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1월은 컨프런스 2회 연사로 참석하고, 조직 내에 1회 참여하는 이벤트 때문에 여유시간을 갖기 어려운 한 달입니다. 그렇지만 최선을 다해 책을 꺼내 들었습니다. ++
책 읽기에 대해 다시한번 곰곰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기회를 제공해주는 주요 밑줄들을 가져와 보겠습니다.
시간을 허비하고 자신에게 하등 중요하지도 않고 그러니 금방 잊어버릴게 뻔한 일에 시력과 정신력을 소모하며. 일절 도움도 안 되고 소화해내지도 못할 온갖 글들로 뇌를 혹사하는 것 아닌가?
이런 잘못된 독서가 다 신문 탓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천만의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신문이나 다른 온갖 잡다한 글을 매일 읽더라도 온전히 집중된 상태로 즐겁게 독서할 수 있다. 어쩌면 새로운 정보들을 선택하고 신속하게 조합해내는 건전하고 중요한 훈련으로 삼을 수도 있다. 반면에 괴테의 <친화력》이라 할지라도 (교양 때문이건, 심심풀이로 읽는 사람이건 그야말로 완전 맹탕으로 읽을 수가 있다.
인생은 짧고, 저세상에 갔을 때 책을 몇 권이나 읽고 왔느냐고 묻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 무가치한 독서로 시간을 허비한다면 미련하고 안타까운 일 아니겠는가?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책의 수준이 아니라 독서의 질이다. 삶의 한 걸음 한 호흡마다 그러하듯. 우리는 독서에서 무언가 기대하는 바가 있어야 마땅하다. 그리고 더 풍성한 힘을 얻고자 온 힘을 기울이고 의식적으로 자신을 재발견하기 위해 스스로를 버리고 몰두할 줄 알아야 한다. 한 권 한 권 책을 읽어나가면서 기쁨이나 위로 혹은 마음의 평안이나 힘을 얻지 못한다면, 문학사를 줄줄 꿰고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인가? 아무 생각 없이 산만한 정신으로 책을 읽는 건 눈을 감은 채 아름다운 풍경 속을 거 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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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걸 평생 끌어안고 다닌다면 요즘 사람들은 아마 비웃을 것이다. 그 사람들이야 고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나 이탈리아의 시인 아리오스토Ludovico Ariosto 같은 책은 없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할 테고, 십 년 전에 <타잔>을 샀듯 지금도 그 비슷한 읽을거리를 사볼 것이다. 그들이 독서물에 대해 갖고 있는 기준이란, '내용이 가벼우면서도 재미있을 것 그리고 읽고 나서 간수해둘 필요가 전혀 없을 것!' 이다. 반면 우리의 원칙은 가치가 없는 건 가급적 장서로 들여놓지 말고 일단 검증된 것은 절대 내버리지 않기!"다. 그러다 보면 어느 결엔가 나이 지긋한 애서가가 조심스레 《서구의 몰락>에서 먼지를 터는 날이 오게 마련이고, 그러면서 혼자 생각할 것이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이 책은 제 소임을 다한지 이미 오래고 이제 없어도 아쉽진 않겠지만, 그래도 그 시대의 주요 저서 중 하나라고, 그 시대의 얼굴을 만드는 데 일조한 책이었다고. 그러니 그런 책이라면 어느 정도 경외심을 표하며 보존해야만 한다고 말이다.
이 구닥다리 책들에서 먼지를 터는 모습을 젊은 사람들이 지켜보지 않아도 좋다! 상관없다. 그들도 언젠가 머리카락이 성글어지고 치아가 흔들거리게 될 즈음이면, 자기와 평생을 함께하며 신의를 지킨 것들을 새삼 되돌아보게 될 날이 있으리니.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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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좀 더 진지하고 본받을 만한 사람들에 대해서 쓴 작품을 읽는 편이 아무래도 내 성미와 취향에 맞긴하다. 그러나 나 자신도 글 쓰는 사람으로서 진즉 깨달은 게 있다. 소재를 선택하는 작가는 진정한 작가가 아니고 그런 책은 읽을 가치가 없다는 사실, 문학작품의 소재 자체는 결코 가치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점이 그것이다. 세계사의 가장 멋들어진 소재를 사용하고도 형편없는 문학이 나올 수도 있고, 잃어버린 바늘이나 눌어버린 수프처럼 정말 너무나 사소한 걸 다루고도 얼마든지 진정한 작품이 있을 수 있다.
하여 나는 어떤 작가의 소설을 읽을 때건 소재에 대한 특별한 경외심이 없다. 소재에 대한 경외심이란 작가가 가질 일이지 독자의 몫은 아니니까. 대신 독자는 작품에 대해 그리고 작가의 전문성에 대해 경의를 품어야 하며, 소재와 무관하게 작업의 질에 따라 작품을 평가해야 한다. 나는 언제나 그럴 용의가 있을뿐더러, 요즘 들어서는 심지어 그 어떤 이념이나 정서적 내용보다도 장인정신을 보여 주는 기술적인 작업에 점점 더 후한 점수를 주게 된다. 왜냐하면 수 십 년간 글쟁이로 살아오면서 경험한 바에 따르면, 이념이나 감정은 적당히 꾸미거나 따라 하기 쉽지만 기술적인 작업의 수준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을 전부 다 이해하지는 못하겠고 또 그다지 공감은 가지 않지만, 많은 부분을 솔직히 인정해가면서 동료로서의 경의와 관심을 갖고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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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로서의 엉성함을 보여주는 작은 실수 말이다.
