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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독서정리

마흔 네 번째 책 :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 에릭 와이너

by 마파람94 2021. 10. 29.

..12명의 철학자의 사상을 개별적으로 파악하거나 각각의 책을 한권씩 읽는다고 상상하면 엄두가 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재미 있게 12명의 철학자를 마음 편하게 만날 수 있도록 열차여행으로 초대합니다.

 

이 책은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우연히 거리를 거닐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예전에 잃어버린 소중한 어떤 것을 발견한 것' 이라는 글로 쓰고 싶습니다.

 

올해 읽은 책중 다섯 손가락 안에 위치 할 만한 책이라는 생각 입니다. 제가 책갈피를 둔 책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소니의 말이 맞다. 내가 침대에서 나오지 못할 때 나의 숙적은 침대도, 심지어 바깥세상도 아닌 나의 예상이다. 나는 이불 아래 파묻힌 채 나를 때려눕히려고 마음먹은 적대적인 세상을 떠올린다. 꼭 마르쿠스처럼. 마르쿠스의 세상에는 실제로 공격적인 야만인과 역병과 반란이 있었다. 하지만 장애물은 상대적인 것이다. 어떤 사람에겐 지저분한 책상이 흉포한 침략일 수 있다.

어쩌면 가장 큰 장애물은 타인이다.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프랑스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 만큼은 아니었지만 마르쿠스도 얼추 비슷했다. "아침에 잠에서 깨면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할 것. 오늘 네가 만날 사람들은 주제넘고 배은망덕하고 오만하고 시샘이 많고 무례할 것이다." 지금도 마르쿠스가 살던 시기와 별반 다를게 없다.

마르쿠스는 골치 아픈 사람에게서 영향력을 빼앗으라고 제안 한다. 나의 삶에 영향을 미칠 자격을 빼앗을 것. 다른 사람은 나를 해칠 수 없다. "다른 사람의 머릿속에 있는 것은 나를 해칠 수 없기 때문이다. 옳은 말씀이다. 왜 나는 다른 사람의 생각을 신경 쓰는 걸까? 생각은 당연히 내 머리가 아니라 그들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침대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내 무능력의 핵심에는 교활한 자기혐오가 있을 거라고 늘 의심해왔지만, 나는 그 사실을 온전히 인정하지 못했다. 나보다 용감한 마르쿠스는 그 사실을 온전히 인정하며 말한다. "너는 너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다." 이렇게 자신을 연민하려다가 몇 페이지 뒤에서 다시 공격에 나선

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처럼 침대에서 나오는 법, 35

 

 

 

다. '이런 끔찍한 불평불만과 원숭이 같은 삶은 이걸로 충분하다.…. 너는 오늘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너는 그러는 대신 내일을 택한다." 마르쿠스는 가장 날카로운 비판을 남겨두었다가 자신의 이기심에 내리꽂는다. "지금처럼 침대에서 빈둥거리는 것은 오로지 나 자신만 생각하는 것이다." 이불 아래 남아 있는 것은 결국 이기적인 행동이다.

이러한 깨달음이 마르쿠스를 움직이게 한다. 마르쿠스에게는침대 밖으로 나갈 사명이 있다. '사명'이지, '의무'가 아니다. 두 개는 서로 다르다. 사명은 내부에서, 의무는 외부에서 온다. 사명감에서 나온 행동은 자신과 타인을 드높이기 위한 자발적 행동이다. 의무감에서 나온 행동은 부정적인 결과에서 스스로를, 오로지 스스로만을 보호하려는 행동이다.

마르쿠스는 이러한 차이를 알았지만, 늘 그렇듯 스스로에게 그 차이를 다시 상기시켰다. "새벽에 침대에서 나오기가 힘들면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라. '나는 한 인간으로서 반드시 일해야만 한다." 스토아 학파나 황제, 심지어 로마인으로서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디-다, 디-다. 다시 미스 올리버예요. 식당칸이 열렸다는 거, 제가 말씀드렸나요? 여러분 모두를 뵐 수 있길 고대하고 있습니 다! 다다.

p. 36

 

 


"질문을 살아요?"

“네, 질문을 사는 겁니다. 오랜 시간 마음 한구석에 질문을 품는 거예요. 질문을 살아내는 거죠.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해결책을 찾아버려요."

좋은 말 같다. 질문을 살아내면서 남은 평생을 보내고 싶어진다. 하지만 질문의 답은? 대답은 어디에 있는데? 이것이 바로 철학이 받는 부당한 평가다. 철학은 말뿐이야. 질문만 끝없이 늘어놓고 대답은 없어. 언제나 떠나기만 하고 도착하지는 않는 기차야.

니들은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 철학도 분명 도착지에 관심이 있지만, 여행을 서두르지 않을 뿐이다. 이것이 그저 똑똑한 대답이 아닌 '마음의 대답'에 도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다른 종류의 대답, 예를 들면 머리의 대답은 그만큼 만족스럽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가장 심오한 의미에서 그만큼 진실하지도 못하다.

마음의 대답에 도착하려면 인내심도 필요하지만 기꺼이 자신의 무지와 한자리에 앉으려는 자세도 필요하다. 끝없는 해야 할 일 목록에서 또 하나를 지우려고 성급히 문제 해결을 향해 달리는 대신, 의혹과 수수께끼의 곁에 머무는 것. 여기에는 시간과 용기가 필요하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우리를 조롱할 것이다. 내버려두라고, 제이컵 니들과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비웃음은 지혜의 대가다.

2 소크라테스처럼 궁금해하는 법, p. 69

 

 

 

질문의 프레임을 어떻게 구성하는가는 중요하다. 제니퍼는 "왜 성공하고 싶어?"라거나 "얼마나 성공해야 충분한 건데?"라고 물어볼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나는 우리가 뉴저지에 있는 제니퍼의 발코니에 앉아 있는 동안 우리 곁을 맴돌던 모기한테 그랬듯 그 질문을 찰싹 때리고 무시해버렸을 것이다. 왜 성공하고 싶으냐고? 그냥 다들 그렇지 않나? 얼마나 성공해야 충분하냐고? 지금 나보다 더.

하지만 제니퍼는 내게 그렇게 묻지 않았다. 성공이 어떤 모습이냐고 물었다. 제니퍼의 질문에는 개인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성공은 나한테 어떤 모습이지? 그 모습을 본다면 내가 알아차 릴 수 있을까?

나는 전기 가오리에 뇌를 쏘인 것처럼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좋은 질문은 그렇다. 사람을 단단히 붙잡고 절대 놓아주지 않는다. 좋은 질문은 문제의 프레임을 다시 짜서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 좋은 질문은 문제의 해답을 찾게 할 뿐만 아니라 해답을 찾는 행위 그 자체를 재평가하게 만든다. 좋은 질문은 똑똑한 대답을 끌어내기도 하지만 침묵을 끌어내기도 한다. 고대부터, 소크라테스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인도의 현자들은 브라모디야brahmodya 라는 시합을 펼쳤다. 참가자들의 목표는 절대적 진리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이 시합은 언제나 침묵으로 끝이 났다. 작가 카렌 암스트롱은 이렇게 설명한다. "참가자들이 자신의 언어로는 역부족임을 깨닫고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것을 직감할 때 통찰의 순간이 찾아왔다. "16

2 소크라테스처럼 궁금해하는 법, p. 71

 

 

 

게처럼 찢어진 눈으로 좌우를 살펴면서 함께 철학을 논할 동지를 찾는 중이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직판했다. 사람들이 찾아오길 기다리지 않았다. 사람들을 직접 찾아갔다.


소크라테스는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침울한 10대 시절 나는 처음 그 말을 듣고 한 숨을 쉬었다. 삶은 이미 충분히 힘겹다. 그런데 성찰까지 하라고? 성찰하는 삶. 나는 그 표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선 성찰하다 examine 라는 단어에는 시험 또는 검사라는 뜻의 단어 'exam '이 들어 있는데, 이 단어를 보면 잊고 있던 시험용 HB 연필과 차가운 의사 선생님의 손이 떠오른다. 그러니 성찰은 너무 힘든 일 같아 보이지 않나. 우리는 더 잘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감히 내가 소크라테스의 성찰하는 삶에 따르는 필연적 결과 두 가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결과 1번: 실질적인 결과를 내지 못하는 성찰하는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 자기 배꼽에 대해 깊이 생각하는데에는 나름의 즐거움이 있지만 그보다는 결과를 내는 것이 더 나은 배꼽을 만들어내는 것이 훨씬 더 만족스럽다(배꼽에 대해 생각하다'에는 '묵상하다'라는 뜻이 있다. 옮긴이). 그리스인들은 그것을 에우다이모니아eu daimonia 라고 불렀다. 보통 '행복'이라고 번역되는 이 단어에는 사실 의미 있는 융성한 삶이라는 더 큰 뜻이 있다. 현대 철학자 로버트 솔로몬의 제안처럼 한번 두 사람을 떠올려보자. 한 사람은 관용에 대해 아주 정교한 이론을 갖고 있다. 다른 한 사람은 그런 이론은 없지만, "아무 생각 없이도 마치 분수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

2 소크라테스처럼 궁금해하는 법, p. 75

 

 

 

피해망상에 빠진 채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것은 사회다. 루소의 야만인"은 과거에 대한 후회나 미래에 대한 걱정 없이 매 순간을 살아간다.

