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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독서정리

스물 일곱 번째 책 : 라면을 끓이며 - 김훈

by 마파람94 2021. 7. 8.

얼마 전 무라카미 하루키의 산문 두 편을 읽었습니다. 이번에는 우리나라 작가인 김훈의 산문 한편을 읽게 되었는데, 라면을 끓이며입니다. 두 나라의 대표적인 작가들의 산문을 접하니 두 사람의 뚜렷한 대조를 새삼스럽게 느끼게 됩니다.

 

김훈 작가의 글은 글쓴이의 생각의 무게의 추가 단어와 문장에 무겁게 녹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편으로는 묵직하게 다가오는 글들에 가볍게 지나칠 수 없다는 생각마저 들게 합니다.

 

그 묵직한 무게를 간직하고자 밑줄들을 가져와 봅니다.

 

 

p. 30 라면을 끓이며 

불을 쓰면, 대체로 실패하지 않는다. 식성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나는 분말수프를 3분의 2만 넣는다.

나는 라면을 조리할 때 대파를 기본으로 삼고, 분말수프를 보조로 삼는다. 대파는 검지손가락만한 것 10개 정도 하얀 밑동만을 잘라서 세로로 길게 쪼개 놓았다가 라면이 2분쯤 끓었을 때 넣는다. 처음부터 대파를 넣고 끓이면 파가 곯고 풀어져서 먹을 수가 없이 된다. 파를 넣은 다음에는 긴 나무젓가락으로 라면을 한 번 휘젓고 빨리 뚜껑을 덮어서 1분~1분 30초쯤 더 끓인다. 파는 라면 국물에 천연의 단맛과 청량감을 불어넣어 주고, 그 맛을 면에 스미게 한다. 파가 우러난 국물은 달고도 쌉쌀하다. 파는 라면 맛의 공업적 질감을 순화시킨다.

그 다음에는 달걀을 넣는다. 달걀은 미리 깨서 흰자와 노른자를 섞어놓아야 한다. 불을 끄고 끓기가 잦아들고 난 뒤에 달걀을 넣어야 한다. 끓을 때 달걀을 넣으면 달걀이 굳어져서 국물과 섞이지 않고 겉돈다. 달걀을 넣은 다음에 젓가락으로 저으면 달걀이 반쯤 익은 상태에서 국물 속으로 스민다. 이 동작을 신속히 끝내고 빨리 뚜껑을 닫아서 30초쯤 기다렸다 가 먹는다. 파가 우러난 국물에 달걀이 스며들면 파의 서늘한 청량감이 달걀의 부드러움과 섞여서, 라면은 인간 가까이 다가와 덜 쓸쓸하게 먹을 만하고 견딜 만한 음식이 된다.


 

p. 31 라면을 끓이며 

나는 이 모든 것을 스승 없이 혼자서 수많은 실험과 실패를 거듭하며 배웠다. 레시피를 읽고 따라 한 것이 아니다. 앞으로도 새롭게 열어나가야 할, 전인미답의 경지가 보이기는 하지만 라면 조리법 개발은 이제 그만하려 한다

나는 라면을 먹을 때 내가 가진 그릇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비싼 도자기 그릇에 담아서 깨끗하고 날씬한 일회용 나무젓가락으로 먹는다.

라면을 끓일 때, 나는 미군에게 얻어먹던 내 유년의 레이션 맛과 초콜릿의 맛을 생각한다. 라면을 끓일 때 나는 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양계장의 닭들과 사지를 결박당한 과수원의 포도나무 사과나무 배나무들과 양식장에서 들끓는 물고기들을 생각한다. 라면을 끓일 때 나는 사람들의 목구멍을 찌르며 넘어가는 36억 개 라면의 그 분말수프의 맛을 생각한 다. 파와 계란의 힘으로, 조금은 순해진 내 라면 국물의 맛을 36억 개의 라면에게 전하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한눈을 팔다가 라면이 끓어 넘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라면의 길은 아직도 멀다.


p. 47

땀이 흐른다.

정화암, 백정기, 이하유, 이을규, 이정규는 내 아버지가 가장 존경했던 상해 시절의 선배들이다. 아버지의 표현에 따르면 그들은 "불타는 투혼의 아나키스트였다. 아버지는 가끔씩 이 선배들의 묘역에 가서 '선생님을 부르며 풀을 쥐어뜯고 울었다. 나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그 선배들의 무덤 가까이에 아버지의 유택을 마련해드렸다. 지난 한식 때 심은 잔디가 잘 퍼져 있다.

기도한다.

주여 망자에게 평안을 주소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광야를 달리는 말


p. 61 바다 

장 향기로운 살을 저장한다. 대게를 먹으면서 그 고달픔과 향기의 관계를 생각했다. 대게의 꿈과 가오리의 꿈과 인간의 꿈이 만나는 자리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런 난데없는 생각들이 내 마음을 스치고 지나갔다. 울진에서 나는 늘 세상 구경 처음 하는 사람처럼 이리저리 쏘다니며 기웃거렸다

울진은 맑은 땅이다. 저절로 이루어진 것들의 숨결이 울진에는 보존되어 있다. 아, 봉평신라비 국보 242호)의 글씨체는 얼마나 맑고 순결한가. 서예가 하나의 양식으로 고정되기 이전의 맑음과 천진함이 그 글씨체 속에 살아 있다. 글씨들은 수줍게 웃고 장난친다. 울진에서는 바다 쪽으로 시선이 열리고 콧구멍도 열려서 들이마실 공기와 빛이 얼마든지 생겨난다. 갈 곳 많고 먹을 것 많고 들여다볼 것이 많아서, 나는 노느라고 나의 작업을 다 마치지 못했다. 인간의 놀이터는 무한 강산이라는 것을 나는 울진에서 알았다.

