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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독서정리

쉰 한 번째 책 : 역사의 역사 - 유시민

by 마파람94 2021. 12. 29.

 

책을 선택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이 책을 왜 읽으려고 하는지? 누가 쓴 것인지, 왜 쓴 것인지, 어떻게 쓴 것인지 책을 선택하여 펼치기 전에 몇 가지 의문으로 시작하곤 합니다. 그리고 책을 선택합니다. 제가 이 책을 읽으려 했던 가장 큰 첫 번째 이유는 사랑하는 이가 역사에 관심이 많다고 하여 그녀의 마음에 들고자 선택한 책입니다. 기왕이면 유시민 작가가 쓴 글이면 더욱 적합하겠다고 생각한 것이 두 번째 이유입니다.

 

책을 모두 읽고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두 가지 목적을 크게 달성한 것 같아서 매우 흡족합니다. 역사에 관심을 갖고 있고 탐구해 보고자 한다면 이 책을 두말할 것 없이 추천하고자 합니다. 이 책을 표현하자면-저자의 표현처럼-예를 들어 '독일의 여러 도시들을 알고 싶다면 패키지여행을 먼저 간 후 상세 자유여행을 하라.'는 제안에 딱 들어맞는 역사공부 책인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역사에 대한 패키지여행 같은 역사 관련 책입니다.

 

책 속 저의 밑줄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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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역사

백규는 세상 사람들이 버리면 사들이고 사들이면 팔아넘겼다. 풍년이 들면 곡식을 사들이고 실과 옷을 팔았으며, 흉년이 들어 누에고치가 나돌면 비단과 풀솜"을 사들이고 식량을 팔았다. 풍년과 흉년이 순환하는 이치를 살 펴 사고파니 해마다 사잰 물건이 배로 늘었다. 돈을 불리려면 값싼 곡식을 사들이고, 수확을 늘리려면 좋은 종자를 썼다. 거친 음식을 달게 먹고, 하고 싶은 것을 억누르며, 옷을 검소하게 입고, 노복들과 고통과 즐거움을 함 께했으나, 시기를 보아 나아갈 때는 사나운 짐승과 새처럼 재빨랐다

우전은 진나라의 난쟁이 배우로 우스갯소리를 잘했지만 모두 큰 도리에 맞았다. 시황제가 원유(苑圃)를 크게 넓히려고 동쪽으로는 함곡관에 이르게 하고 서쪽으로는 옹(擁)과 진창(陳倉)에 이르게 했다. 우전이 말했다"좋은 일 입니다. 그 속에 새와 짐승을 많이 풀어놓아 길러 적이 동쪽에서 쳐들어오면 고라니나 사슴을 시켜 그들을 막게 하면 충분할 것입니다." 시 황제는 이 말을 듣고 곧장 그만두었다.

역사의 코스모스

『사기』 이야기를 끝맺기 전에 『서』에 관해 한 가지만 덧붙여 둔다. 『서』는 후대 중국 지식인들의 기록이나 「태사 공자서」에서 사마천이 말한 내용과 어긋나는 데가 있어 위작(僞作) 논란이 일었다." 



11. 실을 켤 수 없는 고치를 삶아서 만든 하얗고 광택이 나는 가볍고 따뜻한 습

12. 울타리를 쳐놓고 동물을 기르는 임야13. 해제」, 『사기 서 13-32쪽 참조.

 

 

제3장 이븐 할둔, 최초의 인류사를 쓰다

이슬람 세계 중에서 아랍인이 주도권을 쥐고 거주하는 아랍어 사용지역이다. 아랍권 국가는 대부분 '아랍연맹'에 가입해 있는데, 아프리카 북부 해안을 따라 늘어선 모리타니, 모로코, 튀니지, 알제리, 리비아, 이집트와 동부 소말리아, 중동의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 이라크, 레바논, 예멘, 오만, 아랍에미리트, 팔레스타인 등이 여기 속한다. 터키와 이란, 중앙아시아와 남아시아 이슬람 국가들은 '인종'이 달라서 아랍 세계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아랍인'은 아라비아반도에서 유목 생활을 하던 '셈족(Sem ites)'의 한 갈래였다. 아랍인과 유대인은 팔레스타인 땅을 두고 유 대인과 항구적 전쟁 상태에 놓여 있는데 흥미롭게도 둘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처한다. 『역사서설』 서문에서 할둔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이름 앞에 '우리의 주인이자 보호자이고 토라와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아랍 민족의 예언자'라는 찬양 문구를 붙였다. 여기서 토라는 구약성서』의 첫 다섯 권인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신명」이고, 복음서는 『신약성서』의 「마태 복음」. 「마가복음」•「누가복음」•「요한복음」이다." 이슬람을 창시한 무함마드가 자신의 종교적 권위를 보증하기 위해 유대교와 기독교의 경전을 인용했으니, 그들이 서로 철천지 원수처럼 싸우는 현실을 생각하면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랍인은 오래전부터 존재했지만 아랍 세계는 7세기에 탄생했다. 아랍 세계의 창조주는 '예언자 무함마드'였다. 우리가 보통 '이슬람 창시자 마호메트'라고 하는 그는 '왕이 된 예수'라고 할 수 있다.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며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주장했지만 현실 권력을 얻지 못하고 '반체제 시국사범'으로 몰려 처형당했다.

