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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독서정리

다섯 번째 책 : 정의란 무엇인가 - 마이클 샌들

by 마파람94 2021. 2. 8.

 

올해 다섯 번째 책을 읽었다. 밑줄 그은 부분을 옮겨와 본다.

 

'빼 때린다.' 라는 표현을 쓴다.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타격을 받고 정신이 바짝 들 때를 얘기할 때 표현이란 생각을 한다. 이 책은 말랑말랑한 '뇌 때린다.'라고 표현하고 싶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 하버드 대학교의 마이클 샌들 교수는 묻고 답을 하지 않고 계속되는 물음에 물음을 남긴다. 생각을 일으키는 책이다.

 

출처 : https://storage.googleapis.com/clio-images/68835.185453.jpg

 

 

• 76

행위가 된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있다. 믿음이 다르다는 이유로 다수가 소수를 박해한다면, 그 믿음을 인정했을 때 장기적으로 사회 전체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해도, 박해받는 개인에게는 부당한 일이 아니겠는가? 밀은 이 질문에도 대답한다. 그러나 이때는 공리주의적 도덕이라는 한계를 넘어선다. 믿는 관습이나 관례 또는 다수 의견을 따르라고 강요하는 행위는 잘못이라고 말한다. 그럴 경우, 사람들은 능력을 한 것 발휘해 삶의 최고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밑의 설명에 따르면, 순응은 삶의 적이다.

지각, 판단, 차별적 감정, 정신 활동, 나아가 도덕적 기호까지도 포함하는 인간의 능력은 선택하는 과정에서만 발휘될 수 있다. 관습에 따라 행동할 때는 선택이 끼어들 틈이 없다. 이 경우, 사람들은 최고를 분별하거나 합하는 것에서 경험을 쌓을 수 없다. 정신과 도덕도 근력과 마찬가지로 사용해야 좋아진다. (……) 세상이, 또는 내 몫에 해당하는 세상이, 내 인생 계획을 대신 선택해주기를 바라는 사람은 유인원처럼 흉내 내는 능력만이 필요할 뿐이다. 자기 계획을 자기가 선택하는 사람만이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다.

밀은 관습을 따르면 인생에 만족하면서 위험한 길로 빠지지 않고 살아갈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비교 가치가 무엇이겠는가? 무엇을 하느냐만 아니라 어떤 태도로 하느냐도 대단히 중요하다. 행동과 결과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인격도 중요하다. 

 

 

• 150

그럼에도 밀은 여러 생활방식 중에 더 고상한 것이 있다는 생각을 포기하지 않았다. 고상하게 사는 사람들의 만족도가 더 낮을지라도 그러했다. "고급 능력을 가진 사람은 그보다 못한 능력을 가진 사람보다 (.……)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행복해질 수 있으며, 어쩌면 더 심한 고생을 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저급하다고 여겨지는 존재로 떨어지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다.

 

왜 우리는 고급 능력이 필요한 삶을 포기하고 저급한 만족을 느끼며 살려하지 않을까? 밀은 그 이유가 "자유와 개인의 자립에 대한 애정" 과 관련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가장 적절히 표현하는 말은 존엄이며, 인간이라면 누구나 어떤 형태로든 존엄하다"고 결론짓는다.

 

그러나 칸트에게 주목하는 이유는 비단 그의 역사적 영향력 때문만은 아니다. 칸트의 철학을 훑어보기란 처음엔 엄두가 나지 않지만, 그의 철학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도덕과 정치에 관한 사고방식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따라서 칸트를 이해하는 것은 철학을 이해하는 일일 뿐 아니라, 공적 삶의 핵심 사고방식을 살펴보는 일이기도 하다.

 

칸트는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했는데 이는 현대의 보편 인권 개념을 예고한 것이다. 나아가 자유에 대한 그의 설명은 정의를 주제로 한 오늘날의 논쟁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이 책 도입부에서. 정의를 이해하는 세 가지 방식을 구별해 소개했다.

 

그중 하나가 공리주의 시각으로, 이에 따르면 정의의 개념을 규정하고 무엇이 옳은 일인가를 결정하려면 사회 전체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두 번째는 정의를 자유와 연관시키는 시각으로, 자유지상주의자들이 관련 예시를 제시한다. 이들은 소득과 부의 공정한 분배란 규제 없는 시장에서 재화와 용역의 자유로운 교환이라고 말한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시장을 규제하는 행위는 개인의 선택의 자유를 침해하기에 부당하다.

