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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독서정리

쉰 번째 책 : 필로소피 랩 - 조니 톰슨

by 마파람94 2021. 12. 18.

독서에 낙을 둔 후 읽는 분야가 다양해졌습니다. 특히 과거에는 막연하게 어렵다고 생각되었던 고전이나 철학과 관련된 쪽도 자연스럽게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독서량이 늘어갈수록 자연스럽게 인문, 고전, 철학, 역사와 관련한 피할 수 없는 관문이 존재한다는 생각입니다.

 

최근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를 읽고 철학에 관련한 흥미가 생겼고, 그 연장선에서 한권을 더 읽게 된것 같습니다. 오늘 완독한 조니 톰슨의 필로소피 랩 입니다. 나름의 의미부여 하여 읽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2 페이지에 한 주제를 간단하면서도 생각할 수 있도록 요약하고 있습니다. 옴니버스 앨범 같은 느낌입니다.

 

밑줄을 가져와 봅니다.

 

 

 

II. 실존주의 : Memento Mori - Montaigne, 몽테뉴 : 메멘토 모리 pp. 50-51

인생은 만만치 않습니다. 온갖 걱정과 집착, 불안과 공포, 괴물과 유령이 가득하죠. 그렇다면 이런 것들을 몽땅 털어내고 싶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별것 아닌 문제를 가볍게 취급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이에 대해 철학은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인 도구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제시합니다.

메멘토 모리 (말 그대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우리에게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필멸성을 잊지 말라고 촉구합니다. 이는 사소한 문제를 사소하게 취급하기 위한 "이게 진짜 중요할까?"라고 자문함으로써 성가시기 짝이 없는 걱정거리를 전부 내려놓게 도와주는 도구죠.

로마 황제이자 스토아 학파 철학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이 개념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는 죽음이 자연스러우며 불가피한 것이라고 보았고, 때때로 죽음을 떠올리면 물건을 사 모으거나 세속적 부에 매달리거나 수명에 집착하는데서 생겨나는 불안이 사라진다고 주장했지요. 언젠가 모두 흙으로 돌아간다면 쓸데없는 걱정에 이 아까운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있을까요?

고대 이집트 연회에서는 식사 중에 미라가 된 시체를 수레에 실어 들여왔다고 합니다. 참석자들은 이렇게 외쳤겠지요. "먹고, 마시고, 즐기시오! 우리도 곧 이렇게 될 테니." 구약성경의 전도서에도 이와 거의 정확히 똑같은 정서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 프랑스 철학가인 미셸 드 몽테뉴는 메멘토 모리의 개념을 선호한 나머지 우리 모두 가능하면 묘지 가까이 살아야 한다고 권고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죠. "죽음에서 낯섦을 빼앗고, 그리하여 죽음에 익숙해지자." 몽테뉴가 보기에 메멘토 모리는 죽음을 향한 집착이 아니라 삶을 기억하기 위한 도약대였습니다.

중세 기독교 시대와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은 종종 사신이나 시체, 해골이 그려진 장신구를 지니기도 했습니다. 죽음을 가까이 두면 삶이 더욱 달콤하리라는 생각에서였죠.

가능하다면 지금 당장 자신이 죽는 순간을 상상해보세요. 잠시 시간을 내서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죽을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세요. 그 순간의 두려움, 한없는 막막함, 끔찍한 외로움, 혼자라는 느낌, 그리고 당신 곁을 지키다 뒤에 남겨질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려보세요. 필요하다면 이 책은 내려놓아도 좋습니다.

죽음은 반드시 찾아옵니다.

이 사실을 차분히 곱씹었다면 일상의 고민은 쪼그라들고 시들 것입니다. 상사가 뭐라고 생각하든 신경이나 쓰일까요? 친구가 독한 말을 한 게 뭐 그리 중요할까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뭣 하러 부루퉁하게 굴죠?

삶은 끝없는 어둠 속에서 찰나의 순간 타오르는 촛불입니다. 메멘토 모리는 우리에게 사소한 것은 사소하게 귀중한 것은 귀중하게 다루라고 충고합니다.

 

 

II. 실존주의 : Nietzsche - Being Strong : 니체, 힘을 향한 의지-pp. 52-53 

당신의 머릿속에서 뭔가가 '툭 끊어지는' 순간은 언제일까요? 끊임 없는 지겨움과 비참함, 입에 발린 뻔한 소리를 견딜 수 없게 되는 때는 언제인가요? 이건 당신의 삶이며, 단 한 번 뿐인데도 당신은 패기 없고 비굴하고 따분하게 굴면서 삶을 낭비합니다. 수백만 년에 걸친 진화의 결과가 고작 이것인가요? 자신의 가치를 낮추며 살아온 우리는 그저 껍데기만 남아 훌쩍이는, '퇴보한 인류'일 뿐입니다.

19세기 후반에 활동했던 프리드리히 니체는 현대 문명을 이런 식으로 바라봤습니다.

따지고 보면 모든 생명체는 힘을 원하는 욕망 그 자체입니다. 생물학적으로 자기 유전자를 남기려는 진화론적 격전이 벌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생물에게는 통제하고 지배하고 원하는 것을 손에 넣으려는 보편적 본능이 있습니다. 아스팔트를 뚫고 자라는 나무뿌리나 경쟁자와 결투를 벌이는 수사슴을 보면 이 사실을 알 수 있지요. 인간 도 다르지 않습니다.

권력, 고귀함, 신체적 힘이 칭송과 숭배를 받던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한때 기세 등등한 스파르타 전사이자 용감한 장군, 용을 처치하는 북구 용사였으며 영웅과 정복자에 관한 서사시를 쓰는 당당하 고 대담한 종족이었죠. 그런데 이후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습니다. 인류가 자신의 고귀한 모습을 잃고 만 것이죠.

 

인류는 거의 같은 시기에 슬그머니 퍼진 몇몇 질병에 장악당했습니다. 병의 이름은 겸손 연민이었죠. 갑자기 소박한 자, 가난한 자, 병약자 자가 신이나 성인으로 추앙받았습니다. 분노나 자부심은 이제 '죽음이르는 죄' 취급을 받게 되었지요. 거인을 무찌르는 토르도 히드라와 씨름하던 헤라클레스 내쳐졌습니다. 대신 가난한 나사렛 목수의 아들이자 십자가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은 이가 등장했죠.

이런 변화는 삶의 자연스러운 원동력과 완전히 반대입니다. '무를 향한 의지'인 이 변화는 살려고 하는 자체이자 자연계 전체의 핵심인 힘 향한 의지를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힘과 권력을 죄악으로 만들어버린 우리는 힘을 향한 의지를 안쪽으로 갈무리 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배하는 것을 금지당했기에 우리는 죄책감과 양심이라는 형태로 이 의지력 자체를 소모합니다. 인류는 자신을 찢고, 박해하고, 괴롭히고, 학대하며, 인간다움을 억압합니다. 인간은 묶이고 재갈 물린 채 피부가 벗겨질 때까지 우리의 창살에 몸을 부대끼는 야생 늑대와도 같습니다

니체는 이런 상태가 치명 이라보 았습니다. 우리가 삶의 원시적 측면을 전부 다시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고귀함과 힘을 회복하고 대담하고 뻔뻔스럽게 다시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 바로 힘을 향한 의지입니다.

 

 

 

II. 실존주의 : Mortality-Heidegger, 하이데거 : 필멸성, pp. 54-55

400번째 생일을 맞은 드라큘라는 늘 하던 대로, 즉 완전히 무기력하게 누워 관 뚜껑 안쪽을 쳐다보며 하루를 보냈습니다. 일어날 이유가 전혀 없으니까요. 그는 이미 위대한 교향곡을 작곡하고 유명한 걸작을 그렸습니다. 용감무쌍한 영웅들을 처치했고, 각 세기의 미인들과 사랑에 빠지기도 했죠. 만나보지 못한 유명 인사가 없고 맛보지 못한 유형의 인간도 없는데.… 더 애쓸 이유가 뭔가요? 끝이 보이지 않는다면 하루하루는 아무 의미도 없는걸요

20세기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문제가 뭔지 정확히 알았을 겁니다. 드라큘라는 본래성 authenticity이 부족했죠.

하이데거가 보기에 우리는 곧 닥쳐올 예정이며 피할 수 없고 인간이라는 존재를 정의하는 사실, 바로 죽음을 너무 오랫동안 무시해 왔습니다. 인류는 죽음과 관련된 모든 것을 꼭꼭 숨기고 자신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데 막대한 노력을 기울였죠. 죽음의 낌새를 싹 지우고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옛이야기가 한둘이 아닙니다. 세상과 완전히 차단된 별세계인 병원과 호스피스도 많죠. 주변에서 실제로 시체를 봤다는 사람도 거의 없지요.

