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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독서정리

마흔 세 번째 책 : 자전거 여행 -김훈

by 마파람94 2021. 10. 20.

작가 김훈의 글은 짧음에 우리말의 진수를 내포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어떤 짧은 문장에는 깊은 뜻이 엿보이고 또 어떤 단박 한 문단에는 장단도 있습니다. 글을 읽는 묘미라 할까요. 번역서에서는 찾을 수 없는 우리글의 연금술의 절정을 느낍니다. 그의 글을 읽으면 찐 팬까지는 아니지만 그 글을 응원하고 기다리는 사람이 되는 것 같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전국을 다니며 풍경과 삶을 엿보면서 같은 공감각을 느낄 수 있는 자전거 여행입니다. 마치 그의 자전거 옆에 나의 자전거를 같이 타고 가서 그 그곳에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몇 안되는 밑줄을 옮겨와 보면서 2권을 기다려 봅니다.

 

 

 

 

p. 84

300여 년 후에 조선시대 도학자 김종직 1431~1492은 다시 청학동을 찾아 나섰다. 김종직은 함양에서 출발해서 마천골, 피아골을 거쳐 화개 골짜기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의 산행 코스는 매우 길었고, 수발드는 중들이 고생이 많았다. 김종직은 청학동이라는 마을을 찾기는 찾았으나 그곳은 인간 세계와 매우 가까운 곳이어서 여기가 거기인지 기연가미연가하다가 돌아왔다. (두류산행)

그로부터 30년 후에 그의 제자 김일손 1461~1498 청학동을 찾아나섰다. 김일손은 진주에서 출발해서 반야봉을 거쳐서 화개 골짜기에 당도하였다. 그는 청학동을 찾아냈다. 청학동에서 그의 결론은 "청학동'이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고. 있다 하더라도 찾을 수 없고, 찾았다 하더라도 살 수는 없다. 는 것이었다. 속 두류산 기행) 옛일들이 이러하니, 낙원에 대한 꿈은 후대로 내려갈수록 점차 깨어져나가게 마련인 모양이다.

낙원을 증명하는 일은 낙원의 부재를 증명하는 일인 것 같기도 하지만, 화개 골짜기의 차나무밭에서는 낙원을 증명하기 위해 애써 헤매지 않아도 될 듯싶다. 청학동에 이르는 양쪽 골짜기는 온통 푸르른 차나무밭이다. 곡우에서 입하 사이에 햇차의 향기는 바람에 실려 이골 저골로 밀려다닌다.

5월 차나무밭의 냄새는 풋것의 향기가 습한 육질 속에 녹아 있지만, 5월 찻잔 속의 향기는 이 육질이 제거된 향기다. 시는 인공의 낙원이고 숲은 자연의 낙원이고 청학동은 관념의 낙원이지만, 한 모금의 차는 그 모든 낙원을 합친 낙원이다. 한 모금의 차는 그 모든 낙원을 다 합친 낙원이다.

 

 

숲은 숨이고, 숨은 숲이다. : 광릉 숲에서

p. 96

거듭 말하거니와 나는 모국어의 여러 글자들 중에서 '숲'을 편애한다. '수풀도 좋지만 '숲'만은 못하다. '숲의 어감은 깊고 서늘한데, 이 서늘함 속에는 향기와 습기가 번져 있다. '숲'의 어감 속에는 말라서 바스락거리는 건조감이 들어 있고, 젖어서 편안한 습기도 느껴진다. '숲'은 마른 글자인가 젖은 글자인가. 이 글자 속에서는 나무를 흔드는 바람 소리가 들리고, 골짜기를 휩쓸며 치솟는 눈보라 소리가 들리고 떡갈나무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들린다.

깊은 숲 속에서는 숨 또한 깊어져서 들숨은 몸속의 먼 오지에까지 스며드는데, 숲이 숨 속으로 빨려 들어올 때 나는 숲과 숨은 같은 어원을 가진 글자라는 행복한 몽상을 방치해둔다. 내 몸상 속에서 숲은 대지 위로 펼쳐놓은 숨의 바다이고 숨이 닿는 자리마다 숲은 일어선다. '숲'의 피읖받침은 외향성이고, '숨'의 미음받침은 내향성이다.


