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님의 글을 처음 접합니다.
책을 읽을 때면 느끼는 것인데 대가의 문장은 어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치 동네에서 아는 분이 이번에 큰 맘먹고 출간한 수필집처럼 부담 없고 편안한 문장들을 만났습니다.
그녀의 글을 다음번에 다시 찾게 될 것 같은 예감입니다.
며칠 전엔 순전히 맛을 찾아 몇 시간을 허비한 적이 있다. 잡곡밥에 우거짓국을 잘한다는 집은 강북의 서쪽 끝에 있었다. 우리 집은 강남의 동쪽 끝이다. 용건이 있어 우리 집 근처 다방에서 만난 몇몇 친구 중의 하나가 앞장을 섰는데 그 친구는 길눈이 밝은 편이 못 됐다. 또 서너 명씩 몰켜 서있을 때, 택시 잡기가 얼마나 힘들다는 건 세상이 다 아는 바고 해서 우리는 버스와 전철을 번갈아 타고 그 동네 근처에서 비로소 택시를 잡을 수가 있었다. 길눈 어둔 친구 때문에 기사 아저씨로부터 들입다 지청구를 맞아가며 천신만고 당도한 우거짓국집은 문이 닫혀 있었다.
납작하고 허술한 양기와집 대문에 붙은 '일요일은 영업을 안 합니다'라는 팻말 앞에서 우리는 맥이 풀렸지만 괜히 비죽 비죽 웃음이 났다. 일요일을 쉴 수 있다는 게 먹고살 만해졌다는 소리로 들렸고 그런 외진 동네에서도 맛의 특색만 지키면 먹고살만하다는 게 유쾌했다. 무려 두 시간이나 걸려서 허탕을 치고만 우리는 어지간히 시장했다. 그러나 뱃속은 아무거로나 채워주기보다는 맛을, 맛 중에서도 우리 맛의 진수를 맛보길 잔뜩 고대하고 있었으므로 다시 길고 긴 순례길에 올랐다. 이번엔 서울의 동쪽 끝을 벗어난 광주군에 있는 백반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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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꿈처럼 독창적인 것
요행 중형 택시를 잡을 수가 있었고 요금을 좀 더 주기로 했다. 그 집도 일요일엔 영업을 안 하면 어쩌나 걱정이 안 되는 것도 아니었지만 내친김에 가는 데까지 가보리라는 묘한 오기는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켜 아무도 못 말릴 기세였다. 다행히 그 집은 월요일 날 쉰다고 했고 많은 손님이 붐비고 있었다. 맛있게 배불리 먹고 난 값은 어찌나 싼지 그날 들인 교통 비의 반도 안 됐다. “미쳤어, 배보다 배꼽이 크잖아", 이렇게 뇌까렸지만 후회는 아니었다.
굉장한 호강을 한 기분이었다. 싼 음식을 찾아서도, 영양가나 사치스러운 분위기를 취해서도, 이만저만한 데서 식사해보았노라고 자랑하기 위해서도 아닌 순전히 맛을 찾아 불원천리 했다는 건 얼마나 큰 호강인가.
요새는 좀 덜해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장 호화판 식사로 몇몇 호텔의 뷔페를 꼽았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데서 식사를 할 때처럼 자신을 궁상스럽게 느낄 적도 없었다. 남이 내 든 내가 내든 간에 비싼 음식값이 부담이 돼서 많이 먹어야지 벼르게 되고 즐비한 영양식 중 어떤 게 시가로 더 비쌀까 계산까지 해가며 손해를 덜 보여 드니 가뜩이나 양도 크지 않은데 식욕이 날 리가 없었다.
내 나름으로 누리는 기쁨 25
숙부한테 하던 다음과 같은 말이다.
"시상에 두엄데미만도 못한 무지랭이허구 고드름처럼 쌀쌀 허기루 소문난 양반집 며느리허구 어드렇게 배가 맞았을까."
어찌나 육감적인 말투로 그 말을 했던지 나는 진저리를 치면서 이불속에서 귀를 틀어막았다. 그때 내가 두려워한 건 그다음에 두 분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나나 보다도 내 속에서 마음대로 번성하는 성적인 상상력이었다.