우리는 죽음을 감추고 죽음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무시하죠. "부정 타게 그런 얘기 하지 마" 라고들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인간을 정의하는 필멸성을 가리도록 설계된 일상적 습관과 연막에 머리를 파묻은 채 인생 대부분을 보냅니다. 인생의 가장 중요한 사건을 각종 비유와 완곡어법으로 덮어버리는 셈이죠.

하이데거는 죽음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어떤 의미도 찾아낼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죽지 않는 존재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면, 우리는 매 순간의 선택들이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절대 깨닫지 못할 것이며 이는 거짓된 존재 방식입니다. 자신이 내리는 결정의 무게를 진정으로 체감하지 못한다는 말이죠. 각 선택에 따라 우리는 딱 한 가지 형태의 삶을 살게 되고,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오직 하나의 길을 택해 걸을 수 있을 뿐입니다.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고는 결코 삶을 마땅한 방식으로 경험할 수 없고, 바로 내일이라도 뭐든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그릇된 삶을 살게 되죠.

드라큘라는 자기 존재의 끝이 보이지 않으므로 그의 삶에는 시간의 풍미와 무게가 부족합니다. 필멸자인 인간의 마음은 불멸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결국 찾아올 자신의 고독한 죽음에 눈을 질끈 감고(이 고독이 진심으로 두려우니까요) 영원히 살 것처럼 구는 것은 진정한 존재를 부정하는 태도입니다. 의미와 책임 없이 살아가는 거나 마찬가지죠. 존재하지 않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우리가 존재하는 나날도 의미를 잃고 맙니다.

시간과 죽음이라는 닻이 없다면 우리 또한 자신에게서 멀어집니다. 존재 자체에 목적을 부여하고 싶다면 죽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람들은 두려움을 누그러뜨리려고 동화적 결말을 이야기하지만, 그런 환상은 인간의 조건을 깨뜨립니다. 황혼의 아름다움은 사그라 짐에 있고, 사랑의 애틋함은 이별에 있습니다. 흐르는 시간은 우리를 꿈꾸게 하지요. 오늘 당신이 하는 선택은 다시는 되돌릴 수 없기에 더욱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Ⅱ. 실존주의 : Boredom - Schopenhauer : 쇼펜하우어- 권태, pp. 58-59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무엇일까요? 권태나 불행, 고통을 견디도록 우리를 끊임없이 밀어붙이는 것은요? 우리에게 계속 앞으로 나아가라고, 세상에 흔적을 남기고, 또는 그러기를 꿈꾸라고 하는 끈질긴 충동은 대체 뭘까요? 이 원동력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죽을병에 걸렸거나 자살을 원하는 사람을 제외하고, 인간은 모두 깊고 원시적이며 강력한 처칠의 표현대로 "기를 쓰고 발버둥 치려는 욕구를 느낍니다.

독일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이 본능을 의지라고 불렀어며, 이것이야말로 삶의 원동력인 동시에 가장 큰 불행의 원천이라고 말했습니다.

19세기에 활동했던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영향을 받았고(264쪽 참 조)칸트와 마찬가지로 세계는 '있는 그대로 인식될 수 없으며 눈에 보이는 세계는 우리가 스스로 구축한 '표상representation'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칸트가 현실의 진짜 본질(물자체體)을 알 수는 없다고 말한 반면, 쇼펜하우어는 사물을 실증하는 근본적 힘이자 모든 것의 핵심적 본질은 바로 의지라고 주장했죠

세상의 모든 사물에는 원동력이 있습니다. 이 힘은 활기차고 끊임없는 욕구, 또는 '맹목적 매진'입니다. 쟁취하고 통제하고 지배하고 소유하고 이해하려는 욕망이기도 하죠.

 

우주의 모든 것에는 의지가 있습니다. 동물의 의지(배고픔, 생식, 경계하는 태도 등에서 드러나는)를 이해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겠죠. 하지만 절벽 옆면을 깎아내는 강물, 지구에 부딪히는 별똥별, 바다로 흘러드는 물방울에도 모두 의지가 있습니다(52쪽에서 설명한 니체의 힘을 향한 의지라는 개념도 이 전제를 토대로 삼지요).

문제는 인간의 의지가 만족을 모른다는 점입니다. 확장만을 목적으로 삼는 바이러스와도 같죠. 만물의 정수인 의지는 끝없이 더 많은 것을 원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의지는 결코 자신의 몸에 만족하지 않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두 가지 선택지 사이에서 고통받게 됩니다.

즉, 인간은 그리스 신화에서 닿을 듯 닿지 않는 과일에 손을 뻗는 탄탈로스 처럼 지칠 줄 모르고 새로운 것을 헛되이 원하든지, 아니면 동기 부족으로 권태롭고 무기력해지고 맙니다. 의지는 만족을 모르는 동시에 우주 전체의 원동력이기도 하므로 발버둥을 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삶의 반대이기 때문이죠. 인간이라는 존재 자 체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만약 멈춘다면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거나 마찬가지죠.

그러므로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권태감과 초조함 사이에 영원히 갇히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원동력이 모자라 늘어지거나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는 말이죠. 참으로 끝내주는 상황이 아닐 수 없네요.  

 

Ⅱ. 실존주의 : Nietzsche- Eternal Recurrence. 니체 : 영원한 회귀, pp. 62-63

프리드리히 니체는 종종 허무주의자로 오해받습니다. 종종 거대한 콧수염을 달고 분노에 차서 "신은 죽었다"라고 외치며 모든 삶은 가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으로 그려지지요. 하지만 짐작하다시피 그의 사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영원 회귀eternal recurrence라는 니체의 사고 실험을 보면 그는 인생을 긍정하는 사람이자 실존주의의 기둥이며 심지어 매우 현대적인 심리치료사로 보이기도 합니다..

1882년 저서 즐거운 학문Die fronLiche Wissenschaft』에서 니체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악마를 상상해보라고 제안합니다. "너는 지금 네가 살고 있고 지금껏 살아온 이 삶을 다시 한번 똑같이, 그리고 끝없이 반복해서 살게 된다. 새로운 일은 단 하나도 없겠지만, 네 삶의 모든 고통과 모든 즐거움, 모든 생각, 한숨 하나까지 어떤 사소한 일이나 위대한 일도 같은 시간에 같은 순서로 반복될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처음 드는 생각은 뭔가요? 잠깐 곰곰이 생각해보세요. 필요하다면 위 문단을 다시 읽어도 좋습니다.

생각해봤더니 따분할 것 같거나 두려움이 앞선다고 치죠. 니체가 보기에 그건 당신이 객체로서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어쩌다 보니 당신은 자기 삶의 목격자가 되어 모든 것을 신랄하고 냉소적으로 비평해대며 수동적으로 삶이 당신을 지나가도록 놓아둡니다. 상처와 고통을 곱씹으며 인생을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할 무언가로만 인식하죠. 니체는 인정사정없이 야멸차게 말합니다. 이 묘사를 듣고 짚이는 데가 있다면 당신은 '불쌍한 나'라는 자기 연민에 갇힌 줏대 없는 호구일 뿐이라고요.

그런 다음 니체는 해결책이 될 만한 격언을 제시하죠. 아모르파티 anor fati, 즉 '네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모든 이가 바라는 실존적 평안은 자기 몫으로 분배된 카드를 받아들여야만 찾아옵니다. 우리는 의지력으로 '시간을 되감을 수 없고, 이미 일어난 일을 바꿀 수 있기를 넋 놓고 바라서도 안 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사랑해야 한다는 점이지요. 기쁨과 쾌락뿐 아니라 괴로움과 고통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은 인간으로서 자신이 겪는 유일무이한 경험이기에 우리는 그 전부를 사랑해야 합니다. 극복의 증거가 되는 실수와 잘못도 자랑스럽게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그 모든 것 덕분에 존재하니까요.

영원 회귀는 수천 년 동안 여러 동양 종교의 중심이 되었고 고대 그리스 스토아 학파에서도 자주 활용되었지만, 현대 서양 철학에서 이 개념을 널리 알린 것은 니체였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종종 쓰는 '내려놓기', '마음 비우기', '케세라 세라que sera, sera' 같은 표현도 비슷한 의미를 가리키기는 하지만, 니체의 개념에는 더 많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건 그저 무언가가 사라지기를 바라거나 털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삶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기 운명을 사랑하세요. 아모르 파티.


 

II. 실존주의 : Hegel-Masters and Slaves : 헤겔-주종관계, pp. 66-67

누구에게나 숙적이 있습니다. 꼭 숙적이라는 이름으로 부르지는 않더라도 열정적으로 싫어하는 대상 하나쯤은 있지요. 너무 싫은 나머지 그와 반대되는 것을 자기 정체성으로 삼을 정도로요. 그런데 억지로 그 숙적과 함께 살아가야만 한다면 어떨까요? 불가피하게 어마어마한 충돌이 일어나겠죠. 영웅과 숙적, 정립과 반정립, 주인과 노예 사이의 전투… 최후의 승자는 누구, 또는 무엇일까요?