작가는 11이라고 썼다가 나중엔 12라고 써놓고는, 원고를 다시 꼼꼼히 읽어보지 않은 것이다. 분명 교정을 아예 보지 않았거나 아니면 대수롭지 않게 읽어 넘기면서 앞에 섰던 숫자에 신경을 쓰지 않았던 거다. 그런 사소한 문제쯤이야 중요한 게 아니니까. 문학이 무슨 학교도 아닌데 글자나 생각의 오류를 사사건건 지적할 것도 아니니까. 인생은 짧고 대도시의 삶은 워낙 바빠서 젊은 작가로서 작 업시간을 충분히 확보하기 힘드니까 말이다. 모두 인정한다. 그리고 무책임하게 써대는 저널리즘의 선정성이며 매사 타인에 대한 무관 심과 피상성이 지배하는 대도시를 향한 작가의 반감에 대해서는 변함없이 경의를 표하는 바다!
하지만 갑자기 그 '12' 라는 숫자가 나오면서부터 작가에 대한 나의 전폭적인 신뢰가 흔들렸고 느닷없이 불신이 일었다. 그때부터 나는 아주아주 꼼꼼히 읽기 시작했고, 숫자 '12' 같은 식의 부주의한 실수를 다른 데서도 찾아보게 되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저께만 해도 아무 의심 없이 읽었던 다른 대목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별안간 그 작품 전체의 내적인 무게, 책임감, 진정성, 핵심이 날아가고 말았다. 전부 그 바보 같은 숫자 12 때문이다. 갑자기 그런 느낌이 들었다. 이 멋진 책은 대도시인이 대도시인을 위해 그 저 그날 그 순간을 위해서 쓴 책일 뿐이라고. 그러니까 대도시의 몰 인정과 피상성에 대한 고민도 이 작가에게는 그리 심각하게 다룰 문제가 아니라는, 마치 저널리즘 작가에게 근사한 글감이 한 떠오른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그런 느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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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서른이 넘도록 짐작도 못했던 바다. 중국문학이라곤 고작해야 뤼케르트 Friedrich Rückert가 번안한 《시경》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던 내가 리하르트 빌헬름 Richard Wilhelm 등의 번역을 통해 조금씩 중국문학에 접하면서 차츰 무언가를 알게 되었고, 그 무엇이 어느덧 내 삶에 불가결한 것이 되어 버렸으니 바로 선과 지혜라는 도교의 이념이었다. 중국어 한 마디도 할 줄 모르고 중국에 가본 적도 없는 내가 이천오백 년의 세월을 넘어 중국 고전문학 속에서 내 생각을 확인받고, 마음의 쉼터이자 고향을 찾는 행운을 얻었던 것이다. 이전엔 오직 태생과 언어로써 내게 귀속된 세계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장자와 열자, 맹자 등을 읽어보면 중국의 이들 대스승들과 현인들은 웅변가들과는 정반대여서, 놀랍도록 소박하며 서민과 일상에 밀착해 있었다. 허영이라곤 전혀 없이 은둔과 자족의 삶을 택해 살았으며, 이들이 스스로를 표현한 방식은 보면 볼수록 무릎을 치며 감탄하게 된다. 노자의 반대편에 있는 공자는 체제주의자이며 도덕주의자, 법치주의자요 관습의 수호자로서 고대 현인들 중 그나마 유일하게 무게를 잡는 인물인데, 그의 면모는 예컨대 간혹 이런 식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소용없을 줄을 알고도 굳이 행하는 그런 이가 아닌가?"
이만한 평정과 유머와 간결함을 나는 다른 어떤 문학에서도 찾지 못하겠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살펴보노라면, 그리고 세상을 단 몇 년 몇십 년 안에 평정하여 바로잡겠다는 사람들의 웅변을 들을 때면 나는 가끔 이 구절 등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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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개인적으로 친분을 맺고 있는 작가들 역시 이런 경험을 한적이 있지만 본인이 직접 이런 청탁이나 협박을 해봤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면 아침과 청탁의 편지 따위를 보내는, 절대 근절되지 않는 저 동료들은 어쨌거나 수준이 떨어지는 경우라고 추론해도 되지 않을까? 또 날마다 생겨나는 성가신 일들은 문학과 무관한 부탁 편지와 함께 휴지통에다 넣어버린다면 더 이상 성실하고 재능 있는 작가들이 그런 부당한 일을 겪지 않게 되지 않을까?
이렇게 꼬리를 물고 생각하다 보면, 겉보기에는 마치 작가라는 직업에 속한 일인 듯 보이지만 결국 그저 시간낭비에 불과한 바보짓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그 본연의 일은 누가 뭐라 하건 딱히 규정지어 직업으로 만들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작가의 업이란 침잠하고 눈을 밝혀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는 것이니, 그럴 때에 우리의 일은 때로 불면의 밤과 구슬땀이 따를지라도 '노동'이 아닌 소중한 '천적'인 것이다.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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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묘히 둘러 말했을 뿐 결국은 퇴짜 놓았다고 받아들이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군요. 그래서 실례를 무릅쓰고 한마디 덧붙이랍니다.
귀하께서 오 년이나 십 년 뒤에 주목할 만한 작가가 될지 어떨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게 현재의 시작품들에 달린 문제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끝으로, 왜 굳이 작가가 되려 하시는지요? 재능 있는 많은 젊은이들이 작가를 꿈꾸는 이유는, 아마도 작가를 독창적이고 마음이 순수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 섬세한 감각과 정제된 정서의 소유자라는 의미로 이해하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덕목들은 작가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갖출 수 있으며, 어정쩡한 문학적 재능 대신 그런 쪽으로 연마하는 편이 훨씬 더 낫습니다 또 혹시 어떻게 명성을 얻어볼까 하는 생각으로 작가의 길로 들어서는 사람이라면, 작가보다야 배우가 되는 편이 빠르지 않을까요.