11. 『무깟디마 13,14쪽각주 1 참조. p.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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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있었던 그대로의 역사'랑케

타고난 역사가

역사학은 만인에게 유용하지만 권력자에게는 특별히 쓸모가 있다. 현명하거나 현명해지려고 애쓰는 권력자일수록 명성 높은 역사가를 가까이 둔다. 그런 군주들 중에는 빛나는 통치력뿐 아니라 역사가를 높이 존경하고 극진히 대우한 덕에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이도 있다. 19세기 중반 독일 바이에른 국왕이었던 막시밀리안 2 세 (1811~1864)가 그런 인물이다.

역사가 레오폴트 랑케 (1795~1886)는 1854년 9월 25일부터 10월 13일까지 독일 뮌헨에 있던 왕의 별장에서 로마제국의 흥망부터 미국 독립 전쟁과 프랑스 대혁명을 거쳐 나폴레옹 전쟁까지 2,000년 서구 역사에 대해 거의 매일 강의했다. 랑케는 이때 평민이었지만 나중에 프로이센 왕에게 귀족 작위를 받아 '레오폴트 폰 (von) 랑케'가 되었다. '수강생'이었던 막시밀리안 2세는 속기사가 정리한 강의와 질의응답 기록을 랑케에게 보냈는데, 무슨 연유에서 랑케는 그것을 바로 세상에 내놓지 않았다. 막시밀리안 2세의 사후 24년, 랑케가 세상을 떠난 지 2년이 지난 1888년에야 강의록은 빛을 보았다. 랑케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집필했던 『근세사의 여러 시기들에 관하여』의 부록으로 세상에 나왔기 때문이다.'

1. 링케의 연속 강의와 대담을 담은 이 부록의 한국어판은 두 개가 있다. 세로 쓰기 편집에 국한문을 혼용한 문고판 『젊은이를 위한 세계사 (장병칠 옮김, 삼성문화재단, 1976) 근세사의 여러 시기들에 관하여(이상신 옮김, 신서원, 2011)이다. 이 책에 쓴 인용문은 독일 알프레드도브 출판사의 1970년 판본을 번역한 『근세사의 여러 시기들에 관하여 에서 가져왔지만, 발췌 요약을 하는 과정에서 일본어판을 중역한 듯한 분위기가 나는 젊은이를 위한 세계사도 참고했다. 근세사의 여러 시기들에 관하여는 랑케의 역사철학과 세계관, 공화정과 군주정에 대한 입장을 분명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일독할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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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역사

역사가의 주관은 개인적 기질, 경험, 학습, 물질적 이해관계, 사회적 지위, 역사 서술의 목적을 비롯한 여러 요인이 좌우한다.

인간은 다른 인간과 개별적·집단적 관계를 맺고 공동체를 형성하며 살아가는 동안 서로 협력하고 경쟁한다. 그래서 인류 역사는 개인과 집단의 성취, 협력, 갈등, 대립, 투쟁, 억압, 착취, 정복 전쟁과 크고 작은 살육 행위로 점철되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일을 객관적이고 공평한 관점으로 서술할 수 있는 역사가가 있을까? 더 근본적으로 객관적이고 공평한 관점이 존재할 수는 있는가? 없다. 그 증거가 바로 '있었던 그대로' 과거를 보여주겠다고 한 랑케 자신이다.

21세기에 랑케처럼 말하는 역사가가 있다면 마초 인종주의자라고 비난받을 것이다. 그는 로마-게르만 민족은 진보하지만 모든 인류가 그런 것은 아니라면서 아시아에는 한때 문명이 있었지만 야만족 몽골의 침입으로 완전한 종말을 맞았다고 주장했다." 유럽 밖의 사피엔스를 미개인으로 간주했을 뿐만 아니라 여성을 동등한 존재로 존중하지 않았다. 문서보관소에 잠들어 있는 문서들을 가리켜 "그토록 많은 아름다운 공주들이 저주에 걸려 누군가 구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고 했고, 처음 발굴한 자료집에 대해서도 비슷한 표현을 썼다. "손끝하나 닿지 않은 처녀. 나는 그녀에게 다가서는 순간을 고대한다. 그녀가 예쁜지 안 예쁜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3

랑케를 흉보려고 하는 말이 아니다. 역사가의 세계관은 그 시대의 지배적인 사상과 환경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므로, 절대적으로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기준이 있을 수 없다는 자명한 이치를 확인하기 위해 랑케도 지니고 있었던 당대 유럽 남자들의 지배적 관념을 들추어냈을 뿐이다.

인간

12. 근세의 여러 시기들에 관하여, 32-33쪽

13. Bonnie G. Smith, The Gender of History: Men. Women, and Historical "Practice(Cambridge, Mass. Harvard University Press, 1988), p. 116, p. 119. 역시, 진실에 대한 이야기의 이야기 170쪽에서

 

 

제4장 '있었던 그대로의 역사'랑케

139


게다가 역사는 '언어의 그물로 길어 올린 과거'다. 달리 말하면 역사는 문자 텍스트로 재구성한 과거 이야기다. 언어는 말과 글로 이루어지며, 인류는 문자를 발명하기 전에 먼저 말을 했다. 말에 담은 과거 이야기는 시간의 흐름을 견뎌내지 못하며 압축, 누락, 과장, 왜곡, 각색을 거쳐 입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역사는 인류가 문자를 발명한 후에야 나타났다. 하지만 문자 텍스트도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완전하게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은 아니다. 설령 정말하게 표현했다고 해도 읽는 사람이 쓴 사람의 의도대로 똑같이 해석한다는 보장은 없다.