루소는 우리가 인간 본성이라고 생각하는 것 중 많은 것이 사실은 사회적 관습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훈연한 브리치즈와 인스타그램을 향한 사랑이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확신하지만 사실은 문화적인 것이다. 어쨌거나 1970년대 사람들은 활주로 만큼 넓디넓은 털 카펫과 넥타이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지 않았는가. 오늘날에야 우리는 그것들이 끔찍하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심지어 경치처럼 '자연스러운' 것조차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 일 때가 많다. 대부분의 유럽 역사에서 사람들은 산맥을 야만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자원해서 산으로 여행을 떠나지 않았다. 산이 경외의 대상이 된 것은 18세기 이후였다. 루소는 우리가 그 실체를 알아보기만 한다면 사회적 관습을 바꿀 수 있다는 좋은 소식을 전한다. 사회의 인위적 기교는 오래된 나팔 청바지만큼이나 쉽게 갖다 버릴 수 있다

루소의 야만인은 스스로를 향한 사랑을 자주 경험하는데, 루소는 이를 자기 사랑amoure01 이라고 부른다. 이런 건강한 감정은 더 이기적인 종류의 사랑과는 다르며, 루소는 이런 이기적인 사랑을 자기 편애amour-propre라고 부른다. 전자는 인간 본성에서, 후자는 사회에서 비롯된다. 자기 사랑은 혼자 샤워하면서 노래를 부를 때 느끼는 기쁨이다. 자기 편애는 뉴욕 록펠러센터에 있는 라디오시티 뮤직홀에서 노래를 부를 때 느끼는 기쁨이다. 샤워실

p. 90

 

 

 

분노 같은 감정을 떠올려보자. 분노가 터져 나올 때 그 '분노 는 어디에 있는가? 물론 머릿속에 있다. 하지만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그 분노가 몸에도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동작과 언어, 신체와 상관없이 상대의 겉모습에서 악의와 잔혹성을 분간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할 수 없다. 이런 감정들은 결코 비현실적인 영역에서, 분노한 사람의 신체 바깥에 있는 어떤 신성한 곳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철학적 사고 역시 정신뿐만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이다.

다시 크레페리로 돌아와, 다시 책에 푹 빠져든다. 마시는 와인은 아까와 같지만, 책은 다르다. 이번에는 루소의 미완성 유작인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이다. 리베카 솔닛이 자신이 걸어온 역사를 담은 책에서 말했듯이, 이 이상하지만 사랑스러운 책은 "걷기 에 관한 책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한편, 걷는 행위 자체 역시 걷기에 관한 것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루소의 작품이다. 이 책에는 추방당하고 돌에 맞고 조롱당했으나 이제는 더이상 눈곱만큼도 신경 안 쓰는 사람의 도덕적 명료함과 생생한 지혜가 고동친다. 이 책 속의 루소는 주류 의견에 반대하는 루소도, 속마음을 고백하는 루소도, 개혁을 주창하는 루소도 아니다. 여기서의 루소는 쉬고 있는 루소다.

p. 94

 

 

 

지 못했다. 루소는 생각하는 사람이었지만 지나치게 많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이 가장 사랑한 신체 기관인 심장에도 지력이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이마의 주름과 턱의 힘을 풀고 팔다리를 가볍게 흔들 수만 있다면 심장의 지력에 닿을 수 있음을 알았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 앞에서는 으스대고 빼기며 걷지만 혼자 있을 때는 그러지 않는다. 으스대며 걷는 것은 사회적 제스처다. 가장 느린 이동 형태인 걷기는 더 진정한 자기 자신을 만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우리는 아마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을 오래전에 잃어버린 낙원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하지만 걸을 수는 있다. 걸어서 출근할 수 있다. 걸어서 딸아이를 학교에 데려다 줄 수 있다. 산들바람이 부는 상쾌한 가을날 오후, 특별한 목적지 없이 혼자 걸을 수 있다.

우리는 잊기 위해 걷는다. 짜증내는 상사, 배우자와의 말다툼, 아직 지불하지 않은 청구서 무더기, 타이어 압력이 낮거나 차가 불타고 있음을 알려주느라 계속 깜박이는 스바루의 경고등을 잊기 위해 걷는다. 우리는 또 한 명의 훌륭한 산책자였던 윌리엄 워즈워스의 표현처럼 우리에게 너무한 세상을 잠시나마 잊기 위해 걷는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잊기 위해 걷기도 한다. 난 내가 그런다는 걸 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다이어트를 시도해도 절대 빠지지 않는 7 킬로그램의 살과 상습적으로 튀어나오는 코털, 10년 전부터 계속 있어왔으나 도저히 알 수 없는 이유로 어느 날 갑자

3 루소처럼 걷는 법, 101,

 

 

 

다. 제때 피하지 못한 루소에게 개가 달려들었고, 루소는 자갈길 위로 세게 넘어져 피를 줄줄 흘리며 의식을 잃었다. 루소는 뇌진탕에 걸리고 신경 손상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끝까지 온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이로부터 2년도 지나지 않아 루소는 아침 산책에서 돌아온 뒤 쓰러져 사망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루소는 행복하게 죽었다. 말년이 다가올수록 루소의 걸음은 더 부드럽고 낙천적인 성격을 띠었다. 옛날과 같은 자기 연민 "여기 이 땅 위에 나는 혼자로구나)과 피해망상 (내 머리 위 천장에는 눈이, 나를 둘러싼 벽에는 귀가 달렸다")의 흔적이 아직 조금 남아 있었지만 절박함은 사라지고 없었다. 루소는 더 이상 도망치거나 무언가를 찾거나 철학적 주장을 하기 위해 걷지 않았다. 그냥 걸었다.

루소의 유산은 어마어마하다. 축하카드, 할리우드의 최루성 영화, 하트 모양 이모티콘, 모든 것을 남김없이 솔직하게 털어놓는 자서전도 전부 루소가 남긴 유산이다. "나 실컷 울어야겠어"라고 말한 적이 있다면 루소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상상력을 이용해 봐"라고 말한 적이 있다면 루소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한창 열띤 논쟁을 벌이다 "이게 말이 안 돼도 상관없어. 난 그렇게 느끼니까" 라고 내뱉은 적이 있어도 마찬가지다. 배우자가 "당신에게 좋을 것"이라는 이유로 춥고 축축한 날 당신을 16킬로미터 트레킹에 끌고 간 적이 있다면 루소에게 고마워하거나 저주를 퍼부을 수 있다. 루소 덕분에 우리는 다르게 생각하고 느끼게 되었으며, 우리의 감정에 대해 다르게 사고할 수 있게 되었다.

3 루소처럼 걷는 법, p. 103

 

 

 

소로는 윌든에서 자유롭게 떠돌면서 스스로를 봄seeing에 민감하게 만들었다. 소로는 어디에도 매여 있지 않을 때, 자신과 빛 사이에 아무것도 없을 때 가장 잘 볼 수 있음을 알았다. 소로는 본인을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비본질적인 것들은 다쳐내고 문제의 핵심으로 치고 들어가는 수학자에 비유했다.

소로는 피상적이었다. 좋은 의미에서 하는 말이다. 피상적이라는 표현은 억울한 누명을 쓴다. 종종 '얄팍하다'라는 표현과 동의어로 사용되지만 두 단어는 다르다. 얄팍한 것은 깊이가 부족한 것이다. 피상적인 것은 깊이가 분산된 것이다. 무한한 세상에서는 자신의 몫이 얇지만 매우 넓게 퍼져 나간다"

"왜 우리는 겉모습을 비방하는가?" 소로는 궁금해했다. "표면에 대한 인식은 감각에 기적과도 같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여기서 소로가 가만히 응시하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있다. 소로는 훑어보았다. 소로의 눈은 꽃가루를 찾는 호박벌처럼 처음엔 여기 다음엔 저기에 있는 다양한 대상에 내려앉았다. 소로는 이를 눈의 어슬렁거림"이라 칭했다.

인간이 훑어보는 것은 다른 동물들이 코를 킁킁대는 것과 같은 이유다. 주변 환경을 탐색하는 방식인 것이다. 훑어보다 보면 뜻밖의 경이를 만나기도 한다.

4 소로처럼 보는 법, p. 137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의 인식 능력 너머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매일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이처럼 정신에서 구성된, 즉 인지적 세계를 경험한다. 이 세계는 실제 한다. 호수의 표면이 실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유리처럼 매끈한 수면이 호수의 전부가 아니듯이, 인지적 세계 역시 실재의 일부만을 나타낸다. 호수의 깊이를 설명해내지는 못한다.

이마누엘 칸트 같은 관념론자들은 이러한 깊이가 감각 인식 너머에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호수의 바닥이 실재하듯 틀림없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사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경험하는 찰나의 감각적 현상보다 더욱 실재적이다. 철학자들은 이 눈에 보이지 않는 실재에 다양한 이름을 붙였다. 칸트는 이를 예지체 noumenon 라고 불렀다. 플라톤은 이를 이상적인 형태의 세계라고 불렀다. 인도 철학자들에게 이는 곧 브라만이었다. 이름은 다 다 르지만 개념은 동일하다. 서둘러 직장에 출근하고, 넷플릭스를 몰아서 보고, 이 그림자의 세계에서 각자 자기 할 일을 하는 동안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존재의 차원

쇼펜하우어는 이 세계 너머에 있는 세계 개념을 지지했지만 여기에 흥미롭고 (당연히) 우울한 자신만의 생각을 덧붙였다. 칸트와 달리 쇼펜하우어는 실재가 단일하고 통일된 독립체이며, 비록 간접적일지라도 접근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5 쇼펜하우어처럼 듣는 법, p. 155

 

 

 

괴테와 교제했을 때를 제외하면 진정한 친구도 없었다. 하지만 아트만(산스크리트어로 자아라는 뜻이다)이라는 이름의 푸들만 사랑했다. 쇼펜하우어는 사람에겐 절대로 내보이지 못했던 따뜻함을 아트만 앞에서만큼은 드러내 보였다. 그는 아트만이 버릇없이 굴 때마다 "이봐요, 선생님'이라는 말로 다정하게 꾸짖곤 했다.