문학창작에 대한 욕구가 있다는 사실 자체는 자랑할 일도 부끄러 워할 일도 아닙니다. 경험한 바를 명료하게 인식하고 간결한 형태로 형상화하는 습관은 진정한 인격체로 성장하는데 상당히 유익합니 다. 하지만 시작이 많은 사람들에게 오히려 해악을 끼칠 수도 있습니다. 체험한 것을 온전히 음미하게 하는 대신 후딱 해치우고 떨쳐 버리는 쪽으로 오도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젊은 시인들이 자신의 경험을 시적 관점에 따라 평가하는 습관이 들어, 결국에는 글을 쓰기 위한 경험만 골라서 하는 감상적인 장식가로 전락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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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타고난 진정한 비평가는 희소한 까닭에, 혹 비평의 기술이 개량될 수 있고 그 기예가 교육될 수 있을망정 진정한 재능의 향상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보시다시피 수백 명의 비평가들이 평생 직업생활을 하면서 필요한 기술은 어지간히 익혔을지 몰라도 가장 본질적인 의미에는 끝내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수많은 의사나 상인들이 이왕에 어쩌다 배운 직업을 천직 의식 없이 그저 정해진 틀에 따라 수행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러한 실태가 사회적 손실을 의미하는지 어쩐지는 모르겠다. 독일처럼 (말이나 글을 제대로 구사하는 이가 만 명에 하나 나올까 말까고. 독일어를 할 줄 모르고도 장관이건 대학교수건 다 될 수 있는 그런 나라인) 문학적 요구가 아주 소박한 민족이라면 프롤레타리아 의사나 교사처럼 프롤레타리아 비평가가 있다는 게 아무 문제가 아닐지도 모 르겠다.
하지만 작가들로서는 이처럼 불충분한 비평 기구에 노출되어 있는 상황이 막대한 손해다. 작가가 비평을 꺼린다고, 예술가의 허영심 때문에 정곡을 꿰뚫는 진정한 비평보다 멍청한 아침을 더 좋아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모든 존재가 사랑을 구하듯 작가도 사랑을 구하며, 이해받고 인정받기를 바란다. 하지만 평균적인 비평가들이 곧잘 써먹는 말처럼 작가가 비판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조롱은 정말 터무니없는 소리다.
진정한 작가라면 진정한 비평가를 반기게 마련이다. 이는 그에게 서 뭔가 자기 예술에 보탬이 될 만한 걸 배울까 해서가 아니다. 어차피 그렇게 해서 배워지는 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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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자신의 행위가 이해받지 못한 채(과대평가되건 과소평가되건 간에) 무감각의 비현실 속을 부유하는 대신, 자신과 자기의 작업을 자기 나라와 문화의 전반적인 평가 속에서, 또 재능과 성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객관적으로 자리매김하여 본다는 것 자체가 대단히 중요한 공부요 수정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역부족인(핵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틀에 박힌 접근으로 기껏해야 겉껍데기나 더듬다 마는 가치들에 대해 끊임없이 가치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불안함 때문에 공격적인) 비평가들이 작가들을 향해 거만하고 비평에 과민하다고, 아니 지성 일반에 적대적이라고 하도 비난하다 보니 종국에는 순진한 독자가 진정한 작가와 긴 머리나 휘날리고 다니는 <플리겐데 블래터>의 엉터리 작가를 전혀 구별할 줄 모르는 지경에 이른다.
2류 비평가들이 섣부른 가치판단 등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지 말고 판단을 위한 객관적인 정보를 제공하도록 나 개인적으로 여러 차례 (물론 나 자신의 이해관계 때문이 아니라 소홀히 여겨진 듯싶은 작가들을 위해서) 시도해보았지만, 진지한 자세나 객관적인 관심, 하다못해 정신의 문제에 대한 열정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이들 직업인들의 몸짓에서 늘 읽게 되는 반응은 '우릴 좀 가만 내버려둬요! 뭐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생각할 것 있냐고요! 보세요. 우리는 날이 면 날마다 지긋지긋한 부역에 치일 지경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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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본인도 제대로 못 봐 제대로 묘사할 줄 모르는 사람에 대해 떠들어댄다면 그 사람에 대해 우리가 뭘 알게 되겠으며, 그런 비평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바로 그런 무능한 비평가들이 종종 객관성을 빙자하여 미학이 마치 정밀과학이라도 되는양 구는데 실상은 자신의 개인적인 직관을 믿지 못하니까 무난하게 균형과 중립이라는 가면을 뒤집어쓰는 것이다. 비평가에게 중립이란 거의 언제나 미심쩍은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결함, 즉 정신적 체험에서 열정의 결핍을 뜻한다. 비평가에게 열정이 있다면 그것을 숨길 게 아니라 드러내야 마땅하다. 자기가 무슨 측량기사인 양 문화부 장관인 양 굴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개인으로 서야 한다.
보통의 비평가와 보통의 작가의 관계는 대략 상호 간에 애매한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말하자면 비평가는 작가를 별로 대단찮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혹시나 이 인간이 나중에 천재로 판명이 나면 어쩌나 두려워한다. 그리고 작가는 비평가가 자신을 이해하지도, 자신의 가치나 결점을 알아보지도 못한다고 느끼지만, 최소한 알아보고 박살을 내는 그런 사람과 마주치지 않은 걸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하며 어쨌거나 비평가와 그럭저럭 잘 지내면서 덕 보기를 바란다. 평균적으로 독일에서 책 쓰는 사람들과 비평가 간에는 바로 이런 지지리 좀스러운 관계가 지배적이고, 이 점에 서는 사회주의 언론이나 부르주아 언론이나 대동소이하다.