독일 철학자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은 이러한 충돌이 모든 인간과 사물을 정의한다고 보았고 주종관계의 역학에 관한 그의 담론은 후세의 역사가, 사회학자, 철학자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헤겔의 철학은 이해하기 어렵기로 악명이 높고, 본인도 그 점을 알았습니다. 1831년 죽음을 눈앞에 둔 헤겔은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나를 이해했던 사람은 단 한 명뿐이며 그 조차도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가 그의 사상에서 눈부신 보석을 찾아낼 수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헤겔의 철학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는 인간이 정체성과 자의식을 형성하는 방식입니다. 헤겔은 인간이 사물 또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자신을 파악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인간이 되려면 우리는 먼저 인간으로 인식되어야 합니다. 부모님이 나를 이름으로 부르거나 친구가 나를 인정해줄 때, 나는 내가 누구인지 파악하게 되죠. 추상적 상태로 존재하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타인과의 관계에서 분리된 사람은 아무 의미를 지니지 못합니다.

이때 우리와 타인의 관계가 동등하지 않다면 어떻게 될까요?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지배적이라면요? 헤겔은 인간관계에서는 대체로 경쟁자 간 충돌하고 서로 이기려는 투쟁이 뒤따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상황에서 양측은 이 싸움이 힘들고 소모적임을 깨닫게 되고 필연적으로 한쪽이 굴복하는 '주종관계'가 생겨납니다. 강한 자 와 약한 자, 주인과 노예로 나뉘는 거죠.

하지만 이 관계에서는 누구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노예는 객체화되고 노예의 노동력은 주인에게 착취당합니다. 인간 존엄성 또한 소외당하죠. 주인 또한 손해는 있습니다. 주인도 자신을 인식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주인은 노예를 객체화하고 격하했기에 자신이 인식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스스로 지워버린 셈이죠. 주인은 노예의 인식이 필요하지만, 노예의 인식은 자격이 부족하기에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물론 둘 중에서는 노예의 상황이 훨씬 나쁘죠.

그러다 결국 노예는 목숨을 건 투쟁을 시작해 자유를 얻습니다. 이 새로운 관계는 둘 모두에게 더 이롭고, 양측은 자신이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충돌하던 두 인격 사이의 타협에서 이제 서로 주고받는 안정되고 행복하며 성숙한 관계가 탄생합니다.

헤겔은 종종 추상적인 방식으로 글을 썼고, 주종관계 역학에 관해서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많은 독자가 '이게 어떻게 실제 삶에 적용된다는 거지?'라는 의문을 품었죠. 헤겔 본인은 이 질문에 답한 적이 없습니다. '권력관계'의 현대적 해석에 헤겔의 사상이 스며들게 된 것은 사르트르, 보부아르, 푸코가 등장한 다음이었죠. 하지만 아무리 난해하다 해도 헤겔이 보여준 통찰은 심오합니다. 지배와 착취는 누구에게도 이롭지 않죠. 잘되고 싶다면 우리는 서로를 존중해야 합니다.


 

III. 예술 : Aristotle -Letting off Steam :아리스토텔레스 - 스트레스 해소하기 pp.76-77

사람들은 왜 공포 영화를 좋아할까요? 왜 '역대 최고의 영화'에는 늘 우리를 울리는 슬픈 영화가 꼽힐까요? 따지고 보면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두려움과 슬픔을 싫어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야 야생동물이나 외로움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왜 우리는 굳이 시간을 할애해 그런 감정에서 자극을 받으려는 걸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기원전 335년경에 쓴 『시학』에서 자신이 그 답을 찾았으며 이를 카타르시스라고 부른다고 말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모든 면에서, 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시민의 자질로서 온건과 절제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위대한 의사였던 히포크라테스는 모든 병이 몸 안의 액체, 즉 체액humor의 불균형에서 온다고 주장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개념을 영혼까지 연장해서 우리 생각과 감정에도 균형을 맞추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카타르시스는 강렬하거나 유쾌하지 않은 감정을 경험해서 그것을 자기 정신세계에서 몰아내는 과정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이 야말로 카타르시스를 끌어내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동정심과 두려움을 유발해 보는 이가 억눌린 감정을 털어내도록 유도하기 때문이죠.

펑펑 울고 나면 종종 기분이 훨씬 나아지는 이유, 스트레스가 쌓였을 때 실컷 달리거나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마시고 싶어지는 이유는 카타르시스 때문입니다. 김을 빼주는 거죠. 카타르시스는 안전하면서 허용 가능한 스트레스 해소법입니다. 실제로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 카타르시스의 의료적 효과가 워낙 커서 시민들에게 공짜로, 심지어 가끔은 돈을 줘가며 연극을 보게 했다고 합니다. 공공복지의 일환이었던 셈이죠.

논리적으로 보면 비극을 관람하면서 안전하게 이런 감정을 맛보는 편이 현실에서 그 감정을 겪는 것보다 낫습니다.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무대 위의 살인을 감상하는 편이 낫고요. 친구에게 버럭 화를 내느니 프로메테우스의 괴로움에 공감하는 게 낫습니다. 특히 오이디푸스가 어머니와 동침하는 장면은.… 실제보다 관람이 백번 낫겠지요.

최근 카타르시스는 논쟁의 주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원래 의도가 공포나 분노 증오처럼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감정만을 몰아내서 건전한 감정적 균형을 되찾는데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감정을 전부 몰아내려는 의도였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 철학자들이 이성을 감정 위에, 논리를 열정 위에 두려고 갖은 애를 썼다는 점을 생각하면 (사실 아리스토텔레스 본인은 자신의 스승 플라톤만큼 열정이라는 개념을 질색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관점도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현대인의 삶에서 카타르시스는 매우 큰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드라마와 비극, 공포물과 유령의 집을 좋아합니다. 기분을 나아지게 해주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답답하거나 조바심이 나서 견딜 수 없다면 바로 지금이 카타르시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김을 빼야 할 때라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III. 예술 : Music - Schopenhauer : 쇼펜하우어 - 음악

음악은 마법과 닮은데가 있습니다. 우리가 자기 육신에서, 삶에서 빠져나와 날아오르게 하는 힘이 있거든요. 그래서 어디로 가냐고요? 음악과 그 순간만이 존재하는 자아에서 벗어난 공간이죠. 혹시 사람들이 음악을 묘사할 때 종종 거의 종교적인 표현을 쓴다는 점을 눈치채셨나요? 사실 음악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뭔가 더 거대한 것이 존재한다는 느낌, 자아가 사라지는 감각은 순수하게 과학적이고 진화론적인 언어로는 나타내기 어려우니까요.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사실을 모두 잘 알고 있었고, 음악적 경험의 초월적 · 신비적 측면에 관해 많은 글을 남겼습니다.

대부분의 예술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세상의 무언가를 나타냅니다. 회화나 사진, 조각은 사람이나 사물을 표현하죠. 소설이나 영화는 어떤 형태의 관계를 담아내고요. 시 또한 비유와 상징을 활용해서 특정한 주제를 탐색 합니다. 하지만 음악은 뭘 나타낼까요? 작곡가나 음악가가 곡을 쓸 때는 어떤 과정을 거칠까요? 그들은 뭘 목표로 삼을까요?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썼습니다. "음악은..… 상당히 멀찍이서 있다. 음악에서 우리는 닮은꼴을 찾아낼 수 없다." 음악은 그저 음악 그 자체입니다. 음악은 음악을 위해 존재하죠.

쇼펜하우어의 관점에서 음악은 세상의 특정 사물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짜임새 자체, 즉 몸부림치며 나아가려는 힘이며 그 의지라고 이름 역동적 생명력을 표현합니다. 음악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완벽하고 멋진 미적 표현이기에 우리 영혼에 공명하지요. 나아가 인간과 똑같이 의지를 지닌 세상 만물까지 아우릅니다. 쇼펜하우어는 음악에서 으뜸 화음에 사람에게 만족감을 주는 이유(예를 들어 완전종지 Perfect Cadence로 음악을 마치려면 마지막에 코드가 으뜸음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그것이 우리 의지의 분투를 반영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화음을 들으면 확실히 기분이 좋아지죠.

여기서부터는 쇼펜하우어가 너무 나간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합니다. 그는 음악의 4 성부 화성이 세상의 각 부분을 나타낸다고 생각했죠. 광물계, 그리고 중력 같은 과학적 힘과 연결했습니다. 테너는 식물계 알토는 동물계 그리고 멜로디를 담당하는 소프라노는 인간 "제한 없는 자유"와 "지적으로 계몽된 의지"를 나타낸다고 했고요. 쇼펜하우어에게 정말로 모든 것이었죠.

