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52권째 책을 들고 금방 완독하였습니다. 금방이라는 표현이 좀 어울리지 않은데, 왜냐하면 다른 책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에 책을 다 읽었기 때문입니다. 책을 뚝딱 읽게 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예컨대 두께가 얇다든지, 페이지 수가 적다든지, 삽화가 많다든지, 등등이 있습니다. 이어령 선생님의 이번 책을 금방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문장의 세련됨에 있고 짜임새 좋은 문단이 아닌가 라는 생각입니다.
오래전 글을 묶어서 만든 글이지만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우리 정서가 잘 녹아있다는 생각이 들게끔 합니다. 그런 생각을 가졌던 올해 마지막 책- 사실 지금 다른 책을 읽고 있고 있기에 완벽한 마지막은 아닙니다만.- 속의 밑줄을 가져와 보겠습니다.
에어로빅스에서 보듯이 앞으로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공리적인 기능만이 아니라, '춤'과 '음악'처럼 생을 표현하는 즐거움과 그 엑스터시의 힘이다. 작은 예로 '엄살'과 '덤' 이야기를 했지만 결국 우리가 지금까지 버려두었던 것ㅡ지금까지 부정적인 것으로 내버려두었던 민족의 한 씨앗들 그 가운데에는 내일의 풍요한 자산이 깃들어 있는 것들이 많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을 가꾸고 개량하고 응용하면, 잡초라고 버려두었던 식물에서 맛있는 과일을 딸 수 있을 것이고, 우리의 피와 살을 가꾸는 식량을 얻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단순한 낙관론이 아니라, 컴퓨터와 로봇이 대신할 수 없는 인간의 신명과 그 인정이 인간의 가치로 존경받게 될 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믿는다.
'똑똑한 사람', '부지런한 사람', 잘난 사람'들에 눌려 지냈던 사람들이, 무엇이 참된 인간의 삶인가를 가르쳐주는 시대가 올 것이다.
52 Part 1 독법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터에서 벗어나면 술을 마시거나 유흥장을 기웃거리거나 어두운 골목길에서 서성대고 있다. 자신의 자아와 만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도구처럼 일할 때에는 어느 한 구석에 숨어 있던 내가 오후 6시나 7시가 되면 흰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고 짐승처럼 숨쉬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우주에 단 하나밖에 없는 '나', 타자에 의해서는 절대로 대체 불가능한 '나', 피를 나눈 형제로도 마음을 함께 하는 연인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나의 그 영혼. 그것을 주체할 수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구로서의 '나'를 그대로 연장 시켜가려고 하는 것이다.
자아가 돌아오는 시간을 오락이나 마취로 그냥 죽여버리지 말라, 벽돌문화 익명의 사회 속에서 자신의 개성을 회복하는 길은 붓글씨를 쓰듯이 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활자글씨는 단지 의미를 운반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지만, 서도의 글씨는 의미만을 적고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자신의 독자적 인생과 그 존재의 또 다른 의미를 각인시켜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 우주의 유일자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장작 하나를 패도 그 도끼 소리에 자신의 영혼을 담은 음악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시간 속에 숨은 미래 75
형이 아우를 업고 가는 장면이 나온다.
같은 젓가락 문화권에 속해 있는 일본문학에서도 '없는 장면' 은 감동적인 정경으로 자주 등장한다. 이시가와 다꾸보꾸라는 시인은 '내 장난삼아 어머니를 업다가 그 가벼우신 몸에 세 발짝도 떼지 못하였노라!'라는 단시를 읊은 적이 있다. 너무 무거워서가 아니라 너무 가벼워서 걷지를 못했다는 역설에 이 시의 감동이 있는 것이지만, 어머니의 몸무게를 전신으로 느낄 수 있는 '업는 문화' 그 자체에, 그 뻐근한 감동의 원천이 있다고 할 것이다.
포옹의 문화는 상대방의 몸무게를 느낄 수가 없다. 수평적인 인간관계이기 때문이다. 포옹은 누가 누구를 일방적으로 끌어안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대등하게 접촉해서 결합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없는 문화는 업고 업히는 수직적인 인간관계이므로 주는 쪽과 받는 쪽의 상하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결합이다.
어려서는 어머니에게 업혔고, 커서는 어머니를 업는다. 우리는 사람을 보면 우선 내가 업어주어야 할 사람인가 혹은 내가 업혀야 될 사람인가를 가늠한다. 하다못해 차 한 잔을 마셔도 이제는 서구화하여 없어져가고 있지만, 업힐 사람과 업어주는 사람이 이심전심으로 결정된다. 돈을 내는 사람이 없는 사람이고 빈 손으로 일어서는 사람이 업혀가는 사람인 것이다.