하지만 진정한 작가는 이런 평균적 비평, 이런 무지한 문예란 기계와 친구 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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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문학작품에서 소재의 선택은 결코 논할 수 없다. 소재, 즉 어떤 작품의 중심인물들과 특징적인 문제 등은 작가에 의해 선택되는 것이 아니라 엄밀히 따지면 모든 문학의 원재료이니, 바로 작가의 비전과 정신적 체험이다. 작가는 어떤 비전을 회피할 수도, 중요한 인생의 문제에서 도망칠 수도, 또 진정으로 경험한 '소재'를 능력 부족이나 나태함 때문에 방치해둘 수도 있다. 그러나 특정 소재를 선택할 수는 없다. 순전히 이성적이고 예술적인 고려에서 적당하고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내용을 가지고 이 내용이 마치 운명처럼 다가왔다는 듯이, 마치 자신의 머리로 짜낸게 아니고 영혼으로 경험한 듯이 시늉할 수는 절대 없다. 참된 작가 역시 소재를 선택하고 작업을 주관하려는 시도가 심심찮게 있었지만, 그런 시도의 결과는 동료들에게는 극히 흥미롭고 교육적이었을망정 문학작품으로 서는 사산이었다
간단히 말해, 만약 진정한 문학작품의 작가더러 누군가가 "차라리 다른 소재를 선택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라고 묻는다면, 그건 마치 어떤 의사가 폐렴에 걸린 환자더러 "아, 차라리 콧물감기로 정하시지 않고요!" 하고 말하는 것과 진배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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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품, 공장에서 찍어낸 물건, 대중의 입맛에 맞춘 사탕과자에 불과하다. 유포되고 팔려나가고 구매자에게 행복감이나 기쁨을 선사하거나 심심풀이가 돼주기 위해 만들어진 상품인 것이다. 바로 이런 시들이 대중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는다. 진지하게 애정을 쏟으며 몰입할 필요도, 괴로워하거나 마음이 흔들리거나 하는 일도 없이. 그저 곱고 정연한 리듬에 몸을 맡겨 편안하고 즐겁게 어울릴 수 있는 시 말이다.
"이러한 '아름다운" 시들이 가끔 너무나 지겹고 미심쩍어진다. 마치 길들여지고 다듬어진 모든 것들처럼, 교수들과 공무원들처럼 말이다. 그리고 때때로 자로 잰 듯 정확한 세상에 진절머리가 날 때면 가로등을 박살내고 사원에 불을 놓고 싶은 충동이 인다. 그런 날이 면이 '아름다운' 시들은 저 신성한 시성들의 것에 이르기까지 죄다 어느 정도는 마치 검열을 거친 듯, 거세된 듯, 지나치게 지당하고 유순하며 고루하게 느껴진다. 그럴 땐 '형편없는 시에 마음이 끌린다. 그때는 어떤 것도 전혀 형편없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여기에도 환멸은 도사리고 있다. 형편없는 시를 읽는 것은 극도로 수명이 짧은 즐거움이니, 금세 물리고 만다. 그러면 굳이 읽으라는 법 있나? 누구나 스스로 형편없는 시를 지어보면 안 될까? 그렇게 해보라. 그러면 곧 알게 되리라. 최고로 아름다운 시를 읽는 것보다 형편없는 시를 짓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1918)
1_이 글은 1954년에 새로 발표한 1918년 원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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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를 마시거나 흥청망청하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으면서 책에는 그 10분의 1조차도 쓰기를 꺼려하는 사람이 수두룩한가 하면, 생각이 좀 구식인 사람들은 책을 무슨 신주단지 모시듯 호사스럽게 꾸민 방에 꽂아놓고 먼지가 뽀얗도록 놔둔다.
기본적으로 올바른 독자라면 장서이기도 하다. 책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아낄 줄 아는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그것을 손에 넣어 거듭 읽고 손 뻗으면 닿을 곳에 가까이 두려고 하기 때문이다. 책을 빌려 한 번 쭉 읽고 반납하면 간편하기야 하겠지만, 그렇게 읽은 책은 손을 떠나기 무섭게 잊혀지기 일쑤다. 특히 하루에 한 권씩 뚝 딱 읽어내는 사람도 많은데, 그런 경우라면 대출 도서관이 안성맞춤일 것이다. 이들에게 독서란 소중한 보물을 모으고 친구를 얻고 삶을 더 욱 풍성하게 만드는 방편이라기보다는, 단지 소일거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독자들은 일찍이 고트프리트 켈러가 탁월하게 묘사한 적이 있는 것처럼 잔소리한다고 고칠 습관이 아니니 내버려 두자.
올바른 독자들에게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타인의 존재와 사고방식을 접해 그것을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그를 친구로 삼는 것을 뜻한다. 특히나 문학작품을 읽노라면 비단 몇몇 인물과 사건들만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작가의 방식과 기질, 내면의 풍경, 나아가 작풍이나 예술적 기법, 사고와 언어의 리듬까지 접하게 된다. 한 권의 책에 사로잡힐 때, 작가를 알고 이해하기 시작해 그와 모종의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그 책은 진정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런 사람이라면 책을 내던지고 잊어버리는 대신 간직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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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필요할 때마다 독서와 경험을 거듭할 수 있도록 값을 치르고 산다. 그렇게 책을 사는 사람, 그 느낌과 정신에 마음 이 움직여 책을 구입하는 사람이라면, 무분별하게 이것저것 읽어내기보다는 자기 마음에 와닿는 책들, 깨달음과 기쁨을 안겨주는 작 품들을 가려 찬찬히 모을 것이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마구잡이로 읽어대는 독자보다 더없이 귀하다.
백권 천 권의 '베스트 도서' 같은 것은 없다. 각자 끌리고 수긍하고 아끼고 좋아해서 특별히 선택하게 되는 책들이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훌륭한 장서란 '주문'으로 갖출 수 없으며, 각자 애착과 필요를 쫓아 차츰차츰 모으게 되는 것이니, 이는 친구를 사귀는 이치와 똑같다. 그렇게 모은 장서라면 아무리 남보기에 변변치 않더라도 본인에게는 어쩌면 온 세상을 의미할 수도 있으리라. 몇 권 안 되는 책만 갖추고도 너무나 훌륭한 독자들도 얼마든지 있다. 농촌의 많은 아낙네들이 책이라고는 그저 성경밖에 모르고 그 한 권밖에 소유하지 못했어도, 그들이 그 한 권의 책에서 얼마나 많은 지식과 위로와 기쁨을 길어 올리는지는, 입맛만 까다로워진 부자가 온갖 값비싼 장서에서 얻는 것에 비할 바 아니다.
