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 작가의 글을 통해 그의 경험과 깨우침을 전해 받습니다.
모친의 죽음을 통한 미처 알지 못한 엄마, 일 년 중 전반부 태생, 기대와 실망을 떠올리는 아버지의 신발, 술(공짜 술마저)을 끊은 작가, 테세우스의 배, 군복에 배어있던 쉰 냄새를 통한 타인에게의 투영, 대학시절 클래식음악, 라라랜드와 대부, 살아남는 강한 자(2등), 안나 카레리나,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을 통한 도덕적운.
이번 글로 완전 공감했고 작가 김영하가 독자인 저에게 오롯이 투영되었습니다.

인물도 낯설고, 상황도 이해할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 그럭저럭 무슨 일이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는지 조금씩 짐작하게 된다. 갈등이 고조되고 클라이맥스로 치닫지만 저들이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무슨 이유로 저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명확히 이해하기 어렵고, 영원히 모를 것 같다는 느낌이 무겁게 남아 있는 채로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다. 바로 그런 상태로 우리는 닥쳐오는 인생의 무수한 이벤트를 겪어나가야 하고 그리하여 삶은 죽음이 찾아오는 그 순간까지도 어떤 부조리로 남아 있게 된다. 이 부조리에다 끝내 밝혀지지 않은 어떤 비밀들, 생각지도 않은 계기에 누설되고야 마는, 굳이 숨길 필요도 없어 보이는 사소한 비밀들까지 더해진다. 그날의 빈소는 마치 소설의 반전과도 같았다. 반전은 독자의 선입견과 자만심을 통렬히 일깨우면서 이야기 전체와 인물을 새롭게 보게 만드는 극적 장치로, 그날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던 엄마라는 인물에 대해 내가 별로 알고 있는 게 없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엄마는 내가 아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시절의 자신에 대해 입을 다문 채 이 세상을 떠났고, 그럼으로써 내게는 제한된 정보만으로 독자가 적극적으로 상상해 내야 하는, 소설 속 인물들과 다르지 않게 되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기억은 더욱 희미해지고 상상과 뒤섞일 것이다. 무엇이, 누가 실제로 어떻게 존재했는가는 모호해질 것이다. 기억에도 반감기가 있다면 그것은 언제일까. 그날의 빈소에서 나는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있었다. - 일회용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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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로봇
나는 11월생이다. 근대의 학교들은 대체로 일 년 단위로 학생을 모집하기 때문에 가을이나 겨울에 태어난 아이들은 봄여름 출생에 비해 발육이 늦되어 학교생활이나 학습에서 불리하다. 캐나다 아이스하키 청소년 명문 구단 선수들의 생일을 분석했더니 전체 선수의 40퍼센트가 1월에서 3월 사이에 태어났고 상반기 출생 선수까지 합치면 무려 70퍼센트에 이른다는 연구가 있다. 11월과 12월에 태어난 선수는 모든 엘리트 하키팀에서 10퍼센트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내가 캐나다에서 태어났다면 아이스하키 선수는 포기하는 게 현명했을 것이다. 아이스하키는 신체적 접촉이 많고, 덩치가 중요하다. 성장기 아이들에게 몇 달 차이는 체격과 체력에서의 큰 격차를 의미한다. 몇 달 먼저 태어난 것만으로도 선수로 선발되는 데 크게 유리하다.
11월에 태어난 것만으로도 동년배들에 비해 크게 불리했는데, 엄마는 그도 모자라 나를 한 해 일찍 국민학교에 입학시켰다. 세상에 태어난 지 오 년 삼 개월 만에 국민학교 입학식장에 서 있게 된 것이다. 그 시절의 사진을 보면 또래보다 확실히 작고 발육이 덜 됐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운동장에서 하는 모든 신체적 활동으로부터 멀어진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먼 훗날 엄마에게 왜 그렇게 일찍 국민학교에 보냈는가 물어보았더니, 동네에 유치원이 없어서였다는, 참으로 그분다운 답이 돌아왔다. 이제는 이해한다. 더운물도 나오지 않는 전방의 셋집을 전전하며 첫아이를 키우는 오 년이 도시 여자 엄마에게 쉽지는 않으셨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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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대 작가들은 곧잘 이런 질문을 받았고, 이런 질문에는 손으로 한 자 한 자꾹꾹 눌러쓰는 것이 참된 작가의 자세이고, 키보드로 빠르게 타이핑해 프린터로 '찍어내'는 소설은 충분한 사유가 뒷받침되지 않은 '속성' 문학이라는 당시의 통념이 깔려 있었다. 타자는 오랫동안 낮은 직급의 여성 사무원들이 해온 일이었다. 실업계로 진학한 가정 형편이 넉넉지 않은 여성들에게 타자 자격증은 부기나 주산과 함께 필수였다.