쇼펜하우어는 다른 동물인 고슴도치의 도움을 받아 인간관계를 설명한다. 추운 겨울날 한 무리의 고슴도치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고슴도치들은 얼어 죽지 않으려고 서로 가까이 붙어 서서 옆 친구의 체온으로 몸을 덥힌다. 하지만 너무 가까이 붙으면 가시에 찔리고 만다. 쇼펜하우어는 고슴도치들이 "두 악마 사이를 오가며 붙고 떨어지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서로를 견딜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거리"를 발견한다고 말한다.

오늘날 고슴도치의 딜레마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딜레마는 우리 인간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필요로 하지만 타인은 우리를 해칠 수 있다. 관계는 끊임없는 궤도 수정을 요하며, 매우 노련한 조종사조차 가끔씩 가시에 찔린다.

슈테판 로퍼가 커다란 상자를 열고 녹슨 포크와 스푼을 꺼낸다. 쇼펜하우어는 외식을 할 때마다 술잔과 함께 이 포크와 스푼을 가지고 다녔다. 그는 레스토랑의 위생 상태는 물론 그 밖의 웬 만한 것들도 다 불신했다. 그는 이발소에 가지 않았다. 

p. 162

 

 

 

 상처의 크기와 형태가 다를 뿐이다. 쇼펜하우어는 쉽게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지만(한전기 작가는 그를 '고약한 작품"이라 칭한다) 쉽게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다. 예술과 음악의 애호가였던 쇼펜하우어는 가장 심오하고도 아름다운 미학 이론을 전개했고 여러 예술가와 작가에게 수세대에 걸쳐 영향을 주었다. 톨스토이와 바그너는 자기 서재에 쇼펜하우어의 초상화를 걸어두었다. 아르헨티나 작가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쇼펜하우어를 원전으로 읽으려고 독일어를 배웠다. 여러 코미디언도 쇼펜하우어를 사랑한다. 이로써 유머 뒤에는 암울함이 도사린다는 의혹이 사실임이 드러난 셈이다.

다른 철학자들이 저 바깥세상을 설명하려 시도한 것과 달리 쇼펜하우어는 내면세계에 더 관심이 많았다.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하면 이 세계도 알 수 없다. 이 사실은 내게 믿을 수 없을 만큼 명백하다. 왜 그토록 많은 철학자가, 다른 방면으로는 똑똑한 작자들이 이 사실을 놓치는 걸까? 내 생각에 그 이유 중 하나는 외부를 살피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환한 불빛 아래서 자기 열쇠를 찾는 술주정뱅이나 마찬가지다.

"여기서 열쇠를 잃어버리셨소?" 지나가던 사람이 묻는다. "아니오. 열쇠는 저쪽에서 잃어버렸소." 술주정뱅이가 저쪽 어두운 주차장을 가리키며 말한다.

"그런데 왜 여기서 열쇠를 찾고 있는 거요?"

"여기가 환하니까요."

쇼펜하우어는 달랐다. 그는 가장 어두운 곳을 살폈다. 

5 쇼펜하우어처럼 듣는 법, p. 175

 

 

 

그는 소음에 대한 내성이 그 사람의 지능과 정확히 반비례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어느 집 마당에서 아무도 조치를 취하지 않은 채로 개가 몇 시간이나 짖는 소리를 들으면 그 집에 사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된다."

나도 쇼펜하우어의 생각에 동의한다. 내 생각의 열차는 약해 빠져서 쉽게 철로를 이탈한다. 심지어 시계가 째깍거리는 소리도 내 집중력을 깨부술 수 있다. 바이오 아이오닉 파워라이트라는 이름을 가진 내 아내의 헤어드라이어, 그 작고 사악한 악마 새끼는 하루 온종일을 방해한다. 낙엽 날리는 청소기 얘기는 아예 꺼내지도 말자.

최근 연구에서 소음 공해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신체 및 정신 건강에 서서히 악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서던 메디컬 저널Southern Medical Journal>에 실린 한 연구에 따르면 소음 공해는 "불안, 스트레스, 신경과민, 구역질, 두통, 정서 불안, 호전성, 성기능 장애, 기분 변화, 인간관계에서의 갈등 증가, 노이로 제, 히스테리, 정신증"으로 이어질 수 있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이륙하고 착륙하는 비행기 소음이, 심지어 푹 잠들어 있을 때에도, 혈압을 치솟게 하고 심장을 뛰게 하며 스트레스 호르몬을 분비시킨다는 사실이 발견됐다."

쇼펜하우어가 이 연구들을 봤다면 자기 생각이 옳았음을 알게 되었겠지만 그리 기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5. 쇼펜하우어처럼 듣는 법, p. 177

 

 

 

사무실로 돌아와서 우연히 갖게 된 다른 머그컵 다섯 개와 물병 여덟 개, 단백질셰이크 용기 하나, 헤드램프 두 개 옆에 컵을 올려놨어요. 이대로만 간다면 일찍 은퇴해서 선물 가게를 차릴 수 있겠어요."

의 태도는 에피쿠로스 철학 그 자체다. 좋은 것이 주어지면 즐긴다. 하지만 일부러 찾아 나서지는 않는다. 좋은 것은 좋은 것이 나타나길 기대하지 않는 사람 앞에 나타난다. 롭은 이런 값싼 물건을 찾아다니는데 에너지를 쓰지 않는다. 그 물건들은 그저 우연히 생긴다. 그리고 그렇게 물건이 생기면 롭은 감사해한다.

에피쿠로스 사망 이후 몇 세기 동안 에피쿠로스 추종자들이 만든 정원이 지중해 너머로 퍼져나갔다. 다른 학파와 달리 에피쿠로스 학파는 헌신적인 추종자를 대규모로 끌어 모았다. 정원으로 들어오는 사람은 많았고 도망가는 사람은 적었다.

정원의 돌벽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돌을 던졌다. 스토아학파의 스승이었던 에픽테토스는 에피쿠로스가 상스러운 말을 하는 개자식"이라고 했다. 쾌락을 원칙으로 삼은 에피쿠로스 학파의 정신은 다른 철학 학파를 위협했고, 특히 새로 인기를 끌던 종교인 기독교를 위협했다. 결국 승리한 것은 교회였다. 수세기 동안 에피쿠로스 학파는 모습을 싹 감췄다.

p. 204

 

 

 

감자튀김을 먹고 싶은 욕망이 있으면 먼저 고통부터 생겨나요. 지금 감자튀김이 없으니까요. 갈망이고, 추구이고 가려움이죠. 그러니까 그건 가려운 곳을 긁는 데서 오는 쾌락이라는 거죠?" "맞아요. 하지만 그건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언제나 다른 고통이 굵어야 할 가려운 곳이 있을 테니까요."

가려움과 긁기가 끝없이 반복된다니, 지독하게 끔찍해 보인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가려워지는 느낌이다. 우리는 캐비어를 맛보고 즐거워한다. 여기까지는 좋다. 하지만 우리는 곧 다시 캐비어를 갈망하게 된다. 이게 문제가 된다. 캐비어는 갈망이 우리를 괴롭히는 만큼 맛있을 수 없다. 쾌락으로 시작된 것이 고통으로 끝난다. 유일한 해결책은 욕망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의 대화는 와인 쪽으로 흘러간다. 나는 나파 거주민인 톰이 거들먹거리며 와인에 대해 아는 척하는 속물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틀렸다. 나파 거주민이자 아마추어 포도주 전문가, "유리잔 안의 광휘"라는 이름을 가진 케이터링 회사의 주주인 톰 머들은 투벅척 Two-Buck Chuck을 마신다. 찰스 쇼 Charles Shaw 라는 브랜드에서 한 병당 2달러에 판매하는 아주 잘나가는 와인이다.

"진짜예요? 그렇게 저렴한 와인을 마신다고요?"

"편하게 마시는 테이블 와인이에요. 맛도 나쁘지 않고요. 마시 고 삼키면 사라져 버릴 것에 35달러를 쓰는 건 멍청한 짓이에요.

6 에피쿠로스 처럼 즐기는 법, p. 211

 

 

 

충분히 좋은 자기 앞에 나타난 모든 것에 깊이 감사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완벽함도 좋음의 적이지만, 좋음도 충분히 좋음의 적이다. 충분히 오랜 시간 동안 충분히 좋음의 신념을 따르면 놀라운 일이 생긴다. 마치 뱀이 허물을 벗듯 '충분히'가 떨어져 나가고, 그저 좋음만이 남는다.

에피쿠로스는 우정이 인생의 커다란 쾌락 중 하나라고 보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축복받은 삶에 이바지하는 여러 가지 중에 우정만큼 중요하고 유익한 것은 없다." 그리고 지금의 톰과 나처럼 친구는 식사의 필수 요소라고 덧붙였다. 친구 없이 먹고 마시는 것은 "사자와 늑대처럼 게걸스레 먹는 것과 같다.

이러한 우정에의 강조는 쾌락을 가장 우선시하는 그의 원칙에 반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진정한 우정은 자신의 쾌락보다 친구의 쾌락을 더 우선시하는 것이다. 그건 쾌락의 미적분학을 내 던지는 일 아닌가? 에피쿠로스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전체적으로 보면 우정은 고통을 완화하고 쾌락을 증진한다. 우정과 관련된 고통은 우정이 주는 쾌락으로 상쇄되고도 남는다.

톰과 내가 지금 에피쿠로스적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충분히 좋은 와인을 곁들인 소박한 식사, 우정이라는 사치 그리고 시간 고통 없음, 즉 아타락시아에서 오는 쾌락, 나는 내 기분 좋은 마음 상태를 알아채지만 너무 깊이 생각하지는 않는다. 