과거를 있었던 그대로 보여주겠다는 랑케의 야심,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쓴 역사를 과학적 역사라고 한 추종자들의 호언은 인간 정신과 문자 텍스트의 한계에 대한 인식 부족이 빚어낸 착각이 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랑케의 역사 이론은 역사가에게 명분 있는 도피처를 마련해 주었다.

 

과거를 평가하는 일에서 손을 떼고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도록 동시대인을 일깨우는 과업을 외면하면, 역사가는 역사 서술 작업에 따르는 정치적 위험을 피할 수 있다. 사라져 버린 문명의 파편을 탐사하고 이미 죽고 없는 사람들이 남긴 문서를 뒤져 지나간 시대의 '고유한 가치'를 탐사하는 것으로 역사가의 임무를 다할 수 있다면, 굳이 그 과거의 연장선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재의 사건에 개입하거나 끌려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 

 

 

 

제4장 있었던 그대로의 역사'랑케

141

그들은 사건을 거울처럼 그대로 반영하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목적론을 거부한다. 더 이상 어떤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 판사 역할을 맡는 것도 경멸한다(이 점에서 그들은 수준 높은 취향을 보여준다. 그들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그저 확인하고 묘사할 뿐이다. 이 모든 것은 매우 금욕적이다. 근대 역사가의 시선은 슬프고 완고하며 단호하다. 그 시선은 북극의 고독한 탐험가보다 더 고독하다. 그곳엔 눈밖에 없고, 생명체의 낌새라곤 전혀 느낄 수 없다."

랑케는 배울 것이 많지만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기에도 좋은 역사가다. 역사가는 해부학을 배우는 학생이 아니라 노련한 과학수사대 요원과 법의학자가 시신을 다루는 자세로 역사의 사실을 대면해야 한다. 시신을 해부해서 거기 무엇이 있는지를 기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시신의 상태를 보고 사망 원인과 시간을 알아낼 뿐만 아니라 망자의 직업과 생활환경, 생전의 건강 상태와 습관까지 추론해 내야 하며, 유류품이 담고 있는 정보를 연결 해 그 사람의 인생 행로를 추측할 수 있어야 한다. 니체가 아프게 지적한 것처럼, 랑케는 역사의 사실에서 인간의 이야기를 끌어내지 못했다. 그래서 그가 쓴 책들은 대중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귀중한 문헌을 보관하는 도서관 깊은 곳에 잠겨 있는 것이다.

14. Friedrich Nietzsche, The Birth of Tragedy and The Geneology of Morals. Francis Golffing(trans)(NY: Doubleday Anchor, 1956), p. 293. 역사, 진실에 대한 이야기의 이야기 132쪽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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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역사를 비껴간 마르크스의 역사 법칙

그럼에도 여기서 소개하는 것은 후쿠야마가 오래되었지만 중요한 역사학의 이슈를 되살려 냈기 때문이다. 그의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았다고 해도 이 질문을 살려낸 것만큼은 가치 있는 일이다. 그 질문이 무엇인지 우리는 안다. 역사의 진보라는 것이 과연 있는가? 인류는 일관된 방향성을 가진 보편적 역사를 구축할 수 있는가? 랑케와 막시밀리안 2세가 진지하게 묻고 대답했던 바로 그 질문이다.

후쿠야마는 랑케와 달리 확실하고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한 답변을 했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자연과학의 발전은 인류 사회를 자본주의로 인도한다. 자연과학의 지배력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인류가 자본주의 이전과 같은 '야만 상태'로 되돌아가는 역사의 순환은 일어날 수 없다. 둘째, 사회 변화의 동력은 타인과 동등하게 또는 우월한 존재로 인정받으려는 인간의 욕망인데, 계급과 신분으로 나뉘었던 이전의 정치 체제는 이 욕망을 충족해 주지 못한다는 근본적 모순 때문에 무너지고 사라졌다. 자유민주주의는 무결점은 아니지만 현실에서 이 욕망을 충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최대화하는 체제다. 남보다 우월한 존재로 인정받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사회가 어느 정도 다스릴 수만 있다면 세계 모든 국가의 정부 형태는 자유민주주의로 수렴될 것이며 경제적으로는 세계 전체가 하나의 공동 시장이 될 것이다.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안착한 세계에서 인류는 전쟁이나 혁명이 없는 평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 거대한 역사적 투쟁은 사라지고 작은 사건만 일어나는 안정적인 세계가 출현한다.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 붕괴로 인한 냉전의 종식은 영원한 평화의 시대가 왔음을 의미한다. 

 

 

 

역사의 역사

188

민주주의자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이런 변화가 특별한 것은 아니다. 모든 역사가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변화의 가능성을 안고 살아간다. 역사가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사건을 추적하지만 흘러가는 것은 사건만이 아니다. 역사가 자신도 사건과 함께 흘러가며, 그렇게 흘러가는 동안 역사가의 생각도 끊임없이 변화한다.

박은식은 당대사를 기록하는데 모든 열정을 쏟았지만 고대사를 새로 써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나라의 형체가 무너 진 것은 19세기 말이었지만 정신이 무너진 것은 훨씬 오래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911년에 발표한 소설 『몽배금태조』(夢拜 金太祖)에 이런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12세기 초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의 왕 아골타와 조선 사람 무치생(無 生,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이다. 무치생은 금태조 아골타에게 우리 민족의 비참한 현실을 하소연하면서 그렇게 된 원인을 물었다. 공부를 할 틈이 없었다고 하면서도, 금태조는 다음과 같이 준엄한 어 조로 조선 사람을 꾸짖었다

황제가 말씀하셨다.