죽변등대는 내 아침산책의 끝이었다. 등대는 희고 군더더기가 없고 깔끔했다. 과장되거나 모자라는 구석이 없었다. 단 정한 등대였다. 죽변등대는 20초에 한 번씩 섬광을 발한다. 죽변등대의 섬광은 37 킬로미터까지 뻗어나간다. 20초 1섬 광'은 죽변등대의 개별성이다. 지구 상의 모든 등대들 중에서 죽변등대만이 '20초 1 섬광'이다. 


p. 63 바다 

이 섬을 드나드는 빛은 비스듬하다. 아침의 빛은 멀리서 오고 저녁의 빛은 느리게 물러가서 하루의 시간은 헐겁고 느슨하다. 이 섬의 빛은 어둠과 대척을 이루지 않는다. 빛이 어둠을 몰아내지 않고 어둠이 빛을 걷어가지 않는다. 빛과 어둠 은 지속되는 시간의 가루들을 서로 삼투시켜가면서 교차되는데, 그 흐름 속에 시간과 공간은 풀어져서 섞여 있다. 어둠에 포개지는 빛이 비스듬히 기울 때 풍경은 멀고 깊은 안쪽을 드러낸다. 빛은 공간에 가득 차지만 공간을 차지하지 않고 빈 것을 빈 것으로 채워가면서 명멸한다. 만조의 바다 위에 내리는 빛은 먼 수평선 쪽이 더 찬란하다. 그 먼 빛들의 나라로 들어가면 그 나라의 빛은 더 먼 나라에서 빛나고 있을 터이다. 그래서 빛의 나라는 무진 강산이다. 밀물은 마을 앞 방조제 턱밑까지 바싹 달려들고 썰물의 갯벌은 수평선에 포개진다. 빛은 물 위에 내려앉지만 물을 디디지는 않는다. 밀물 때 먼 나라의 빛들은 물에 실려서 심으로 들어오고, 물이 빠지면 붉은 석양의 조각들이 갯벌 위에 떨어져서 퍼덕거린다. 이 섬에서는 빛이 공간 속을 드나드는 모습과 바닷물이 시간 속을 드나드는 모습이 닮아 있다. 이 흐름 속에서 시간과 공간, 어둠과 밝음, 채움과 비움처럼, 인간이 세계의 골격으로 설정해 놓은 개념들은 스스로 소멸한다. 


p. 68 밥

위에 나무판을 깔고, 거기에 바지락과 호미, 꼬챙이, 고무장화를 싣고 노인들은 그 무게에 의지해서 집으로 돌아온다. 몸의 무게와 짐의 무게가 서로 기대면서, 석양에 긴 그림자를 이끌고 몸과 짐이 함께 이동한다. 손자가 자라서 유모차를 졸업하자 손자의 유모차를 밀고 다니는 노인도 있었다. 허리가 굽은 노인은 남성보다 여성 쪽이 훨씬 더 많다. 여자들은 생리, 출산, 하혈, 수유눈물로 피와 육즙을 모두 빨려서 그렇게 꼬부라진 것이라고, 젊어서 마누라 속 많이 썩인 늙은 어부가 말해주었다. 어부의 말은 의학적으로 타당하게 들렸다

섬의 유모차들은 모두 물건을 실을 수 있도록 바구니를 붙였고, 헐거워진 이음새를 고무줄로 고정시켰다. 유모차는 아이와 노인 사이를 건너가면서 용도 변경에 따른 외양을 갖추고 있었다. 그 유모차도 2톤짜리 어선처럼 불가결한 것들만으로 구성되어서 무거운 것들을 가벼운 표정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섬에서, 소형어선의 엔진과 작은 물고기의 내장과 노인들의 유모차는 동일한 계통발생에 놓여 있다.

안개 낀 봄날 저녁에 한 60대 사내가 아내를 태운 휠체어를 밀면서 갯벌로 뻗은 뚝방길 저쪽 끝으로 가고 있었다. 그 사내는 휠체어 포켓에서 물병을 꺼내서 아내의 입에 대어주었고, 수건으로 입을 닦아주었다. 


p. 77 남태평양 

늙은 여자를 나는 망원경으로 관찰한다. 망원경 속에서 생활은 영원하다. 저물어서 늙은 농부가 경운기를 몰아 집으로 돌아갈 때 나는 느낌으로 가득 차서 여관으로 돌아간다. 내 느낌은 대부분 언어화되지 않는다

다윈(1809~1882)의 행복은 그가 과학자의 언어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1831 년 겨울에 젊은 다윈은 비글호를 타고 영국 포츠머스 항을 떠나서 남미 해안, 마젤란 해협, 갈라파고스, 타히티, 뉴질랜드, 호주, 아프리카 남단을 돌면서 자연과 생명을 관찰하고 분석하고 기록했다. 그 여행기가 비글호의 항해다. 다윈은 여행에 대한 낭만적 환상이 없었다. 그의 여행은 자유나 일탈이 아니었다. 그는 포괄적인 관찰과 정밀한 과학의 언어로 멸종과 현존 사이의 수억 년을 건너간다. 다윈의 새들은 멸종을 잇대어가며 수억 년의 시공을 건너가고 있다. 그 시공 속에서 스스로를 변화시키지 않고서 살아남을 수 있는 생명은 없다.