그가 주장한 결론은 우리 모두 들으며 에고와 개인성을 내려놓음으로써 순수하고 의지 없는 온전하고 황홀한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음악은 자아를 해체한다는 점에서 의지에서 벗어나게 하는 해방구입니다. 음악에 몸을 맡기면 당신을 만족스러운 초월적 장소로 데려다 줄 겁니다.

 

 

 

 

IV. 사회와 인간관계 Jung-The Character Selection Screen - 융 : 캐릭터 선택 창, pp. 86-87

연인의 옆에서 눈을 뜬 영웅은 충분히 잠을 못 자 눈꺼풀이 무겁습니다. 전화기를 집어 드니 보살피는 자인 아버지에게서 안부 전화가 걸려오지만, 그냥 무시하기로 합니다. 출근한 영웅은 상사인 마법사와 회의를 합니다. 몇 시간 뒤 숙취에 시달리는 광대는 휴가로 하이킹을 하러 갔던 얘기를 늘어놓는 모험가와 점심을 먹습니다. 밤이 되어 집에 돌아온 그녀는 그림자로 변신합니다……

융의 원형 archetype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스위스 정신분석학자 카를 융은 프로이트의 오랜 친구이자 추종자였습니다.(훗날 사이가 벌어지기 전까지는 말이죠). 하지만 프로이트가 대체로 개인의 무의식에 초점을 맞춘 반면, 융은 주로 자신이 '집단 무의식'이라 이름 붙인 주제에 전념했습니다.

융은 어느 사회 집단에나 구성원의 행동을 좌우하는 보편적 구조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가 말하는 '원형' 이죠. 간단히 말해 원형이란 공동체가 구성원에게 활용해도 좋다고 인정한 일련의 행동 방식을 가리킵니다. 어떻게 보면 게임에 나오는 캐릭터 선택 창과 비슷하죠..

오늘은 어떤 캐릭터로 플레이하실 건가요? 순수하고 순진하기 짝이 없는 처녀? 자연과 혼연일체인 동물? 독서광이며 사려 깊은 마법사? 세상을 비웃는 광대

 

융은 이런 열두 원형의 영향력이 워낙 강력해서 사람들이 이를 길이 남기기 위해 설화, 신화, 노래, 전통 등에 새겨 넣었다고(156쪽 캠 벨의 이론도 참조해보세요) 주장했습니다. 예를 들어 <반지의 제왕>, <해리 포터>, <겨울왕국>, <스타워즈>에서 프로도, 해리 포터, 엘사, 루크 스카이워커는 모두 영웅에 해당합니다. 간달프, 덤블도어, 패비 할아버지, 요다는 현자고요. 피핀, 해그리드, 올라프, 쓰리피오C-3PO 는 어린아이입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사람들은 신과 종교에까지 이런 원형을 적용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로키와 헤르메스는 장난에 목숨 거는 트릭스 trickster, 아프로디테와 비너스는 연인에 해당합니다. 심지어 유일 신교인 기독교에도 처녀인 성모 마리아와 현자인 성부, 그림자인 사탄이 존재하죠.

여기 적힌 원형은 종종 마케팅과 대중문화에서 활용됩니다. 하지만이 자신의 저서에서 이런 식으로 각 항목을 명확히 밝혀 적지는 않았다는 점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융은 자신이 개략적으로 잡은 원형에 이름을 붙이기는 했지만, 나중에 굳어진 롤플레잉 게임 캐릭터 같은 명칭보다는 훨씬 느슨하게 정의해놓았습니다. 다만 융의 예가 좀 더 융통성이 있기는 했어도 현대적 버전을 축소나 왜곡이라고 부를 정도로 동떨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현대인에게 융의 개념은 공감할 구석이 많습니다. 우리는 미리 정해진 행동 양식이 존재하며 우리에게 허용되는 역할은 극도로 한정되어 있다고(융의 생각대로 열두 개는 아닐지라도) 느끼죠. 철학적으로 보면 융은 실존주의자들과 비슷한 데가 있습니다. 인간이 행복해지려면 원형의 한계를 벗어나 '개인화'를 향해 나아가서 자신만의 특성을 창조해야 한다고 주장했거든요. 자유로워지려면 캐릭터 선택 창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맞춤 캐릭터를 만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IV. 사회와 인간관계 - Plato-True Love: 플라톤 진정한 사랑

사람은 누구나 늙습니다. 화를 내고 외면하고 부정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잘난 체하며 과시하는 것들은 전부 언젠가 시들고 쪼그라들겠지요. 그렇기에 궁금해집니다. 우리가 젊고 팽팽할 때 만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말로든 행동으로든 평생 함께하기로 맹세했는데, 그 사람의 외모가 완전히 변해버린다면 어떻게 될까요?

사랑의 의미에 관한 글을 쓰던 플라톤은 이러한 문제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플라톤의 사랑 이론은 육체와 영혼이라는 더 큰 주제를 다룹니다. 플라톤의 관점에서 인간이란 단순하게 말하면 육체에 갇힌 영혼입니다.

영혼은 인간의 가장 순수한 본질이며, 인간은 영혼이 있기에 이 타락하고 거짓된 환영에 불과한 세상 (246쪽 참조)을 초월해서 명목상의 '현실' 뒤에 숨은 진정하고 완벽한 현실, 즉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습니다. 혼은 진실의 창인 셈이죠. 이런 생각을 토대로 플라톤은 사랑이 두 종류, 즉 세속적 (또는 저속한) 사랑과 신성한(또는 순수한) 사랑으로 나뉜다고 주장했습니다. 저속한 사랑은 물질적이고 헛되며 얄팍합니다. 매혹이자 성욕, 욕망이기도 하죠. 쾌락만을 토대로 삼기에 피부가 처지고 머리가 하얗게 세면 사랑이 식습니다. 현대적 언어는 열병이나 성적 흥분으로 표현되는 이 사랑은 육체적 사랑입니다

순수한 사랑은 타인의 혼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가장 순수하고 깊은 자아를 발견하는 것이죠. 이런 사랑은 몸의 변화에 개의치 않고 세월에 따른 육체라는 껍데기가 어떻게 달라지든 변함없이 충실하며 헌신입니다. 변화와는 관계없이 본질에 집중하기 때문이죠. 두 정신의 긴밀한 포옹인 이 사랑은 영혼의 사랑입니다

오늘날 플라토닉 러브는 성적인 측면이 없는 애정이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상대방이 잘되는 모습, 상대의 가장 좋은 모습을 끌어내고 싶다는 욕구를 가리키죠. 하지만 플라톤 본인은 사랑의 개념에서 육체적 욕망을 배제한다라고 명확히 밝힌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는 사랑이란 육체를 넘어서는 이해이며 때로는 성교를 통해서도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생각했습니다. 육체를 통해서 상대의 영혼을 찬미 할 수도 있다는 말이죠

정말 운이 좋아서 당신이 늙고 병약해 지고 백발에 주름투성이가 되었는데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손을 잡아줄 누군가가 있다면 플라톤의 사랑을 떠올려보세요.

진정한 사랑 맹목이 아니라 꿰뚫어 보는 통찰력입니다. 겉모습 너머를 보기 때문이죠. 또한 함께 이 세상에 유배된 두 영혼이 나누는 포옹이자 동반자 관계이기도 합니다.

 

 

 

V. 종교와 형이상학 : Al-Kind! - First Causes -알 킨디 : 첫 번째 원인, pp. 130-131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고, 대하소설이나 장대한 서사시에도 첫 문장이 있고, 교향곡에도 첫 음표가 있습니다. 모든 것에는 시작이 있고, 모든 일에는 원인이나 이유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 간단한 명제는 신의 존재에 관해 가장 널리 알려진 논증인 '우주론적 논증cosmological argument'의 근거입니다. 이 논증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를 가장 명징하게 정리한 것은 9세기 이슬람 학자 알 킨디AL-Kindi입니다. 그의 논리는 간단합니다. (1)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다. (2) 우주는 존재하기 시작했다.

고로 우주에도 원인이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인간의 뇌는 설명되지 않는 사실을 싫어합니다. 임의적이거나 자발적인 사건이라는 개념은 우리의 자연스러운 직감에 어긋나지요. 사물에는 반드시 그곳에 존재하는 이유가 있고, 마땅한 원인이나 셜록 홈스가 할 법한 논리적 설명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주 또한 원인, 창조주 또는 '처음 움직인 자'라는 뜻의 제일동자第一 (아리스토텔레스가 만든 용어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죠.

이 논증은 현대에 들어 미국인 윌리엄 레인 크레이그 William Lane Craig에 의해 새로이 힘을 얻었습니다. 그는 과학과 수학에 기초해서 두 번째 명제를 강화했죠

 

첫째, 레인 크레이그는 빅뱅이 과학자 대부분에게 지지받는 이론이며 존재하기 시작한 순간을 명확히 가리킨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우주가 순차적으로 '시작'하게 된 매우 확실한 사건입니다.