“짐은 무인(武人)이라 배운 것이 본래 없었고 사방을 정벌하느라 바빠 문학을 배울 틈이 없었다. 경전과 역사를 학습하지 않아 마음에 걸리던 터에 문사(文士)를 상대하니 크게 위로가 되는구나. 짐을 위하여 평소 읽은 것을 한 번 외워 보거라." 

8. '사람'은 몽골제국의 증선지가 사기 이후 나온 중요한 역사서를 편집해 전설 시대부터 송나라까지 중국 역사를 정리한 『십팔사략(十八史略)이고, '동감'은 송나라

 

 

제6장 민족주의 역사학의 고단한 역정, 박은식·신채호·백남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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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치생이 어릴 때 처음 배운 사략(史略)과 통감(通)'의 첫편을 가려 외우니, 

황제가 물어보셨다. "그것이 조선의 고대사인가?"

"아닙니다. 중국의 고대사입니다."

"나라의 모든 사람이 처음 배우는 교과서가 모두 이런 것이 냐?"

"그렇습니다."

"조선 인민의 정신에 자기 나라의 역사는 없고 다른 나라의 역사만 있으니, 이는 자기 나라를 사랑하지 않고 다른 나라를 사랑함이라. 천여년 조선은 형식만 조선일 뿐, 정신의 조선은 망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구나. 처음 배우는 교과서가 이러하니 어릴 때부터 노예 정신이 뇌수에 박혀 평생 학문이 모두 노예 학문이요, 평생 사상이 노예 사상이다. 이처럼 비열한 사회에 소위 영웅은 누구이며 유학의 현자는 누구인가. 소위 충신은 누구이며 공신은 누구인가. 모두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이 비열한 근성을 뿌리 뽑지 않고는 조선 민족이 자강자립 정신을 품을 수 없다. 이것을 빨리 바꾸어 인민의 뇌수에 조선 역사가 들어서게 하면 민족이 어떤 곳에 표류할지라도 조선은 망하지 않을 것이며, 미래의 희망도 여기서 생겨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런 희망도 없을 것이니 명심하고 분발하여라."의

사마광이 B.C. 5세기 전국시대부터 송나라 성립기까지 중국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한 『자치통감(資治)이다. 『십팔사략』과 『자치통감은 중국에서 어린이용 역사 교과서로 쓰려고 만든 책으로, 조선의 사대부들은 천자문을 땐 어린이들에게 이를 암기하게 했다.

9. 몽배금태조 (이동보 옮김, 윤세복 교열, 국학연구소(gukhak.org)) 참조.

 

 

 

역사의 역사

202

서사를 담고 있다.

신채호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조선상고사』에 나오는 인물평을 소개한다. 고구려의 연개소문과 신라의 태종무열왕 김춘추, 그리고 김유신에 대한 것이다. 이들은 우리가 어린이용 위인전에서 처음 만나는 역사 인물이다. 세 사람에 관해 널리 퍼져 있는 이야기와 비교해 보라. 역사가 쓰는 사람의 철학과 연구 방법에 따라 얼마나 크게 달라질 수 있는지 새삼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 절대적으로 옳은 역사, 과거를 있었던 그대로 보여주는 역사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시대를 가를 만큼 두드러진 문화적·정치적 진화를 몰고 온 인위적 대변혁을 혁명이라 한다. 연개소문은 봉건 세습 호족 정치를 타파하여 정치권력을 한곳에 집중시킴으로써 분열의 국면을 통일로 전환했다. 그 반대자는 군주와 호족을 가리지 않고 한꺼번에 소탕하여 영류왕 이하 수백 명의 관리를 죽였고, 침략해 온 당태종을 격파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당으로 진격하여 중국 전역을 떨게 했다. 그는 혁명가의 기백뿐만 아니라 재능과 지략도 갖춘 인물이었다. 다만 죽을 때 어진 이를 골라 조선인 만대 행복을 꾀하지 못하고, 어리석은 자식 · 형제에게 대권을 맡겨 결국 이미 이룬 공적을 뒤엎어 버렸으니, 야심은 많고 덕은 적은 인물이었던가 싶다. 그러나 그 역사가 아주 없어지고 오직 적국 사람의 붓이 전하는 기록만 가지고 그를 논하게 되어 사태의 전모를 환히 알아볼 수 없다. 그러니 경솔하게 그 일부를 들어 전체를 논하기는 어렵다. 그런데도 수백 년 사대주의의 노예가 된 역사 가들이 좁쌀만 한 눈으로 연개소문을 혹평하며, “신하는 임금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되지 못한 도덕률로 그의 행위를 규탄하고,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하늘의 도리를 따르는 것이다"는 노예근성으로 그 업적을 부인하여,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의 송장을 살 한점 남지 않게 씹어 대는 것을 나는 크게 원통히 여긴다.