비글호의 항해는 5년이 걸렸다. 비글호는 전장 27미터, 무게 240톤, 쌍돛대 범선에 대포가 10문 장착되어 있었다. 비글 호는 영국 해군의 측량선으로 그 임무는 전 세계를 돌면서 경도를 측정해서 땅과 바다의 올바른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었다.


p. 81 남태평양 

추크는 225 킬로미터의 원형 환초로 둘러싸여서 대양 속의 호수와 같다. 그 안에 80여 개의 화산섬이 흩어져 있다. 환초 안은 수심이 40미터 정도지만 환초 밖은 1천 미터가 넘게 깊어진다. 섬 둘레의 물가에 잘피 숲이 우거져 있고 그 수초의 이파리 사이에서 온갖 기묘한 무늬를 가진 작은 물고기들 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물안경과 호흡기를 쓰고 물 속을 들여다보았다. 작은 물고기들의 나라는 꿈같았고, 이 세상이 아니었다. 물고기가 이동할 때 몸의 색깔은 산호와 수 초의 색깔에 맞게 변해갔다. 그것들의 무늬와 생김새는 하늘의 별보다도 더 다양했고, 그것들의 몸놀림은 정과 동 사이에 경계가 없었다. 영롱하고 발랄한 목숨들이었다.

"물고기들은 왜 저마다 저러한 무늬를 갖게 되는가를 젊은 과학자들에게 물어보았다. "그것이 종의 특수성이다"라고 과학자들은 대답해주었다. 그 대답은, 그 질문처럼 답답한 인간의 언어였다. 갈라파고스 군도에서 다윈은 섬마다 서로 다 른 생물군이 살고 있고, 거북이 등 껍데기의 무늬와 두께와 생김새도 섬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갈라파고스의 그 많은 종들은 거기서부터 1천 킬로미터쯤 떨어진 아메리카 대륙의 생물들과 친연성을 갖는다는 것을 다윈은 알았 다. 그것은 인간이 자연을 인식해온 역사에서 놀라운 전환이었다.


p. 138 : 밥

사랑과 열정으로 더불어 그하루하루가 무사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복은 아니지만, 그래도 복 받은 일이다. 사람의 죽음을 가까이서 지켜본 일이 있었다. 연기가 빠져나가듯이, 생명은 가뭇없이 빠져나갔다. 생명은 본시 연기나 바람 같은 기체가 아니었을까. 생명이 빠져나간 육신은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고, 죽어가는 육신의 눈을 떠서 마지막 이승을 한동안 바라보더니 눈을 감았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이승의 마지막 풍경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아직 살아 있는 나는 죽어가는 그를 바라보았고 그는 마지막 망막의 기능으로 아직 살아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의 마지막 망막에 비친 살아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마지막 망막에 비친 살아 있는 나의 모습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죽어가는 그와 마찬가지로 한 줌의 공기나 바람은 아니었을까.

그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무서웠다. 그와 나는 마지막 시선을 교환하면서 작별했고 차가운 흙구덩이로 들어가야 하는 것은 오로지 그의 몫이었다. 그리고 또 나의 몫이기도 할 것이었다. 다 똑같이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야 하지만그 무서 움은 공유되는 것이 아니고 각각 저마다의 몫일뿐이다.

나는 춥고 어두운 흙구덩이로 들어가야 할 일이 무섭다. 그래서 살아 있는 동안의 무사한 하루하루에 안도한다. 행복에 대한 내 빈약한 이야기는 그 무사한 그날그날에 대한 추억이다.


p. 171 세월호 

풍랑이 없는 바다에서 정규 항로를 순항하던 배가 갑자기 뒤집히고 침몰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그 원인과 배경이 불분명한 사태는 망자의 죽음을 더욱 원통하게 만들 뿐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의 삶을 공허한 것으로 만든다. 망자들이 하필 불운하게도 그 배에 타서 죽음을 당한 것이라고 한다면, 살아 있는 모든 사람들의 삶은 아무런 정당성의 바탕이 없이 우연히 재수 좋아서 안 죽고 살아 있는 꼴이다. 삶은 무의미한 우연의 찌끄레기 잉여물, 개평이거나 혹은 이 세계의 거대한 구조 밑에 깔리는 티끌처럼 하찮고 덧없다. 이 사태는 망자와 미망자를 합쳐서 모든 생명을 모욕하고 있고, 이 공허감은 참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이 우발적이라는 공허감, 보호받을 수 없고 기댈 곳 없다는 불안감은 사람들의 마음을 허무주의로 몰아가고, 그 집단적 허무감은 다시 정치적 공략의 대상이 되고 있다.

세월호 침몰의 원인이 선박 불법 증축, 과적, 고박 불이행, 평형수 부족, 급변침 등이었다는 정부의 조사 결과 발표는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이것은 결국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를 무시했기 때문에 배가 빠졌다는 것이다. 밥을 굶으면 배가 고프 고, 심장이 멎으면 사망에 이른다는 말이다. 


p. 175 세월호 

천하의 공물일진대 그 자리를 내놓는 것이 어떻게 사태를 책임지는 일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책임을 진다는 것은, 지게꾼이 지게를 진다는 말이 아니다. 자리를 내놓고, 감옥에 가고, 할복을 하고 분신을 해서 지옥에 간들 이미 그 해악이 세상에 퍼져버린 사태에 대해서 책임을 질 수는 없다. '책임을 진다'는 행위는 사실상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는 말은 쫓겨났다는 뜻이고, 그 쫓겨남으로써 아무것도 책임지지 못한다. 그것은 무의미한 빈말이다. 그 공허함은 “세월호는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를 무시했기 때문에 침몰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틀린 말이 아니로되, 하나 마나 한 말이다. "기업이 해고를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라는 말도 모두 그러한 것인데, 그 명석함에 가려진 폭력성이 세상의 강자로 행세하고 있다.