그 후 나는 오랫동안 그 말을 잊지 못했다. 소설가가 된 후로는 그 말을 잊지 못했다기보다는 그 말에 시달려왔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고향인 개성상인 얘기를 써보고 싶다고 생각해 연로한 고향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도움말을 청하고 자료를 수집하면서 소설이 될 만한 소재를 몇 개 얻었건만 이상하게도 그걸 따로 독립시킬 수가 없었다. 결국은 두 엄더미만도 못한 무지렁이와 고드름 같은 대가댁 며느리의 정염을 기둥 줄거리로 한 채 무수한 곁가지를 모아들인 데 지나지 않았다. 너무 오래 가지를 키웠나 보다. 장장 오천 장이 넘는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요새 거의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고 있는 『미망』이 바로 그것이다. '미망'이라는 제목도 개성 특이한 정신의 맥을, 억울하게 당한 걸 결코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가 새로운 기운으로 승화시키는데 있다고 본 내 나름의 견해와 열다섯 살 적에 들은 후 도저히 잊어버릴 수 없는 한마디 말에 대한 부담감이 복합된 것이다.
대부분의 내 소설은 도저히 잊어버릴 수 없음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미망(未忘)에서 비롯된 것들 43
나이까지 건강하게 살았으니 장수의 복은 충분히 누렸다고 생각한다. 재물에 대한 미련은 없지만 내가 쓰고 살던 집과 가재도구를 고스란히 두고 떠날 생각을 하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나의 최후의 집은 내 인생의 마지막 여행 가방이 아닐까. 내가 끼고 살던 물건들은 남 보기에는 하찮은 것들이다. 구식의 낡은 생활 필수품 아니면 왜 이런 것들을 끼고 살았는지 남들은 이해할 수 없는 나만의 추억이 어린 물건들이다. 나에게만 중요했던 것은, 나의 소멸과 동시에 남은 가족들에게 처치 곤란한 짐만 될 것이다. 될 수 있으면 단순 소박하게 사느라 애썼지만 내가 남길 내 인생의 남루한 여행 가방을 생각하면 내 자식들의 입장이 되어 골머리가 아파진다.
그러나 내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이 육신이란 여행 가방 안에 깃들었던 내 영혼을, 절대로 기만할 수 없는 엄정한 시선, 숨을 곳 없는 밝음 앞에 드러내는 순간이 아닐까.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을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내가 일생 끌고 온 이 남루한 여행 가방을 열 분이 주님이기 때문일 것이 다. 주님 앞에서는 허세를 부릴 필요도 없고 눈가림도 안 통할테니 도리어 걱정이 안 된다. 걱정이란 요리조리 빠져나갈 구멍을 궁리할 때 생기는 법이다. 이게 저의 전부입니다. 나를 숨겨준 여행 가방을 미련 없이 버리고 나의 전체를 온전히 드러낼 때, 그분은 혹시 이렇게 나를 위로해주시지 않을까. 오냐. 그래도 잘 살아냈다. 이제 편히 쉬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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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꿈처럼 독창적인 것
아득한 태곳적 화산 폭발로 생긴 호수 위에도 인간이 그어놓은 국경선이 있다는 게 그닥 대수롭게 생각되지도 않았다. 인간사가 다만 미소하게 여겨지는게 우리를 자유스럽게 했다. 열정적인 송우혜는 여기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우리는 소리 높여 시시덕댔지 만강한 바람이 그 소리를 날렸다.
연길에 머무는 동안에 발이 넓은 동행들 때문에 동포들의 가정집에 초대받아 가서 식사를 할 기회가 많았던 것은 정말이지 큰 복이었다. 다들 꾸밈이 없이 소박하고 너그러웠고, 손님 대접에 극진했지만, 우리처럼 사교적인 계산이 들어 있지 않아 편안했다. 어떻게 그이들에겐 우리가 예전에 상실한 인간성의 원형이랄까, 마음의 고향의 맛 같은 것이 하나도 닳지 않고 그냥 남아 있는 걸까? 악착같이 경쟁하지 않아도 먹고사는 데에 지장이 없고, 여투어놓지 않아도 노후 걱정이 없는 체제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려입은 겉모양은 우리가 그이들보다 좀 나아 보일지 몰라도 마음은 훨씬 더 초라하고 밉다는게 나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비밀스러운 열등감이었다. 우리의 빈번한 왕래가 그 땅에 앞으로 유발시킬 소비의 욕구를 생각하면 우리가 바로 인간 공해라는 미안감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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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선하고 관대한 평화
또 덩달아서 눈물이 나왔다. 연변에서 그 이를 그쪽 발음으로 '리리화'라 부르면 더욱 여성적이고도 리 드미컬하게 들려 주로 농담을 할 때에 그렇게 불렀었다. 남자의 울음은 거의가 중국 사람인 선객들에게도 충격을 준 것 같았다. 저희들끼리 수군대며 일제히 우리에게 창가 자리를 내주었고, 눈빛에 깊은 연민이 어렸다.