신라가 고구려·백제 두 나라 사이에 고립된 한낱 약소국이 되자, 김춘추는 당에 들어가 당태종을 보고 힘닿는데까지 자기를 낮추고 많은 예물로 구원 병을 청했다. 아들을 당에 볼모로 두었고, 신라의 의복을 버리고 당의 의복을 입었으며, 신라의 연호를 버리고 당의 연호를 쓰기로 했다. 당태종이 편찬한 역사서와 『사기』, 『한서』, 『삼국지』등에 있는 조선을 업신여기고 모욕하는 말들을 그대로 가져다 본국에 유포해 사대주의 병균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고구려·백제가 망한 뒤 신라의 역사가들은 그 두 나라의 대표 인물인 연개소문과 부여성충의 전기 자료를 말살하고 오직 김유신만 찬양했다. 『삼국 사기』「열전」은 김유신 한 사람의 전기가 을지문덕 이하 수십 명의 전기보 다 훨씬 더 길다. 김유신은 신라에 항복해 귀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은 신가라 국왕 구해의 증손이다. 김유신은 어지간한 연줄이 없이는 출세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당시 최고 권세가였던 김용춘의 아들 김춘추와 사귀어 발 판을 만들려고 했다. 제기를 차다가 일부러 춘추의 옷 단추를 떨어뜨리고 집으로 데려가 막냇누이를 불러 단추를 달게 했다. 누이 보희의 아름다움에 반한 춘추가 청혼해 유신의 매부가 되었다. 용춘이 죽고 춘추가 왕이 되 자, 유신은 그 도움으로 군권을 손에 넣었다. 『삼국사기』 「김유신전」은 유신을 전략과 전술이 뛰어난 백전백승의 명장이라고 했지만, 패전을 숨기고 조그만 승리를 과장한 거짓 기록일 뿐이다. 김유신은 지혜롭고 용맹한 명 장이 아니라 음험하고 사나운 정치가였다. 평생의 공은 싸움터에 있지 않았으며, 음모로 이웃 나라를 어지럽힌 사람이었다. 그는 스파이를 시켜 글 화(錦花)라는 무당을 의자왕에게 보내 성충과 윤충 형제를 모함해 죽게 하고, 쓸데없는 토목 공사를 벌여 국가 재정을 파탄에 몰아넣게 했다. 결국 백제를 망하게 한 것이다.

 

제6장 민족주의 역사학의 고단한 역정, 박은식, 신채호·백남운

203

 

 

210

사회는 조선 역사의 발전 단계 전체를 나타내는 보편사적 특성이다. 이러한 세계사적 방법론을 채택해야만 우리는 민족 생활의 발전사를 내면적으로 이해하고 현실의 위압적인 특수성에 절망하지 않는 적극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마지막 문장이다. "이러한 세계사적 방법론을 채택해야만 우리는 민족 생활의 발전사를 내면적으로 이해하고 현실의 위압적인 특수성에 절망하지 않는 적극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백남운이 이렇게 모호하고 추상적인 문장을 쓴 이유는 일제의 검열과 탄압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두려움 없이 어떤 말이든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이렇게 쓰지 않았을까. “이러한 유물사관의 연구 방법을 채택해야만 우리는 조선도 다른 나라와 다름없이 정상적으로 발전해 왔다는 확신을 얻어 식민지의 비참한 현실에 절망하지 않고 민족의 광복과 인간해방을 이루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백남운은 마르크스주의자였고 민족 주의자였는데 둘 중에 어느 쪽이 우선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가장 절실한 소망은 민족의 광복이었고, 그 소망을 이루는 수단으로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조선사회경제사』에는 사실을 이론에 끼워 맞춘데가 많다. 예컨대 백남운은 한반도에 원시 공산제 사회가 있었다는 것을 논증하려고 친족 관계를 나타내는 우리말의 어원을 추적해 군혼( 婚)의 흔적을 찾았으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비롯한 우리의 고대 문헌과 중국 역사서의 조선 관련 기록을 근거로 고구려· 백제·신라가 모두 노예제 사회였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고려하면서 읽으면 크게 거슬리지 않는다. "조선 민족도 남들과 동등한 자격과 능력을 가지고 인류 사회의 주역이 될 수 있는 민족이다. 일제 강점이 없었더라도 조선 사회는 자본주의 발전의 길을 열어 나갔을 것이다. 조선 민족도 공산주의 · 사회주의 혁명의 길에서 스스로를 해방하고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는 희망을 품자.” 겉보기에는 몹시 따분한 사회경제사 책이지만 행간에는 이런 호소가 숨어 있다.

아래 글은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이 사실을 이론에 끼워 맞출 때 사용한 전형적 추론 방법을 보여준다. 앞서 언급했듯이 백남운은 친족 관계를 나타내는 호칭을 원시 시대 군혼의 강력한 증거로 삼았고, 사노비의 존재를 알려 주는 몇몇 사실에서 삼국 시대를 노예제 사회였다는 결론을 이끌어 냈다. 논리적으로는 수긍하기 어려운 추론이지만, 어떻게든 우리 민족이 세계 문명의 보편적 발전 경로를 똑같이 밟아 왔다는 주장을 논증하기 위해 쏟은 열정만큼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친족 관계를 나타내는 말의 어원에는 원시적인 혼인의 흔적이 남아 있다. '마누라'와 '메누리(며느리)', '누이'는 어원이 같고 모두 '잠동무'를 가리킨다. 자기 남편인 '샤옹'과 딸의 남편 '사우도 어원이 같다. 형제가 자매를 아 내로 삼고, 어머니와 딸이 남편을 공유한 흔적이다. 후세의 관념으로 보면 해괴한 일이지만 태고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아내를 공유하고 형제자매가 성교하는 야만적 군혼이 어디에나 있었다. 마르크스는 “태고의 관습에 따 르면 누이는 아내였다"고 했다. 우리 원시 조선의 선조들은 극히 단순한 채취 경제를 영위하다가 정착 생활로 옮겨가면서 무질서한 성교에서 군혼 형태로 바뀌었을 것이다. 모든 문화민족이 거친 단계다. 중국, 인도, 일본, 유 럽과 아메리카도 모두 그러했다. 특수하거나 기형적인 것이 아니라 세계사의 정상 궤도를 밟은 것이다.