주어와 술어를 가지런히 조립하는 논리적 정합성만으로는 세월호 사태를 이해할 수도 없고 진상을 밝힐 수도 없을 것이다. 또 이 사태를 객관화해서 3인칭 타자의 자리로 몰아가는 방식으로는 이 비극을 우리들 안으로 끌어들일 수가 없다. 나는 죽음의 숫자를 합산해서 사태의 규모와 중요성을 획정하는 계량적 합리주의에 반대한다. 


p. 177 세월호 

직면하기를 두려워한다면 우리는 뉘우침의 진정성과 눈 물의 힘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함석헌 (1901~1989)은 말했다.

눈에 눈물이 어리면 그 렌즈를 통해 하늘나라가 보인다.

사람은 고난을 당해서만 까닭의 실꾸리를 감게 되고

그 실꾸리를 감아가면 영원의 문간에 이르고 만다.

 

뜻으로 본 한국 역사 한길사, 1977,444쪽

● 2015년 1월 1일 중앙일보에 실린 글과 같은 해 4월 10일 종합경제지 이 투데이'에 실린 글을 합쳐서 재구성했다.


p. 189

이는 돈이 없어서 죽었고 윤심덕은 그 돈이 설치고 다니는 세상이 더러워서 죽었다. 한갓 추상이며 껍데기에 불과한 것 그토록 무서운 구체성을 행사하고 결국 심청이가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 세상에서 윤심덕 또한 살 수가 없었던 모양이 다. 그러나 죽은 윤심덕은 그렇다 치고, 돈이 영영 없다면 우리는 또 어찌 살 수가 있겠는가. 결단코 못 산다.

돈은 순전히 그것을 소유한 사람의 사적인 주권에 복속되어 있을 때 가장 큰 주관적 효용을 갖는다. 음습한 골짜기를 흘러 다니는 돈은 실물을 지배할 뿐 아니라 인간의 판단과 가치, 정치적 이해관계까지도 지배한다. 관리에게 돈을 먹이는 일을 '인사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 같은 정치관계의 표현이다. 어느 전직 대통령은 비서관을 불러서 "아무개 재벌 총수 요즘 잘 지내는지 궁금하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수백억을 긁어모을 수 있었다. 그 비서관이 재벌 총수에게 전화를 걸어서 "각하께서 당신의 안부를 묻고 계신다"라고 말하면 그 재벌 총수는 며칠 후 수백 억을 싸가지고 청와대로 들어와서 "자주 문안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코미디 대본이 아니라, 재판기록에 나오는 대사다. 이 대사 속에는 거 칠거나 덜떨어진 대목이 전혀 없다. 매끄러운 대사이다.




p. 198 : 돈

귀족이라고 욕해대고 있다. 쓰레기를 뒤진다고 서민이 아니고 쌍소리를 잘한다고 서민은 아닐 것이다.

서민이 선이고 귀족이 악인 것도 아니다. 가난뱅이가 선이고 돈 많은 자가 악인 것도 아니다. 그 반대도 아니다. 부자가 부자의 악덕에서 헤어나기 어렵듯이 가난뱅이에게도 가난뱅이의 악덕은 있다. 또 부자의 미덕이 있듯이, 가난뱅이의 미 덕도 있는 것이다. 인간은 전면적으로 선하거나 악하지 않다.

대통령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쌍소리를 찍찍 해대거나 쓰레기통을 쑤시고 다니면서 그것이 마치 귀족적 엄숙 주의를 까부수는 발랄함이나 낮은 처지의 삶에 대한 포용력인 것처럼 떠벌리는 꼴은 추악하다. 그렇게 뼛골 속부터 서민이고 서민이 그렇게 좋으면 서민으로 꾸역꾸역 일이나 하고 살면 되지, 대통령은 왜 하겠다는 것인가.

사회 전체가 감당해야 할 고통의 몫을 골고루 나누어서 짊어져야 한다는 정치 구호는 아름답다. '고통분담'은 IMF 위기를 통과하는 슬로건으로서 나무랄 데 없이 정의로웠다. 그러나 고통의 분담이란 사실상 이루어지기 어렵다. 고통은 누구를 막론하고 싫어하는 것이다. 아마도 고통을 분담해본 역사적 경험을 축적하지 못한 사회가 갑자기 위기에 처해서 고통의 분담을 실천하고, 그 실천으로써 위기를 극복하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p. 217 : 소방관의 죽음 

펌프차, 앰뷸런스, 사다리차, 화학차와 대원 20여 명을 인솔하고 11시 24분께 현장에 도착했다. 이 병력이 이날 진압 전투의 선착 대였다. 선착대가 도착했을 때, 2층 유리창 밖으로 쏟아져 나오는 화염과 연기가 3층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2층 유 리창들은 모두 다 방범용 쇠창살에 가로막혀 있었다. 3층 유리창도 대부분이 마찬가지였고 몇 군데 유리창에는 쇠창살 이 없었다.