그래서 책의 작용이란 수수께끼 같다. 아버지나 교사라면 누구나 자녀나 학생에게 시기에 맞게 양서를 읽히고자 애썼건만 뜻대로 되지 않았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자상한 관리와 조언이 아이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도 있겠지만, 나이가 많건 적건 누구나 책의 세계로 들어가는 자기만의 길을 찾아내야 한다 누군가는 문학작품으로 독서를 시작하는 것이 수월하다고 느끼는 반면, 그런 작품을 읽는다는 것이 참으로 멋지고 감미로운 일임을 깨닫기까지 아주 오랜 세월이 걸리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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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에서 시작해서 도스토예프스키로 끝 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반대도 있으며, 문학을 끼고 성장하여 나중에 철학으로 넘어갈 수도 있고 또 그 반대도 있으니, 길은 수백 가지다.
그러나 책을 통해 스스로를 도야하고 정신적으로 성장해 나가고자 하는 데는 오직 하나의 원칙과 길이 있다. 그것은 읽는 글에 대한 경의 이해하고자 하는 인내, 수용하고 경청하려는 겸손함이다.(이것은 비단 책읽기만 해당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나의 생각) 그저 시간이나 때우려고 읽는 사람은 좋은 책을 아무리 많이 읽은들 읽고 돌아서면 곧 잊어버리니, 읽기 전이나 후나 그의 정신은 여전히 빈곤 할 것이다. 하지만 친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듯 책을 읽는 사람에게 책들은 자신을 활짝 열어 온전히 그의 것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읽는 것은 흘러가거나 소실되지 않고, 그의 곁에 남고 그의 일부가 되어, 깊은 우정만이 줄 수 있는 기쁨과 위로를 전해주리라.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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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좋은 작품들과 아니 진정한 독서와 평생 멀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문학작품. 노래 기행문, 관찰문 등 무엇이건 자기 마음에 드는 것으로 시작해 유사한 다른 것들로 점점 확장하도록 하자.
서론은 이 정도면 충분하리라. 세계문학의 고귀한 전당은 노력하는 모든 이에게 활짝 열려 있다. 그 풍성함에 기가 질릴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양이 아니기 때문이다. 평생 열댓 권의 책만 끼고 살아도 진정한 '독자들이 있다. 또 온갖 것을 다 집어삼키고 모든 것에 대해 한 마디씩 거들 줄 알지만 그 모두가 허사인 경우도 있다. 교양 Bildung이란 무엇인가 '양성하는'bilden 것, 즉 인격과 인성의 도야를 전제로 한다. 그것이 없다면, 그래서 알맹이가 빠진 채 공허하게 이루어진 교양이라면, 거기에서 지식은 생길지 몰라도 사랑과 생명은 나오지 못한다. 애정이 결여된 독서, 경외심 없는 지식, 가슴이 텅빈 교양이란 정신에게 저지르는 가장 고약한 범죄 중 하나다.
그럼 본격적으로 시작해보자. 무슨 학문적 이상이나 완벽함에 대한 부담감 없이, 오랜 세월 책과 벗하면서 살아온 내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이상적인 세계문학 도서목록을 몇 쪽에 걸쳐 간략하게 적어볼 참이다. 그에 앞서 책을 대하는 데 실질적인 주의사항 몇 가지만 살펴보자.
책이라는 이 불멸의 세계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사람이라면, 곧 책의 내용뿐 아니라 책 자체와도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된다. 책 읽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입도 해야 한다는 요구는 설교처럼 되풀 이되는 말이지만, 오랜 애서가이자 적잖은 장서를 소유한 사람의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책을 사는 것은 비단 서점상이나 작가들을 먹여살린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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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건 늘 다른 문학사에서 내용을 베껴오게 마련이니, 그 모든 걸 다 읽기엔 인생이 너무 짧지 않은가?
고백하건대 어쩌면, 도무지 읽기 힘든 어설픈 번역문으로 밖에 접 할 수 없는 산스크리트 문학 최고의 작품 보다는 제 나라 시인의 아름다운, 전체 가락에서부터 미세한 파동에 이르기까지 속속들이 음미되는 좋은 시 한 편이 훨씬 더 나을 수도 있다. 또한 작가나 그의 작품에 대한 지식과 평가도 종종 상황에 따라 매우 달라지게 마련이다. 오늘의 우리가 우러르는 작가들 중에는 이십 년 전의 문학사에 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이들도 있다. (맙소사. 그러고 보니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다. 작가 게오르크 뷔히너 Georg Büchner 를 깜빡했다. <보이체크> Woyzeck. <당통의 죽음> Dantons Tod. <레온체와 레나> Leonce und Lena의 작가를 말이다! 그를 빼놓을 수야 없는 일이다!)
오늘날 우리가 독일문학 고전에서 중요하고 생명력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이십오 년 전의 문학 전문가가 불후의 명작으로 꼽은 것이 꼭 일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독일 대중이 셰펠의 <제킹겐의 나팔수>를 읽고 있을 때 학자들이 쓴 참고서적에는 테오도르 쾨르너 Theodor Körner 를 고전으로 추천해놓았다. 뷔히너는 이름도 없었으며 브렌타노는 완전히 잊힌 작가였고, 장 파울은 영락한 천재로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다! 마찬가지로 우리 자식과 손자 대에 이르면 지금 우리의 견해와 평가는 너무나도 뒤떨어진 것이 될지도 모른다. 아무리 박학다식하다 한들 여기에는 대책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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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국 서적들을 접한 지 벌써 수십 년이 흘렀지만 기쁨은 나날이 커져 그중 한 권씩은 대개 내 침대 머리맡에 둔다. 저 인도인들에게 결여되었던 것, 즉 삶에의 밀착, 최상의 도덕적 요구에 맞추기로 결단한 고결한 정신적 경지와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삶의 즐거움과 매력이 이루는 조화, 고상한 정신세계와 소박한 삶의 기쁨 사이를 폭넓게 오가는 것 등이 모든 것이 여기에는 넘치게 들어 있었다. 인도가 고행과 금욕으로 세상을 버림으로써 고귀하고 감동적인 경지에 이르렀다면, 중국은 본성과 정신, 종교와 일상이 대립이 아닌 상호 보완의 관계로 양자 모두 긍정되는 그러한 정신세계를 일구어냄으로써 인도 못지않게 비범한 경지에 도달했다. 극단적인 요구를 내세우는 인도의 금욕적 지혜가 청교도적인 젊은이라면, 옛 중국의 지혜는 분별력과 유머를 겸비한 노회한 어른이었다. 경험 때문에 좌절하지도 잘 안다고 무례히 굴지도 않는 그런 어른 말이다.