그래서 더 폄하되었던 것 같다. 선배 작가들은 붓글씨도 멋지게들 잘 썼다. 언젠가 한 선배 문인이 양평에 짓고 있는 집의 상량식을 한다고 해서 구경을 갔는데, 그 자리서 붓을 들고 대들보에 붙일 문구를 일필휘지로 써내려가는 것도 보았다. 이런 분들에게 모니터 앞에 앉아 키보드나 두들기고 있는 젊은 작가들이 어떻게 보였을까?
지금은 거의 모든 작가들이 컴퓨터로 작업을 할 것이다.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바로 소설을 쓰는 작가도 있다던데, 나는 아직 엄지 두 개로는 긴 글을 쓰지 못한다. 앞으로도 못할 것 같다. 기술과 나의 경주는 여기까지인가보다. 아버지는 내가 공인회계사가 되기를 바랐다. 경영학과에 보낸 것도 그 때문이었다.
- 우물정자 천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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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얼굴이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쉽게 물러나지 않고 주인과 대거리를 했다. 어느새 날은 저물고 구경꾼도 줄어들었다. 끝내 아버지는 이기지 못했고 주인으로부터 신발장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아마도 도둑이 대신 벗어두고 간 것으로 보이는 낡고 더러운 신발을 받았다. 도둑의 신발을 꺾어 신은 채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아버지 나이는 마흔이었고, 지금 내 나이보다 열다섯 살이나 어렸던 젊은 아버지의 행동을 나는 충분히 이해한다. 그것은 전형적인 직업군인의 사회 부적응 사례이기도 했다. 부대에서라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군화의 안감에는 주인의 이름이 매직펜으로 적혀 있고, 설령 안 적혀 있다 해도 누가 감히 대대장의 신발을 훔쳐가겠는가. 아버지가 사회에 나와서 배운 유일한 삶의 방식은 군율이었다. 그럼에도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와의 즐거운 목욕탕 나들이를 아버지 자신이 망쳤고, 그때 나와 동생이 빼앗긴 기쁨은 신발 한 켤레보다는 더 중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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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행동을 용서하지 못해서가 아니라(그걸 왜 못하겠는가? 나도 그랬을 수 있다), 모든 부모가 언젠가는 아이를 실망시키고, 그 실망은 도둑맞은 신발 같은 사소한 사건 때문에도 비롯된다는 것, 그 누구도 그걸 피할 수 없고, 나처럼 어떤 아이는 오랜 세월이 지나서도 그 사소한 에피소드를 기억하고, 기억하면서도 충분히 이해하고, 이해하면서도 아쉬워한다. 그렇지만 그게 부모를 증오하거나 무시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언젠가는 누군가를 실망시킨다는 것은 마치 우주의 모든 물체가 중력에 이끌리는 것만큼이나 자명하며, 그걸 받아들인다고 세상이 끝나지도 않는다. 나이가 들어 좋은 점은(부모를 포함해 그 누구라도) 그 사람이 나에게 해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리해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기대와 실망이 뱅글뱅글 돌며 함께 추는 왈츠와 닮았다. 기대가 한 발 앞으로 나오면 실망이 한 발 뒤로 물러나고 실망이 오른쪽으로 돌면 기대도 함께 돈다. 기대의 동작이 크면 실망의 동작도 커지고 기대의 스텝이 작으면 실망의 스텝도 작다. 큰 실망을 피하기 위해 조금만 기대하는 것이 안전하겠지만 과연 그 춤이 보기에도 좋을까? 오랜 세월이 지나 나는 목욕탕 사건에 대해 아버지에게 물었다. 기억이 안 난다는 답만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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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 대와 삼십 대에는 매일같이 술을 마셨다. 밖에서도 마시고, 집에서도 마셨다. 대형 마트에서 여섯 개들이 맥주 팩을 사서 아내와 집에서 함께 마시며 하루를 마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결혼생활이었다.