쇠창살에 갇힌 사람들은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쇠창살이 없는 창문에서는 매연에 쫓긴 사람들이 곧 뛰어내릴 기세였다. "뛰어내리지 마라. 바람 쪽으로 머리를 낮추고 기다려라. 우리가 간다." 이규준 소방위는 핸드마이크로 3층을 향해 소리쳤다. 그러나 뛰어내릴지 말지는 소방관이 판단할 일이 아니라, 화염 속에 갇힌 사람들이 판단할 일이었다. 선착 대는 쇠창살 없는 유리창 밑 인도 위에 매트리스를 깔았다. 4명이 뛰어내렸다. 부상자는 없었다.

이규준 소방위는 구조대원에게 3층 옥내 진입을 명령했다. 홍갑석 소방교, 김종수 소방사 그리고 숨진 서형진 소방사가 굴절사다리를 타고 3층 창문으로 접근했다. 바스켓을 창틀에 밀착시키고 도끼로 방범 쇠창살을 부수었다. 굴절사다리는 세 번을 오르내리면서 16명을 지상에 내려놓았다. 


p. 264 : 몸

목소리를 통해서 내가 체험한 양희은의 여성성은 여자인 생명의 외로움을 버거워하면서도 힘겹게 감당해낸다. 그 여성성은 제도나 인습에 의해서 이미 정형화되고 이미 여성화되어버린 아름다움을 사절하고 있다. 사랑을 노래할 때, 양희은의 목소리는 그리움이나 기다림을 노래하기보다는 사랑과 더불어 와야 할 자유를 노래한다. 그래서 양희은 목소리의 쓸쓸함은 애절하지 않고 강력하다.

김추자는 어떤가. 김추자는 어지럽다. 김추자 목소리의 본질은 환각과 도발이다. 김추자의 여성성은 내연기관처럼 끊임없이 폭발하고 배기한다. 이 폭발의 절정이 음악적 기율로 통제될 때가 김추자의 가장 좋은 순간들이다. 사랑을 노래할 때 김추자의 목소리는 사랑을 손짓해 부르기보다는 사랑을 부르고 있는 자신의 내면을 가열차게 터뜨려버린다. 그래서 김추자의 노래는 때때로 상대가 없는 독백처럼 들린다. 이 독 백은 맹렬한 독백이다. 이것이 김추자의 도발이다

사실은, 심수봉 얘기를 하려고 이 글을 시작했다. 나는 젊 었을 때 양희은을 좋아했다. 좀 더 나이 먹어서는 김추자를 좋아했고 지금은 심수봉을 좋아한다. 나는 목소리를 통해서 심 수봉을 체험한다.


p. 269

하나의 음이 소멸하고 또 다른 음이 태어나 그 뒤를 물고 이어지면서 다시 소멸한다.

선율은 그렇게 해서 시간 위에 뜬다. 떠서 출렁거리면서 흘러간다. 선율이 흔들릴 때 세계는 흔들리고, 이 세계의 철벽 같은 강고함에는 구멍이 뚫린다. 그리고 그 흔들림 속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인간은 살아 있다. 없었던 세계가 홀연 시간 속에 등장하는 것이다.

음악은, 그리고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인간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결핍의 소산인 것만 같다. 스스로의 결핍의 힘이 아니라면 인간은 지금까지 없었던 세계를 시간 위에 펼쳐 보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상상력은 스스로의 결핍에 대한 자기 확인일뿐이다.

악기는 인간의 몸의 일부로써만 작동한다. 인간의 몸이 아니면, 그 악기로부터 소리를 끌어낼 수가 없다. 타악기는 팔의 "일부이고 관악기는 호흡의 일부이며 건반악기, 현악기가 다 몸의 일부이고 성악은 몸 그 자체이다. 그래서 모든 악기는 인간의 몸과 친숙하게 사귈 수 있는 물리적 구조로 태어난다.

가야금, 거문고, 기타,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하프 같은 현악기들은 인간의 몸에 안기기 편안한 구조를 갖고 있다. 연주자는 악기를 안거나 무릎 위에 올려놓고 켠다. 


p. 276 : 몸

사람이 알지 못하는 곳에서, 찌개가 저 혼자서 끓고 있다.

소파에 앉아서 부엌의 된장찌개가 끓는 소리를 들을 때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에서 끓고 있는 된장찌개로부터 소외되지 않는다. 나는 내 몸속에서 불과 물과 찌개 재료들의 밀고 당김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그 작동방식을 나는 안다. 내가 나무에 못을 박을 때 느끼는 삶의 작동원리를 다른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처럼 된장찌개는 저 혼자서 끓는 것인데, 이 격절은 연대된 격절이다. 아날로그의 원리가 이 격절에 연대를 부여한다. 한 줄로 잇닿게 하는 것이다.

여자 사랑하기를 좋아하는 내 바람둥이 친구는 "연애란 오직 살을 부비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아, 저렇게 간단한 것을 몰라서 이토록 헤매었다는 말인가 싶었다.

살은 오직 아날로그 방식으로만 작동한다. 나는 살의 아날로그를 자세히 쓸 힘이 없다. 그것은 아직도 내 언어의 힘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살의 아날로그는 언어와는 무관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언어의 반대말은 '살'이라고 나 는 생각하고 있다.


 

p. 285

성품이 의젓한 이 개는 까치들을 쫓지 않고 모른 척하고 딴 곳을 쳐다본다. 나는 이 개가 내세에 사람의 몸으로 태어나기를 부처님께 빌었다. 그래서 이 개의 이름을 보리'라고 지었다. 개 이야기를 하려다가 까치 이야기로 빠져버렸다. 늘 이 모양이다.