둘째, 끝없는 우연의 연속(원인이 없는 세계가 성립하는데 필요한 조건은 무한이라는 개념에 의존합니다. 언제나 또 하나의 '원인', 즉 '이보다 전'의 사건이 영원히 거슬러 올라가며 계속되어야 한다 는 뜻이죠. 하지만 레인 크레이그는 무한이라는 개념이 모순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그는 수학자 다비트 힐베르트David 가 처음 제시한 '힐베르트 호텔'의 역설을 예로 듭니다.

무한개의 방이 있으며 무한한 투숙객이 모든 방을 사용하고 있는 호텔을 상상해보죠. 이제 새 손님이 도착합니다. 이때 1번 방 손님을 2번 방으로 옮기고, 2번을 3번으로.… 하는 식으로 무한히 반복하면 새 손님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역설이 발생합니다. 무한은 전혀 무한하지 않고, 실제로는 적용이 불가능하죠.

다른 수학적 문제도 있습니다. 무한한 수의 사물, 예를 들어 햄스터를 생각해봅시다. 햄스터의 절반은 분홍색, 나머지 절반은 노란색이라고 가정해보죠. 노란 햄스터는 몇 마리일까요? 무한 마리. 분홍색은 몇 마리죠? 무한 마리 합치면 몇 마리죠? 무한 마리, 부분집합과 합집합이 동일하다는 데서 문제가 발생하며, 이는 일종의 수학적 오류입니다. 그렇기에 레인 크레이그는 '무한한 회귀'(원인 없는 우주와 같은)라는 개념은 조금만 생각해봐도 말이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여러 걸림돌을 고려할 때 유일하게 논리적인 우주론적 논증은 우주의 탄생에 틀림없이 원인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직 특정 종교의 특정 신이 존재한다고 증명된 적은 없지만, 이것이 '제일동자' 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일까요? 달리 표현하자면, 빅뱅을 일으킨 것은 누구일까요?


 

V. 종교와 형이상학 : Hume-Evil, 흄 -악의 문제, pp. 136-137

당신이 세계를 창조한다고 상상해 봅시다. 손을 탁탁 털고 소매를 걷어 올린 다음 작업대를 정돈합니다. 우선 세계에 무성한 초록 정원을 선사하기로 합니다. 하늘에는 눈부신 은하를 흩뿌려주고요. 기가 막힌 노을을 만들고 아름다운 교향곡을 작곡할 털 없는 두발 짐승도 덧 붙이고…. 여기까진 아주 좋습니다. 수고하셨어요!

그런데 자고 일어났더니 찌뿌둥합니다. 짜증이 난 당신은 전염병, 기아, 전쟁, 죽음을 던져 넣습니다. 상당히 암울한 세계가 되었네요. 당신이 보기에 이 세상의 나쁜 일들에 궁극적으로 책임이 있는 것은 누구일까요? 이것이 바로 '악의 문제problem of evil'입니다. 원래는 고대 그리스의 에피쿠로스(228쪽 참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이 악의 문제를 널리 알리고 가장 명확히 정리한 것은 스코틀랜드 계몽주의 철학자 데이비드 흄이었습니다.

제시된 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신이 그렇게 강력하고(전능) 모든 것을 안다면(전지) 이토록 끔찍하고 부당하고 무시무시한 악을 기껏해야 못 본 체하거나 최악의 경우 직접 창조했다는 뜻인데도 어떻게 만인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전선) 존재일 수 있을까요?

우리를 사랑한다고 공언한 신이 어떻게 홀로코스트를 내버려 둘 수 있나요? 끔찍한 화산 폭발의 어떤 점이 자비로운가요? 어째서 선한 신은 자신의 피조물인 새끼 코끼리가 서서히 약해져서 결국 굶어 죽게 놔두는 걸까요? 찰스 다윈은 기생 말벌이 숙주를 안쪽부터 파먹으며 성장하는 잔혹함을 목격한 뒤 신앙을 잃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신에게도 한계가 있다고 하면 넘어갈 수도 있겠지요. 돕고 싶었으나 그럴 수가 없었다든가, 아니면 몰랐다든가? 하지만 신이 완벽히 전능하다면 (주요 유일신교의 교리대로 당연히 신의 책임 아닐까요?

악은 두 가지 유형으로 명확히 구분됩니다. 자연적 악(지진, 전염 병, 기생 말벌 같은 자연재해 또는 자연에서 나타나는 잔혹함)과 도덕적 악 (고문이나 살인)처럼 인간의 자유의지로 저질러지는 것이죠. 문제는 양쪽 모두에서 발생합니다.

전자의 경우 왜 애초에 그렇게 결점이 많은 세상을 만들었을까요? 후자의 경우에는 왜 인간에게 그렇게 변덕스럽고 다루기 힘든 자유 의지를 부여한 걸까요? 까다로운 것은 '고전 종교(기독교, 이슬람, 유대교)의 신이 전능하다는 점입니다. 신은 원하는 대로 뭐든 할 수 있는데, 세상이 이 모양일 '필요'는 없지 않나요? 그렇다면 신이 악을 원한다는 뜻일까요? 인간이 어떤 짓을 저지를 수 있는지 뻔히 알면서 일부러 틀리기 쉽고 갈팡질팡하는 인간을 창조한 걸까요?

이 문제에는 제시된 답이 있습니다. 신은 옳다는 뜻에서 신정론 theodicy'이라 불리는 이 변론은 일반적으로 세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 악이란 인간이 지닌 허약한 자유의지의 산물일 뿐이라는 주장입니다. 둘째, 악 또한 신이 부여한 목적이 있어서 친절을 베풀 기회나 지혜를 인간에게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신의 본질을 생각하면 현재 세상이야말로 "가능한 최선의 세계"이며, 우리는 언젠가 신의 계획이 무엇이었는지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V. 종교와 이상학 : Pascal - Betting on God. : 파스칼 신을 두고 하는 내기

돈을 걸지 않고도 한몫 잡을 수 있는 공짜 내기를 제안받는다면 당연히 받아들이시겠죠? 말 몇 마디 하는 대가로 영원한 낙원에 갈 기회를 얻는다면 그것 또한 남는 장사 아닐까요?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은 그렇다고 생각했고, 그런 이유로 우리 모두 신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파스칼의 내기 Pascal's Wager는 신의 존재를 논증하는 방법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신을 믿어야 할 근거로 게임이론을 제시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선택지는 (1) 신을 믿는다. (2) 신을 믿지 않는다 두 가지입니다. (1) 우리가 신을 믿고 신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영원한 삶과 천국의 낙원을 보상으로 받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신을 믿고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냥 죽을 뿐입니다.

(2) 반면 우리가 신을 믿지 않고 신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의식 없이 영원히 썩어가거나(최선) 지옥에서 끝없이 고통받게 (최악)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신을 믿지 않고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신을 믿고 신이 존재하지 않을 때와 동일한 결과죠! 그러니 걱정할 게 뭔가요? 그냥 한번 믿어보면 되지 않나요? 어차피 밑져야 본전인데요.

게임이론과 몇몇 확률 모형에 따르면 우리는 내기의 '잠재 수익'과 확률을 곱해 예상 손실과 비교해서 내기가 유리한지 불리한지 판단할 수 있습니다. 신이 존재할 확률이 0(즉 논리적으로 불가능)이 아닌 한 '영원한 낙원'이라는 보상을 나노 단위의 확률과 곱해서 얻는 잠재 수익일지라도 내기를 걸기에는 충분합니다(이런 계산을 도박장에 서는 '기댓값'이라고 하죠).

파스칼의 요점은 "잃을 것은 하나도 없지만, 영원을 얻을 수도 있다'라는 것입니다. 천국행 공짜 내기인 셈이죠!

파스칼의 내기에서 널리 알려지지 않은 점은 그가 종교에 의지했을 때 실존적 행복이나 공동체 의식 등 여기 지상에서 얻을 수 있는 현세의 이득에 관해서도 언급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건 진짜 신앙이 아니잖아요!"라고 따질 사람들에게 파스칼은 자세한 답변을 남겼지만, 여기서는 "그런 척하다 보면 진짜가 된다" 라는 문장으로 간단히 줄여보겠습니다. 신앙심이 깊은 척하다 보면 (예를 들어 의식이나 예배 등을 통해서) 언젠가 자연스럽게 진짜로 믿는 사람이 된다는 말이죠.

그러니 기도문을 읊고, 노래를 부르고, 매일 밤 신께 기도하세요. 하루에 몇 분만 투자하면 사상 최고의 복권을 손에 쥐게 될지도 모릅니다.

