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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와 일상

김수영 :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by 마파람94 2020. 12. 5.

나는 공대를 졸업했다. 공부했던 대부분의 교과 과목이 인문학으로 대표되는 문학(시, 소설), 역사, 철학과는 무관한 과목으로 대학 생활을 보냈다. 사실 전공과목의 대표 격인 3대 역학(열-유체, 구조, 동역학)과 공업 수학이라는 곳에 함몰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문학의 이해'라는 과목을 수강했다. 한 한기 2학점 교양 선택과목이었지만 그 때문에 오늘 글을 쓰고 있는 김수영 시인의 시를 알고 있다.

 

오늘 어쩌다 인터넷에 시인 김수영의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를 읽었고 '기억저장'을 위해 얼른 글로 옮겨와 본다. 지금 이 시를 읽으면서 든 생각인데, 20대 대학 생활 때 느꼈던 그 느낌 그것(?)과 세월이 지난 지금의 느낌이 공통분모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 사실 그것 때문에 지금 글을 쓰고 있다.

 

긴 여운과 얘기를 짧게 하자면, 여전히 짧은 싯 구절에 그때나 지금이나 마음이 동 한다.-사실 지금이 더 그렇다. 시를 한 번 들여다 보자.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王宮 대신에 王宮의 음탕 대신에
五十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 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二十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第十四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을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二十원 때문에 十원 때문에 一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一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시집 {거대한 뿌리}, 1974)

 

 

남한산성 행궁 photo by maparam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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