겨울 아침에 개를 데리고 산에 오르면 내 입에서도 허연 김이 나오고 개 콧구멍에서도 허연 김이 나온다. 그때 나는 내가 곧 개임을 안다. 개, 소, 말, 사슴, 노루가 새나 물고기보다 인간 쪽으로 더 가까운 것은 그들이 다 함께 포유류들이기 때문이다. 어미의 자궁에서 태어나서 어미의 젖을 먹고 자란 중생들은 개나 말이나 사슴이나 사람이나 다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마음의 바탕이 아마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바탕은 자궁으로부터 태어나는 일에 대한 연민일 것이다. 그래서 모 든 포유류들에게는 '인연'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존재하는 모양이다.

경북 영동의 소백산맥 속에서 자전거를 타고 놀다가 진짜로 개를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 그는 민주지산이 가까운 도마령 아래 산골마을의 포수 홍민표씨(36세)이다. 그는 사냥을 생계의 일부로 삼는 직업 포수다. 그는 사냥 나갈 때 개 다섯 마리를 데리고 간다. 이 개는 빛나는 혈통을 자랑하는 사냥개가 아니다.


p. 318 : 길

내 어머니는 서울 토박이 여자였다. 어머니는 가난했다. 사실 나는 어머니가 그 결핍과 적막을 어찌다 감당해내면서 자 식들을 기른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어머니는 가난했지만 경우 바르고 깔끔한 여자였다. 어머니는 자, 됫박, 저울 같은 도량형기를 존중하고 신성시했다. 쌀 됫박 밑바닥에 양초를 발라서 물량을 속이는 쌀장사와 저울 눈금을 속이는 푸줏간을 어머니는 증오했고, 동네 여자들과 합세해서 불매운동을 벌였다. 두부 한 모의 규격이 일정치 않아서, 콩값이 오르면 두부모가 작아졌는데, 어머니는 가게에서 두부모의 가로 세로 높이를 따졌다. 내가 심부름으로 석유를 사러 갈 때도 어머니는 주전자나 양철통을 들고 가지 못하게 했고 반드시 한 되들이 정종 병을 들려 보냈다. 정종 병은 투명해서 속이 들여다보였고 또 들이가 정해진 병이어서 석유가게에서 양을 속이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몇 살 때였던가 아마도 초등학교 상급반 무렵이었을 것이다. 제헌절 날 어머니는 새 옷을 주셨다. 어머니가 주신 새 옷은 새로 산 게 아니라 입던 옷을 빨고 깁고 다려서 주신 옷이었다. 운동화는 새로 사 온 것이었다. "법을 만든 날이다. 새 옷을 입어라"고 어머니가 말씀하신 것으로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p. 341

그러다가 어느 날 이가 아파서 치과에 갔다가 나는 그 철제 연장들을 보고 경악했다. 치과의사의 연장은 그야말로 쇠의 낙원이며 쇠의 절정이었다. 그것들은 연장이 수행해야 하는 기능과 연장의 생김새가 완벽하게 일치하고 있었다. 군더더기라고는 없었고, 모양과 기능의 일치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연장은 그것을 사용하는 인간의 마음과 그 인간이 작용을 가해야 할 대상 사이에서 완벽한 출동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치과의사의 연장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그 연장을 다루기 위해 치과의사가 되고 싶었다. 모든 연장에는 끝이 있고 날이 있고 손잡이가 있다. 연장은 손잡이로부터 끝과 날을 향해 전개된다. 손잡이는 인간의 쪽이고 끝과 날은 사물의 쪽이다. 쇠가 인간과 사물을 연결시켜, 사물을 개조할 수 있게 하고 썩은 이를 뽑을 수 있게 해 준다. 치과 의자 옆에는 완성된 쇠의 아름다움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나는 쇠의 아름다움을 들여다보면서 이를 뽑아야 한다는 두려움을 잊고 있었다.

나는 자전거 타기를 좋아한다. 자전거가 고장 나면 내 손과 내 연장으로 자전거를 분해해서 고칠 수도 있다. 자전거의 동력 전달장치 속에서도 쇠의 아름다움은 찬란하다. 


p. 346: 길

불은 물과 상극이지만 둘은 같은 성질을 갖고 있다. 물의 흐름은 지표 위에서 가장 자연스런 물리력의 유동이고 불의 흐름은 공기 속에서 가장 자연스런 화학력의 유동이다. 그것들은 모두 가장 자연스럽고 자유롭고 편안한 곳을 지향하고 있다. 그것은 좁은 곳에서 넓은 곳을 지향하며, 자신에게 가해지는 모든 외력에 순응하면서 그 외력을 넘어선다. 가마 안은 벽으로 구획되어 있고 그 벽에는 불구멍(살창구멍)이 뚫려 있다. 불들은 그 구멍을 통해서 구획을 넘어간다.

벽의 중심 부분에 뚫린 구멍은 작고, 가장자리로 갈수록 구멍의 크기는 커진다. 불길을 가마의 가장자리로 유도함으로써 가마 전체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한 개 한 개의 그릇이 아니라 가마 전체를 '구워내기 위한 인공적인 장치였다. 불은 그 구멍을 통해 가마 속을 흐르면서 흙과 물의 성질 속으로 삼투되어 흙과 물의 성질을 변화시킨다. 완성된 한 개 의 토기 속에는 불이 들어 있는 것이다.