 

 

 

VI. 문학과 언어 : Beckett - Waiting Around -베케트 -기다림, pp.160-161

친한 사람과 함께 먼 곳으로 길을 떠나거나 공항에서 한참을 기다려야 해서 심심함을 달랠 방법을 찾느라 애썼던 적이 있나요? 휴대전화도 지루해지고 뭔가를 읽기에는 눈도 너무 피곤할 때는 뭘 하시나요? 우리는 무언가를 기다릴 때 어떤 행동을 할까요?

아일랜드 극작가 사뮈엘 베케트Samuel Beckett는 희곡『고도를 기다리며」(1953)에서 바로 이런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라는 두 남자가 고도라는 수수께끼의 인물을 만나려고 기다리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두 등장인물 포조와 러키도 종종 나타났다 사라지지만, 세상에 널리 알려진 부분은 대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대화입니다.

비평가 비비언 메르시에 vivian Mercier는 이 작품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연극, 심지어 2막에 걸쳐"라고 설명했고, 그 말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인물들은 한결같이 고도를 기다리지만, 그는 결국 나타나지 않습니다. '플룻'은 이 기묘하게 어중간한 상태에서 인물들이 서로 나누는 대화를 중심으로 이어지고, 연극 자체도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이 하는 별난 생각이나 행동을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기다리면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법석을 떨고 이야기를 늘어놓습니다. 둘은 처음에는 서로 괴롭히다가 나중에는 서로 신경을 쓰지요. 이들은 상대방이 필요한 것처럼 보입니다. 극이 진행되는 동안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섬뜩한 상황 (등장인물이 허리끈으로 목을 매려는데 바지가 흘러내린다든가)이 계속 벌어집니다. 두 남자는 해야 할 일이라는 이유만으로 자기가 맡은 역할을 계속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서로 괴롭히자"라고 했다가 다음 순간 "이제 화해하자" 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인생과 인간관계를 고스란히 반영합니다.

베케트는 카뮈를 무척 좋아했기에 베케트의 작품에서는 부조리 (56폭 참조)의 영향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끝없이 언덕 위로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프처럼 등장인물들은 한없이 고도를 기다립니다.

존 레넌은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인생이란 네가 다른 계획을 세우느라 바쁠 때 네게 일어나는 일이야."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신만의 '고도'를 기다리느라 어영부영 허비한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고도'는 인간이 삶에서 찾으려 애쓰는 어떤 의미를 상징한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사랑이나 해방, 직업적 성공, 종교적 깨달음, 심지어 죽음을 기다립니다. 하지만 인생이란 우리가 어떤 추상적이고 신비한 미래를 기다리면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펼쳐지는 판에 박힌 일상 또는 촌극입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미처 깨닫기도 전에 막이 내려오겠지요.


 

VI. 문학과 언어 : Aristotle, Rhetoric - 아리스토텔레스 - 수사학, pp.172-173

철학이 당신에게 세계를 정복할 힘을 건네준다면 어떨까요? 위대한 선행에도 끔찍한 악행에도 쓰일 수 있는 마법을 알려준다면요? 운이 참 좋으시네요. 바로 이 방법을 가르쳐줄, 오래된 지혜가 정말 있거든요. 정신을 조종해 사람들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힘이죠

이 모든 것을 가르쳐줄 스승은 바로 고대의 마법사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은 설득의 기술을 집대성한 책입니다. 말의 힘을 활용해서 타인의 마음을 바꾸고, 토론에서 이기고, 대중을 선동하는 법을 알려주지요. 선거에서 이기려는 정치가에게도, 할머니가 이제 뺨을 그만 꼬집기를 바라는 당신에게도 유용하죠.

2000년도 더 되었음을 생각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사실은 매우 놀랍습니다. 일단 비법을 배우고 나면 실제로 활용되는 예가 온 사방에서 눈에 띄기 시작합니다. 마법의 원리를 알고 나면 주문에 조종당하지 않는 데 도움이 되죠

그렇다면 이 설득의 기술이란 무엇일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세 가지, 즉 에토스, 파토스, 로고스를 꼽았습니다.

에토스는 좋은 성품(또는 그렇게 보이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람들은 누군가가 믿음직하거나 인품이 훌륭하거나 아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의 말에 더욱 귀를 기울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질병에 관해 논할 때 술집에서 몇 잔 걸친 취객보다는 의사의 말이 더 권위가 있겠지요. 우리는 전문가(또는 그렇게 통하는 사람)나 '믿음직하고 솔직한 사람'에게 더 쉽게 설득됩니다.

파토스는 감정을 자극하는 능력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불러일으키고 싶은 감정의 본질을 파악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군중을 화나게 하고 싶다고 치죠. 그러려면 분노의 작용 원리가 '부당하게 행해진 명백한 잘못에 대한 설욕'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이 점을 이해한다면 해야 할 일은 (a) 확실한 잘못이 (b) 무고한 피해자에게 저질러졌음을 강조하고, (c) '정의'가 실현되어야 한다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또는 호의를 끌어내기 위해 농담을 하거나(이는 에토스에도 해당합니다) 건국 설화를 끌어와서 애국심을 자극할 수도 있습니다. 모두 매우 계산적이지만, 맥이 빠질 정도로 효과적이죠.

로고스는 사실과 타당한 주장의 활용입니다. 아마도 남을 설득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떠올리는 방법이겠지요. 대체로 우리는 말을 듣는 사람이 논리적이고 이성적이라고 가정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적절한 근거와 함께 논리적 주장을 제시하면 듣는이는 우리의 관점에 동의하며 좋은 토론이었다고 등을 두드려줄 것입니다. 아리스토텔 레스는 일이 항상 이렇게 풀릴 거라고 여길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았지만 설득이 효과를 보려면 세 가지가 모두 갖춰져야 하니까요), 로고스에 가장 무게를 둔 것은 사실입니다. 좀 더 냉소적인 사람이라면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요.

이제 수사학의 세 가지 비법을 알았으니 당신도 틀림없이 사방에서 실제 예를 발견하게 될 겁니다. 자신의 경력을 떠들어대는 정치가에게서는 에토스가, 시적인 미사여구로 군대를 전장에 내보내는 왕에게서는 파토스가, 자기주장을 뒷받침하려고 번거로운 통계를 줄줄 외고 다니는 친구에게서는 로고스가 보이겠지요.


 

VI. 과학과 심리학 : Libet-Watching Yourself Behave -리벳-뇌와 자유의지

혼자 할 수 있는 간단한 철학 실험을 해봅시다. 근처 책상이나 탁자에 손바닥이 아래를 향하게 손을 올리고 가만히 두세요. 준비되면 몇 초쯤 기다렸다가 손을 들어주세요. 들고 싶을 때 들면 됩니다. 원하는 타이밍에 맞춰서요.

손을 드셨나요? 당신이 정확히 그 순간을 택하게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요? 왜 조금 앞이나 조금 뒤가 아니라 그때였나요? 당신 뇌에서 신경계를 거쳐 손까지 이어지는 생물학적 연쇄를 일으킨 것은 정확히 무엇일까요? 당신 마음이나 의식의 어느 부분이 어떤 방식으로 첫 번째 도미노를 건드렸을까요?

이 모든 질문은 수천 년간 철학자들을 고민하게 했지만, 1980년대에 미국 과학자 벤저민 리벳 Benjamin Libet은 실제로 이에 관한 실험을 진행했고 상당히 충격적이며 섬뜩한 결론을 얻었습니다.

리벳의 실험을 이해하려면 먼저 뇌에는 손을 들기로 선택하는 것 과 같은 '수의적 운동, 즉 자발적 행위를 책임지는 특정한 영역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파킨슨병이나 투렛 증후군에 동반하는 무의식적 경련이 일어날 때 이 영역은 활성화되지 않습니다. 뇌의 이 영역은 운동 전에 나타나는 '준비전위 readiness potential'를 제 어하며 모든 수의적 운동 전에 활성화합니다.

이제 실험을 살펴보죠. 리벳은 다수의 피험자를 모아 우리가 했던 것과 똑같은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참가자들은 마음이 내킬 때 손을 들기만 하면 됐죠. 차이점이 있다면 리벳의 실험 대상자들은 뇌파와 손목 신경을 측정하기 위해 특수한 전극을 부착했다는 것뿐이었습니다. 모든 참가자는 자신이 손을 움직이기로 '선택한 정확한 시각을 확인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선택을 인식하는 이 시점은 뇌에서 일어나는 '준비전위'와 동시에 일어나리라 예상되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리벳은 뇌의 '준비전위'가 피험자의 선택 인식보다 350밀리초 빠르게 활성화한다는 사실을 알 아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스스로 선택했다고 생각하기 3분의 1초 전에 우리 뇌가 이미 손을 움직이기로 '선택'했다는 뜻입니다.