분단된 민족에 대한 그이들의 적나라한 연민의 시선을 받으면서 나는 처음으로 우리가 중국땅에서 숱하게 뿌리고 다닌 연민을 같잖고도 창피하게 여겼다. 그이들이 우리보다 조금 못 입었다고, 조금 덜 정결하다고, 조금 작은 집에 산다고 여길 때마다 아끼지 않은 연민은 이제 그이들로부터 받고 있는 연민에 비하면 얼마나 사소하고도 천박스러운 것이었나.
돌이켜보니 우리 세 사람의 '호곡장'은 다 달랐지만 결국은 한 뿌리에 닿아 있었다.
* 이 글은 『한 길 사람 속』(박완서 산문집 8)에 '부드러운 여행'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으로, 여행과 여행자의 의미가 오롯하게 담겨 있기에 발표 당시의 원제를 살려 함께 실었다.
76 2부 선하고 관대한 평화
어찌 그리 선하고 관대하고 평화로워 보이는지. 그 나이라면 홍위병 시대는 물론 종교가 지금만큼도 자유롭지 못했을 온갖 시대적 역경을 겪었으련만, 그걸 다 이겨내고 신앙을 지켰다는 고집스러움이나 잘난 척하는 우월감이 조금도 없이 그저 어린양처럼 무방비 상태로 착해 보였다. 그 노부인은 내 한국말 인사를 듣더니 자기도 중국말로 인사를 하면서 팔을 크게 벌려 나를 포옹했다. 나는 그의 작은 가슴에 푹 파묻혀 평화로움을 느꼈다. 그리고 아, 이거였구나, 하는 어떤 깨달음 같은게 왔다.
해방이 되고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분들이 속속 돌아왔고, 우리는 그중 큰 두 어른, 이승만 박사와 김구 선생을 국부國父로 추앙했다. 한 분은 미국에서, 한 분은 상해를 거점으로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셨다. 한 분은 완전한 독립을 보기 전에 흉탄에 맞아 쓰러지셨고, 한 분은 대통령을 몇 번씩 연임했다. 두 분 다 아무것도 되기 전, 그냥 국부일 적에 미국서 온 분은 어딘지 우리 정서와 어긋나 거북하게 느껴지는 반면 중국서 온 분은 편안하고 저절로 존경과 사랑이 우러났다. 김구 선생의 장례식 날 라디오를 통해 들리던 국민들의 오열 소리를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집에서 엄마도 서럽게 따라 우셨다. 그런 차이가 그분들이 일생 몸 바친 독립운동을 비호해 준 땅 인심, 땅기운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처럼 느껴졌다.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미사였다.
상해와의 인연 91
분노, 경악, 가책 등의 격한 감정과 더위 먹은 것처럼 맥을 못 추게 늘어지기만 하는 육체와의 부대낌은 어쩔 수 없이 몸살기를 일으키고 있었다.
나는 부끄럽게도 내가 만약 어떤 불가피한 사정에 의해 일행과 떨어져 그 난민촌에 혼자 남아 하룻밤을 지내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차라리 죽는게 나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아무한 테도 그런 생각을 드러내지 않았건만 스스로 부끄러웠던 것은 국경 없는 의사회의 젊은 벨기에 의사의 의연한 태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거기서 일하게 됐냐는 우리의 질문에, 여기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어려움이 있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기 때문에 있을 뿐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어리석게도 자유의사에 의해서 그 일을 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했고, 그는 또 그렇다고만 간단히 대답했다. 세상에, 자유의사에 의하지 않고 누가 거기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 의사의 안내로 말기 결핵 환자를 수용하고 있는 캠프에 갔을 때의 생각도 났다.
환자들이 기침을 할 때는 고개를 돌리라는 주의 사항을 듣고 지레 겁이 나서 안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문가에 누워 있던 환자가 웃으면서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숨 쉬지 않는 땅 117
얄룽창포강은 생각보다 큰 강이었다. 대안의 나루터까지 흐름을 거슬러 사선으로 건너는 것 같았다. 게다가 배가 물속의 모래톱에 걸려 움직이지 않을 때가 잦아 누군가 물속으로 들어가 밀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더위를 견디기 위해 뱃전에 걸터앉아 발을 물에 담그는 사람도 생겨났지만 점점 심각해지는 허기증은 어째볼 도리가 없었다. 체질상 고프기도 잘하고 부르기도 잘하는 나는 뱃속이 무두질을 하는 것처럼 쓰렸다.