 

세 번째는 정의란 사람들이 도덕적으로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을 받는 것. 즉 재화를 분배해 미덕을 포상하고 장려 하는 것이라는 시각이다. 뒤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살펴보면 (8장) 알겠지만, 미덕을 기초로 삼는 사람은 정의를 좋은 삶에 관한 고찰과 연관 짓는다.

칸트는 첫 번째 시각(행복 극대화)과 세 번째 시각(미덕 장려)을 거부한다. 둘 중 어느 것도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정의와 도덕을 자유와 연관시키는 두 번째 시각을 열렬히 옹호한다.


 

• 215

가족의 도움을 받고 교육도 많이 받은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분명 유리하다. 모든 사람에게 경기에 참가할 기회를 주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애초에 출발선이 다르다면 그 경기는 공정하다보기 힘들다. 기회 균등이 공식적으로 보장되는 자유시장에서 소득과 부가 공정하게 분배된다고 생각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고 롤스는 주장한다. 자유지상주의 체제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는 부당함은 분배되는 몫이 도덕적 관점에서 볼 때 대단한 임의의 요소에 부적절하게 영향을 받는 상황을 허용한다는 점" 이다. 

이 불공정을 수정하는 방법 하나는 사회적, 경제적 불이익을 바로 잡는 일이다. 공정한 능력 위주 사회라면 단지 형식적인 기회 균등에만 기대지 않고 다른 조치들을 취하려고 노력한다. 이를테면 교육 기회를 고르게 제공하여,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도 풍요로운 가정에서 자란 학생과 똑같은 기반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한다. '헤드 스타트' 프로그램(저소득층 아동의 교육을 지원하는 국가적 프로그램 - 옮긴이), 아동 영양 보건 프로그램, 교육과 직업 훈련 프로그램 등을 실시해 모든 사람 계층이나 가정환경에 상관없이 똑같은 출발선에 설 수 있도록 힘쓰는 것도 좋은 예다. 능력 위주라는 개념에 걸맞게 자유시장에서 소득과 부가 공정하게 분배되려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재능을 개발할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모두 똑같은 출발선에 서서 경기를 할 때라야 승자도 포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230. 정의란 무엇인가

무하마드 알리가 대한 권투선수가 될 수 있는 기술을 타고났다는 사실은 결코 공평하지 못하며, (..) 무하마드 알리가 하룻밤에 수백만 달러를 벌어들이는 능력을 가졌다는 사실도 분명 공평치 못하다. 그러나 평등이라는 추상적 이상을 추구하느라. 알리가 하룻밤 경기에서 벌 수 있는 돈이 하층 사람이 부두에서 하루 동안의 비숙련 노동으로 벌 수 있는 돈보다. 많아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알리를 보며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불공평한 일이 아니겠는가? 

롤스는 <정의론》에서, 프리드먼의 견해에 반영된 자기 위안 식 조언을 거부한다. 그는 격앙된 어조로, 우리가 잊기 쉬운 익숙한 진실 을 이야기한다. 즉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은 마땅히 존재해야 하는 방 식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재능이 분배되는 방식과 사회 환경의 우연성이 부당하다는 이유로 제 도를 강제하는 것은 언제나 문제가 있게 마련이며, 그러한 부당함은 인 간의 합의에도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거 부해야 한다. 더러 부당함을 간과하는 구실로도 이용되는 그 주장은 부 당함을 묵인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태도와 똑같이 취급한다. 자인의 분배 방식은 공정하지도, 불공정하지도 않다' 간이 태어나면서 특정한 사회적 위치에 놓이는 것 역시 부당하지 않다. 그것은 단지 타고나는 요소일 뿐이다. 공정이나 불공정은 제도가 그러한 요소들을 다루는 방식에서 생겨난다.

롤스는 우리가 그러한 요소를 다룰 때, "서로의 운명을 공유하고" "우연히 주어진 선천적이거나 사회적인 환경을 [자신을 위해] 이용하려면 그 행위가 반드시 공동의 이익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데 동의하자고 제안한다. 롤스의 정의론이 궁극적으로 성공하는 실패 하든, 그 이론은 미국 정치철학이 아직 내놓지 못한, 좀 더 평등한 사회를 옹호하는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임에 분명하다.