물은 흙의 입자들을 서로 반죽시켜서 흙의 흩어진 알맹이들을 엉기게 한다. 흙은 물을 만나서 비로소 가소성을 갖는다. 물과 흙이 결합된 반죽은 물과 흙의 성질을 모두 지니고 있지만, 더 이상 물이나 흙이 아니다.


p. 358 :길

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옆집 매화나무가 더 아름답고 절실한 것이다. 나와 가까운 것들, 내 눈에 잘 띄는 것이 귀한 것이다"라고 말해본들 아이들이 그 말을 알아들을 리도 없다. 그래서 "올봄은 이미 늦었으니 내년 봄에 심자"는 정도로 얼 버무리고 넘어갔다. 나무를 심을 엄두는 못 내고, 일 년생 화초라도 몇 포기 마당에 심어서 아이들의 성화를 모면키로 하 고 동네 꽃가게에 갔다. 농협이 직영하는 대형 매장이다.

야생화는 한 포기에 5천 원씩이었고, 수입종이나 개량종은 2천 원씩이었다. 버려진 들판에 피어나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야생의 풀꽃들이 훨씬 더 비싸게 팔리고 있었다.

사람들이 버려진 것들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다. 배가 어느 정도 불러진 연후에야 그리고 화려하고 요란한 것들을 싫증 나도록 누린 연후에야 그 초라한 것들의 아름다움이 비로소 보이게 되는 모양이었다.

농협의 꽃 직판장은 꽃을 사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젊은 부부들은 어린아이를 올려 앉힌 손수레를 밀고 다니면서 꽃을 고르고 있었다. 무슨 꽃을 살 것인지 머리를 마주대고 소곤거리는 젊은 부부들의 모습은 꽃보다 아름다웠다.

아파트에서는 흙을 구할 길이 없다. 흙 한 줌을 구하려면 차를 몰고 멀리 교외로 나가야 한다.


p. 362 : 길

이쪽 길로 가자니 저쪽 길이 아까웠고, 저쪽 길로 가자니 또 그 너머의 길이 궁금해서 자전거는 갈 길을 정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굴러갔다. 구례에서 출발한 자전거는 섬진강 동쪽 19번 국도를 따라 내려가다가 강 건너 서쪽 산이 부르면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서 816번 지방도로를 따라 내려갔다. 이쪽에서만 저쪽이 보이고, 또 저 쪽에서만 이쪽이 보인다.

새잎 돋는 봄날의 강가에서, 사실 그런 의문들은 다 부질없고 한가한 것이다. 그저 막무가내로 닿을 수 없는 봄 속을 향해 달리면 그만이다. 어느 성인은 봄의 강가에서 득도했다고, 어렸을 때 읽은 책에 적혀 있었는데 나는 봄의 강가에서 미혹의 끝을 향해 바퀴를 굴려 나아간다.

꽃은 식물의 성적인 완성이며, 존재의 절정이다. 그래서 꽃은 스스로 자지러진다. 꽃에는 그리움이 없다. 꽃은 스스로 아무것도 그리워하지 않으면서 그 꽃을 바라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앞에 보이는 대상을 그리워하게 한다

나뭇잎은 한 조각의 이파리로서 스스로 자족하기보다는 온 산을 뒤덮는 연두의 바다로서 흔들리고 반짝인다. 어린아이 나 어린 강아지나 새로 돋아난 어린잎은 신생의 빛으로 영롱하다. 


p. 364 :길

향기는 어린애가 토해낸 젖의 곰삭은 향기다. 신선한 요구르트 냄새와 비슷하다. 은사시나무숲에 봄바람이 불 때, 이파리들은 바람의 방향에 따라서 일제히 나부끼면서 뒤집힌다. 그래서 은사시나무숲의 빛과 색깔은 그 숲을 스치는 바람의 풍향에 따라서 바뀐다. 봄의 숲들은 이 모든 빛과 색과 냄새의 대오를 거느리면서 여름의 강성함을 향해 나아간다. 온 산의 엽록소는 일제히 깨어나서 아우성친다.

식물학 책을 들여다보아도 엽록소의 정체와 탄소동화작용의 비밀을 알 수는 없었다. 빛을 빨아들여서 먹고살면서 빛과 더불어 살고, 빛과 더불어 아름다움을 뿜어내는 저 억겁의 이파리들은 복되다

하루 종일 봄산의 언저리와 강가를 자전거로 쏘다니고 나면, 내 피부에 나무처럼 엽록소가 생겨서, 밥벌이에 수고하지 않고도 빛과 더불어 온전히 살 수 있을 것 같은 환각에 빠진다. 그때 숲 속에서 오줌을 누면 초록색 오줌이 나올 것만 같다. 그러나 강가를 쏘다니며 적는 이런 글은 스스로 그 피부에 엽록소를 지니지 못한 자의 결핍이다.


p. 367

그것은 유전형질의 작용이라는 것이었다. 유전형질이 수박 속에서 작용해서 다른 색소를 퇴색시키고 빨간색을 모아나간다는 설명이었다. 그리고 그 향기는 '휘발성 물질'의 일종인데, 그 물질의 정체는 알 수 없고, 수박이 그 물질을 만들어가는 과정의 비밀 역시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향기는 공기 중에 떠다니는 것인데 이것을 '휘발성 물질'이라고 해봐야 동 의어 반복일 터이고, 유전형질의 작용이라는 말은, 수박이란 본래 그렇게 되어진 생명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어진다는 말과 별 차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이 궁색한 설명이야말로 수박의 축복이고 모든 과일의 축복일 것이었다. 색깔과 향기로 가득 차서 터질 듯이 팽팽해지는 것이 수박의 자연이다. 이 아름답고 불가해한 것이 한 번의 칼질에 두 쪽으로 열린다.

