가족이 쓰던 우유 배달 손수레 나무 모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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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아흔에 가까워지면서 우리가 나중에 험멜 도자기들을 내다 버릴까 봐 전전긍긍했다. 어머니는 이것들을 평생 벽난로 위에 두고 즐겼다. 1940 년대부터 1960년대 사이에 인기 있던 저속한 도자기 인형들이다. 그중 한 상자가 딸 집 다락에 보관돼 있다. 내게 더 소중한 것은 이 집이다. 증조 할아버지가 1865년에 이사 오신후 거의 150년 동안 우리 가족의 터전이었다.

뒷방에는 각 세대가 유기한 부서지고 쓸모없는 물건들이 있다. 그런 것들이 언제 다시 필요하게 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 자식들이나 손주들은 외딴 시골에 와서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럴 이유가 없지 않나?) 그렇지만 집이 텅 빈다고 생각하면 우울하다. 차라리 다 타버리는게 낫겠다.

오래된 집에 눌러살면서 어느 정도는 집이 낙후되게 방치했었다. 지붕을 고치고 정화조를 비우긴 했지만 만약 전등이 고장 나면 사용하지 않고 그냥 두었다. 다음에 들어와 살게 될 사람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래된 벽지가 뜨면 그대로 두었다. 누군가는 총 길이 122미터에 달하는 책장들을 치울 것이다.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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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시 데이트를 하기 시작한 다음에야 피에로스의 라 메리디아나에서 오소부코를 다시 먹을 수가 있었다. (시가 드디어 여자를 꼬이게 했다. 내가 열네 살이었을 때 그랬어야 했는데...)

어느 날 저녁, 내가 데이트 상대를 에스코트하면서 뉴런던의 밀스턴에 들어서는데 종업원이 내 손님이 손녀인지 물었다. 우리 둘은 동시에 "아니요!" 하고 비명을 질렀다. 다시는 그 종업원을 볼 일이 없었다. 데이트 상대들은 대부분 내 딸로 오해를 받았지, 손녀로는 아니었다.

내 집에서는 그들을 위해 적포도주가 들어간 스튜를 만들었다. 미트로프도 만들었다. 어떤 여자들은 내 부엌에서 또는 그들의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었다. 캘리포니아에서 날아온 여자 친구는 자기 집에서 마늘 다지기를 갖고 왔다. 그리고 함께 슈퍼마켓에 가서 클로브(열대성 정향나무의 꽃을 말린 향신료_옮긴이)를 35리터나 사기도 했다.

그녀가 부엌을 관장했을 땐 심지어 초콜릿 아이스크림에 서도 마늘 맛이 났다. 수년 동안 잠깐잠깐씩 연애를 하던 끝에 난 린다와 함께하기로 했다. 내가 운전을 그만두기 전까지는 우리 둘 중 한 사람이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그다음에는 내가 집 밖으로 나갈 일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에 외식을 하기 시작했다. 우린 책방으로, 슈퍼마켓으로, 그리고 피에로스로 차를 몰았다.

모든 음식에 마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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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품이 밝고 정이 많은 분이었다.

그녀와 제인은 아침에 민들레를 캐면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쓴 이파리를 삶아서 저녁으로 먹었다. 할머니는 걸을 때 뒤뚱거리셨다. 현관문까지 가려면 난간도 없는 시멘 트 계단 여섯 개를 힘겹게 올라야 했다. 그녀는 서른 살 된 목수였던 자신의 손자에게 뭔가 붙잡을 수 있는 것을 설치해달라고 부탁했다. 난 그가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올 라갈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올라가시면서 뭘."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종류의 예술도 사랑하고 생활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람은 자신을 전혀 다른 열정에 노출시켰을때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 내가 또 다른 예술을 말하는 것은 그것을 잘해야 한다거나 하는 그런 얘기는 절대 아니다.

나는 8학년 때 미술 과목에서 낙제했다. 그건 정말 통탄할 일이었다. 왜냐하면 미술 시간에 내 옆자리에 앉은 메리 베스 버제스를 내가 좋아했기 때문이다.

음악은 진짜 이해가 안 된다. 내 인생에서 가장 기억나는 음악적 순간은 켄 번스의 야구 프로그램에서였다. 그는 '야 구와 나의 야구 사랑'에 대해서 나와 인터뷰했다.

아직 남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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