술은 오십 대가 되어서야 멀어졌다. '끊었다'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게,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입에 대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제는 술 없이 살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알코올 의존 해방'의 기준은 비행기를 탔을 때 제공되는 공짜 술을 거절할 수 있느냐다. "와인 한 잔 하시겠습니까?"라는 승무원의 질문에 "아니요"라고 말했을 때 내면에서 차오르는 힘을 느꼈고 테스트를 통과한 기분이었다. 술이라는 숨은 조종자는 내 안에서 힘을 잃었다. 이제 나는 모임이 있을 때 차를 가져가야 할까를 고민하지 않게 되었고 늦은 밤 여행지의 숙소로 돌아갈 때 편의점에 들르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었다.
신인 작가 시절 인사동의 어느 술자리에서 자연 예찬을 하는 선배 작가에게 "저는 도시가 좋아요. 자연을 보면 아무 감흥이 없어요"라고 말했다가 선배들로부터 “뭘 모르는 젊은 녀석"이라는 투의 핀잔을 들었다. 억울했다. 다 자연을 좋아해야 하나? 지금은 숲과 나무와 풀, 새가 주는 평화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조금 아는 사람이 되었고, 온갖 불편을 감수하며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고 있다. 주말이면 홍대 앞에 나가 새벽까지 놀 때도 많았는데, 이제는 사람 많은 곳에는 웬만하면 얼씬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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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에도 큰 차이가 있다. 예전엔 하룻밤에 한 편의 단편을 (물론 초고지만) 완성할 때도 있었다. 지금은 도대체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는지가 궁금하다. 아마 뭘 잘 몰라서였을 것이다. 좋아하는 작가도, 자주 듣는 음악도, 즐겨 먹는 음식도 모두 달라졌다. 새벽까지 깨어 있는 저녁형 인간이었는데 아침형이 되었다. 자전거를 즐겨 탔는데 지금은 요가를 한다. 전반적으로 나는 이십 대의 내가 만났다면 재수 없어했을 사람으로 변한 것 같다. 왜 그렇게 많이 변했냐고 누가 물으면 별로 할 말이 없다. 잘 모르기 때문이다.
플루타르코스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는 영웅 테세우스가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돌아올 때 타고 온 배 이야기가 나온다.
서른 개의 노가 달려 있었던 테세우스의 배는 아테네 인들에 의해 데메트리오스 팔레우스의 시대까지 유지 보수되었다. 썩은 널빤지를 뜯어내고 튼튼한 새 목재를 덧대어 붙이기를 거듭하니, 이 배는 철학자들 사이에서 '끝없이 변화하는 것들에 대한 논리학적 질문'의 살아 있는 예가 되었다. 어떤 이들은 그 배가 그대로 남았다고 여기고, 어떤 이들은 배가 다른 것이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23장 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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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변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흔히들 하지만 사람은 평생 많이 변한다. 노력으로 달라지기도 하고 환경에 적응하기도 한다. 생물학적 수준에서는 인간의 몸이란 테세우스의 배와 마찬가지다. 세포들이 끊임없이 죽고 다시 생성되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 세포는 거의 없을 것이다. 행동도, 마음도, 습관도, 조금씩 달라지다가 그 변화가 누적되면 전혀 다른 사람처럼 되어버린다. 아버지는 사십 대와 오십 대, 육십 대 이후가 모두 달랐다. 사십 대에는 혈기 방장한 두주불사의 군인이었고, 오십 대에는 술은 여전히 많이 마셨지만 성질은 많이 눅은 은행원이었다. 은행을 떠난 뒤에는 화를 거의 낼 줄 모르는 호인으로 변해 적응하기 어려울 정도였고 술과 담배도 자제했다. 