 

 

 

 

• 241 : 소수집단 우대정책 논쟁

다양성 논리를 내세우는 이들은 입학 허가를 수혜자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목적을 실행하는 수단으로 본다. 다양성이란 공동선이라는 명분을 내세운 논리다. 이때의 공동선은 학교의 공동선이자 사회의 공동선이다.

 

우선, 학생들 사이에 여러 인종이 고루 섞여 있으면, 출신 배경이 비슷한 학생들끼리 모여 있을 보다 서로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어 무척 바람직하다. 학생들이 모두 특정 지역 출신이라면 지적·문화적 시야가 제한될 수 있듯이, 인종·민족·계층이 모두 동일한 경우 역시 그러할 것이다.

 

둘째로, 여건이 불리한 소수집단 학생들을 교육해 핵심 공직이나 전문 직에 나아가 지도력을 발휘하게 한다면, 대학은 지역 발전과 공동선에 더 크게 기여할 수 있다.

다양성 논리는 대학에서 흔히 내세우는 논리 중 하나다. 텍사스 법학전문 대학원장도 흡우드의 반발에 직면했을 때, 학교의 소수집단 우대정책이 시민사회의 목적에 기여하는 바를 언급했다. 이 대학의 사명 하나는 텍사스 법조계에 다양성을 늘리고, 흑인과 히스패닉이 정부와 법조계에서 지도력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다. 그는 이 점에서 이 대학 법학대학원의 소수집단 우대정책이 성공을 거두었다고 밝혔다. '우리 학교를 졸업한 소수집단 학생들이 유명한 법률사무소에서 일 하고, 공직에 임명되어 텍사스 입법부에서 일하거나 연방 판사로 재직 중이다. 텍사스의 주요 관직에 소수집단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대개 우리 학교 출신일 정도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배키 소송을 심리할 때, 하버드 대학은 법정 조언자 자격으로 소견서를 제출해, 교육을 근거로 소수집단 우대정책을 변호했다. 하버드 대학은 소견서에서, 학업 성적과 시험 점수가 입학 심사의 유일한 기준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했다. "학문적 우수성이 유일한 또는 지배적 기준이라면, 하버드 대학은 활기와 지적 우수성을 상당 부분 잃을 것이며, (….) 모든 학생에게 제공되는 교육의 질도 떨어질 것이다. 과거에는 다양성이라고 하면 "캘리포니아, 뉴욕, 매사추세츠에서 온 사람들, 도시 거주자와 시골 소년들, 바이올린 연주자와 화가와 축구선수들, 생물학자와 역사학자와 고전학자들, 앞으로 증권거래인과 교수와 정치인이 될 사람들로 구성된 학생들을 일컬었다. 그러나 하버드 대학은 이제 인종적·민족적 다양성도 고려한다.

아이다호에서 온 시골 소년은 보스턴 사람이 내놓을 수 없는 것을 하버드 대학에 제공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흑인 학생은 백인 학생이 내놓 을 수 없는 것을 제공할 수 있다. 하버드 학생이 경험하는 교육의 질은 학생들의 성장 배경의 차이와 거기서 오는 시각 차이에 영향을 받는다.

다양성 논리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두 가지 반박을 내놓는다. 하나는 현실적 반박이고, 또 하나는 원칙적 반박이다. 현실적 반박은 소수집단 우대정책의 효과에 의문을 품는다. 인종별 우대정책은 다원화 사회를 활성화하거나 편견과 불평등을 줄이기보다는 소수집단 학생 들의 자부심을 훼손하고, 모든 집단이 인종을 더욱 의식하게 만들며, 인종 간의 긴장을 높이고, 자신도 행운을 누려야 할 사람이라고 느끼는 백인들의 분노를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실적 반박은 소수집단 우대정책이 부당하다는 게 아니라, 그 정책이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고 득보다는 해가 많으리라는 주장이다.


 

• 311.

매킨타이어는 이 문제에 대단히 설득력 있는 답을 제시한다. 그는 <덕의 상실>이라는 책에서, 우리가 도덕적 행위자로서의 목적과 목표에 도달하는 방법을 설명한다. 매킨타이어는 인간을 자발적 존재로 보는 시각의 대안으로 서사라는 개념을 개시한다. 인간은 이야기하는 존재다. 우리는 서사적 탐색으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에 대답하려면 그전에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 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매킨타이어가 관찰하기에, 모든 체험된 서사에는 특정한 목적론이 깃들어 있다. 이는 외적 권위가 부여한 고정된 목적이나 목표가 있는 뜻이 아니다. 목적과 예측 불능은 공존한다. "허구의 서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우리도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삶에는 미래로 나아가게 하는 특정한 형식이 있다." 