우리 몸은 자기가 적당하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움직이고, 우리의 의식적 지각은 전혀 상관없는 구경꾼처럼 그저 지켜볼 뿐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책임자이며 '선택'을 하는 주체라고 여기지만, 우리 뇌가 이미 모든 것을 정해버린 셈이죠. 리벳은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수의적 운동은 무의식적 대뇌 과정으로 보인다. 확실히 자유의지는 동작을 개시하는 주체가 될 수 없다."

대뇌피질의 '준비전위' 영역이 얼마나 확실하게 배타적으로 수의적 운동만을 수행하는지 알 수 없다는 등의 이유로 리벳의 실험을 비관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모두 결정적이지 않았고, 리벳의 연구는 엄연한 과학으로 인정받습니다.

그러니 다음에 비스킷에 손을 뻗거나 모르는 사람에게 미소를 지어주기로 마음먹을 때는 당신의 뇌가 당신보다 먼저 그 결정을 내렸음을 기억하세요. 당신은 자신이 모든 것을 통제한다고 생각하며 으쓱할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우리는 그저 영화관에 앉아 우리 몸이 인생을 연기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VIII. 일상 속 철학 :Frankl-Giving Meaning to Suffering.-프랭클-고통에 의미 부여하기,pp.226-227

고통은 삶에서 불가피한 부분입니다. 운이 좋은 사람에게 고통은 실연이나 사별, 가끔 겪는 심각하지 않은 질병이겠죠. 하지만 살면서 끔찍한 신경쇠약이나 장애를 남기는 질병,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통을 겪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의 말대로 "인간은 무엇에든 익숙해질 수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굉장한 회복력과 인내력을 지닌 강건한 종이니까요.

오스트리아의 신경학자이자 심리학자이며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빅터 프랭클 Viktor FrankL은 자신의 감동적인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 (1946) 에서 이 주제를 다뤘고, 인간이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이유를 탐색했습니다.

프랭클은 인간이 의미를 부여하기만 하면 어떤 고통이든 견딜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더는 견디지 못하겠다고 느끼는 지점에 다다르는 것은 더 견뎌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할 때뿐입니다. 니체는 이렇게 표현했죠.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은 거의 어떤 방식의 삶이든 견딜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반드시 고통의 의미를 찾아내야만 합니다. 견뎌야 할 개인적 이유를 찾으려고 애써야 한다는 말이죠. 프랭클은 우리 각자는 '삶의 질문을 받고", "혼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대답해야 한다고 썼습니다. 도움이 될 만한 표준이나 미리 정해진 길은 없기에 인간은 각자 삶이 주는 고통에 개인적 의미를 붙여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의미를 찾도록 돕거나 이끌어줄 수는 있지만, 결코 그 사람에게 필요한 의미를 건네줄 수는 없습니다. 그 의미는 개인적이어야 하기 때문이죠.

프랭클은 예를 하나 들었습니다. 오랜 결혼 생활 끝에 아내가 세상을 떠나 슬픔에 잠긴 남자를 생각해봅시다. 어느 날 그는 이런 생각을 해보라는 말을 듣습니다. "당신이 세상을 먼저 떠나고 당신 대신 아내가 남겨졌다면 어떨까요?" 갑자기 그의 슬픔에 의미가 생깁니다. 그는 아내를 대신해 슬픔을 견디고 있기에 이제 그 슬픔을 자랑스럽게 꿈습니다. 물론 슬픔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매일 강렬한 외로움을 느끼지만, 이제 그걸 견딜 방법을 손에 넣은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을 최대한 빨리 지워 없애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래서는 고통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습니다. 고통은 영혼을 단련하는 대장장이의 망치처럼 우리의 정체성을 담금질하고, 우리는 그 결과물을 자랑스럽게 여겨야 마땅합니다. 프랭클은 이렇게 썼습니다. 최근 들어 고통받는 이는 자신의 고통을 자랑스러워하고 고 귀하게 여길 기회를 거의 얻지 못한다." 우리가 본보기로 여기는 이들은 견디고 극복한 사람이지 즐겁고 화려하게 살았던 사람이 아니라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끈질긴 회복력이야말로 인간을 위대하 게 만들지요.

고통을 풍성한 삶을 사는데 방해가 되는 걸림돌로 인식하기 쉽지만, 프랭클이 말한 대로 "고통과 죽음 없이 인간의 삶은 완벽해질 수 없는" 법입니다. 경험은 오직 자신의 것,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을 통해 더욱 단단해지고, 그 과정에서 찾은 의미는 그 누구도 앗아갈 수 없지요. 우리는 자신이 견뎌온 역사를 자랑 스레 짊어질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합니다.


 

 

VIII. 일상 속 철학 : 孫子-Winning at Board Games-손자-보드게임에서 이기는 법, pp.236-237

거의 다 됐습니다. 몇 달 만에 드디어 당신은 체스에서 아버지를 이길 기회를 잡았다고 확신합니다. 아버지의 말은 진형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나이트 한 개가 더 많고요. 아버지의 킹은 무방비 상태입니다. 이제 몇수만 더 놓으면 끝입니다. "체크." 아버지가 말하자 당신은 소스라치게 놀라 완전히 놓치고 있던 조그마한 폰을 내려다봅니다. 아버지는 단 세 수만에 게임을 끝내겠군요. 아버지가 교묘한 기술로 당신의 눈을 가린 것이죠. 음흉한 노인네 같으니!

어쩌면 아버지는 손자의 책을 즐겨 읽으셨는지도 모릅니다 2000 하고도 500년이 지난 지금도 손자병법』은 전쟁과 전략, 전술을 다룬 최고의 병법서로 손꼽힙니다.

손자는 유난히 어지러웠던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비교적 작은 나라였던 오나라의 명장이었습니다. 중국 백성에게는 끔찍한 전란의 시대였지만, 새로운 병기 제조법과 공병술이 발전하고 손자 같은 위대한 전략가가 등장한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손자병법』은 군대나 장군이 다양한 유형의 적을 상대로 의표를 찌르고 승리를 거두는 방법을 설명하며, 이 가운데는 일상생활이나 업무에서 활용할 만한 교훈도 많습니다. 물론 보드게임에서 상대방을 압살하는데도 도움이 되죠.

첫 번째 교훈은 모든 상황에 천편일률적으로 적용되는 보편적이고 포괄적 전략이란 없으며 상황에 맞춰 접근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기고자 하는 자는 날씨부터 시작해 지형, 병사의 사기, 새 떼가 날아가는 경로 같은 사소한 것까지 상황의 모든 요소를 고려해야 합니다. 오늘이 어제와 같으리라고, 이 문제가 지난번 문제와 같으리라고 속단하면 안 됩니다. 모든 것을 새로 검토하세요.

두 번째 교훈은 책략입니다. 절대 자신의 계획을 드러내지 말고 항상 상대가 오해하도록 유도하세요. 손자는 이렇게 썼습니다. “계책을 숨길 때는 어둠처럼 보이지 않게, 움직일 때는 벼락치듯 신속하게 하라." 강하다면 약한 척 가까이 있다면 멀리 있는 척하세요. 모노폴리 게임을 한다면 돈을 보이지 않게 감춰두세요. 항상 적이 추측하게 놔두세요.

세 번째 교훈은 전쟁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인생에서와 마찬가지로 전쟁에서도 공격과 폭력은 마지막이자 가장 효과가 떨어지는 수단이지요. 손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최고의 병법이다." 전쟁을 하지 않고 설득하거나, 선수를 치거나 위협을 제거하거나, 갈등을 해소할 수단이 하나라도 있다면 그쪽을 택하세요. 전쟁은 관련자 모두에게 피해를 줄 뿐 아니라 성공 가능성도 훨씬 적은 수단입니다.

손자는 전 세계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기로 손꼽히는 책을 썼고, 오늘날에도 군사학교에서는 손자의 병법을 가르칩니다. 그는 종종 더 작거나 약체인 군대의 관점에서 글을 썼기에 전 세계의 게릴라나 혁명군에게 인기가 높습니다. 1960년대에 마오쩌둥이 손자를 종종 인용했죠. 그의 책에는 우리 삶에도 얼마든지 적용할 수 있는 흥미로 운 내용이 많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빠를 때는 바람과 같이 느릴 때는 숲처럼 고요하게 쳐들어갈 때는 불처럼 기세 좋게 움직이지 않을 때는 산처럼 진중하게 하라." 다음에 조카와 보드게임을 할 때는 이 말을 염두에 두면 좋겠네요.


 

 

IX. 인식과 마음 : Hume-Black Swans. -흄 -검은 백조, pp.250-251

미래가 과거와 같다고 대체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그건 항상 그런 식이었다"라는 말만으로 내일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철학적인 관점에서 내일도 태양이 뜰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오늘까지의 모든 해돋이가 말도 안 되는 우연이었고 지금까지 엄청난 확률의 연쇄가 이어진 것뿐이라면요?