 

제6장 민족주의 역사학의 고단한 역정, 박은식, 신채호·백남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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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예술을 말하면 누구나 신라 예술을 거론하지만 그 주요 동력이 노예 노동이었다는 것을 지적한 이는 아직 없었다. 비석, 묘석, 석굴, 석등, 범종, 불상을 비롯하여 건축, 그림, 춤과 음악이 모두 사원 예술이고 귀족 문화였다. 노예 소유자 계급 문화생활의 침전물인 것이다. 『삼국유사』를 보면, "신라 제35대 경덕왕이 황룡사종을 만들었는데 길이가 1장 3촌이요 두께는 9촌이요 무게는 49만 7,581근이다. 장인(匠人)은 이상택(里上 宅) 하전(下典)이었다." 여기서 이상택은 노예 소유주인 상전이고, 종을 만든 장인 하전은 사노예(私奴)다. 큰 작품을 만들때는 사노예, 관노예, 상민 중에서 기능이 뛰어난 자를 뽑아 일을 시켰는데, 당시 노동 편제의 특질을 보면 노예 기술자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금석공조각(金石工彫刻)과 건축, 그림, 벽돌, 기와 등 신라의 공예품은 주로 노예 노동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고구려나 백제보다 원시공산 사회의 특색이 강한 후진국 신라는 정복 국가를 형성하면서 아직 맹아 형태였던 노예 제도를 법률 제도로 만들어 사회적 생산 조직의 기반으로 삼았다. 5세기 초반에서 7세기 후반까지 전성기를 누렸던 신라의 노예 경제는 삼국 통일 이후 자체의 역사적 운동과 당나라 봉건 문화 수입으로 변질 · 분화하다가 아시아적 봉건제로 전환했다.

헤로도토스에게 역사 서술은 돈이 되는 사업이었고, 사마천에게는 실존적 인간의 존재 증명이었으며, 할둔에게는 학문 연구였다. 마르크스에게는 혁명의 무기를 제작하는 활동이었고, 박은식과 신채호에게는 민족의 광복을 위한 투쟁이었다. 사피엔스의 다는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이지만 뇌에 자리 잡는 철학적 자아는 사회적 환경을 반영한다. 그들은 각자 다른 시대에 살면서 다른 경 힘을 하고 다른 이야기를 남겼다. 그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즐거움과 깨달음을 얻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의 철학적 자아와 공명하기 때문이다. 민족주의자든 아나키스트 마르크스주의자 든 식민지 시대 지식인들이 쓴 역사를 읽으면 가슴이 아리다. 그 들이 살았던 사회적 환경과 오늘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같지 않은 데도 이러는 이유가 무엇일까?

 

제6장 민족주의 역사학의 고단한 여정, 박은식·신채호·백남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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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사실을 알 수 없다. 아는 사실이 전부 기록할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역사가는 과거 사실의 일부를 알 뿐이며, 그중에 의미 있고 중요한 사실을 추려서 이야기를 만든다. 랑케가 그토록 중시했던 문헌 기록은 과거의 모든 사실이 아니라 문헌을 작성한 사람이 알았고 또 중요하다고 여긴 일부 사실만 보여준다. 만약 어떤 역사가가 옛 문헌의 정보에 전적으로 의지해 역사를 쓴다면 그 역사는 옛 문헌을 만든 사람이 쓴 것이 된다. 카는 우리가 아는 고대사와 중세사가 그 시대, 그 사회를 있었던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을 아래와 같은 방식으로 논증했다.

B.C. 5세기 그리스 그림에 결함이 있는 이유는 수많은 조각이 우연히 없어져서가 아니라 도시국가 아테네의 소수 집단이 그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당시 아테네 시민들이 그리스를 어떻게 보았는지는 알지만 스파르타와 코린 트, 테베 같은 다른 도시국가 사람들이 그리스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모른다. 페르시아 사람이나 노예, 시민 계급에 속하지 않았던 아테네 거주민의 생각은 말할 나위도 없다. 우리가 아는 중세사의 사실은 거의 다 여러 세대의 연대기 편찬자들이 선택한 것이다. 그들은 종교 이론과 종교 활동 분야에 종사했기 때문에 종교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종교와 관련이 있는 것은 무엇이든 기록했지만 그 밖의 사실은 별로 기록하지 않았다

이 문제를 더 분명하게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어떤 이유에서 인간이 거의 다 죽고 문명이 모두 폐허가 되었다. 도서관의 책과 인터넷 디지털 정보가 다 없어졌다. 사피엔스 가운데 오로지 극소수의 한국인만 살아남았다. 긴 세월이 흐른 뒤 후손들이 폐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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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문명의 역사, 슈팽글러·토인비·헌팅턴

토인비는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역사가의 일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역사는 기록이고 과학이며 예술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앞서 차례에서 본 것처럼 『역사의 연구』는 문명의 탄생과 성장, 쇠락과 해체의 과정과 원리에 대한 단 하나의 이야기다. 세부 사항을 서술할 때 문학적 표현을 즐겨 사용한 그는 역사와 문학을 뒤섞었다는 비판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문장 스타일을 견지했다. 다음은 역사가를 넘어 위대한 예술가가 되고 싶었던 토인비의 열망을 보여 준다.