종합의 시대와 총체적 문화
포크와 나이프는 찢기 위해서 있다.
시간 속에 숨은 미래 85
짐작할 수가 있다. 흔히들 죽음을 생의 끝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생과 동시에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옛날 이집트의 귀족들은 무슨 잔치가 벌어질 때마다 그 술자리에 관을 갖다놓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즉 식사가 끝나고 주연으로 들어가게 되면 한 남자가 나무로 인간의 시체를 만든 모형을 관에 넣고 들고 다닌다는 것이다. 실물의 크기이기 때문에 누가 봐도 진짜 시체를 연상했던 모양이다. 관을 든 사람은 회식 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시체를 보이면서 이렇게 말을 했다는 것 이다.
"이것을 보시면서 마음껏 술을 들고 즐기십시오. 당신도 죽으면 이러한 모습이 되어버릴 테니까!"
살아 있는 즐거움, 그 절정의 즐거움에 이르기 위해서 이집트인들은 죽음의 영상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죽음을 삶의 현장 속에 끌어들임으로써 생의 강렬한 불꽃을 타오르게 한 것이다.
여러분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이따금 비난의 대상이 되어 있는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노나니・・・・・・.라는 우리의 유흥가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이것이 퇴폐적인 노래라고 생각한다. 젊어서 힘껏 일해도 시원찮을 나이에 놀라고 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가난을 면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도덕적 실증주의자들이 많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 풀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집트인이 '관'을 갖다놓고 술을 마신 것처럼 이 노래 역시 술자리에서 흥을 돋우기 위한 효과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보면 젊은이들은 죽을 것도 모르고 오로지 일만하고 있기 때문에 술을 마실 때만이라도 '죽음'의 의식을 일깨워 준 노래라고 풀이할 수 있다. 죽음의 의식이 단순한 쾌락으로, 자포자기의 쾌락으로 흘러버릴 때도 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잘못된 삶을 깨우쳐주고 반성케 하는 좋은 교사요, 현명한 절인의 구실을 해줄 때가 많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천년만년 살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거꾸로 현대인은 '생'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세상은 메말라지고 그 죄악은 더욱 어둠을 더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종말감 속에서 시작하는 사람, 죽음 속에서 시작하는 사람, 죽음 속에서 삶을 느끼는 사람만이 생의 완전함을 지닐 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종말 속에 시작이 있는 우주의 리듬
종말 속에 시작이 있고, 시작 속에 이미 그 종말이 있다는 것을 단순한 말장난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수사학의 문제가 아니라 차라리 식물학에 속하는 것이라고 하는 편이 좋을 는지도 모른다. 계절의 순환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그 식물들이기 때문이다.
식물들의 세계에 있어서는 종말과 시작이 고리쇠처럼 연결되어 있어서, 낙엽이 진다는 말은 곧 새잎이 돋는다는 것과 같은 뜻이다.
시간 속에 숨은 미래 107
106 Part 1 SU
손님은 "한 두서너 켤레만 주세요"라고 대답한다. 점원은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하는 기색 없이 몇 켤레의 양말을 내놓는다. 흔히 일어나는 일이지만, 좀 더 따지고 보면 점쟁이들의 거래 방식처럼 신기한 일이다.
"두서너 개'란 말은 두 개, 세 개, 네 개를 두루뭉수리로 합쳐놓은 말이다. 여기에 '한'이란 말까지 붙이면 무려 하나에서 넷까지의 수를 한꺼번에 나타내는 말이 된다. 양말을 한 두서너 개" 달라면 대체 몇 켤레를 내놔야 하는가. 점쟁이나 탁월한 독심술자가 아니면 정확하게 손님이 몇 켤레를 요구하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다.
"한 두서너 개 달라는 사람도 이상한 사람이지만, 그것을 또 용케 알아듣고 두 켤레나 세 켤레를 적당히 내놓을 줄 아는 점원은 더욱 이상하지 않은가.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그 사람에게 어디 갔다 왔느냐고 물으면 그는 여전히 또 *양말 두서너 켤레 사가지고 왔다"고 대답할 것이다.