 

p. 108

그리고 이 젊은 세대는 점차 기능이 둔화되고 마침내 정지되어 동심원의 안쪽으로 숨어들고, 나무껍질 밑에는 다시 새로운 세대가 태어난다. 젊음은 바깥쪽을 둘러싸고 늙음은 안쪽으로 고인다. 식물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나무 밑동에서 살아 있는 부분은 지름의 10분의 1 정도에 해당하는 바깥쪽이고, 그 안쪽은 대부분 생명의 기능이 소멸한 상태라고 한다. 동심원의 중심부는 물기가 닿지 않아 무기물로 변해 있고, 이 중심부는 나무가 사는 일에 간여하지 않는다. 이 중심부는 무위와 적막의 나라인데 이 무위의 중심이 나무의 전 존재를 하늘을 향한 수직으로 버티어준다. 존재 전체가 수직으로 서지 못하면 나무는 죽는다. 무위는 존재의 뼈대이다. 하나의 핵심부를 중심으로 여러 곁의 동심원을 이루는 세대들의 역할 분담과 전승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 나이테를 들여다보는 일의 기쁨이다.

나무의 늙음은 낡음이나 쇠퇴가 아니라 완성이다. 이 완성은 적막한 무위이며 단단한 응축인 것인데 하늘을 향해 곧게 서는 나무의 향일성은 이 중심의 무위에 기대고 있다. 무위의 중심이 곧게 서지 못하 면 나무는 쓰러지고 거죽의 젊음은 살 자리를 잃는다. 중심부는 존재의 고요한 기둥이고 바깥쪽은 생성의 바쁜 현장인데, 새로운 세대의 표층이 태어나면 생성과 존재가 사명을 교대하면서 나이테는 하나씩 늘어간다. 동심원 속에서 늙음과 젊음이 전위와 후방이 순탄한 질서를 이루어 나무는 곧게 서서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또 잎을 떨군다. 나이테의 동심원 속에서는 후방이 전위보다 훨씬 더 두껍고 단단한 것이어서 잎 피는 나무의 그 찬란한 전위는 모두 이 후방에 기대어 있다.


 

 

여름 연못의 수련, 이어인 일인가! : 광릉 숲 속 연못에서

p. 113 : 여름 연못의 수련, 이어인 일인가!

광릉 숲 속 연못에 수련이 피었다. 수련이 피면 여름의 연못은 살아 있는 동안의 시간 속에서 가득 차고 고요한 순간을 완성한다. 수련은 여름의 꽃이지만 작약, 모란, 달리아, 맨드라미 같은 여름 꽃들의 수다스러움이 없다. 수련은 절정의 순간에서 고요하다. 여름 연못에 수련이 피어나는 사태는 '이 어인 일인가?'라는 막막한 질문을 반복하게 한다.

나의 태어남은 어인 일이고, 수련의 피어남은 어인 일이며, 살아서 눈을 뜨고 수련을 들여다보는 일은 대체 어인 일인가? 이 질문의 본질은 절박할수록 치매하고 치매할수록 더욱 절박해서 그 치매와 절박으로부터 달아날 수가 없는 것인데 수련은 그 질문 너머에서 핀다. 



 

p. 129

유채밭과 밀밭이 있다. 작년에 유채를 심었다. 금년 4월에는 강가의 유채가 피어 어지러울 것이다.

여의도에서는 밤섬이 보인다. 한강의 철새들은 저녁이면 다들 밤섬에 모여서 잔다. 비오리는 비오리끼리, 청둥오리는 청둥오리끼리 구획을 이루며 잔다. 서해의 갈매기들이 내륙 깊숙이 날아들어와 암사동 앞 한강까지 와서 논다. 조류학자들에 따르면, 철새들은 해마다 찾아오는 특정 지역에 대한 인상이 유전자 속에 각인된다고 한다. 무서운 추억이다. 추억이 본능이며 생명력인 것이다. 그래서 서울의 한강을 찾아오는 철새의 집안은 수만 년 동안 대대로 이 강을 찾아온다. 새들도 사람처럼 본관을 가져도 괜찮을 것이다. 한강 자전거도로에서는 이것저것 다 들여다보고 가려면 반도 못 가서 날이 저문다.


흐르는 것은 저러하구나 : 조강에서

p. 143

풍경은 사물로서 무의미하다. 그렇게 말하는 편이 덜 틀린다. 풍경은 인문이 아니라 자연이다. 풍경은 본래 스스로 그러하다. 풍경은 아름답거나 추악하지 않다. 풍경은 쓸쓸하거나 화사하지 않다. 풍경은 자유도 아니고 억압도 아니다. 풍경은 인간을 향해 아무런 말도 걸어오지 않는다. 풍경은 언어와 사소한 관련도 없는 시간과 공간 속으로 펼쳐져 있다.