인간 생활의 여러 현상을 드러내 보이는 방법은 세 가지다. 첫째, 사실을 확인하고 기록하는 역사의 기법이다. 둘째, 사실을 비교 연구해 일반 법칙을 설명하는 과학의 기법이다. 셋째, 사실을 예술적으로 재생산하는 창작의 기법이다. 이 세 가지는 질서 정연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다. 역사는 창작적 요소를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사실의 선택, 배열, 표현 그 자체가 창작의 영역에 속하는 기술이다. 그러므로 위대한 예술가가 아니고서는 위대한 역 사가라고 할 수 없다는 견해는 옳다

토인비는 사실을 토대로 문명의 흥망성쇠를 지배하는 일반 법칙을 찾아 흥미로운 드라마를 만드는 방식으로 문명의 역사를 서술했다. 서구 역사가들은 대륙마다 문명의 발전 수준이 다른 원인을 두고 오랜 논쟁을 벌였는데, 토인비는 어느 하나의 요인만으로는 문명의 흥망성쇠를 해명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소위 인종설과 환경설을 모두 배척했으며, 그 대안으로 환경 변화와 다른 문명에 대한 대응 방식과 그 과정에서 문명 내부에 형성되는 집단적인 간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도전과 웅전의 패러다임(paradigm)'을 창안했다." 

 

 

역사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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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해 인류 전체를 결속하고 평화로운 세계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보편적 성향과 최소한의 공통 윤리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모든 문명에는 살인과 강도, 절도를 금지하는 도덕적 규칙이 있다.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돕는 행위를 권장하는 윤리 규범도 있다. 폭력으로 분쟁을 해결하는 행위와 사적인 보복 행위를 제어하는 법률도 있다. 이런 규칙과 윤리와 법률의 존재는 사피엔스의 공통적 존재 조건과 보편적 성향을 표현한다.

그런데도 왜 인류 역사는 폭력 충돌과 정복 전쟁, 약탈 행위와 대량 학살로 얼룩졌으며, 사회 내부의 억압과 착취는 왜 사라지지 않는가? 사피엔스에게는 정반대의 보편적 성향도 있기 때문이다. 자기 중심성, 부족 본능, 물질적 탐욕, 지배욕 같은 것 말이다. 역사는 인간의 상충하는 본성이 사회적 환경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동안 도시국가에서 벌어진 내란이 사람들을 어떻게 타락시켰는지 상세하게 묘사했다. 토인비가 제시한 수많은 사례에서 문명을 발전시킨 창조적 소수자들은 비창조적 다수자들이 자신을 따르고 모방하게 했다. 결국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주체는 사회의 엘리트 집단인 셈이다. 그래서 헌팅턴은 정치와 종교의 지도자와 지식인들에게 아래와 같이 호소했다.

평화와 문명의 미래는 세계의 주요 문명들을 이끄는 정치인, 종교인, 지식인들이 얼마나 서로를 이해하고 협력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문명의 충돌에서 유럽과 미국은 단결하거나 갈라설 것이다. 더 거대한 충돌, 범지구 적으로 벌어지는 문명과 야만성의 '진짜' 충돌에서 종교, 예술, 문학, 철학, 과학, 기술, 윤리, 인간애를 풍요하게 발전시킨 세계의 거대한 문명들 역시 단결하거나 갈라설 것이다. 다가오는 세계에서 문명과 문명의 충돌은 세계 평화에 가장 큰 위협이며, 문명에 바탕을 둔 국제 질서만이 세계대전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어 수단이 될 것이다

토인비는 세계대전의 불길이 타오르고 냉전 체제가 형성되던 시기에 과거 동시대 문명들이 공간적으로 접촉한 과정을 살피고 문명 충돌의 패턴을 연구했다. 자신이 만든 가설 또는 이론을 어떤 국제정치학자가 냉전 붕괴 이후 세계 질서의 재편 과정을 해석하고 제3차 세계대전을 예방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데 쓰게 되리라고 예상했을까? 2,500년 전 투키디데스가 내다본 것을 '환생한 '투키디데스' 토인비가 예감하지 못했을리 없다.

투키디데스는 옳았다. 내전은 '인간의 본성에 따라 언젠가는 비슷한 형태로 반복될 미래사'였다. 그가 말한 그대로 내전은 모든 문명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20세기에 터진 두 차례 세계대전을 토인비는 '서구 문명의 내전'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이후 일어날 세계 전쟁은 문명의 내전을 넘어 핵무기를 동원한 '사피엔스의 '내전'이 되어 역사의 종말을 가져올지도 모른다. 다문명 세계 체제를 인정하고 문명의 상호 존중과 공존을 추구하자는 헌팅턴의 이론이 세계 시민에게 큰 호소력을 가졌던 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런 방식으로 찾아올지 모르는 문명과 역사의 종말을 두려워하기 때 문이다.