사고파는 일은 돈이 오고 가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두서너 개'일 수는 없다. 둘이면 둘, 셋이면 셋이다. 숫자 하나에 따라 돈 이 몇 백원씩 왔다 갔다 하는데도 그들은 이 명백한 거래를 하고 서도 두서너 켤레를 팔았고 두서너 켤레를 산 것이다.
두서너 개라는 이 신비한 숫자는 결코 컴퓨터로 잴 수 없는 말이다. 한국인만이 이해하고 또 생활하고 있는 이심전심의 숫자요. 말인 것이다. 그 증거로 외국 백화점에 가서 양말을 "원투스리포만 달라고 한다면...
사소한 속에 숨은 거인 185
그리고 "떡" 버티고 선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만약 'ㄹ'음과 'ㄱ' 음을 섞어 쓰면 굴러가다 멈췄다. 멈췄다 굴러가는 불규칙 운동을 나타나게 된다. "솔방울이 떼굴떼굴 굴러간다"로 바뀌고 만다. "떡" 할 때에는 솔방울이 걸려서 멈춰선 상태요, "떼굴" 할 때에는 다시 굴러 내려가는 상태가 된다. 이러한 'ㄹ'과 'ㄱ'의 대응을 대표하는 말이 '살다'와 '죽다'라는 말이다. '살다'는 생명이 계속 물처럼 흘러가는 것이요, 바퀴처럼 굴러가고 돌아가는 것이지만, '죽는다'는 것은 그 목숨이 막히고 꺾이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살다'는 'ㄹ'음이 붙어 있고 '죽다' 는 'ㄱ'음으로 끝나고 있다. '떽떼굴'의 경우처럼 살고 죽는다'는 말 역시 'ㄹ'과 'ㄱ'이 섞여 있어서 교묘한 생사의 두 상태를 실감 있게 전해주고 있다.
한국인은 유난히 "죽겠다"는 말을 잘 쓴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많다. 직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첫 마디가 대개는 피곤해서 죽겠다이다. 좋아도 죽겠다고 하고 슬퍼도 죽겠다고 한다. "우스워 죽겠고, 재미있어 죽겠다"라고 말하는 것이 한국인이다. 심지어 죽는 것은 생물만이 아니다. 시계도 죽고, 불도 죽고, 맛도 죽는다.
우리가 죽는다는 말을 잘 쓰는 것은 그만큼 죽다란 말이 살다 란 말과 잘 대응이 되는 것이기에 정지와 더 이상 계속될 수 없는 극치의 넓은 뜻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ㄹ'과 'ㄱ' 그것은 삶의 두 가지 음양(陰陽)을 나타내는 한국인
사소함 속에 숨은 거인 187
직역을 하면 출구가 아니면 입구란 뜻이다. 들어가는 것과 나 가는 것을 하나로 보지 않고 각기 독립적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나가고 들어오는 것을 하나로 표현하는 '출입구'라는 그 편리한 말이 영어에는 따로 없는 셈이다.
엘리베이터도 마찬가지다. 영어의 엘리베이터를 어원적으로 따져보면 높이 올라가는 것'이라는 뜻이 된다. 문자 그대로 보면 엘리베이터는 올라갈 수는 있어도 내려올 수는 없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승강기라고 한다. 서양 사람과는 달리 올라 가고 내려오는 양면성, 즉 엘리베이터의 상승.하강을 동시적으로 파악한 것이다.
이런 예를 들자면 끝이 없다. 책상 서랍을 영어로 'DRAWER' 라고 부른다는 것은 중학교 학생 정도만 돼도 다 안다. 그런데 그 것도 어원을 분석해보면 '빼는 것'이라는 일방적인 뜻으로만 되어 있다. 빼기만 하고 닫는 개념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말로 는 빼고 닫는 서랍의 두 기능을 모두 포함시켜 '빼닫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말에는 이렇게 모순 개념이나 반대 운동을 하나로 묶어놓은 것들이 많다. 열고 닫는다 하여 '여닫이'가 되고 밀고 닫는다고 하여 '미닫이'라고 한다. 나가고 들어가는 것을 동시적으로 나타낸 것이 '드나든다'이며 좀 더 그것을 실감 있게 표 현할 때에는 '들락날락'이다. 엘리베이터 역시 우리 안목으로 보 면 올라만가는 것이 아니라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다.
'왔다갔다'라는 말, '오락가락'이라는 말, '보일락말락'이라는
192 Part2 발견
긁으면 글이 되고, 모양을 긁으면 그림이 된다. '그리움'이나 '그리다'란 말 역시 예외가 아니다.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나 모습을 긁는 것이 그리움이다. 그러니까 그리움이란 말은 종이가 아니라 마음속에 쓴 글이요, 그림인 셈이다.