삶이란 특정한 통합이나 일관성을 갈망하는 서사적 탐색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갈림길에 마주쳤을 때, 우리는 완전한 삶, 내가 관심을 갖는 삶으로 이끄는 길을 찾아내려 애쓴다. 도덕 고민은 내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 내 삶의 이야기를 해석ㅎ 는 것에 가깝다. 여기에는 선택이 끼어들지만, 그것은 해석에서 나오는 선택일 뿐, 의지에서 나오는 절대적 행위가 아니다. 내 앞에 놓인 어느 길이 내 삶의 궤적과 가장 잘 어울리는지는 나보다 남이 더 분명히 알 수도 있다. 도덕적 행위자를 서사로 설명하는 방식에는 이 한 가능성을 허용하는 미덕이 있다.

이 설명은 내 삶이 속한 더 큰 삶에서는 도덕적 고민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가를 보여주기도 한다. 매킨타이어는 이렇게 쓴다. "나는 개인이라는 '자격'만으로는 결코 선을 추구하거나 미덕을 실천할 수 없다." 내가 속한 이야기와 타협할 때만이 내 삶의 서사를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매킨타이어에게 도덕적 고민의 서사적 또는 목적 본 주민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그랬듯이) 전체의 일부라는 소속과 밀접히 연관된다.

우리는 누구나 특정한 사회적 정체성을 지닌 사람으로서 자신을 둘러 환경을 이해한다. 나는 누군가의 아들이거나 딸, 또는 사촌이거나 삼촌이다. 나는 이 도시나 저 도시의 시민이며, 이 조합 아니면 저 조합의 회원이다. 나는 이 친족, 저 부족, 이 나라에 속한다. 따라서 내게 이로운 것은 그러한 역할과 관련된 사람들에게도 이로워야 한다. 이처럼 나는 내 가족, 내 도시, 내 부족, 내 나라의 과거에서 다양한 빚, 유산, 적절한 기대와 의무를 물려받는다. 이는 내 삶에서 기정사실이며 도덕의 출발점이다. 또한 내 삶에 도덕적 특수성을 부여하는 것이기도 하다.

매킨타이어는 서사적 설명이 현대의 개인주의와는 맞지 않는다는 점을 기꺼이 인정한다. "개인주의 관점에서 보자면, 나는 내가 되기로 선택한 사람이다. 개인주의자들의 시각으로는 도덕을 고민하려 면 내 정체성과 부담을 제쳐두거나 제거해야 한다. "내 나라가 한 일에 대해서는 내가 그 책임을 떠맡기로 직간접적으로 선택하지 않은 이상 내 책임은 없다. 이 같은 개인주의는 현대의 미국인에게서도 볼 수 있는데, 이들은 미국 흑인에게 나타나는 노예제의 영향을 보고도 일체의 책임을 부인하면서 '나는 한 번도 노예를 소유한 적이 없다 고 말한다." (매킨타이어가 이 글을 쓴 시기는 헨리 하이드 의원이 배상에 반대한다고 천명때보다 20년 이상 앞선다는 점을 주목하자.)

 

• 327

첫 번째 이유는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내세울 수 있다. 그러나 두 번째 이유는 그 전쟁에 책임이 있는 나라의 시민들 만이 느끼고 외칠 수 있다. 스웨덴 사람도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면서 그 전쟁은 부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오직 미국 사람만이 그 경 쟁을 부러워할 수 있다.

자부심과 수치심은 정체성을 공유한다는 전제에서 나오는 도덕 걸 정이다. 미국인이 외국을 여행하다가 볼성 사납게 행동하는 미국인과 마주쳤을 때, 개인적으로는 그를 모를지언정 당혹스러울 수 있다. 다른 나라 사람이 그 행동을 보았다면 역시 눈살을 찌푸렀겠지만 당혹스러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족이나 동료 시민의 행동에서 자부심과 수치심을 느끼는 감수 은 집단적 책임감을 느끼는 감수성과 연관된다. 둘 다 우리 자신 어딘가에 소속된 자아로 인식하게 한다. 즉 우리는 자신의 선택과 상관없이 도덕적으로 한데 묶여 있으며, 우리를 도덕적 행위자로 민 는 서사에 연관된 사람들이다.