최근 두 세기 동안 독일어권 최고의 지성들이 이런 유익한 흐름을 잘 타고 왔는데, 대부분의 정신적 운동이 불처럼 일어나다가 금세 꺼지고 말았던 반면, 리하르트 빌헬름의 중국 관련 저서들은 잔잔한 가운데 지속적으로 영향력과 비중이 커졌다.
18세기 독일문학에 대한 편애, 인도 사상에 대한 탐색 그리고 중국의 사상과 문학을 점차 알아가는 과정을 따라 내 서재의 모습도 그때마다 변화하며 풍성해졌다. 또 다른 여러 가지 경험들과 정신적인 탐닉도 마찬가지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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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작품들을 쫓아가다 보면 점차 문학 전반에 해당되는 좀 더 상위의 원칙에 대한 감각을 갖추게 될 것이다.
내가 아는 어떤 평범한 기술자는 책장 가득 책을 모았는데 그 가운데에는 라베, 켈러, 뫼리케, 울란트 등의 작품이 다수 있었다. 그는 어떻게 이런 작가들을 알게 되었으며, 그 작품들을 소장하여 거듭 읽게 된 것일까? 어느 날 우연히 물건 포장지 대용으로 쓰인 베를린 일간지의 문예란 기사에서 어느 현대작가의 시 몇 줄과 짤막한 산문을 읽게 되었다고 한다. 이 글이 그의 마음에 와닿아. 그때부터 신문의 문예란을 주의 깊게 탐독하기 시작했고 이렇게 문득 일깨워진 재미와 동경에 힘입어 해를 거듭하면서 순전히 혼자 힘으로 울란트와 켈러에게까지 인도되어 갔던 것이다.
이것은 예외적인 경우이지만 어쨌든 그의 일례는 신문 읽기에서 출발하더라도 더 높은 차원으로 이르는 길이 있음을 일러준다. 물론 일반적으로 볼 때 신문은 책의 가장 위험한 훼방꾼 중 하나다. 적은 돈으로 일견 많은 것을 제공해주는 듯하면서 시간과 정력을 과다하게 잡아먹는다는 사실도 그렇지만, 그 주체성 없는 잡다함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고상한 독서능력과 취향을 망가뜨린다는 점은 더 큰 폐해다. 특히 신문 때문에 생긴 비난받아 마땅한 현대의 악습 중 하나는 논문이나 소설을 '연재' 형식으로 읽는다는 것이다. 모름지기 존경하는 작가의 글이라면 절대 그런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출판된 것을 사거나 아니면 최소한 그의 작업이 어지간히 이루어지기를 기다려 글 전체를 중단 없이 읽을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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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하면 되고, 신간들의 경우 대개 서점에 가면 살펴볼 수 있다. 또 책을 그다지 많이 사지 않더라도 바지런한 서적상과 정기적으로 연락을 주고받기를 권한다. 서적상들을 폄하하여 헐뜯는 이들이 왕왕 있는데 이는 부당한 처사다. 그들은 책에 관한 조언과 안내, 추천 도서목록, 부정확하거나 잘못 알려진 책 제목의 확인, 기타 등등의 크고 작은 일들을 통해 독자들은 물론이고 우리의 정신생활 전반에 실로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다.
어떤 책을 읽고 구입해야 할지에 대해 정해진 조언이란 없다. 각자 자신의 생각과 취향에 따르면 된다. 백 권 혹은 천 권의 '최우수 도서목록'을 작성하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지만, 이는 개인소장 도서와는 전혀 무관하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독자가 꼭 갖추어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편견이나 선입견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다. 간혹 총명한 이들이 말하길. 시를 읽는 것은 시간낭비요 사춘기 소녀들한 테나 어울리는 일이라고 한다. 그런 이들은 대개 교훈적이고 학문적인 도서만 읽어야 한다는 견해다.
그러나 어느 시대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결국은 교훈과 학문의 보고를 운문의 형식으로 담아두지 않았던가! 수많은 시와 동화와 희곡들에는 무수한 교훈서들보다도 훨씬 심오하고 가치 있고 일상의 삶에 도움이 되는 내용이 얼마나 많은가? 한편 학문적 저작들 가운데에도 그 내용과 문체가 최고의 문학작품 못지않게 독특하고 참신하고 생생한 것들이 있다. 단테와 괴테의 작품을 마치 철학서처럼 읽을 수도 있고, 디드로의 철학 에세이를 완결된 형식의 시로 읽을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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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다는 사실이야말로 장 파울이 죽지도 낡지도 않고 여전히 생생하 게 살아 작용하고 있다는 증거 아닌가?