옛날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에 나오는 시 한 구절이 우리에 게 그것을 증명해준다. "마음의 붓으로 그린 부처 앞에……"라는 아름다운 시구가 그것이다. 그리움은 마음의 붓으로 그린 그림이요, 글이다.
우리가 글을 쓸 때면 글의 근원적인 뜻대로만 쓰면 훌륭한 작품이 나올 수가 있다. 미끈미끈한 볼펜으로 글을 쓸망정 그것이 긁는 행위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부인들이 바가지를 긁듯 이 문사도 문자로써 긁는다. 가려운 데를 긁어주어야 한다. 부정이나 불의를 박박 긁어야 글은 시원한 것이 된다.
그리고 또 글은 그리움를 나타내야 한다. 현재에 없는 것을 찾는 것이 그리움이다. 사라진 과거거나 앞으로 올 미래…… 언제나 '그리운 것'과 '그리는 것은 눈앞에 부재하는 것이다. 글은 바로 그 부재의 것을 현존케 하는 힘이다. 글은 긁는 것이며 문자로 쓴 그림이며 과거의 그리움과 미래를 그리는 행위다.
나나의 비극
'나나의 비극'이라고 하면 에밀 졸라의 소설 이야기인 줄 알 것 이다. 그러나 여기의 나나는 외국 소설의 여주인공 이름이 아니라 순수한 우리나라의 말, 그것도 우리가 언제나 말끝마다 붙여 쓰기를 좋아하는 말이다.
194 Part 2 발견
옆에서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조심해서 들어보면 이상스 럽게도 "나", "・・・・・나"가 연속적으로 튀어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차나 한잔합시다."
"영화나 구경 갑시다."
"바둑이나 한 판 둘까?"
"집에나 들어가서 잠이나 자자."
끝없이 '나', '나'가 폭발한다. 어째서 그런 습관이 생겨나게 되 었을까?
그냥 '나' 자를 빼고 "차를 마십시다", "바둑을 돕시다"라고 말 하지 않고 왜 꼭 말끝마다 '나' 자를 붙여야 시원한가?
별 뜻 없이 무심히 말하는 소리지만, 그것을 분석해보면 우리 잠재의식 속에 그만큼 생활의 불만이 가득히 괴어 있다는 증좌다. "......나"는 소극적인 선택이며 도피적인 언사인 것이다. "집에 나가서 잠이나 잔다"는 것은 곧 다른데에 가봐야 별 수 없다는 뜻이며, 또 집에 들어가서도 신통한 일이 없으니 잠을 자는 것이 차라리 속 편하다는 불만의 토로다. "집에 가서 잠을 자야겠다" 는 말과는 그 뉘앙스가 아주 다르다. 결국 ㆍㆍㆍㆍㆍㆍ나"란 말은 소극적인 긍정, 마지못해 하는 행동, 그리고 꿩 아니면 닭이라는 식의 사고를 상징하는 것이다.
사소함 속에 숨은 거인 195
100퍼센트의 노력, 100퍼센트의 자(自)를 다 바치는 사람 은 '나' 자를 쓰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사람만이 보람 있는 생활 을 할 수 있다.
우리의 말투에서 '나나'의 관습어가 가시는 날, 우리에겐 정말 충족된 생을 살 수 있는 그날이 올 것이다.
'어쨌든'이란 말
남들이 옆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혹은 남들이 쓴 문장을 유심히 한번 관찰해보라. 유난히 많이 등장하는 하나의 어휘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어쨌든'이라는 부사다.
"어쨌든 좋지 않다", "어쨌든 해야 되겠다". 무엇인가를 부정하는 긍정하는 우리는 무엇을 강조할 때 '어쨌든'이란 말을 흔히 쓴다. 영어에도 물론 'anyway'나 'anyhow'란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처럼 상습적으로 또 경우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렇게 자주 튀어나오지 않는다.
분석적이고 논리적이라는 당당한 사설이나 대학 교수님들의 논문에도 그 결론이 "어쨌든…………"이란 말로 끝맺어져 있을 경우가 많다.
대체 '어쨌든'이란 그 부사는 무엇인가? 장황한 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그것이 이유 이전이며, 논증이나 사고를 추방하는 '곤 봉' 같은 말임에는 틀림없다.