무위자연이라는 말은 광막해서 나는 그 권역의 넓이와 가장자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자연은 쉴 새 없이 작용해서 바쁘고, 풍경은 그 바쁜 자연의 외양으로 드러나 있다. 무위자연의 '무위'는 그 바쁜 것들에 손댈 수 없고 거기에 개입할 수 없는 인간의 속수무책을 말하는 것으로, 나는 겨우 이해하고 있다.


 

p. 156

강물 위에서 '참'을 맞을 때 어부들은 다시 거꾸로 달려드는 물살이 무서워서 배의 방향을 돌려놓는다. 치고 올라갈 때 물은 '곧게 일어서서 달려드는데, 역류하는 물은 서울 강남구 압구정 밑까지 압박한다. 다시 강이 흐름을 거꾸로 돌려 바다를 향할 때 상류에 갇혀 있던 강물은 한꺼번에 이 하구를 향해 쏟아져내려 온다. 전류리는 한자로(...)라고 쓴다. 강물이 거꾸로 뒤집혀 흐르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전류리 선단의 어선들은 이제 목선은 거의 없고 대개가 섬유 강화 플라스틱 배들이지만, 동력은 30마력을 넘지 못한다. 0.5톤~1톤의 작은 배들은 15마력짜리 스즈키 엔진 1개를 꽁무니에 달았고 그보다 큰 배들은 30마력을 쓴다. DMZ가 지척인 이 어장에서는 30마력 이상의 동력은 허가되지 않는다. 전류리 어부 심상록씨(66)에 따르면, 어선에 동력 부착이 허용된 것은 3년 전부터다. 그 이전까지 이 어장의 모든 배들은 오직 어부의 몸으로 노를 저어서 이 사나운 물 위로 나아갔다.

17세 때 뱃일을 시작한 심 씨는 50년 가까이 이 하구에서 동력 없는 배에 노를 저어서 고기를 잡았다. 혼자서 노를 젓고 투망까지 할 때도 있었다고 한다. 보름사리와 그믐사리에 물은 가장 사납다. 간만 차 9미터 정도의 흔한 사리가 사리다. 9미터를 넘으면 악사리이고, 그 보다 더 심하면 대사리이며, 7월 백중사리는 대대사리다. 바다의 고 기들은 악사리대사리, 대대사리 때 역류하는 물을 따라 이 하구로 몰려온다. 


자전거 여행

 

p. 170

역사의 전환과 좌절을 보여주는 장관을 이룬다. 그의 생애가 흘러가는 풍경은 양수리 두물머리에서 합쳐지는 강물의 풍경과도 같다. 수 종사 마당에서는 그 모든 숨은 풍경이 드러난다.

배반과 치욕

물 건너 천진암은 북경을 통해서 당도하는 새로운 세계 인식과 미래 전망의 교두보였으며 최전진 기지였다. 천진암은 북경과의 핫라인을 개설하고 있었다. 신간 서적과 인맥으로 연결되는 이 핫라인은 더디지만 정확히 작동되었다. 이벽은 천진암에 와닿는 이 새로운 세계 인식의 안내자였고, 주석자였으며, 지도자였다. 이벽은 최연장자가 아니었지만 권철신, 권일신, 정약전, 정약용, 이승훈 등은 모두 이벽의 지도력 아래서 서학에 입문했다. 아마도 정약전, 정다산 형제는 마을 앞의 강을 배로 건너가서 천진암의 강학에 참가했을 것이다. 때때로 그들은 한강 물줄기에 배를 띄우고 서울을 드나들었다. 1783년 여름에도 처갓집인 정다산의 집에서 며칠을 묵었던 이벽은 정약전, 정다산과 함께 두물머리나루에서 배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배 안에서 젊은 그들은 보편적 원리의 유일성과 그 조화로움, 그리고 원리가 실 현 세계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면서 황홀했다.

그리고 환란은 닥쳐왔다. 형틀에 묶인 정다산은 천주교를 서슴없이 배반했다. 그의 배교는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는 주문모 신부의 존재를 폭로했고, 황사영과 이승훈을 삿된 무리들이라고 저주했다. 그는 전국 각지에 숨어 있는 천주교인들을 색출할 수 있는 방법을 취조관들에게 일러주었고 이 방법은 실제로 포도청에 시달되어 천주교도 검거와 심문에 활용되었다.