6 에피쿠로스처럼 즐기는 법, p. 213 

 

 

 

각하지 않는 상태를 최대한 오래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려면 인내심이 필요하다. 베유가 살던 시대에는 심지어 오늘날에는 더욱더 드문 것이다.

배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소하다 여길 문제에 크나큰 관심을 기울였다. 예를 들면 손 글씨 같은 것. 베유의 친구이자 전기 작가였던 시몬 페트르망에 따르면 고등학생 때 베유는 자신의 "엉성하고 경망스러우며 아무렇게나 휘갈겨 쓴 손 글씨를 바 뭐야겠다고 결정했다. 그리고 부어오르는 손의 통증과 두통에도 불구하고 지칠 줄 모르고 주의 깊게 노력했다. 휘갈겨 쓰던 베유의 손 글씨는 "점점 경직이 풀리고 유연해졌으며, 마침내 말년에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글씨를 얻게 되었다.

인내심은 좋은 덕목이다. 최근 연구가 보여주듯이 인내심은 자신에게도 좋다. 여러 연구가 인내심 있는 사람이 안달 내는 사람보다 더 행복하고 건강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인내심 있는 사람은 더 이성적으로 행동할 확률이 높다. 이들은 대처 기술도 더 뛰어나다.

하지만 인내는 그리 즐거운 느낌을 풍기지 않는다. 인내심을 뜻하는 영어 단어 'patience'는 고통과 끈기, 참을성을 뜻하는 라틴어 파티엔스 patiens에서 나왔다. 인내라는 뜻의 히브리어 사블라 누트 salanut 는 아주 약간 더 명랑하다. 이 단어는 인내와 관용이라는 뜻을 동시에 갖는다. 무엇에 대한 관용일까? 물론 고통에 대한 관용이지만, 부족한 자신에 대한 관용이기도 하다. 


7 시몬 베유처럼 관심을 기울이는 법, 235

 

 

 

백은 개인 시간에 짬을 내어 전기 배선도를 본뜬 새로운 지도를 만들었다. 백의 지도는 현실보다 더 깔끔하고 단순했다. 역간 의 거리가 동일하고 노선과 노선이 45도나 90도로만 만났기 때문이었다. 이 지도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오늘날까지도 큰 변화 없이 이용되고 있다. 백이 이렇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그는 엔지니어가 아닌 승객의 입장에서 사고했다.

매 역마다 열차는 승객을 내뿜고 승객을 들이쉰다.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쾌활한 영국 발음으로 녹음된 방송이 흘러나온다. 열차와 플랫폼 사이 간격 - 조심하세요." 지하철 타기는 관심 기울이는 연습을 하는 훌륭한 방법이다. 지하철 안에는 지켜볼 사람들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눈을 크게 뜬 관광객들 눈을 가늘게 뜬 은행가들, 눈이 먼 걸인들 공기는 언어의 조각들로 가득하다. 프랑스어의 동명사, 이탈리아어의 분사, 미국식 영 어의 감탄사. 많은 것들이 우리의 관심을 두고 다툰다고 말할 수 도 있겠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이건 경쟁이라기보다는 거친 협업에 가깝다.

나는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듯 내 주의를 붙잡아 바로 내 건너편에 앉아 있는 여성에게 비춘다. 여성은 꽃무늬 바지를 입고 있으며 무릎에 펼쳐놓은 타블로이드 신문의 십자말풀이를 푸는데 맹렬히 집중한 듯 보인다. 리드미컬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지휘자의 지휘봉처럼, 또는 감자튀김처럼 펜을 흔든다. 여성은 정신을 한 곳에 쏟고 있다. 하지만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가? 


7 시몬 베유처럼 관심을 기울이는 법, p. 241

 

 

 

간디는 자서전에서 돈을 훔치고 담배를 피우고 육식을 한 것을 아버지께 고백하는 편지를 썼던 때를 회상한다. 간디는 손을 덜덜 떨면서 아버지께 쪽지를 건넸다. 아버지 간디는 자세를 바로 하고 쪽지를 읽었고, "진주 같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려 종이를 적셨다. 간디는 말한다. "그 진주알 같은 사랑의 눈물이 내 마음을 깨끗하게 정화했고 내 죄를 씻어주었다. 그런 사랑이 어떤 것인지는 오직 경험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그런 사랑은 흔치 않으며, 자기 내면을 향하는 일도 드물다. 자기 자신에게 가혹한 사람으로서, 나는 간디 또한 때때로 한바탕 찾아오는 자기혐오와 씨름했다는 사실을 알고 희망을 얻었다. 가끔 간디는 화를 폭발시키면서 자기 가슴을 세게 때리기도 했다. 하지만 간디는 말년을 향해 가면서 이런 자기 학대에서 벗어났고, 친구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그 누구에게도 성질을 내지 말 것.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국과 싸우지 않는다. 우리의 싸움은 더 평범하지만, 그렇다고 당사자에게 덜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다행히도 간디의 비폭력 저항 철학은 부부간의 말다툼과 사무실에서의 언쟁, 정치적 소란에도 적용된다.

간디의 관점에서 작은 논쟁 하나를 살펴보자. 당신과 파트너는 중요한 일을 기념하기 위해 외식을 할 예정이다. 

8 간디처럼 싸우는 법, p. 293

 

 

 

당신은 인도 요리를 파트너는 이탈리아 요리를 먹고 싶어 한다. 당신은 인도 요리가 더 우월하다고 확신하지만, 파트너는 당신만큼이나 이탈리아 요리가 더 낫다고 확신한다. 갈등이 발생한다. 어떻게 해야 하 는가?

"가장 빠른 해결책은 '물리력으로 승리를 획득'하는 것이다. 파트너를 마대자루에 집어넣고 봄베이 드림스 레스토랑으로 끌고 가서 강제로 식사를 시킬 수 있다. 이 방식에는 여러 단점이 있으므로, 그냥 인도 요리를 먹자고 계속 우길 수도 있다. 대화 끝. 더 이상의 논의는 생략한다. 파트너가 동의한다고 해보자. 당신은 승리했다. 안 그런가?

안 그렇다. 저녁 식사 자리의 불편한 평온함은 환상일 뿐이다. 강제로 복종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끝난 것처럼 보이는 논쟁이 어쩌면 그저 다른 갈등 상황의 시작일 수도 있다." <간디의 방식: 갈등 해결 핸드북》의 저자 마크 위르겐스마 이어는 말한다. 또한 당신은 “베일을 쓴 폭력"에 기댐으로써 파트 너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해치게 된다.

반대로, 파트너에게 '양보'해서 이탈리아 요리를 먹는 데 동의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은 내내 뚱한 채로 저녁을 먹는다. 이건 그저 다른 형태의 폭력일 뿐이다. 심지어 더 나쁘다. 부정직하고 "깨끗하지 못한" 폭력이기 때문이다. 아무 원칙도 없는 척하느니 자기 원칙을 두고 싸우는 편이 낫다

다른 요리를 제안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일본 요리. 하지만 그 건 아무도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는 뜻이며,

p. 294

 

 

 

여자는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서서 휘청거린다. 돈도, 그 어떤 종류의 친절함도 구하지 않는다. 그 부분이 가장 최악이다. 이 애매모호함. 나는 깜짝 놀라고 측은한 마음을 느끼지만 뭘 어떻게 해 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친절은 힘든 것이다. 우리는 돕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른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낫다고 우리는 스스로에게 말한다. 다른 승객들도 뉴욕만의 미묘한 방식으로 불편해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여자가 지나갈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선다. 어떤 사람은 더욱더 빤히 앞을 쳐다본다. 나는 공자의 책에 얼굴을 파묻는다.

여자가 열차 맨 끝으로 간다. 더 이상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목소리는 들린다. "옛날에는 내 얼굴도 앳되었어요."

그러다 여자가 사라진다. 모두가 참고 있던 숨을 내쉰다. 또는, 내가 그렇게 상상한다. 고개를 들고 방금 일어난 일을 생각해본 다. 이런 고통을 만나면 무엇을 해야 하나? 물론 나는 여자를 도와줄 수 있었다. 하지만 말했듯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 랐다. 열차 안의 그 누구도 몰랐다. 그럴 때 친절은 어떻게 전염될 수 있는가? 누군가는 시작을 해야 한다

절은 힘든 것이다. 친절에는 감정이입이 필요하지만 그것만 으로는 충분치 않다. 유교 의례가 필요하다. 결혼과 졸업, 죽음처 럼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 우리가 의식을 치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러한 사건들은 너무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켜서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을 수 있다. 의례는 우리를 하나로 모 아준다. 의례는 우리의 감정을 담을 그릇을 제공한다. 

p. 324

 

 

 

점원에게 감사하며 조심스럽게 도시락 뚜껑을 연다. 점심을 먹은 후 공책을 꺼내 대문자로 쓴다. "일본 탄환열차: 목록"좋은 시작이다. 하지만 너무 광범위하다. 더 구체적일 필요가 있다. 더 작게 들어가야 한다. 일본 탄환열차에서 나를 즐겁게 한 것들. 더 낫다.

1. 승무원이 복도를 미끄러지듯 걸어왔다가 몸을 회전하고, 숭객을 만나자 인사하는 모습. 

2. 하이힐을 신고 복도를 걸어오던 젊은 여성이 아주 살짝 휘청했다가 발레리나처럼 우아하게 중심을 잡는 모습. 

3. 고통스럽지 않은 기분 좋은 따뜻함을 내뿜는 단 단하고 두꺼운 스티로폼 커피 컵의 감촉. 