자부심과 수치심이라는 윤리와 집단적 책임이라는 윤리가 이 밀접히 연관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보수 정치인들이 개인주의 근거로 집단적 사죄를 거부하는 모습에는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하이드, 존 하워드를 비롯해 앞서 언급한 정치인들이 그러했다). 개인은 자신의 선택과 행동만 책임지면 그만이라고 고집한다면, 우리나 역사와 전통에 자부심을 느끼기는 어렵다. 다른 곳에 사는 누구 미국 독립선언서, 헌법,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 알링턴 국립묘 잠든 영웅 등을 존경하거나 감탄할 수는 있다. 그러나 애국적 지 을 느끼려면 세월을 뛰어넘어 공동체에 소속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 370

공적 영역이 잠식되는 것이 문제라면, 해결책은 무엇일까? 공동선을 추구하는 정치는 시민 삶에 기반이 되는 시설들을 재건하는 것을 일차 목표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민간 시설의 소비를 늘리기 위한 재분배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부유한 사람들에게서 세금을 걷어 공공기관과 공공서비스를 다시 일으킴으로써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똑같이 그것을 이용할 마음이 생기게 할 수 있다.

앞선 세대는 연방정부의 고속도로 정책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했 고, 그 덕에 미국인들은 전에 없던 개인적 기동성과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자가용, 도시 팽창, 환경 문제, 공동체를 좀먹는 생활방식에 의존하게 되었다. 우리 세대도 시민의 삶을 개선하는 중요한 기반시설에 투자할 수 있을 것이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모두 아이를 보내고 싶어지는 공립학교, 상류층 통근자를 끌어들일 대 중교통 체계, 그리고 보건소, 운동장, 공원, 체력단련장, 도서관, 박 물관처럼 사람들을 닫힌 공동체에서 끌어내 민주 시민이 공유하는 장소로 모이게 하는 시설 등이 그것이다.

불평등이 시민에게 미치는 결과와 그것을 바로잡을 방법에 초점을 맞춘다면, 비슷한 소득 재분배 주장으로는 불가능한 바람직한 정책을 찾아내 사람들의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분배 정의와 공동선의 연관성을 강조할 수도 있다.

좋은 삶에 관한 문제에 공적으로 개입하는 행위는 시민의 삶을 침해하는 행위이자 자유주의적 공적 이성의 범위를 넘어서는 행위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우리는 흔히 정치와 법은 도덕적, 종교적 논쟁에 휘말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압과 배타성을 우려해서다. 일리 있는 우려다. 다문화 사회의 시민들은 도덕과 종교에 이견을 보인다. 앞에서 주장했듯이 정부가 이러한 이견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기란 불가능하지만, 적어도 상호 존중을 바탕으로 한 정치는 가능하지 않을까?

내 생각으로는 가능하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익숙한 정도보다 좀 더 적극적으로 시민의 삶에 개입해야 한다. 최근 10~20년간 우리는 시민의 도덕적· 종교적 신념을 존중한다는 것은 (적어도 정치적 목적에서는) 그 신념을 모른 척하고, 방해하지 않으며, 공적 삶에서 그것을 가급적 언급하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런 식의 회피에서 나온 존중은 가짜이기 십상이다. 그런 태도는 도덕적 이견을 회피한다기 보다는 억누르는 쪽에 가깝다. 그러다 보니 반발이나 분노를 유발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공개 담론을 줄이고, 이 뉴스에서 저 뉴스로 숨어 다니며 추문이나 자극적인 기사 또는 시답잖은 소식에 매달린다.

도덕적 이견에 좀 더 적극적으로 개입한다면 상호 존중의 토대를 약화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더 강화시킬 수 있다. 우리는, 동료 시민이 공적 삶에서 드러내는 도덕적 종교적 신념을 피하기보다는 때로는 그것에 도전하고 경쟁하면서, 때로는 그것을 경청하고 학습하면서 더욱 직접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어려운 도덕 질문을 공개적으로 고민한다고 해서 어느 상황에서든 합의를 끌어낼 수 있다거나, 심지어 타인의 도덕적 ·종교적 견해를 평가할 수 있다고 장담하긴 어렵다. 도덕적, 종교적 교리를 더 많이 알수록 그것이 더 싫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해보기 전까지는 어찌될지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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