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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독서정리

서른 네 번째 책: 저만치 혼자서 - 김훈

by 마파람94 2022. 9. 7.

 

 

작가 김훈의 글 입니다. 이번 글은 측은한 시선이 향한 곳을 묘사한 그림처럼 보입니다. 작가가 느낀 그 측은지심의 마음을 공유받았습니다. 

 

 

-신부님. 아주 오래전 것도 말해도 되나요?

-그럼요. 죄는 오래됐다고 해서 묽어지지 않습니다.

-처넛적 것두요?

-너무 억지로 끄집어내지는 마십시오.

일상 속에서 거듭되는 죄를 거듭 사해주는 것이 하느님의 뜻 에 맞는 것인지를 장분도 신부는 김요한 주교에게 문의했다.

세속의 일상을 죄와 죄 아닌 것으로 양분할 수는 없을 터이 며, 사제가 세속으로부터 멀어서 일상을 만질 수 없고 낙태하는 여자의 고통과 슬픔을 알 수 없다 하더라도, 사제가 사하는 죄를 함께 사하여주시겠노라는 하느님의 약속에 의지하라고. 김요한 신부는 회답했다.

바지락은 먹이사슬의 밑바닥에 깔려서 수만 년 동안 진화하 지 않았다. 그래서 수만 년 전의 바지락이나 지금의 바지락이 나 껍데기에 팬 골의 개수가 똑같다고 학자들은 말했다. 어촌마 을 갯가에는 신석기시대의 조개껍데기 무덤이 남아 있었다. 일 만여 년 전의 음식물 쓰레기 폐기장이었다. 선착장을 만드느라 고 갯벌이 매립되어서 조개 무덤은 땅 위에 돌산처럼 솟아올랐 다. 거기에 쌓인 조개껍데기도 모두 바지락이었다. 조개껍데기 는 삭아서 가루가 되었고, 가루가 바닷물에 반죽되어서 돌이 되 었다. 예수님은 이천여 년 전에 태어나서 신유생 닭띠라는

데, 조개 무덤은 일만여 년이 넘었다.

저만치 혼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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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루시아 수녀는 삼십대 초부터 남해의 먼 섬에 격리된 나환 자촌에서 일했다. 항구에서 섬까지는 뱃길로 사십 킬로미터였 다. 김루시아 수녀는 물을 데워서 나환자들을 씻겼다. 수건으 로 나환자들의 등을 밀었고, 약을 먹였고, 장례 때 화장장에서 기도했다. 나환자들 사이에서도 아이가 태어났다. 육지의 보육 원에서는 나환자촌 아이를 받아주지 않았다. 김루시아 수녀는 섬 안에서 미음을 먹여서 아이를 길렀다. 부모는 감염이 걱정스 러워서 아이를 만지지 못했고 날 때부터 부모와 격리된 아이는 누구의 품으로나 파고들었다. 이 세상의 이유 없는 고통이 모두 하느님의 섭리라면 자신의 일은 하느님의 뜻에 맞서는 것이며 그 또한 섭리일 것이었다. 나환자촌에서 한 생애를 다 살아내고 여생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봄날에 절벽에서 물로 뛰어내려 자살한 환자를 건져서 화장할 때, 김루시아 수녀는 그렇게 생각 했지만, 그 생각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말이 되어 나오려 고 하는 그 생각을 버렸다. 자살한 환자는 김루시아 수녀와 동갑 이었고 젊어서 실명해 있었다. "보이는 곳으로 가겠다"는 문장 한 줄이 그의 유서였다.

김루시아 수녀도 섬에서 늙었지만 섬에는 노후를 의탁할 곳 이 없었다. 도라지수녀원에 들어올 때 김루시아 수녀는 골반뼈 에 구멍이 뚫려서 걸음이 어려웠고 심장이 메말라서 숨을 힘들 어했다. 의사들이 긴 병명을 붙였지만 병은 이름으로 지칭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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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조사한 결과를 '종합보고서'로 발간했다. 진실 규명을 신청 한 건수는 1만 8백60건이었고 이중 7천9백22건(73%)은 민간 인 집단 학살사건이었다. 현장조사와 관련자 조사 과정을 모두 수록한 보고서의 분량은 방대했다. 이 보고서는 곧게 찔러 들어 가는 문장으로 학살과 고문의 현장으로 거침없이 다가섰다. 이 보고서는 디테일을 존중해서 세밀히 살폈고, 증명되는 것과 증 명되지 않는 것을 구별했다.