4. 컵에 영어로 "Aroma Express Café"라고 쓰여 있고, "Aroma"의 "0"가 커피 원두 모양으 로 그려져 있는 것. 

5. 도쿄에 가까워질수록 풍경이 점점 도시로 바뀌는데, 그 변화가 점진적이어서 도시가 급작스럽게 나타난다 기보다는 서서히 드러나는 모습. 

6. 얼룩 하나 없이 깨끗한 화장 실.

7. 기대하지 않았는데 언뜻언뜻 보이는 바다. 

8. 반대 방향 기 차가 정면충돌을 걱정할 새도 없이 빠른 속도로 지나가면서 내는 소음. 

9. 창문 위로 작은 개울과 지류들을 만들면서 마치 자기의 지가 있는 것처럼 민첩하게 움직이는 빗방울들.

일본 탄환열차에서 나를 낙심하게 한 것들. 1. 후지산을 발견하고 순간 흥분했는데 사실은 후지산이 아니라 특별할 것 없는 다른 산이라는 걸 깨닫고 찌르는 듯한 실망감을 느낀 것. 2. 옆자리가 빈 줄 알았는데 휴가 나온 스모 선수처럼 보이는 남자가 출발을 몇 분 남기고 옆자리에 앉았던 것. 3. 낡은 아쿠아블루색 시트. 4.

10 세이 쇼나곤 처럼 작은 것에 감사하는 법, p. 353

 

 

 

이 자그마한 기차 마을을 디자인한 사람에게는 그 어떤 요소도 너무 작거나 너무 사소하지 않다. 자그마한 가게 앞에 달린 작은 간판도, 작은 주차장에 있는 작은 자동차도, 작은 도로를 따라 심어진 작은 나무들도 결코 하찮지 않다. 바 자체도 작다. 한가운 데에 있는 기차를 둘러싸고 예닐곱 개의 의자가 놓여 있다. 방이 아니라 구석이다.

준코는 맥주를, 나는 산토리 위스키를 주문한다. 내 위스키는 차분한 우아함을 내뿜는 견고한 유리잔에 담겨 나온다. 웃는 얼 굴의 바텐더는 다비드상을 조각하는 미켈란젤로처럼 얼음을 정교하게 조각해 놓았다.

바텐더가 자기 일을 하는 동안 그에게 기차에 관해 (그밖에 물어볼 게 뭐가 있겠는가?) 물었다. 바텐더는 어렸을 때 자기 방 창문을 로 열차가 지나가는 모습을 지켜봤는데, 그 열차가 평탄치 않았던 어린 시절에 자기 옆을 지켜준 든든한 존재였다고 말한다. 대 부분의 아이들은 나이가 들면서 기차에 흥미를 잃는다. 바텐더는 그렇지 않았다. 불행한 회사원 시절에 바텐더는 시간이 나면 기차를 타고 아무데로 향하곤 했다. "기차를 타면 차분하고 행복해져요." 그가 말한다. "기차에서는 인생에 대해 더 명확하게 생각할 수 있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신다. 제대로 만든 유리잔의 단단함과 그럭저럭 괜찮은 위스키의 맛, 은은하게 달콤 한 아로마에서 기쁨을 느낀다. 그러는 내내 눈앞에 펼쳐진 자그 마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바라본다.

10 세이 쇼나콘처럼 작은 것에 감사하는 법, p. 355

 

 


영원회귀는 우리의 환상을 벗겨내고 우리의 성취가 거짓임을 드러낸다. 큰 거래를 성사시키고, 책을 쓰고, 승진을 했는가? 축하한다. 하지만 이제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몇 번이고 처음부터 다시. 영원히 우리는 모두 시시포스다. 신이 내린 형벌로 영원히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 렸다가 그 바위가 다시 굴러 내려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가 여운 그리스 신화 속 인물, 뉴저지 몽클레어의 발코니와 친구 제 니퍼의 질문을 다시 생각해본다. “성공은 어떤 모습이야?" 나는 니체가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할지 안다. 성공의 모습은 자기 운명을 철저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성공의 모습은 시시포스의 행 복이다.'

다른 많은 철학자들처럼 니체도 지혜를 직접 실천하는 것보 다 널리 알리는 데 더 능했다. 니체는 “제때 죽어라"라고 말했지만 자신은 그러지 못했다. 니체는 너무 일찍, 그리고 너무 늦게 죽었다.

1889년 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 니체는 한 마부가 말에게 채찍을 휘두르는 것을 보았다. 니체는 말에게 달려가 말을 끌어안고 그대로 쓰러졌다. 의식을 잃기 전 니체가 마지막으로 한 행동은 다른 존재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시도였다. 의식을 되찾았을 때

p. 386

 

 


니체 버전의 영원회귀에는 그런 해피엔딩이 없다. 나는 한 치의 벗어남 없이 똑같은 길을 걷고 또 걸을 것이다. 똑같은 벤치에 앉아 똑같은 나비를 만날 것이고, 니체의 바위를 찾아 헤매지만 결국 찾지는 못할 것이다. 매번 영원히..

이 끝없는 실패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니체는 묻는다. 아니,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기꺼이 끌어안을 수 있는가? 사랑할 수 있겠는가?

바위를 찾지 못한 것에 대해서라면, 물론 그럴 수 있죠. 프리드리히 하지만 인생에서 더 실망스러웠던 일, 예를 들면 망친 면접과 서투른 부모 노릇, 변덕스러운 친구들에 관해서라면, 나도 잘 모르겠다. 체념할 수는 있다. 어쩌면 받아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랑하라고? 그건 지나친 요구다. 아직 거기까진 가지 못했다. 어쩌면 온 우주와 내가 얼마나 많이 되풀이되든 상관없이 거기까진 영원히 못 갈 수도 있다.

<사랑의 블랙홀>이 코미디인 이유가 있다. 똑같은 삶을 똑같은 방식으로 영원히 반복해서 살아야 한다면, 웃는 것 외에 달리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더 나은 것이 있다. 춤추는 것. 춤춰야 할 이유를 기다리지 말 것. 그냥 춤출 것. 마치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내키는 대로 흥겹게 춤을 출 것. 삶이 행복해도 춤을 추고, 삶이 괴로워도 춤을 출 것. 그리고 시간이 다 되어 춤이 끝나면 이렇게 말할 것. 아니, 외칠 것. 다카포! 처음부터 다시 한번!

11 니체처럼 후회하지 않는 법, p. 389

 

 

 

심리학자들은 지혜의 정의에 대해 수십 년간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1980년대에 일련의 연구자들이 최종 합의를 보기 위해 베를린에 있는 막스플랑크 인간발달과 교육 연구소에 모였다. 이 베를린 지혜 프로젝트는 지혜를 규정하는 다섯 가지 기준을 제시했다. 사실적 지식, 절차적 지식, 인생 전체에 걸친 맥락주의 가치 상대주의, 불확실성을 관리하는 능력이 그것이다.

나는 그중에서도 가장 마지막 기준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삶의 불확실성과 혼란을 관리해주겠다고 약속하는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의 시대를 살아간다. 하지만 알고리즘과 인공지능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삶은 그 어느 때 보다도 더 예측 불가능하고 혼란스럽게 느껴진다.

스토아 철학은 이 지점에서 빛을 발한다. 스토아 철학의 핵심 교리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고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여라는 격동의 시기에 더욱 매력을 뽐낸다. 나는 마르쿠스의 책을 읽었기에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철학이 얼마나 많은 것을 요구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즐거운지는 알지 못했다.

어려운 시기의 철학인 스토아철학은 재앙 속에서 태어났다. 기원전 300년경 제논이라는 이름의 페니키아 출신 상인이 배를 타고 아테네의 피라에우스 항구로 향하다 난파되었고, 자색 염료를 실은 귀중한 화물을 전부 잃었다. 

12 에픽테토스처럼 역경에 대처하는 법, p. 399

 

 

 

 난 정말 좋은 항해를 했어." 이 말은 훗날 스토아 학파의 핵심 주제가 된다. 바로 고난을 통해 강해지고 성장할 수 있다는 것. 로마의 정치가이자 스토아 철학자였던 세네카는 이렇게 말했다. "바람에 수없이 시달리지 않은 나무는 땅에 튼튼하게 뿌리박지 못한다. 바람에 흔들려야 땅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고 안정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고난은 덕을 함양할 수 있는 기회다.

스토아 캠프의 첫 번째 날, 스토아 철학에 대한 내 생각이 전부 틀렸음을 깨닫는다. 인정머리 없고 냉정한 스토아 철학의 이미지는 에피쿠로스 학파의 식도락가 이미지만큼이나 사실과 거리가 멀다. 스토아학파는 차가운 사람들이 아니다. 강렬한 감정을 억누르지도, 안으로는 벌벌 떨면서 겉으로만 용감한 표정을 짓지도 않는다. 이들은 모든 감정을 다 내던지지 않는다. 불안, 두려움, 질투, 분노, 그 밖의 다른 '정념'처럼 오직 부정적인 감정만 내 던진다(정념이라는 의미의 pathe는 '감정'과 가장 가까운 고대 그리스어 단이다).

스토아 학파는 기쁨을 모르는 로봇이 아니다. 미스터 스팍도 아니다 (영화 <스타트랙> 속 감정을 절제하는 캐릭터-옮긴이). 윗입술을 꽉 깨물고 삶의 고난을 버텨내는 사람들이 아니다. 성격 나쁜 쇼펜 하우어와는 달리 스토아학파는 우리가 가능한 최선의 세상,


12 에픽테토스처럼 역경에 대처하는 법, p. 401

 

 

 

우리 둘 다 예루살렘에서 저널리스트로 일하고 있었다. 예루살렘에는 다른 어느 곳보다 길고양이가 많다. 털이 뭉치고 상처가 훤히 벌어진 그 꼬질꼬질한 고양이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찢어졌다. 너무 안쓰러웠다. 바로 거기까지가 내 '도움'의 전부였다. 나는 고통스러워함으로써 고양이들의 고통에 대응했다. 마치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고양이를 돕는 한 형태인 것처럼.