"어쨌든 그렇게 해야 된다"거나 "어쨌든 나쁘다"는 말은 다 같이 일방적인 폭력, 비판을 허용치 않는 독재의 언어다.
사소함 속에 숨은 거인 197
다시 돌아온 하늘 밑에서 환갑을 맞게 된 것이다.
60년 동안 땅만 보고 살아오는 동안에도 그리고 매일 밤 깊이 잠들어 있는 나의 머리맡에서도, 태세는 아주 조용히 그리고 어김없이 닭에서 원숭이의 열두 구획의 하늘 자리를 옮겨 다닌 것 이다.
어떤 권력, 어떤 기술로도 우리의 나이를 결정짓는 이 확고한 별의 움직임을 멈추게 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다. 이 운명의 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우리 스스로가 별을 만드는 사람이 되었을 때뿐이다.
태세의 별을 만들어냈던 것처럼 시인이란, 창조적 상상력을 가진 예술가들이란, 별의 관측자로서가 아니라 별을 만드는자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문학을 택하고 시를 배웠던 것도 그런 특권을 부여받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사실상 진정한 시인에겐 환갑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윤동주가 바로 그런 시인이었다는 것은 이미 강의실에서 배웠 던 텍스트 읽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시 (詩)를 자세히 읽어 보면 아주 짧은 그 텍스트 안에 세 개의 다른 시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첫 번째 연에 나오는 것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로 과거형이고, 다음 연은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 어가야겠다'로 다짐과 바람을 나타낸 미래형으로 되어 있다.
262 Part 3 명상
그러나 그 마지막 행은 독립 연으로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 운다'로 현재형이다.
과거형으로 된 시행들은 부끄러움이니 괴로움이니 하는 부정적 감정을 서술하고 있는데 비해서, 미래의 시간을 나타내는 시 구들은 '・・・・・・노래해야지' '걸어가야겠다'로 외적인 행동을 나타내는 희망의 말로 구성되어 있다.
윤동주에게 있어 과거란 참회로 다가서는 내면의 시간이요, 미래란 다짐으로 맞이하는 행동의 시간인 것이다.
그러나 이 과거와 미래 사이에 솟대처럼 외롭게 서 있는 현재의 시간에는 나의 감정도 행동도 아무것도 더 이상 서술되어 있지 않는 묘사로 되어 있다. 단지 거기에 바람에 스치는 별이 있을 뿐이다.
윤동주가 만든 이 별은 '오늘밤에도'라는 그 '도'의 조사가 암시하고 있듯이 무한히 계속되는 오늘, 영원히 지속되는 밤인 것이다. 과거도 미래도 이 시인의 텍스트 안에서는 오늘밤으로 응축되고 별로 결정(結)되어 나타난다.
단독 연으로 구성된 「서시」의 그 숨막히는 마지막 행을 다시 기억해보자. 밤이 어두울수록 별은 빛난다. 모든 것을 정복한 밤의 암흑은 오히려 별빛을 창조해내는 상황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별에 스치는 바람은 이미 과거형으로 서술되었던 잎 새에 이는 그 바람이 아닌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소네트처럼 어떤 폭풍도 별을 움직이게 할 수는 없다.
시간이 빚은 공간 263
그것만이 '너는 왜 법관이 되지 않고, 국회의원이 되지 않고, 글을 쓰고 있는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길이다. 윤동주가 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노래하려고 했던 그 '죽어가는 모든 것'들에는 심판하는 자도, 심판을 받는 자도 동시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윤동주의 텍스트를 과거형이나 미래형에 속하는 텍스트만으로 읽으면, 그는 시인이라기보다는 독립운동가요 훌륭한 크리스천이다.
그러나 윤동주가 우리 앞에 여전히 시인으로서 기억되는 것은 그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순교한 것만이 아니라 바람에 스치는 별을 끝없이 지속하는 '오늘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환해야 보이지만 별은 어두워야만 잘 보인다. 밤의 시대에 태어난 우리는 '별의 언어', 역설의 언어를 만날 수밖에 없다.
별의 관측자가 아니라 별을 만드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 는 '오늘밤'에도 글을 쓴다.
** 저자의 '글 쓰는 삶'에 대한 진정어린 고백을 담고 있는 이 글은 1993년 12월 3일 제자들이 마련한 회갑연 자리에서 저자가 <별의 관측자가 아니라 별 을 만드는 사람이 되자 - 윤동주 서시」의 구조>라는 제목으로 강의한 내용이 다. (편집자주)
시간이 빚은 공간 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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