그러다 육십 대에 뇌출혈로 쓰러지고, 칠십 대에 암이 발병하자 술, 담배를 완전히 끊고 예민하고 성마른 사람이 되었다. - 모른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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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복에서 풍긴 냄새였을 것이다. 그런데 같은 공간에서 생활했던 우리들은 후각의 차원에서 일심동체가 되어 있어 전혀 의식할 수 없었다. 나중에 동생 면회를 하러 신병교육대에 갔을 때에야 친구가 말한 바로 그 냄새를 제대로 맡을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의 일기에는 '나'에 대한 말들로 가득했다. 내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일까를 알기 위해 애썼던 십 대의 내가 거기 있다. 그러나 돌아보면, 나라는 존재가 저지른 일, 풍기는 냄새, 보이는 모습은 타인을 통해서만 비로소 제대로 알 수 있었다. 천 개의 강에 비치는 천 개의 달처럼, 나라고 하는 것은 수많은 타인의 마음에 비친 감각들의 총합이었고, 스스로에 대해 안다고 믿었던 많은 것들은 말 그대로 믿음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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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은 그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입장권처럼 보인다. 그런데 입장권은 갖기 어렵다. 잘 태어나야 하고, 그러지 못했다면 오랜 노력과 투자가 필요하다. 때론 굴욕도 견뎌야 한다. 교양인들의 사회는 배타적이다. 그래서 그들은 지름길을 택한다. 리플리처럼 뛰어난 연기력만 있다면 교양은 비슷하게 흉내 낼 수 있다. 그러나 교양인의 사회에는 의외로 익혀야 할 규칙이 많고 그 적용도 섬세함과 유연함을 필요로 한다. 오래 계속하다가는 탄로가 난다. 그들은 이카로스처럼 추락한다. 이야기의 세계에서 '핑크 정장을 입는 녀석', 하층계급 출신의 욕망은 처벌을 받는다. 유럽은 신분제가 강고한 사회였고 지금까지도 그 잔재가 남아 있다. 『위대한 개츠비』의 배경이 된 1920년대의 미국 역시 그랬다고 한다. 할리우드는 신분 상승 욕망을 경계하면서 동시에 대중에게 아첨했다. 부자, 지체 높은 이가 햄버거와 코카콜라를 맛있게 먹거나 오토바이 뒷자리에 타고 행복해하는 장면들을 보여주었다. 가난한 삶에도 만족할 수 있고 만족해야 한다는 메시지였다.
나는 결국 대학원이라는 강고한 신분제 세계에 녹아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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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탕달의 『적과 흑』이 그랬고 『위대한 개츠비』가 그랬다. 신분을 속이거나 없는 교양을 꾸며내어서라도 더 높은 사회적 존중을 얻으려는 인물들의 이야기. 이런 이야기들은 여전히 내 마음속 깊은 곳의 어떤 불안을 건드린다. 그 목소리는 이렇게 속삭인다. 너는 교양인의 흉내를 잘도 내고 있구나. 다른 사람은 다 속여도 나는 못 속이지. 너는 아직 충분하지 않아. 너는 우리와 어울리지 않아.
그런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나는 여지없이 그 동기의 연구실로 소환된다. 모르는 성악가가 모르는 언어로 모르는 노래를 부르는 그 방의 딱딱한 나무의자에 앉아 교양인의 관용과 너그러운 미소를 바라고 있다. 내가 어딘가 잘못된 곳에 와 있고,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로 다시 '이탈'해야만 할 것 같은 이 익숙한 충동은 여전히 내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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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에는 글쓰기를 전공하지 않는 학생들도 들어왔다.
과제도 열심히 제출했고 글도 전공자들 못지않게, 아니 더 잘 쓰는 경우도 있었다. 그들 중 꽤 여럿이 교수실로 찾아와 같은 질문을 던졌다.
"제가 작가가 될 수 있을까요?"
그럴 때면 나는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를 물었다. 작가가 되고 싶으면 계속 쓰면 되고, 되고 싶지 않으면 안 쓰면 되지 않나 생각했기 때문이다.
"선생님께서 가능성이 있다고 하시면 한번 열심히 해보려고요."
그 학생들은 '하고 싶음'이 아니라 '할 수 있음'에 더 관심이 많았다. '하면 된다'가 아니라 '되면 한다'의 마음. 나는 누구에게도 답을 주지 않았다. 답을 몰랐고, 알아도 줄 수 없었다.