평범한 사람 중에도 난관에 봉착했을 때 그 진가를 발휘하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옛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구인救人'이 라고 해서 고해 바다 같은 인생에서 만나기를 소원해 마지않았고 그래서 토정비결 같은 데도 자주 등장시켜 왔다. 마침 우리 가운데 그런 구인이 있었다. 우리 일행은 석부장 빼고 열 명이었는데, 이 여행을 주선한 시인 민병일, 소설가 김영현과 이경자, 그리고 나까지 네 사람이 문인이고, 나머지 여섯 명은 치과의사도 있고 사장님도 있고 은퇴한 노부부 등 다양했지만 그때까지 우리하곤 서먹한 사이였다. 실은 그 여섯 사람이 짜놓은 여행 계획에 우리가 나중에 빌붙어 맞춤한 인원을 만든 셈인데, 공항에서 첫 대면을 한 후 친숙해질 기회가...
138 3부 왜 인간이냐고 묻는 것
그 후 그런 증세는 그럭저럭 무마가 되었다. 엄마의 신경성이란, 내 정의감의 빤한 한계를 두고 우리 아이들이 놀리는 말이다. 그래도 지금 다시 그의 글이 생각나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우리가 모르는 사람을 처음 소개받을 때 그 사람의 학벌이 나 지위, 재산 정도 따위보다도 그 사람의 귀여운 버릇이나 소탈한 일화 같은 것이 오히려 그 사람을 이해하고 호감을 갖는 데 믿을 만한 구실을 할 때가 있다. 헬레나의 글도 내가 티베트를 여행하는 동안, 특히 시골에서는 그런 좋은 의미의 선입 관이 돼주었다.
헬레나가 체험한 마을을 연상시키는 농촌일수록 밭에서 일하는 야크의 머리장식이 사뭇 볼만하다. 그렇잖아도 잘생긴 몸집에다 수놓은 띠를 두르고 제왕처럼 위엄 있는 뿔 사이로는 붉은 술을 달고 유유히 쟁기질을 하고 있는 야크를 보고 있으면 이 짐승을 식구처럼 사랑하고 고마워하는 티베트 사람들의 상냥한 마음씨가 느껴져 절로 미소 짓게 된다. 고마워하 면서 잡아먹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시체를 독수리에게 먹이는 조장류의 풍습이 아직도 남아 있는 땅이라는 걸 감안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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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왜 인간이냐고 묻는 것
1절-형이 아우에게
나는 타국으로 떠나지 않으면 안 된다.
슬퍼하지 말아 다오.
아우야. 이것은 전생에서의 인과因果일 테니까.
언젠가 구름 사이로 볕이 드는 날도 있을 테니.
2절 아우가 형에게
나는 여기 남아 있을게요,
형님.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 아주세요.
이것도 전생으로부터의 인과겠죠.
한 방울의 물도 결국에는 큰 바다로 흘러들어가는걸요.
3절-티베트 민중이 두 분에게
우리들은 고통을 달게 받겠습니다. 이것이 전생으로부터의 인과니까요. 제발 슬퍼하지 마세요. 하늘의 해와 달 같은 두 분의 지킴 덕으로 우리들의 오늘이 있으니까요.
형이 달라이 라마를, 아우가 판첸 라마를 가리키고 있다는 건 말할 것도 없으리라. 이런 가사의 노래를 차 안의 티베트 사람들은 듣고 또 듣더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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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왜 인간이냐고 묻는 것
그 방법이 문제였다. 우리가 남긴 라면, 김치 국물을 한데 모으더니 거기다 남은 자기네 요리를 한꺼번에 쏟아부었다. 그렇게 개죽같이 만든 걸 그들에게 안겼다. 그러나 그건 몇 사람 한테밖에 차례가 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 몇 사람도 어디 가서 분배의 문제로 싸울지도 모른다. 아귀다툼, 아귀지옥에 빠지는 걸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아귀다툼은 어떤 것일까? 그 심통 사나운 한족 여주인의 얼굴에는 그것까지 계산한 교만한 쾌감이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었다.
그 여자가 한 짓은 적선도 보시도 나눔도 아니었다. 같은 인간에게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건 순전히 인간에 대한 모 독이었다.