이승훈도 형틀에 묶였다. 이승훈은 정다산의 행적을 폭로했고, 정다산을 저주했다. 이승훈은 자신이 정다산에게 영세를 준 사실까지도 폭로했고, 정약전을 밀고해서 사건에 연루시켰다. 형틀에 묶인 처남과 매부는 그렇게 서로를 저주하고 밀고하며 울부짖었다.

1801년의 국청 마당은 한마디로 지옥이었다. 다산이 사형을 모면하게 되는 배경을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이 적극적인 배교가 큰 힘이 되었던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길고도 기약 없는 유배생활에서 수많은 저술을 쌓아가면서도 그는 1801년의 배반과 치욕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쓰지 않고 말하지 않았다. 그의 말년의 자서전이라 고할 수 있는 「자찬묘지명」에서도 그는 1801년의 국청에서 벌어졌던 일들과 거기에 관련된 자신의 내면을 말하지 않았다.

유배 시절에 그의 마음속에서 1801년의 일들은 어떠한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었을까? 신앙인으로서 순교의 길을 끝까지 걸어간 약종 형님과 매부 이승훈의 죽음은 그의 마음속에서 어떠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일까? 오랜 유배에서 돌아와 다시 그 물가마을의 옛집에 이르러, 강 건너 쪽 천진암의 산봉우리를 바라보면서 그의 마음속에서 1801년의 일들은 어떤 풍경을 이루고 있었던 것일까? 이런 후인의 의 문에 대해 다산은 끝끝내 침묵한다. 200년 후에 태어나 단지 책을 읽을 뿐인 후인이 그 침묵의 부당성을 공박할 수 있을까. 

171

전환의 시간 속을 흐르는 강

 

아마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삶 속에서 벌어진 일들 중에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있는 법이다. 다산의 치욕은 침묵 속에 잠겨 있다.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치욕이 아니라 그가 한평생 간직했던 침묵이다. 치욕은 생애의 중요한 부분이고, 침묵은 역사의 일부다.

이승훈은 매우 머뭇거리면서 사형장으로 나아갔다. 그는 형이 집행되기 전에 이미 천주교를 배교할 태도를 분명히 했다. 죽음 앞에서 그는 신앙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죽음은 순교도 배교도 아니었다. 그는 살고 싶었을 것이다. 나는 살고 싶어하는 그의 편이다. 샤를르 달레가 쓴 한국 천주교회사는 신앙의 징표들에 대해 무자비하게도 엄격하다. 그는 중생의 고통에 대한 추호의 연민도 없다. 그는 이승훈의 최후를 이렇게 기술했다.

천주교인이건 아니건 그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배교로도 그의 목숨은 구할 수 없었다. 그는 하느님께 돌아온다는 간단한 행위만으로도 그 피할 수 없는 형벌을 승리로 바꿀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배교를 철회한다는 조그만 표시도 하지 않고 숨을 거두었다. 최초로 영세한 그가 자기 동포들에게 영세와 복음을 전했던 그가. 순교자들과 함께 죽음의 자리로 나아갔으나 그는 순교자는 아니었다. 그는 천주교인이기 때문에 참수되었으나 그는 배교자로서 죽었다. 하느님 당신의 심판은 얼마나 정의롭고 무섭습니까.

자전거 여행

 

나는 하느님의 심판이 정의로운 것이었던지는 알 수 없으나 그 무서움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한국 천주교 역사에 대한 달레의 심판은 하느님의 심판처럼 무자비하다. 그는 이벽, 이가환, 이승훈, 권일신 등을 모두 배교자로 규정했고 그들의 죽음을 순교에서 제외시켰다. 그들의 죽음에는 순교와 배교가 겹쳐져 있다. 나는 하느님의 심판이 두렵기보다도, 순교와 배교, 순결과 치욕이 겹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이 더욱 두렵다.

지금 정다산은 두물머리 북쪽 능내 마을에 묻혀 있고 이벽, 이승훈, 정약종, 권철신, 권일신 등은 물 건너 남쪽 퇴촌 마을에 묻혀 있다. 그 사이에서 강물은 합쳐지고, 합쳐진 강물이 다시 갈라서는 산줄기 밑을 돌아 멀어서 보이지 않는 저쪽을 향해 나아간다. 수종사 절 마당에서 이 모든 풍경은 감출 수가 없고 숨을 곳이 없다. 그 강물은 치욕의 시간들을 모두 거느리고 전환을 향해 흘러간다. 능내와 퇴촌 사이의 강에서 아득히 먼 물들이 만나고 있었다. 수종사에서는 산하의 풍경 속에서 운명의 모습이 보인다.