그러므로 수박을 먹을 때는 수박의 과육을 주사위처럼 오려내서 포크로 콕콕 찍어먹을 것이 아니라, 수박을 껍질째로 초승달 모양으로 잘라서 하모니카 불듯이 두 손으로 쥐고 좌 우로 밀어가면서, 입과 코와 가능하면 턱까지 모두 빨간 과육 속에 깊숙이 파묻고 손가락 사이로 과즙을 줄줄 흘려가면서 입을 크게 벌려 걸신들린 듯이 아귀아귀 먹어야 한다. 수박의 경이로움은 식물학자들도 설명할 수 없고 인간의 언어로 바꾸어놓을 수 없는 것이므로 이 축복에 동참하려면 입과 코를 깊숙이 박고 몸속으로 빨아들이는 것 이외에는 달리 아무런 방법이 없다.


p. 369

설명하기보다는 자두 한 개의 생김새와 맛과 기쁨을 온전하게 내 몸속에 간직하는 편이 보다 확실한 삶에 가까울 터이다.

무등산 수박이 다 익으면 여름이 끝난다. 무등산 수박은 메마른 산비탈의 돌밭에서 온 여름 내내 폭양을 쪼여가며는다. 무등산 수박은 햇볕이 뜨겁고 날이 가물수록 더 농밀한 빛깔과 향기와 수분을 끌어모아 연두색 껍질 속에 저장한다. 힘이 좋은 넝쿨에는 20킬로그램이 넘는 수박덩이가 서너 개씩 달려 있다. 메마른 땅과 뜨거운 햇볕은 여름 과일들의 고난이 아니다. 어디로 피서를 가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다가 온 여름이 다 지나갔다. 축복은 저 숨 막히는 무더위 속에 있었던 것임을 여름의 끝물에 한입의 과일을 깨물면서 문득 알게 된 다. 이 많은 과일들을 지상에 차려놓고, 힘센 여름은 이제 물러가고 있다.


p. 388 : 글

산세를 묘사하는데, 칠장산이 그 중심에 있고 거기서부터 다시 남북으로 산줄기들은 뻗어나가고 있다. 2003년에 경기도 가 촬영한 안성 지역 위성사진을 들여다보면 대동여지도 상의 한남금북정맥이 안성시 죽산면에서 높은 기세로 솟구치면서 인접 칠장산 쪽으로 다가오다가 다시 거기서 한남정맥과 금 북정맥으로 갈라져 남과 북으로 뻗어나간다" 경기도의 근현 대지도, 경기도, 2005) 아무런 장비가 없이 목측과 발걸음 만으로 강호의 표정을 살핀 이중환의 글은 산하의 대종大을 정확히 드러낸 것인데, 그 발걸음의 치열함을 가히 알 수 있다. 위성사진으로 들여다보는 안성의 산하는, 죽산에서 솟구치는 산세가 자진모리의 기세로 숨 가쁘게 뻗어나가면서 수많은 골짜기와 물줄기를 거느리고 있고, 그 사이에서 편안하게 자리 잡은 마을과 들이 물줄기를 맞이하고 있고, 산세가 숨을 죽이고 들이 시작되는 어귀에는 많은 저수지들이 박혀 있다

안성 지역에는 64개 소의 저수지가 있다. 이 숫자는 경기도의 다른 시군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이다. 화성 용인 지역은 50여 개 소의 저수지가 있지만 그 밖의 시군들은 1~20개 소의 저수지가 있을 뿐이다



p. 404 : 글

무명해 보였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 보일 아무런 이유가 없는 어떤 자연현상처럼 보였다. 그 여자는 다만 사위의 옥바라지를 나온 한 장모였으며, 감옥에 간 사위의 핏덩이 아들을 키우는 팔자 사나운, 무력한 할머니의 모습만으로, 오직 그런 풀포기의 모습만으로 그 교도소 앞 언덕에서 북서풍에 시달리며 등에서 칭얼대는 아기를 어르고 있었다. 그런 그 여 인네의 모습을 훔쳐보면서, 나는 아무것도 생각지 않기로 했다. 시대도, 긴급조치도, 국가보안법도, 무슨무슨 혐의도, 성 명서들도, 군법회의도, 김지하도 나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나는 다만, 그 여인네의 등에 매달린 아이가 발이 시 려우면 안 될 텐데, 그런 걱정만을 했다. 지방판 마감이고 유신 독재고 뭐고 간에 어서 빨리 저 여인네의 용무가 끝나서 그 "아이가 할머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 이 추운 언덕의 바람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만을 했다. 그러자 내 마음속에서, 나에게 없었던 따듯한 것들,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울음에 가까운 따듯한 것들이 돋아나고 있음을 느꼈다. 그것이 무엇이었던가. 나는 지금 그 20년 전의 따스함의 정체를 겨우 말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것은 나에게 감염된 그 여인네의 모성이었으며 허름하고 남루한, 그 풀포기와도 같은 무력과 무명의 모습이야말로 그 여인네의 힘의 모든 원천이었음을 가로등 하나 없는 교도소 앞 광장은 캄캄하게 어두워졌고, 기온은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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