자신의 취향에 대한 불안과 불신, 소위 전문가와 권위자들이 내리는 판단에 대한 터무니없는 존중은 대개 잘못된 것이다. 최우수 도서나 최우수 작가 100선 같은 건 세상에 없다. 절대적으로 정확한 비평이란 것도 없다. 경박하고 피상적인 독자라면 어떤 책에 흠뻑 빠져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다가, 나중에 다시 보면 그랬던 자신을 이해할 수 없어서 부끄러운 침묵을 지키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책과 친밀한 관계를 맺은 사람이라면, 그래서 그 책을 거듭 읽으면서 그때마다 새로운 기쁨과 만족을 느낀다면, 그는 오롯이 자신의 느낌을 믿을 것이며 어떤 비평으로도 자신의 그 기쁨을 망치지 않을 것이다. 평생 동화책만 즐겨 읽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린 자녀들에게까지 동화책을 못 읽게 하는 사람들도 있다. 정해진 규범이나 틀에 따르기보다 마음의 요구와 느낌을 따르는 사람이 늘 옳다. 온갖 것을 가리지 않고 다 읽는 사람들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신문 쪼가리라도 읽지 않고는 손에서 그냥 내려놓는 법이 없고, 마치 체에다 대고 물을 붓듯 종류를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읽어대면서도 도무지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병적인 탐독가들에게는 어떠한 조언도 소용이 없다. 그들의 경우 독서하는 방식이 잘못되었을 뿐 아니라 더 깊은 오류, 즉 전반적인 성격에 문제가 있어서 인간으로서도 격이 떨어진다. 아무리 기막힌 독서법이라 해도 그런 사람을 쓸모 있고 매력적인 인간으로 만들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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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문학과 예술 방면에 그다지 조예가 깊지 못한 평범한 사람 일지라도 소박하되 넘치는 애정으로 독서생활을 가꾸어 나가며 삶의 기쁨과 내면의 가치를 키울 줄 아는 진지함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리하여 별별 멋들어진 비평에 신경을 곤두세워 귀기울이기보다 흔들림 없이 내면의 요구를 따르고, 유행 풍조에 동요하기보다 자기 마음에 맞는 것을 충실히 지켜낸다면, 더 빠르고 확실하게 진정한 문학적 교양을 성취해낼 수 있을 것이다. 혹 미숙한 서생이나 이류의 작품을 읽을지라도 마음에 와닿는 점이 있을 테고, 계속해서 다른 작품을 찾아 읽으며 점점 예민해지는 감수성으로 더욱 순전하고 풍부하게 울리는 방향으로 따라가다 보면 마침내 대가들의 작품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 그때쯤 되면 진정한 대가를 제대로 아는 이가 의외로 드물고, 그 대가들의 후계자 중 보잘것없는 아류에 불과한 작가가 어쩌다가 이름이 알려져 모든 이들의 손에 들려 있구나 싶어 놀라움을 금치 못하리라. 켈러나 뫼리케 슈 토름, 야콥센, 베르하렌 휘트먼 등의 독창적인 대가들을 이렇듯 스 스로 발견해낸 사람이라면, 그 어떤 박식한 전문가보다도 이 작가들을 더 잘 알고 깊이 향유할 것이다. 그런 발견은 스스로 찾아낸 길과 자기 판단력에 대한 신뢰를 더욱 공고히 해줄 뿐 아니라, 그 자체로 근사하고 순수한 기쁨이다.
독서도 다른 취미와 마찬가지여서, 우리가 애정을 기울여 몰두할수록 점점 더 깊어지고 오래간다. 책은 친구나 연인을 대할 때처럼 각각의 고유성을 존중해주며, 그의 본성에 맞지 않는 다른 어떤 것도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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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무분별하게 후닥닥 해치우듯 읽어서도 안되며, 받아들이기 좋은 시간에 여유를 갖고 천천히 읽어야 한다. 섬세하고 감동적인 언어로 쓰여서 무척 아끼는 책들이라면 때때로 낭독하도록 한다.
외국문학 작품이라면 가급적 원어로 음미하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도에 지나치거나 너무 엄격하게 굴어서도 안 되겠다. 해당 언어에 능통하여 술술 읽지 못할 바에는 굳이 원전을 붙들고 씨름하느니 좋은 번역으로 읽는 편이 훨씬 낫다. 단테나 셰익스피어, 세르반테스 등을 원어로 읽을 줄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작품에 매료되지 않는가?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을 찾아 온갖 문학작품을 기웃거리며 오늘은 페르시아의 동화, 내일은 북구의 전설, 모레는 미국의 그로테스크 현대문학을 탐욕스럽게 전전하는 것은 실속 없고 위험할 따름이다. 인내심도 안정감도 없이 사방팔방 입맛을 다시면서 제일 맛있고 최고로 향긋하고 특별한 것만 취하려고 하는 사람은 묘사의 아취나 문체에 대한 감각을 망쳐버리게 된다. 그런 독서자는 종종 세련되고 성숙한 예술 애호가처럼 보이지만 거의 대부분이 소재적인 측면 아니면 주변적인 특징을 집어내는 데에 그친다. 이런 성급함과 끝없는 사냥질을 하느니 차라리 정반대로 한 작가, 한 시대, 한 사조의 작품 들을 오랜 시간을 두고 섭렵하라. 철저히 알아야 진정으로 소유하게 된다. 들썩이는 호기심으로 온갖 시대 온 나라 문학의 별별 습작과 수준미달의 작품들을 꿀꺽꿀꺽 집어삼킨 이보다, 우수한 네 나라 작가 서너 명을 반복하여 완벽하게 읽은 사람이 훨씬 더 풍요로우며 많은 것을 깨우치게 된다. 머릿속 가득 수천 궈너의 책제목과 작가의 이름을 공허하게 떠올리는 것보다 몇 권 안되는 책일망정 속속들이 알아 그 책들을 손에 집어드는 순간 그것을 읽던 수많은 시간들의 감동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편이 더 귀하고 만족스러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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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짝 놀라서 그가 모자를 깜빡 잊고 나왔나 보다. 하고 혀를 차겠지요. 그런데 다음 날 보니 그런 사람이 둘이나 되고 그다음엔 열 명 쯤이 그러고 다닌단 말입니다. 그러면 이제 젊은이들이 모자가 없거나 깜빡 잊어서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벗고 다닌다는 걸 알게 되죠. 그러면 당신은 언짢아집니다. 그들이 관습을 파괴했으니까요.