전환의 시간 속을 흐르는 강 173

 

p. 207 : 망경강에서

위는 중국 대륙으로 막히고 아래는 동중국해 쪽으로 열린 이 오목 한 내에서 달은 물을 북쪽으로 밀어 올리고, 대륙의 연안을 압박하고도 갈 곳 없어 넘쳐나는 물은 모든 강들의 하구로 파고들고 반도의 해안에 포개진다. 그래서 서해의 관능은 반도의 남쪽 끝, 영산강 하구에서는 잔물결로 주름지면서 섬세하고 부드럽지만,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그 숨소리가 커져서 한강 하구에 이르면 해일처럼 힘차고 숨 막힌다.

대동강은 어떤가. 가보지 못해서 알 수 없지만, 서해의 힘은 더욱 크게 하구로 파고들고 연안으로 안겨올 것이 틀림없다. 서해와 달의 당기고 끌리는 모습이 저러하므로 조국의 서쪽 강들은 서해에 닿는 하구에서 저마다의 사랑과 저마다의 소멸의 표정을 따로따로 갖는다.

동해로 흘러드는 강들은 날카롭고 명징하다. 동쪽의 강들에는 산의 격절감이 녹아서 흐른다. 가파르고 빠른 강들이 일출을 향해 나아간 다. 서해에 닿는 강은 들을 흐른다. 그래서 서쪽의 강들은 유장하고도 아득하다. 크고 흐린 강들이 해 지는 곳을 향해 느리게 나아간다. 서해는 그 많은 강들을 받아내고 또 거슬러 오른다. 서해는 연안의 수많은 작은 포구를 먹이는 거대한 어머니의 바다와도 같다.

만경강은 아직도 파행하는 자유의 강이다. 큰 댐이 없고, 하구 언이 없고, 시멘트 제방이 없고, 강변도로가 없고, 수중보가 없고, 강 가에 갈비 먹는 집이 없어서, 마음대로 굽이치는 유역은 언제나 넓게 젖어 있다. 바다가 수평선 너머로 물러간 저녁 무렵의 하구에서 강의 크나큰 자유는 아득한 갯벌 위에서 헐겁고 쓸쓸했다.


 

p. 212

운명이 갯벌에 지속적으로 산소를 불어넣어, 갯벌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터전이 된다. 갯지렁이는 온몸의 마디를 뻘밭에 밀면서 기어간다. 갯지렁이는 죽음을 통과하듯이 온몸을 뒤틀면서 뻘 속을 헤치고 나간다. 갯지렁이가 기어간 뺄 위의 자국은 난해한 문자와도 같고, 고통스러운 글쓰기의 흔적과도 같다.

동죽조개는 껍데기에 나이테를 갖는다. 나무의 나이테와 같다. 성긴 테는 조개의 여름이고 촘촘한 테는 조개의 겨울이다. 모든 조개들이 그 껍데기에 삶의 고달픔과 기쁨들을 기록한다. 해양생물학자들은 조개껍데기들을 들여다보고 조개의 연륜뿐 아니라 조개의 일륜까지도 읽어낸다. 조개의 하루가 그 껍데기 위에 기록되고, 밀 물이 들어오고 썰물이 나갈 때 조개의 생명의 안쪽에서 이루어지는 성장의 흔들림이 조개껍데기 위에 미세한 음파처럼 퍼져나간다. 밀물 때 그 음파의 폭은 넓고, 썰물 때는 좁다. 내륙 깊숙이 달려드는 힘센 서해는 연안의 모든 조개껍데기 위에 그 파도의 무늬를 새겨넣는다. 만경강 하구에서, 서해는 그렇게 부풀어올라서 가득찼고 그렇게 멀어져 갔다.

바다의 짠맛과 햇볕의 향기로 소금은 탄생한다

옥구 염전은 올해의 첫 번째 소금을 거두기 시작했다. 갯고랑에서 끌어올린 바닷물이 6단계의 저수장을 거치면서 증발하고 마지막 결장 지에서 소금을 이룬다. 

자전거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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