이 보고서가 증언하고 있는 범죄는 모두가 군대나 경찰 그리 고 검찰과 법원에 의해 자행된 국가 범죄였다. 기소와 재판과 선 고의 사법절차를 모두 거친 합법적 학살도 많았다. 이미 사형이 집행된 사건이 수십 년 지나 무죄로 판명되기도 했는데, 그 사건 의 기소와 재판을 담당했던 수사관과 법관들은 그때 일이 왜 그 렇게 되었는지,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를 말하지 않았다.

나는 1948년생으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의 시절을 거쳐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이 보고서에 수록된 대부분의 학살 과 고문은 모두 나의 삶과 동시대에 벌어졌던 야만 행위이다. 나 는 이 보고서를 구해서 읽으면서 공포와 절망에 치를 떨었다. 나 의 시대에 폭력은 일상화되고 제도화되어 있었다. 정권은 이권 과 다름없었고, 정치권력과 군사력에 의한 폭력과 행정 권력, 경 제 권력에 의한 폭력이 겹쳐 있었고, 이념이라는 미신이 세상의 꼭대기에서 모든 폭력을 총괄했다. 이 제도화된 폭력은 그 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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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를 자행하는 자와 피해자와 방관자들의 인간성을 심대하게 파괴했고 그 시대에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남겼다. 나는 그런 시대에 태어나서 자랐고 밥을 벌어 먹었다.

「명태와 고래」는 이 보고서를 읽은 후에 두려움과 절망감 속 에서 쓴 글이다. 나는 감정을 글에 개입시키지 않으려고 애썼다. 남쪽과 북쪽의 폭력에 의해 번갈아 짓밟히고 제 땅에서 추방되 는 사람들에 대하여 쓰려고 했다. 짓밟힌 사람이 다시 삶을 추슬 러나가는 모습은 겨우 조금밖에 쓰지 못했다. 고통과 절망을 말 하기는 쉽고 희망을 설정하는 일은 늘 어렵다.

「48GOP

48GOP는 십년쯤 전에 언론사 취재팀과 함께 전방 군부대를 취재 여행하면서 느낀 것들을 소설로 쓴 것이다. 나는 당시로부 터 사십 년 전에 육군에서 제대했는데, 사십 년 후의 젊은이들이 같은 자리에서 북쪽 젊은이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동부전선 산 악 고지의 영하 이십 도에 가까운 추위 속에서 양쪽 젊은이들이 모두 발이 시려워서 쩔쩔매고 있었다.

전쟁과 분단의 기원은 나의 시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 래된 역사 속에서 그 필연성들이 배태되고 자라나서 오늘의 방 향으로 전개된 것이라고 나는 그때 생각했다.

변하지 않는 것들이 변하는 것들을 억누르고 있었고, 변하지 않는 것들이 변하는 것들의 힘에 조금씩 밀려가고 있었다.

군말 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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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는 것들이 변하는 것들의 힘에 조금씩 밀려가고 있었다. 스스 로 변하지 않는 것들은 마침내 멸망할 것이라고 나는 그때 생각 했다.

내가 1948년생이므로 소설 제목을 '48GOP'라고 정했다. 괴 로운 제목이지만 바꿀 수도 없다. 나의 돌아가신 아버지는 나라 가 망해서 없어지던 1910년생이고 그 아들인 나는 그 나라를 다 시 세우던 1948년생이다. 1948년은 1910년의 연장 위에 있다. 1910. 1948. 이 두 개의 숫자가 부자의 생애에 좌표처럼 찍 혀 있다.