캐런은 아니었다. 캐런은 행동에 나섰고, 주인 없는 태비 한 마리와 다리를 저는 오리엔탈 숏헤어 한 마리를 집으로 데려왔다. 밥을 주고 동물병원에도 데려갔다. 그리고 새 주인을 찾아주었다. 캐런은 감정을 느끼는데서 멈추지 않았다.

롭이 한 명 한 명에게 스토아 캠프의 워크북이자 고대 그리스에서 쓰인 얇은 텍스트 하나를 나눠준다. 텍스트라기보다는 팬플릿에 더 가깝다. 총 열여덟 쪽밖에 안 된다. <엔키리디온》, 즉 안내서라는 뜻이다. 로마의 노예였다가 철학자로 변신한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이다. 스토아 사상의 본질을 뽑아낸 정수다.

첫 번째 페이지의 첫 번째 줄에서부터 시작한다. 롭이 소리 내어 읽는다.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달렸고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달려 있지 않다." 너무나도 참인 동시에 너무나도 명백한 문장이다. 당연히 어떤 것들은 우리에게 달렸고 어떤 것들은 그렇지 않다. 내가 이 말을 들으려고 수천 킬로미터를 달려왔던가?

12 에픽테토스처럼 역경에 대처하는 법, p. 403

 

 

 

기운과 슈퍼히어로의 파워가 있지만 그것은 우리의 내면세계만을 제어할 수 있다. 내면세계를 지배하라. 그러면 "천하무적 이 될 것이라고, 스토아 철학은 말한다.

우리는 너무 자주 자신의 행복을 타인의 손에 맡긴다. 고압적인 상사나 변덕스러운 친구, 인스타그램 팔로어 같은 타인의 손에 노예였던 에픽테토스는 이런 고난을 스스로 부여한 속박에 빗댄다. 원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에픽테토스는 모르는 사람에게 자기 몸을 맡기는 상황을 상상해보라고 말한다. 터무니없지 않나? 하지만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매일 마음속에서 하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주권을 타인에게 이양해 그들이 우리의 마음을 지배하게 만든다. 그들을 몰아내야 한다. 지금 당장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보다 스스로를 바꾸는 것이 훨씬 쉽다. 대학 캠퍼스에서 흔히 보이는 트리거 워닝trigger warning(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리는 사전 경고-옮긴이)의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이런 경고문은 대학생들이 충격적일 수 있는 내용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통제할 수 없을 것이라는 가정을 더욱 강화한다. 학생들의 힘을 과소평가한다. 스토아식 방법은 아니다.

키케로는 궁수를 떠올려보라고 말한다. 궁수는 자기 능력이 허락하는 한 가장 훌륭하게 활시위를 당기지만 시위를 놓고 나면 화살의 궤적이 더 이상 자기 손에 달려 있지 않음을 알고 숨을 내 쉰다. 스토아 철학은 이렇게 말한다. "해야 할 일을 하라. 그리고 일어날 일이 일어나게 두라" 

p. 408

 

 

 

우리는 외부의 목표를 내면의 목표로 바꿈으로써 실망의 공격에 대비해 예방접종을 놓을 수 있다. 테니스 경기에서 이기려 하지 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경기를 펼칠 것. 자기 소설이 출간되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대신 자신이 쓸 수 있는 가장 훌륭하고 진실한 소설을 쓸 것. 그 이상도 이하도 바라지 말 것.

벽난로의 불이 뜨거운 재로 변하고 커피는 점점 더 차가워지지만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다. 우리는 스토아 철학에 무릎을 담갔고, 더 깊이 들어갈 준비가 되었다. 에픽테토스의 안내서 속 날카로운 문단들을 하나하나 읽어 나간다. 어떤 문단은 긴 토론을 벌일 만하고, 어떤 문단은 가벼운 끄덕임만으로 충분하다. 그러다 이 문장이 나타난다.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것은 문제 자체가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한 그들의 판단이다." 우리는 침묵 속에서 가만 히 자리에 앉아 심오하면서 동시에 너무나도 명백한 2000년 전의 생각을 받아들인다.

스토아 학파는 우리의 감정이 이성적 사고의 산물이라고 믿지만 그 사고에는 결함이 있다고 본다. 사고방식을 바꿈으로써 자신의 느낌도 바꿀 수 있다. 스토아 철학의 목표는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느끼는 것이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린다는 것을 나도 안다. 우리는 자기감정이 정확하다거나 부 정확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감정은 그냥 감정이다. 


12 에픽테토스처럼 역경에 대처하는 법, p. 409

 

 

 

우리는 발가락을 찧으면 소리를 지른다. 도로가 막히면 욕을 한다. 자연스럽다. 어쨌거나 우리는 결국 인간이다. 이 최초의 충격은 감정이 아니라 당황했을 때 얼굴이 빨개지는 것과 같은 반사 반응이다. 이러한 반응은 우리가 그것에 동의할 때에만 감정이 된다고 스토아 학파는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반응에 동의함으로써 반사 반응을 정념의 지위에 올려놓는다.

이 모든 과정은 순식간에 눈 깜짝할 사이에 발생하지만 이 중 그 무엇도 우리의 허락 없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이 부정적인 최초의 정념을 존중하고 증폭시키기를 선택할 때마다 우리는 불행 하기를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스토아 철학은 묻는다 도대체 왜 그러고 싶어 하는가?

인상에서 동의로 이어지는 끈을 잘라내야만 한다. 바로 이 지 점에서 소크라테스식 멈춤(나는 이를 "위대한 멈춤"이라 부른다)이 도움이 된다. 에픽테토스는 이렇게 말한다. "선명한 인상에 빠져 들지 말고 이렇게 말하라. '인상이여, 잠시 기다리게. 네가 무엇인지, 무엇을 나타내는지 살펴보게 해 주게. 너를 따져보게 해주게." 고난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 자동으로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내리는 선택임을 깨달아야만 더 나은 선택을 내리기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꽉 막힌 도로에 갇히거나 발가락을 찧으면 다들 화가 나지 않나? 롭은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12 에픽테토스처럼 역경에 대처하는 법, p. 411

 

 

 

스토아 진료실에서 놔주는 또 다른 백신은 프리메디타치오 말로 룸premeditatio malorum, 즉 '최악의 상황에 대한 예상'이다. 세네카는 인생이라는 화살이 어디로 날아갈지를 예상해보라고 말한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하고 "유배, 고문, 전쟁, 난파 사고를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하는 것이다.

스토아 철학은 미래의 고난을 상상하는 것은 미래의 고난에 대해 걱정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걱정은 모호하고 애매한 것이다. 하지만 고난을 예상하는 것은 구체적인 행위이며, 더 구체적일수록 좋다. '나는 재정난을 겪는 모습을 상상한다'보다 '집과 차, 그동안 모은 가방 전부를 잃고 다시 어머니 집에서 살게 되는 모습을 상상한다'가 더 좋다. 에픽테토스는 큰 도움이 되는 또 다른 제안을 한다. 네가 말하고, 듣고, 걷고, 숨 쉬고, 삼키는 능력을 잃었다고 상상해보라.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함으로써 우리는 미래의 고난이 가진 영향력을 빼앗고 지금 가진 것에 더욱 감사할 수 있다. 예상한 대로 대재앙이 닥쳤을 때 스토아주의자들은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열리거나 조타수가 맞바람을 만날 때처럼 태연하다고, 에픽테토스는 말한다. 예상된 고난은 힘을 잃는다. 구체적으로 표현된 두려움은 그 크기가 줄어든다. 최소한 스토아 철학은 그렇다고 말한다.

우리 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스토아 철학의 최악의 상황에 대한 예상 개념을 설명해주자 딸아이는 그것이 "멍청한 짓"이 며 니체의 영원회귀 개념보다도 더 멍청하다고 분명히 말한다.

12 에픽테토스처럼 역경에 대처하는 법, p. 417

 

 

 

정해진 사실이다. 하지만 이 원통들이 여기저기 부딪치며 힘들게 굴러갈지 부드럽게 굴러갈지는 원통에 달려 있다. 이 원통들은 매끈하게 다듬은 완벽한 형태의 원통인가? 아니면 거칠고 올퉁불퉁한 원통인가? 즉 이 원통들은 도덕적인 원통인가? 언덕이나 중력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우리가 어떤 종류의 원통이 될 것인가는 통제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

내 침대가 흔들린다. 격렬하게 잠에서 덜 깬 상태로 생각한다. 지진이다! 미리 예상치 못했으나 예상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하는 그런 고난, 그런데 지진이 아니다. 진동이 너무 규칙적이다. 이 건 사람이 만들어낸 진동이다.

"자연에 순응하는 삶을 살 시간입니다." 어느 목소리가 말한다. 눈을 뜨고 힐끗 시계를 본다. 아침 5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아 맞다. 마르쿠스. 마르쿠스는 새벽에 일어나 별을 보고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삶의 아름다움을 곱씹어라. 별을 관찰하라. 별과 함께 움직이는 스스로를 보라." 나는 마르쿠스가 새벽에 일어나지도 별과 함께 달리지도 않았을 거라고 확신하지만 좁은 이 철학자이자 황제의 말을 믿고 해가 떠오르기 전에 일어나는 것이 우리 스토아학파

12 에픽테토스처럼 역경에 대처하는 법, p. 421

 

 

 

나는 늙지 않았다.