 

277 제8장 문명의 역사, 슈팽글러토인비·헌팅턴

 

 

역사의 역사

296

각 대륙의 역사가 서로 크게 달라진 것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타고난 차이가 아닌 환경의 차이 때문이었다. 인간 사회의 궤적에 영향을 주는 환경적 요소 가운데 제일 중요한 것은 네 가지였다.

 

첫째, 가축이나 작물로 삼을 수 있는 야생 동식물이 대륙마다 다르게 분포했다.

 

둘째, 확산과 이동의 속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대륙마다 달랐다. 유라시아는 주요 축이 동서 방향이고 생태적 · 지리적 장애물이 비교적 적어 이동이 쉽고 확산이 빨랐다.

 

셋째, 대륙마다 고립도의 차이가 있었다. 남북 아메리카와 호주는 고립도가 높았다.

 

넷째, 대륙의 면적과 인구가 달랐다. 면적이 넓고 인구가 많으면 잠재적 발명가의 수, 경쟁하는 사회의 수, 도입할 수 있는 혁신의 수도 많다.

 

이 네 가지 환경 차이는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으며 논쟁의 여지가 없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네 가지 환경적 요소 그 자체가 아니라 "이 네 가지 환경 차이는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으며 논쟁의 여지가 없다"는 마지막 문장이다. 다이아몬드는 15세기 이후 세계를 정복한 유럽인들이 끈질기게 붙들고 있었던 인종적 우월감과 문화적 자아도취에 얼음물을 끼얹었다. 그는 도덕적 훈계를 하거나 연민의 감정에 호소하는 대신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고 논쟁의 여지가 없는' 환경의 차이를 근거 삼아 자신의 주장을 논증했다. 예전의 어느 역사가도 이토록 냉정한 태도로 역사를 쓰지는 않았다.

대륙마다 문명 발전 속도가 달랐던 이유를 이런 방식으로 논증할 경우 인문학자들이 흔히 내세우는, 무슨 말인지 이해는 하지만 진리인지 아닌지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는 추상적 관념이나 가설이 끼어들 여지가 사라진다.

 

모든 시대는 신과 직접 관계를 맺는다는 랑케의 주장, 유럽 모델을 인류사에 그대로 적용하려 했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역사 발전 단계론,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이라고 한 신채호의 민족주의 역사철학, 심지어는 역사가 인간의 영혼에 제공하는 정신적 기회를 증대하는 쪽으로 진전되므로 서구 문명의 수준이 더 낮다고 했던 토인비의 가설도 다이아몬드의 주장 앞에서는 빛을 잃어버린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같은 추상적 개념으로 유럽의 전진을 설명한 막스 베버 (1864~1920)의 이론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것들은 논란의 여지가 많을 뿐만 아니라 옳고 그름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도 없다.

다이아몬드의 역사 연구와 서술 방법이 유일하게 옳다는 것은 아니다. 그가 과학 논문 쓰듯 역사를 다룰 수 있었던 것은 대륙 간 문명 발전 격차의 원인을 찾는데 초점을 맞추어 인류사를 썼기 때문이다. 모든 역사책을 그런 식으로 쓸 수는 없으며, 모든 역사적 사건의 발생 원인을 환경 하나로 환원할 수도 없다. 개인의 역사, 민족의 역사, 국가의 역사전쟁과 혁명의 역사, 건축과 음악의 역사는 인류사에 비하면 작고 개별적인 사건을 다룬다. 개별적인 사건에서는 환경의 영향뿐만 아니라 등장인물의 성격, 야망, 재능, 집단적 이익 분쟁과 대중심리 등 수많은 변수가 작용한다.

페르시아 전쟁의 직접 원인은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 1세와 크세르크세스 1세의 야망이었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배경에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정치사회 체제의 차이와 라이벌 의식이 놓여 있었다. 20세기의 두 차례 세계대전은 같은 대륙의 같은 문명 안에서 일어난 사건이어서 환경론을 적용하는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어쨌든 다이아몬드는 과학과 역사를 융합함으로써 인류사의 중대한 질문에 대답했다. 총, 균, 쇠』의 가치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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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 대로 다니면서 도시의 다양한 얼굴을 볼 수 있지만 그 도시의 전체적인 면모를 놓칠 위험이 있다. 그럴 여유만 있다면, 먼저 패키지여행을 한 다음에 자유여행을 떠나 도시의 겉과 속을 다 보는 것이 좋은 여행법이다. 이 책으로 미리해 본 패키지여행이 헤로도토스부터 하라리까지 역사의 역사를 자유롭게 여행하려는 독자들에게 참고가 되기를 기대한다.

서문에서 나는 이 책을 '역사의 역사에 대한 르포'라고 말했다. 역사의 역사에서 뚜렷한 존재감을 보였던 역사가와 역사서, 그 책들이 다룬 역사의 사건, 그리고 그 역사가들이 살았던 시대에 관한 르포를 쓰는 과정에서 나 자신은 무엇을 배우고 느꼈는지 생각해 보았다. 역사의 역사는 내게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다. 인간의 본성과 존재의 의미를 알면, 시간이 지배하는 망각의 왕국에서 흔적도 없이 사그라질 온갖 덧없는 것들에 예전보다 덜 집착하게 될 것이라고 충고해 주었다. 역사에 남는 사람이 되려고 하기보다는 자기 스스로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인생을 자신만의 색깔을 내면서 살아가라고 격려했다. 내가 배우고 느낀 것이 독자들에게 온전히 전해졌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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