사실 젊은이들로서는 모자를 더 이상 쓰지 않을 여러 이유를 댈 수 있을 겁니다. 건강상의 이유로 그런다면 그나마 낫다고 하겠지요. 유행 때문에 그럴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사실 이해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그런가 보다 하며 넘길 겁니다. 또 좀 튀어 보이려고 여자들의 눈길을 끌려고 그럴 수도 있겠지요. 여기 좀 봐라. 나 이 정도면 꽤 근사한 녀석 아니냐. 건강한 구릿빛 얼굴에 멋진 머리 칼 아니냐고 뻐기고 싶어서 말이죠. 이 경우라면 모자를 쓰지 않는 이들은 모든 노인과 허약자, 대머리와 추남들의 적이 될 겁니다. 하지만 이런 건 다 참을 수 있습니다. 건강 때문에 유행이 바뀐다면 그거야 용인할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좀 잘난 척하고 싶어서, 늙은이들은 절대로 따라 할 수 없는 걸 과감하게 저질러보는 것도 도저히 못 봐줄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정말 문제가 되는 건 꼬인 심사로 바라볼 때입니다. 그러니까 나이 들고 허약한 사람, 보수주의자, 대머리, 옛날식만 추종하는 사람이 모자 없이 다니는 젊은이들을 개인적으로 연관시켜, '틀림없이 나를 약 올리려고 저러고 다니는 거겠지!라고 생각하게 되면, 그때는 모든 게 고약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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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이여' 라고 시를 쓴다면, 당신에게는 이 말이 깊은 내면의 진정과 신성함을 의미할 수 있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뭔 헛소리냐 할 겁니다. 오늘날의 젊은 시인들이 딱 그런 셈입니다. 그들은 낡은 상징, 느슨해진 형식, 폐기된 이상에 너무나 신물이 나서 너무나 뻔하고 관습적이고 구태의연하기 보다는 차라리 이해불능이 되겠다는 겁니다. 그리하여 각자가 가진 자기 나름의 성역을 마치 만인에게 통하는 양 마음대로 설정하는 겁니다.
게다가 이들 젊은 사람들은(안타깝게도 당신은 소홀히 했지만) 모두 정신분석 같은 걸 한차례 겪었지요. 자기 무의식의 표현을 엄청나게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법을 그들은 배웠답니다. 그들은 그 정도까지 나아갔고, 스무 살이 자기 세계관을 완결된 것으로 여기 듯 자신들의 정신분석을 완결된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실 분석의 후반부는 아직 갖추지 못했지요. 아직 전반부도 겪지 않은 당신이야 물론 전반부고 후반부고 간에 아무것도 없지만.
케베스 : 그 전반부 후반부라는 게 다 뭡니까?
테오필로스 : 오, 친구여, 분석의 전반부가 가르쳐주는 건 우리 스스로가 하나의 온전한 개인이라는 인식입니다. 우리 아버지 세대와 입법자들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과 완전히 상반된 권리와 힘과 충동들을 인정함으로써 말이지요. 말하자면 이 절반은 우리를 모반자로 만듭니다. 하지만 후반부에 가면, 우리 스스로가 인류의 일부임을 자각하게 되고, 그리하여 인류를 거스르지 않고 그 궤도를 기꺼이 함께 밟아나갈 때에 비로소 개인의 최고 만족 또한 찾을 수 있음을 통찰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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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그의 행위를 표현하는 '중대하게'라는 말은 결국 기만행위를 일컬으니, 절반은 반어적인 의미로 쓰인 것이다. 왜 여태 그 생각을 못했나 싶었지만 문득 시험 삼아 문장을 한 번 뒤집어보는 간단한 실험을 해봄으로써, 나는 비로소 핵심에 좀 더 가까이 파고들게 되었다. 뒤집으니 이런 문장이 되었다" 작가의 소임이란 중대한 것을 단순하게 말하는 일이 아니라 단순한 것을 중대하게 말해주는 것이다." 보라 그러자 또 하나의 새로운 진리가 내 앞에 있었다. 뒤집어놓 자 문장은 오히려 형식상 더 나아졌다. 왜냐하면 '중대하다'는 단어 가 원래의 문장에서는 슬쩍 의미를 갈아탔던 데 반해, 이제는 앞뒤로 동일한 의미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불현듯 알게 된 사실은, 문장을 뒤집자 셰퍼의 진리가 원래 말했던 것보다 훨씬 더 참되고 훌륭해졌다는 점이다. 이제야 모든 게 명백해졌다. 물론 셰퍼의 문장 자체도 전과 다름없이 여전히 타당하고 멋졌다. 셰퍼의 극에서 볼 때 말이다. 하지만 내가 취한 반대극에서 보면 역전된 문장은 그야말로 전혀 새로운 힘과 온기를 띠며 빛을 발하고 있었다.
셰퍼의 말인즉슨, 작가의 소임이란 임의의 사소한 것을 마치 대단한 것인 양 꾸며내는 일이 아니라 진정으로 가치 있고 중요한 것을 소재로 선택해 가능한 한 단순하게 기술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내가 뒤집어놓은 문장은 말하자면 이렇다
"작가의 소임이란 무엇이 중요하고 대단한지를 결정하는 일이 아니다. 뒤죽박죽인 세상에서 후세의 독자들 대시 취사선택을 해 오로지 가치가 있고 진정으로 즁요한 것만 골라 일러주는 무슨 훈육교사 노릇도 아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다. 작가의 소임은 아무리 사소하고 별 볼일 없는 것에서도 무변광대 한 것을 인식하고, 신은 어디에나 존재하며 만유에 깃들어 있다는 보물 같은 지식을 끊임없이 발견하고 일러주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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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이들이 전쟁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폭력과 총질로는 아무 소용없다는 점, 전쟁과 폭력은 복잡 미묘하고 민감한 문제들을 너무나도 상스럽고 어리석고 잔혹한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시도라는 점이다.
그리고 도스토예프스키와 니체를 선구자로 하여 프로이트가 첫 삽을 뜬 새로운 심리학이 젊은이들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이러한 것이리라. 개성의 해방과 본능적 충동을 신성시하는 것은 하나의 길의 초입에 불과하며, 개인의 최고 자유는 인류의 한 부분인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여 얽매이지 않는 정신으로 인류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그런 자각이 없는 개인의 자유는 하찮고 사소할 따름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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