나의 자기기만 능력은 수염 몇 가닥이 처음으로 하얗게 셌을 때 생긴 것이 아니다.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가 말했듯이 우리가 노화 탓으로 돌리는 많은 결점은 사실 인성의 문제다. 노화는 새로운 성격 특성을 만들어낸다기보다는 기존의 특성을 더욱 증폭한다. 우리는 나이 들수록 더 강렬한 형태의 자기 자신이 된다. 이러한 변화는 보통 긍정적이지 않다. 돈 쓰는 데 신중한 청년은 늘 투덜대는 늙은 수전노가 된다. 감탄할 만큼 의지가 강한 젊은 여성은 짜증 날 만큼 고집 센 할머니가 된다. 이런 성격의 강화는 늘 부정적인 쪽으로만 흘러가야 하는 걸까? 나이 들면서 그 궤도의 방향을 꺾을 수는 없는 걸까? 더 나은 모습의 나이 든 내가 될 수는 없을까?

대부분의 철학자는 기이할 만큼 노년에 침묵한다. 내가 기이하다고 말한 것은 나이 듦이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수많은 철학자들이 끝까지 생산적인 삶을 살며 장수를 누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플라톤은 여든에 죽을 때에도 여전히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이소크라테스는 아흔아홉까지 살았고 아흔넷에 자신의 가장 유명한 작품을 썼다. 고르기아스는 두 사람을 한참 어린애로 보이게 하는데, 그는 백일곱 살까 지 살았고 죽는 날까지 일에 매진했다.

13 보부아르처럼 늙어가는 법, p. 439

 

 

 

"나이는 그 무엇의 원인도 아니다."

고대 그리스에는 시간을 의미하는 단어가 두 개 있었다. 바로 크로노스 chronos와 카이로스 kairos. 크로노스는 일반적인 시간이다. 시계 속의 분, 달력 속의 달이다. 카이로스는 딱 맞는 적절한 때를 의미한다. 무르익은 기회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카이로스를 의미하는 것이다.

지금이 아빠와 딸이 함께 여행을 떠나기 적절한 때로 보였다. 이 제 내 딸은 더 이상 내 농담을 재미있다고 여기지 않으며(본인은 한 번도 내 농담이 재미있었던 적 없다고 주장한다) 더 이상 나와 포옹하지도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대화를 나눈다. 이 불확실한 세계에서 우리의 대화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누가 알겠는가?

우리 아이들은 수목관리사가 나무의 나이를 잴 때 확인하는 나이테와 같다. 시간이 흘렀음을 보여주는 경험적 증거다. 아이들은 자라고 변화하며, 우리는 아이들만큼 명백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우리 또한 변하고 있음을 안다. 나이든 아빠인 나에게 나이나 이테는 더욱 중요하다. 나는 점점 더 굵어지는 아이들의 나이테를 그 어느 때보다 더 통렬하게 감지한다. 나는 기쁨을 뒤로 미루고 싶은 유혹에 저항한다. 파리에 가면 왜 안돼? 지금, 청소년기라는 급류가 아이를 휩쓸기 전에 파리에 가면 왜 안 돼? 더 확실 한 건 나와 달리 소나가 프랑스어를 할 줄 안다는 것이다. 

13 보부아르처럼 늙어가는 법, p. 441

 

 

 

우리는 봄에 어울리지 않는 차가운 공기에 겉옷을 여미며 센 강가를 걷는다.

"아빠." 소냐가 말한다. "나 질문 있어."

질문! 모든 철학의 씨앗 궁금함의 뿌리. 어쩌면 소나는 세상이 전부 환상일 뿐인지, 아니면 진정성 없는 시대에 어떻게 하면 진정성 있는 삶을 살 수 있을지 궁금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칸트의 정언명령(고결한 사람은 상황이나 동기와 상관없이 윤리적으로 행동한다는 개념)이 소냐의 흥미를 끌었을지도. 질문이 뭐든 간에 나는 무척 기쁘고, 아버지로서 지혜를 전해줄 작정이다

"그래, 소나야 질문이 뭔데?"

"언제부터 머리가 벗겨지기 시작했어?"

"음, 스물네 살 때쯤인 것 같은데."

"왜 그냥 다 밀어버리지 않았어?"

"희망을 놓지 못한 것 같아."

"다 부질없다는 거 알잖아, 아빠."

"그래, 그렇지."

흠, 플라톤의 《대화》과는 사뭇 다른 대화로군. 하지만 이게 시작이겠지.

계속 걸으면서 내가 먼저 나선다. 나는 실존주의에 대해 아빠 스플레인 (남자man와 설명하다 explain 를 합친 단어로 상대가 원치 않는 설명을 남자가 구구절절 늘어놓는다는 뜻의 맨스플레인에서 맨 아빠로 바꾼 것옮긴이)을 늘어놓는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실존주의는 실 존에 초점을 맞춘 철학이며,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철학의 본래

p. 444

 

 

 

"사실성? 진심? 시몬 드 보부아르라는 사람 너무 과대평가되어 있네. 그럼 셰익스피어는?"

"셰익스피어가 왜?"

"셰익스피어는 새 단어를 엄청나게 많이 발명했다고. '눈알eye tall'이나 끝내준다 awesome' 같은 단어들 말이야. 셰익스피어가 없었다면 '자식 눈알이 끝내주는데' 같은 말도 못 했을걸 한번 생각해보란 말이야."

"일리가 있네."

"맞지? 내가 차세대 시몬 드 보부아르가 될 수도 있는 거야."

"그럴 수 있지. 그런데 그러려면 철학 용어가 있어야 해. 진정 한 철학자들은 다 자기만의 철학 용어가 있거든. 어디 보자. '끝내줌성'은 어때?"

"그게 무슨 뜻인데?"

"음, 끝내주는 상태를 말하는 거야. 모두들 약간의 끝내주는 면은 있다는 개념이지."

"그럼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끝내주는 점이 더 많아?"

"아니, 그건 아냐.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자신의 끝내주는 면을 더 잘 알아. 자신의 끝내주는 점 저장소에 가닿는 것, 그게 바로 끝내줌성이야."

소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눈알도 굴리지 않는다. 극찬이다.

걷는 동안 햇빛이 구름 사이를 뚫고 나온다. 그때 방금 우리가 철학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철학을 읽은 것도 공부한 것도 아닌

13 보부아르처럼 늙어가는 법, p. 447

 

 

 

"임신했을 때 나타나는 신체 증상은 다 나타나는데, 임신은 아닌 거야. 그냥 임신했다고 생각만 한거지."

"흥미롭네. 근데 그게 이거랑 무슨-"

"아빠도 상상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아빠는 저 쿨하게 생긴 다리가 무슨 대단한 생각에 대한 은유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보기 엔 저건 그냥 쿨하게 생긴 다리야."

철학자들은 도를 잘 넘는다. 심오한 생각이 너무 하고 싶어서 지적 환영에 빠질 위험을 감수한다. 때때로 희미하게 빛나는 저 빛은 오아시스가 아니라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장난일 뿐이며, 때로는 가장 단순한 설명이 가장 좋은 설명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도 둘씩 짝을 이뤘을 때 철학을 가장 잘 실천할 수 있다고 믿었다. 2인조 방식이다. 지나치게 멀리 가지 않도록 나를 붙잡아줄 다른 사람, 다른 정신이 필요하다. 소냐는 내 소크라테스다. 소냐는 내 가정에 의문을 제기한다. 의심을 심는다.

카페를 사랑한 시몬 드 보부아르는 카페 위에서 태어났다. 보부아르 가족이 살던 아파트에는 발코니가 하나 있었는데, 그 발 코니에서 카페 드 라 로통드Café de la Rotonde가 내려다보였다. 어느 날 부모님이 나가고 집에 안 계실 때 보부아르는 여동생에게 아래층으로 몰래 내려가 카페 크림caté crème(크림 커피-옮긴이)을 마시 자고 했다. 동생 엘렌은 그때를 이렇게 회상한다. "그 엄청난 대담함 그 뻔뻔함이라니!"

13 보부아르처럼 늙어가는 법, p. 449

 

 

 

과거는 벽장 속에서 너무 많은 공간을 차지한다. 노인은 자신의 과거를 버리거나 자선단체에 기부해버리고 싶은 유혹을 느낄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실수다. 과거는 두 가지 측면에서 나름의 가치가 있다. 하나는 치유의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창조적 측면이다.

"추억에는 일종의 마법, 나이에 상관없이 느낄 수 있는 마법이 있다." 보부아르는 말한다. 그 마법의 뿌리는 과거에 있지만 마법 이 꽃을 피우는 것은 현재다. 얼마나 오래 전의 일이든 상관없이 우리가 과거를 경험하는 것은 언제나 현재다.

과거는 현재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보부아르는 풍성한 과거가 없는 현재의 삶을 상상할 수 없었다. "만약 우리가 지나온 세계가 황폐하다면 음침한 사막 말고는 거의 아무것도 볼 수 없을 것이다."

회상은 다시 보기가 아니다. 기억은 선택적이다. 과거는 기억해야 하지만 까먹을 필요도 있는데, 그러지 않으면 낙마 사고 이후 모든 것을 상세히 기억할 수 있게 되어 끔찍하게 고통받는 보르헤스의 소설 속 가여운 주인공 푸네스처럼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실존주의자들은 우리가 어떤 기억을 끄집어낼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좋은 기억을 회상하면 왜 안 되는가? 회상의 기쁨을 표현하는 단어들은 있지만 그와 비슷한 부정적 단어, 예를 들면 죄책감이나 후회를 의미하는 단어는 하나도 없었던 고대 그리스인처럼 살면 왜 안 되는가?