이런 질문이 바로 데이비드 흄의 '귀납법 문제입니다. 여전히 가장 까다롭고 다루기 어려운 철학적 난제로 손꼽히지요.

이 문제는 모든 유형의 '귀납적 추론'에 도전장을 던집니다. 귀납법이란 다양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관찰한 뒤 결론을 끌어내는 것을 가리킵니다. 여러 날에 걸쳐 다양한 개가 짖는 것을 봤다면 "개는 짖는다"라는 결론을 내려도 무방하겠죠. 지금까지 해가 매일 떠올랐다면 내일도 해가 뜰게 틀림없다는 귀납적 추론이 가능합니다. 위스키를 마실 때마다 맛이 끔찍했다면 내 입맛에 위스키가 맞지 않는다고 봐도 되겠고요

문제는 18세기에 흄이 지적한 대로 과거의 관찰이 아무리 많이 쌓여도 그것이 미래의 무언가를 철학적으로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과거와 미래 사이에는 '필연적 관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실험을 반복할 때 상황이 달라질 기상천외한 이유는 얼마든지 생각해낼 수 있죠 (세계 자체가 시뮬레이션이나 사악한 악마의 환각이라든 가. 모든 것이 꿈이라든가). 내일도 똑같은 일이 일어날지 확실하게 알아낼 방법은 없습니다. 따라서 위스키가 항상 끔찍하리라는 철학적 보장이 없으므로 나는 계속 위스키를 마셔봐야 하는 겁니다.

백조밖에 본 적 없는 남자를 예로 들어 문제를 설명해보죠. 그는 귀납적 추론가 특유의 오만하고 자신만만한 태도로 선언합니다. "백조는 모두 흰색이야!" 그러다 오스트레일리아의 호숫가를 걷던 그는 위풍 당당한 검은 백조를 보고 어안이 벙벙해집니다. 과연 모든 귀납적 결론의 한구석에 검은 백조가 숨어 있지 않다는 보장이 있을까요?

물론 모든 과학 실험에서 귀납법이 쓰인다는 점 (186쪽 참조)을 생각할 때 흄의 지적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니며, 최근 들어서야 포퍼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성공했지요 (196쪽 참조). 하지만 여전히 이 해법이 충분하지 않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습니다.


 

 

IX. 인식과 마음 : Socrates - Questioning Everything - 소크라테스 모든 것을 질문하기, pp.254-255

무언가를 알지 못할 때 어떤 기분이 드나요? 타인의 생각을 알지 못하면 신경이 쓰이나요? 질문을 잘못 이해하면 민망한가요? 손을 들고 "잘 모르겠는데요"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는 횟수는 하루에 몇 번까지 일까요?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자가 되는 첫걸음이자 가장 중요한 단계라고 보았으며, 우리 모두 자신의 무지를 좀 더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인간의 역사가 쌓이면서 왠지 모르게 무지는 부정적 단어가 되었습니다. 가장 심각한 죄악은 아닐지 몰라도 일종의 성격적 결함으로 여겨지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무지는 부모와 교사, 위키피디아가 치료해야 하는 질병 취급을 받습니다. 우리가 채워야만 하는 구멍과도 같죠.

하지만 모든 무지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는 사실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이중 언어 구사자는 대단하고, 학위가 두 개인 사람은 놀랍고, 책 1000권을 읽은 사람은 경이롭죠. 하지만 이 또한 획득 가능한 지식의 바다 안에서는 작디작은 물방울일 뿐입니다. 우리는 모두 특정 분야에서 무지하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무지는 그저 일종의 불가피한 악이 아니라 제대로만 활용하면 진리와 지혜로 가는 근본적 토대이자 첫 단계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것을 '소크라테스적 무지'라고 부릅니다. 소크라테스는 무지를 다음 두 종류로 나누었습니다

(1) 자신의 무지에 무지함: 소크라테스의 관점에서 이는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는 채로 삶을 산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전혀 의문을 품지 않는 사람들이 여기 속하죠. 이들은 옳고 그른 것을 아는 듯이 행동하지만 마치 '잠든' 것처럼 여기저기 부딪히며 살아갑니다. 게다가 스스로를 의심할 생각조차 하지 않지요.

(2) 소크라테스적 무지 : 자신이 안다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모르는 것을 모두 비판적 시선으로 검토함으로써 잠에서 깨어난 상태를 가리킵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역할이 질문하는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아테네의 '잔소리꾼'이었고, 정의의 본질부터 신앙심에 이르기까지 온갖 주제에 관해 질문하고 따지며 세월을 보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기원전 399년에 아테네 시민들이 소크라테스를 잽싸게 처형해버렸는지도 모릅니다.

이 두 번째 유형의 무지를 소크라테스는 '인식적 미덕'이라고 불렀습니다. 모든 철학자, 모든 지적인 인간이 도달하려고 노력해야 할 경지죠. 그러려면 아무리 널리 알려진 이론이라도 정확성을 확인하지 않고는 믿지 말아야 합니다. 타당성을 묻지 않고 상황에 장단을 맞추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이는 스스로 아는 것이 얼마나 적은지 인정하고 자신이 모든 것에서, 어떤 주제에 관해서든, 언제든 틀릴 수 있음을 깨닫는다는 뜻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명언대로 "반성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는 법 입니다.


 

X 정치와 경제 : Kant-World Peace-칸트-세계 평화, pp.292-293

철학이 좀 비실용적이라는 비판이 종종 나오는 데도 이유가 있기는 합니다. 희한하기 짝이 없는 범심론(266쪽)이나 플라톤의 추상적인 이데아 세계 (100쪽), 버클리의 유아론적 관념론(146쪽)이 최고의 실용적 발명상 후보에 들기는 글렀다고 봐야겠죠. 철학이 엄청나고 근사한 아이디어를 딱 하나만 내놓아도 좋을 텐데요. 세상을 더 좋은 쪽으로 완전히 바꿀 방법 같은 것 말이죠. 이를테면… 세계 평화를 이룰 방법?

이마누엘 칸트는 자신이 바로 이런 일을 해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짧은 책 『영원한 평화에는 전쟁 없는 세계로 나아가는 방법이 단계별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세계 평화를 만드는 칸트의 레시피는 인류학과 정치, 철학적 이성을 알기 쉽게 (그가 보기에는) 버무린 다음 계몽주의 시대를 상징하는 희망 담긴 낙관주의를 살짝 곁들인 것이었습니다. 각 나라가 따라야 할 '결정적 조항' 세 가지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담겨 있죠.

(1) 공화국이 될 것: 칸트는 법 앞의 평등과 선출된 의회를 공화국의 요건으로 보았습니다. 시민이 법을 제정하므로 체제는 지지와 합의라는 뒷받침을 얻습니다. 칸트는 이런 제도 안에서라면 "전쟁이라 는 처참함을 불러오는" 또는 "자신의 재산으로 전쟁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쪽으로 쉽게 투표할 시민은 없으리라 생각했죠. 전쟁을 벌이는 것은 부유한 과두제 집권층이나 독재자뿐입니다. 그들은 잃을 것이 없으니까요.

(2) 공화국 연방을 형성할 것: 국가 간의 이 연합은 오늘날 우리가 자유무역 지역이나 불가침 조약이라 부르는 것과 비슷합니다. 무역으로 서로 묶인 국가들은 쉽게 전쟁을 벌이지 않습니다. 양쪽에게 이득이 되지 않으니까요. 이런 연방은 "국가 간의 형제애라는 광신적 열광이 아니라 각자의 이익을 토대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칸트가 보기에 모든 국가는 번영을 원하고, 이성적으로 이는 곧 무역 연합으로 이어집니다. 이 연합은 주권이나 국가 정체성 상실과 관련이 없으며 이념과 문화, 종교와 언어 통합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3) 세계시민주의를 받아들일 것: 끔찍한 전쟁을 이미 겪은 인간은 인류를 위한 자신의 의무를 깨달을 수밖에 없다고 칸트는 생각했습니다. 칸트의 세계시민주의는 인류를 개성 없는 덩어리로 한데 뭉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존중에 가까운 개념입니다. 타인을 인간 이하, 구제 불능의 악, 또는 어떤 식으로든 열등한 존재로 본다면 평화는 유지될 수 없습니다.

칸트의 주장은 소련이 무너지고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 이론 (298쪽 참조)이 등장한 1990년대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그의 유산은 우선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칸트에게서 영감을 얻음)이 주도한 국제연맹(실패함), 그리고 오늘날의 국제연합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의 생각이 가장 비슷하고 명확한 형태로 실현된 것은 유럽연합이죠. 가까운 무역 파트너가 된 민주국가는 서로 거의 또는 전혀 전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증명된 셈입니다. 따라서 칸트의 주장에는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단지 그의 세 가지 조항이 단순한 단계라기 보다는 태산 같은 장애물로 보인다는 점이 문제일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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