먼저 그 개죽 같은 게 얻어걸린 이들은 도망치듯이 사라졌지 만 아직도 아무것도 못 얻어 가진 이들이 문간에 남아 있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빈 페트병, 스티로폼 라면 용기라도 내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밖으로 나와보니 이 작은 도시 여기저기 뒹구는 게 화학연료의 마지막 쓰레기인 비닐 조각, 스티로폼 파 편, 찌그러진 페트병 따위 생전 썩지 않는 것들이었다. 뚱뚱한 식당 주인을 나무랄 자격은 아무에게도 없었다. 우리의 관광 행위 자체가 이 순결한 완전 순환의 땅엔 모독이었으니.
당신들의 정신이 정녕 살아 있거든 우리를 용서하지 말아 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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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왜 인간이냐고 묻는 것
다음날도 히말라야 산맥을 전망하기에 좋은 쾌청한 날씨였다. 우리가 에베레스트라고 부르는 히말라야 최고봉을 여기서는 초모랑마라고 한다. 에베레스트는 그 산이 최고봉이라는 걸 발견한 서양 사람의 이름에서 따온거라고 한다. 세균이나 바이러스만 발견해도 거기다 제 이름을 붙이고 싶어 하는게 서양 문명이니까 어련했겠는가. 그러나 초모랑마는 최고봉이 라고 발견되기 전에도 최고봉이었고, 이름이 붙여지기 전부터 거기 있었다. 에베레스트는 칠성이가 미국 가서 리처드가 된 것 같은 이름이니 본고장에서는 초모랑마라고 불러주는게 예의일 것 같았다.
티베트 특유의 깊고 장엄한 하늘을 이고 순결한 은빛으로 빛나는 히말라야의 대 파노라마 앞에 우리는 조용히 숨을 죽였다. 너절한 수다를 떠느니 침묵으로 오체투지 하는게 이 위엄과 미를 아울러 떨치고 있는 세계의 지붕에 대한 예의일 것 같았다. 초모랑마에 연이은 눕체, 칸첸중가, 초오유 등의 거봉 등이다 은백색으로 빛나는데 초모랑마만은 오렌지색에 가까운 색을 하고 있었다. 상냥한 은백색에 비해 그게 도리어 무장을 하고 정좌한 장군처럼 장한 기상과 위엄을 떨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초모랑마의 티베트 쪽 면은 거의 직벽으로 돼 있 어서 눈이 쌓일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보인다는게 안내인의 설명이었다.
모독(冒漬) 209
이 광장 안에 있는 오래된 목조 사원의 이름은 가스타만다 프라고 하는데, '카트만두'라는 수도 이름이 거기서 유래됐다 고 한다. 사원 전체가 아주 큰 한 그루의 나무로 지어졌다는 전설이 있기도 하다. 왕궁과 유서 깊은 사원들이 모여 있는 이 광장은 시정의 잡답으로부터 격리되거나 특별히 보호됨이 없어 시장통과 다를 바가 없다. 과일장수도 있고 민예품 장수도 있고 그냥 이 화창한 날을 즐기며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고 네팔의 고유한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도 있다. 다갈색의 목조건물들은 정교한 창틀마다 먼지가 두툼히 앉아 있고, 삐딱하게 기운 것도 있지만, 안팎의 번화한 인기척 때문에 현재 사 람이 거주하는 집 같지. 고적 같은 느낌이 별로 안 든다.
힌두 문화권에는 신이 많다. 네팔에 총 몇 위의 신이 있는지는 네팔 사람들도 잘 모른다고도 하고, 네팔의 인구보다 많을 거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아무리 많아도 대답 없는 신은 답답했던지 살아 있는 여신까지 만들어낸 게 네팔 사람들이다. 살아 있는 여신을 쿠마리라고 하는데, 쿠마리의 집도 이 구왕궁 광장 근처에 있다. 쿠마리의 집 역시 목조로 된 이층 건물이고 반듯한 안마당을 에워싼 'ㅁ'자 구조로 돼 있다.
쿠마리는 네팔에 있는 여러 종족 중 특히 네와르족이 믿는 여신이라고 한다. 쿠마리는 처음부터 여신으로 태어나는 게아니라 점성가, 승려, 브라만 등으로 구성된 전형 위원회에 의해서 선출된다. 뽑힐 자격으로는 하자 없는 집안, 깨끗한 피부, 완벽한 건강, 단정한 용모 등 여러 가지 까다로운 조건이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아직 생리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춘기가 되어 생리가 시작되면 당장 여신의 자리에서 평범한 소녀의 자리로 격하돼 궁에서 나와 학교도 갈 수 있고 시집도 갈 수 있다. 빈 쿠마리의 자리는 같은 절차를 밟아 다시 선출된다
222 3부 왜 인간이냐고 묻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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