창조적 측면의 회상도 있다. 나는 이러한 회상을 '위대한 정리'

13 보부아르처럼 늙어가는 법, p. 461

 

 

 

세계를 헤쳐 나갈 수 있게 도와준 사람이었다. 또한 실비는 사르트르의 죽음 이후 절망에 빠진 보부아르를 구해준 사람이었다?

보부아르와 실비는 함께 노르웨이 피오르드로 크루즈 여행을 떠났다. 보부아르는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실비는 이렇게 말한다. "보부아르는 마치 모든 것을 잊기로 한 것 같았다. 그녀는 우리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 관계가 삶을 즐길 수 있게 해주었다고, 살아갈 이유를 주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난 너를 위해 살지는 않지만 너 덕분에, 너를 통해서 살아.' 우리 #8 의 관계는 바로 이런 것이었다."

3. 타인의 생각을 신경 쓰지 말 것

나이가 들면 특이하고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생각에 신경 쓰지 않게 되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애초에 다른 사람들은 내 생각을 안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시몬 드 보부아르도 마찬가지였다. 보부아르는 스스로에 대해 더 자신감이 생겼고 자신의 특이한 성격을 더 온전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더 겸손해지기도 했다. 보부아르는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유치한 환상"에서 벗어나는 코페르니쿠스적 순간을 경험했다.

이런 변화는 엄청난 위안이 된다. 우리 한 명 한 명은 태양이 아니라 식물이다. 빛을 흡수하고 반사한다. 빛을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13 보부아르처럼 늙어가는 법, p. 465

 

 

 

소로는 "열정을 잃어버린 사람만큼 늙은 사람은 없다"라고 말했다. 보부아르는 한 번도 열정을 잃지 않았다. 궁금해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전문 평론가처럼 영화와 오페라 이야기를 했다. 꾸준히 신문을 읽었고 권위와 열의를 담아 전 세계에서 일어난 사건을 논했다. 미국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로널드 레이건을 경멸했다(정력적이고 격렬한 혐오만큼 노화를 잘 막아주는 것은 없다). 학자와 기자들을 만났고 호의를 베풀었으며 자신의 트레이드마크 인 빨간색 가운을 입고 친구들을 만났다.

10여 년 전에 관심을 끊었던 일이 다시 보부아르의 흥미를 끌었다. 보부아르는 쉰두 살에 "경탄할 만한 것이 남아 있지 않은 이 세상 구경이 이제는 더 이상 재미있지 않다고 말했지만, 10년 후 여행은 삶에 새로움을 되찾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라고 확신하며 다시 여행길에 나섰다. 그리고 다른 국가에서 보내는 이틀은 익숙한 환경에서 보내는 30일만큼의 가치가 있다는 극작가 유진 이오네스코의 여행 공식에 동의했다. 여행을 통해 보부아르는 계속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다. 보부아르는 여행길에서 평화를 느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영원을 품은 순간을 산다. 나 자 신의 존재도 잊어버린다."

5. 프로젝트를 추구할 것

보부아르는 노년에 수동성이 아닌 열정을 불러일으켜야 하며

13 보부아르처럼 늙어가는 법, p. 467

 

 

 

그저 잠시 머물다 '담배 피우지 마시오' 규칙을 준수하고, 우리가 처음 들어왔을 때의 상태로 방을 비우고, 어쩌면 고객 의견함에 쪽지 한두 개를 넣어놓고 갈 수도 있는 그런 여행자


나는 아직 내 자리를 넘겨줄 준비가 안 됐다. 아직은 아니다. 나는 늙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노년과 충돌한다면, 아니 노선과 충돌할 때, 우리 딸에게 어떤 쪽지를 남겨주고 싶을까?

다시 기차를 타고 이동하면서 곧 성인이 될 딸아이를 바라본다. 이어폰을 귀에 단단히 끼우고 손가락으로 스마트폰을 두드리고 있는 아이는 내가 할아버지 노트와 할아버지 펜을 꺼내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소냐에게

모든 것을, 특히 너 자신의 질문을 물으렴,

경이로워하며 세상을 바라보렴.

경건한 마음으로 세상과 대화하렴.

사랑을 담아 귀를 기울이렴.

절대로 배움을 멈추지 말렴.

모든 것을 하되,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도 가지렴.

네가 원하는 모든 높이의 다리를 건너럼 네가 가진 시시포스의 돌덩이를 저주하지 말렴.

받아들이렴. 사랑하렴. 아, 맥도날드는 좀 줄이려무나.

싫음 말고, 그건 너의 선택이니까.

13 보부아르처럼 늙어가는 법, p. 475

 

 

 

모니터 화면이 번쩍이는 한, 모든 것이 괜찮다. 몽테뉴라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장인어른을 괴롭힌 것은 완화 치료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부정이다. 기술은 우리를 죽음의 현실에서 멀리 떨어뜨려놓지만, 죽음은 자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우리 또한 자연의 일부이므로 우리는 스스로에게서 스스로를 멀리 떨어뜨려놓고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도피 백 소리가 날 때마다 조금씩 더 몽테뉴는 번쩍거리는 모니터와 삑삑 소리를 내는 심박동기와 정해진 양만큼 똑똑 떨어지는 링거를 보고 이 방에 없는 것을 단박에 알아챘을 것이다. 방에 없는 것은 바로 수용이었다.

죽음의 해결책은 더 긴 삶이 아니다. 절망의 해결책이 희망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죽음과 절망 모두 같은 약을 필요로 한다. 수용이다. 보부아르처럼 몽테뉴도 결국 받아들였다. 마지못한 수용이 아니라 완전하고 관대한 수용이었다. 죽음에 대한 수용이기도 했지만 삶에 대한 수용이자 자기 자신에 대한 수용이기도 했다. 자신의 긍정적 성격에 대한 수용이자(“자신을 실제보다 낮추어 말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어리석은 짓이다" 자신의 결점에 대한 수용이었다. 예를 들면 게으름이 그랬다. 몽테뉴는 종종 시간을 낭비하는 자신을 질책했다. 하지만 결국 그런 질책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지를 깨달았다. "우리는 정말 바보다. 우리는 '그 사람은 평생을 허송세월했어'라거나, '난 오늘 한 게 없어'라고 말한 다. 아니, 그동안 살아 있지 않았단 말인가?"

14 몽테뉴처럼 죽는 법,p. 497 

 

 

 

훨씬 더 나쁘다.

죽음의 존재를 인식하면 삶을 더 풍성하게 살 수 있다. 고대 이집트인은 이 사실을 알았다. 이들은 축제가 한창일 때 해골을 날라와서 손님들에게 자기 운명을 상기시켰다.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도 이 사실을 알았다. 시인 호라티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새로 시작되는 매일매일이 너의 마지막 날이라고 확신하라. 그 뜻밖의 시간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니."

몽테뉴는 1592년 9월 13일 자기 저택에서 쉰아홉 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늙은 나이가 아니었다. 사망 원인은 편도선이 감염되어 목에 고통스러운 농양이 생기는 편도선염이었다. 마지막 며칠간 몽테뉴는 말을 하지 못했다. 대화를 "인생에서 가장 달콤한 활동"으로 여긴 사람에게는 특히나 가혹한 고통이었다.

죽기 몇 시간 전 몽테뉴는 하인들을 전부 불러 모아 돈을 나눠 주었다. 몽테뉴의 한 친구는 그가 죽음을 달콤하게 맛보았다"고 말한다. 그 이상은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그 달콤함은 몽테뉴가 낙마 사고 이후 느꼈던 "끝없는 달콤함이었을까? 아니면 몽테뉴는 더 살 수 있었던 몇 년을 빼앗겼다고 느꼈을까?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공포와 더불어 욕심 때문이기 도 하다. 우리는 며칠 또는 몇 년을 더 살고 싶어 한다. 

p. 500

 

 

 

한다. 왜일까? 몽테뉴는 궁금했다. 하루를 살아낸 사람은 경험할수 있는 것을 전부 경험한 것이다. "오늘과 다른 빚도, 오늘과 다른 밤도 없다. 저 태양과 저 달, 저 별, 저들이 뜨고 지는 방식, 그 모든 것은 우리의 조상이 즐겼던 것과 똑같으며, 똑같은 것이 우리의 후손을 즐겁게 할 것이다." 내가 세상을 떠날 때 몽테뉴의 이 말에 의지할 수 있기를 바란다.

아니다. 미셸이 꾸짖는다. 내 말이 아니다. 너의 말이다. 개인적이지 않은 통찰은 존재하지 않는다. 빌려온 진실은 빌려온 속옷만큼이나 잘 맞지 않으며 그만큼 기분 나쁜 것이다. 진심으로 무언가를 알거나, 아예 모르거나 둘 중 하나다.

 

삶을 표준화된 시험처럼 살지 말고, 간디처럼 하나의 거대한 실험으로 여겨라. 이렇게 몸소 체험한 개인적 철학의 목표는 추상적 지식이 아니라 개인적 진실이다. 어떠한 사실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아는 것. 여기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 나는 사랑이 인간의 중요한 감정이며 여러 건강상의 이점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나는 내가 딸아이를 사랑한다는 걸 안다.

몽테뉴 철학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자신을 믿을 것. 자신의 경험을 믿을 것. 자신의 의심도 믿을 것. 경험과 의심의 도움을 받아 인생을 헤쳐 나가고 죽음의 문턱을 향해 다가갈 것. 타인과 스스로에게 놀라워하는 능력을 기를 것. 스스로를 간질일 것. 가능성의 가능성에 마음을 활짝 열 것. 그리고 몽테뉴는 동포인 시몬 베유와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한다. 제발, 주의 좀 기울여.

14 몽테뉴처럼 죽는 법, 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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