「영자」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에는 오래전부터 9급 공무원 시험을 준 비하는 젊은이(구준생)들의 집단주거지가 형성되어 있다. 9급 공무직의 여러 직렬에 따른 시험 과목을 가르치는 학원들과 싼 음식을 파는 식당, 술집, 가게와 작은 방을 세놓는 오피스텔 건 물(고시원)들이 밀집해 있다. 9급을 지망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몇 년 동안 이 동네에서 살면서 학원에 다닌다. 해마다 9급 시험 이 끝나면 사람들은 흩어지고 새로 모인다. 합격한 사람보다 낙 방한 사람이 훨씬 더 많다.

이 세상 속으로 진입하지 못하는 많은 젊은이들을 나는 이동 네에서 보았다. 삼수 끝에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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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낮에는 오토바이로 배달 노동하고 밤에는 학원에 다니면서 9급을 준비하는 이도 있는 한편 가수가 되려고 노래를 연습하는 젊은이도 있었다. 「영자는 이 노량진 9급 학원 동네의 젊은이 들을 관찰하면서 쓴 글이다.

제도가 사람을 가두고 조롱하는 모습을 나는 거기에서 보았 다. 인간의 생존 본능을 자기 착취로 바꾸어버리는 거대한 힘이 작동되고 있었다.

날이 저물면 구준생 남녀들이 사육신 묘지에 와서 키스했다.

「대장 내시경 검사

몸이 탈 나서 병원에 가고, 죽은 친구들의 빈소에 문상 가는 일은 요즘 나의 중요한 일과이다. 「대장 내시경 검사는 병원이 나 빈소에서 들은 이야기의 파편들을 엮은 글이다.

문상을 가면 고등학교, 대학교 때 친구들을 만나서 소주 마시 고 노닥거리는데, 문상 왔던 사람이 몇 달 후에 죽어서 문상을 받는다. 죽은 자는 죽었기 때문에 죽음을 모르고 산 자는 죽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을 모른다. 빈소에서 노닥거릴 때, 인간은 무 엇을 아는가? 라는 의문이 떠오르면 난감하다. 죽지 않은 사람 들은 이웃집에 마실가듯이 죽은 사람의 빈소에 모인다.

몇 달 전에, 늙어서 바람피우다가 걸려서 이혼하고 재혼한 친 구가 죽어서 문상을 갔었다. 헤어진 전 부인이 검은 옷을 입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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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에는 지친 사람들이 숨쉬러 온다. 「저녁 내기 장기」는 내 가 그동안 호수공원의 장기판을 기웃거리면서 보고 듣고 겪은 것들에 이야기를 입힌 글이다. 이십오 년 전에 장기를 두던 노인 들은 지금은 없다. 지금은 그후에 늙은 사람들이 장기를 두고 있 다. 그때 산책하던 사람과 개들은 지나갔다. 지금은 다른 사람 과 개들이 지나간다. 지나가는 것들은 지나가고 또 지나간다. 다 들 지나가서 지금 장기판에서는 내가 늙은이 대접을 받는다. 장 기꾼들은 여름에는 나무그늘에 모이고 겨울에는 양지쪽으로 간 다. 눈구덩이에 앉아서 두는 사람도 있다.

호수공원 장기판에서 나는 해체되는 삶의 아픔을 느꼈다. 저 마다의 고통을 제기끔 갈무리하고 모르는 사람끼리 마주앉아서 장기를 두는 노년은 쏠쏠하다. 삶을 해체하는 작용이 삶 속에 내 재하는 모습을 나는 거기서 보았다.

「저녁 내기 장기」는 대상에 바싹 들러붙어서 쓴 글이다. 형용 사를 쓰지 않으려고 애썼던 기억이 난다. 바싹 붙는다고 좋은 것 은 아니다. 바싹 붙고 나면 글을 데리고 물러서기가 어렵다. 나 는 날마다의 불완전 속에서 살고 있다.

「손」

「손」은 오래전에 오영환 소방사한테서 들은 이야기의 느낌에 의지해서 쓴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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