만약 내게 신비한 능력이 있어 미래를 다녀올 수 있다면 어땠을까? 나는 십 년 후로 시간여행을 해 그 학생의 미래를 본다. 그는 두 권의 책을 낸 소설가가 되어 카페에서 머리를 쥐어뜯으며 글을 쓰고 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돌아와 교수실에 있는 학생에게 자신 있게 말해준다. - 이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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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자기 미래가 궁금하지 않았을까? 많이 궁금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쓰는 게 좋고 작가가 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 계속 썼을 테고, 쓰다 보니 작가도 되었을 것이다. 그들도 지금은 나처럼 "언제 작가가 될 거라고 생각하셨나요?"라는 질문을 받고 있을 것이다.
사공 없는 나룻배가 기슭에 닿듯 살다 보면 도달하게 되는 어딘가. 그게 미래였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온다. 먼 미래에 도달하면 모두가 하는 일이 있다. 결말에 맞춰 과거의 서사를 다시 쓰는 것이다. - 이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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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2등에 머물거나 확고한 신념으로 '잘라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 나무'로 존재하는 이들이 내 주변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것에 대하여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나의 이십 대는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로 시작하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외우는 이들과 함께였다. 그 시는 이렇게 끝난다. "그러나 지난밤 꿈속에서/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살아남은 자들이 부끄러워하던 시대는 가고, 곧 1등이든 2등이든 무조건 살아남는 것이 최선이라는 시대가 왔다. 지금은 너를 떨어뜨리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는, 오직 단 한 명만이 살아남는다는 '오징어 게임', 서바이벌 게임의 세계관이 스크린을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은밀히 믿고 있다. 액정화면 밖 진짜 세상은 다르다고. 거기에는 조용히, 그러나 치열하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남아 어떻게든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싸우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 무용의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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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지하 술집에서 낭비했던, 눈이 지금보다는 훨씬 밝았던 이십 대의 밤들에 나는 침대에 누워 책을 더 보고 있었어야 했다. 육체에 관한 한 앞으로 더 나아질 것은 없을 것이다. 인간의 세포는 무한히 복제되지 않는다.
그리고 복제될 때마다 열화劣化된다. 애초의 유전자 정보는 손실되거나 변형되어 다음 세포로 전달된다고 한다.
인생 후반을 이렇게 열화 복제된 세포들과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인생은 후불제 같기도 하다. 그러나 세속적인 성공의 기준으로 볼 때 지금의 나는 이십 대의 나보다 모든 면에서 크게 좋아졌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역시 선불제가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과연 어느 쪽이 맞을까? 좋은 이야기들은 이 이분법을 넘어선다. 영화 <라라랜드>의 시작 부분에서 주인공 미아와 서배스천은 모두 무명의 배우이며 음악가다. 미아는 오디션이란 오디션은 다 보러 다니지만 문전박대에 가까운 취급을 받고 좌절을 거듭한다.
서배스천은 재즈 피아니스트이지만 술집에서 자신의 음악적 취향과는 전혀 다른 손님들의 신청곡을 치며 생계를 이어간다. 그의 꿈은 정통 재즈바를 차리고 거기에서 자기가 원하는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둘의 사랑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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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세월이 흘러 미아는 유명한 배우가 되고 새로운 사람과 결혼도 한다. 어느 날 예약한 연극을 보러 가던 미아 부부는 저녁을 먹으러 근처의 재즈바에 들어가게 된다. 그곳은 바로 서배스천이 차린 재즈바 '셉스'로 많은 이들이 찾는 명소가 되어 있다.
세속적 성공이라는 척도로 보면 미아와 서배스천의 곡선은 뒤로 갈수록 상승한다. 그러나 극장을 나오는 관객들의 기억에 남는 충만한 기쁨의 순간들은 무명의 배우와 가진 것 없는 피아니스트가 수영장 파티가 끝난 뒤 언덕에서 함께 춤을 추는 장면 같은, 영화 초반의 신들이다. 그들은 서로 깊이 사랑하고, 연인의 꿈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따라서 둘의 인생 그래프는 마치 경제학의 수요 공급 곡선처럼 성공의 곡선과 반대로 그려지게 된다.

영화 <대부> 시리즈에서도 비슷하다. 알 파치노가 분한 마이클 콜레오네는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는 형의 그늘에 가린데다가 가족의 사업을 이어받을 생각이 전혀 없는 유약한 대학생으로 나온다. 그러나 그는 형을 죽이고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아 원치 않았던 대부의 자리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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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기준으로 그래프를 그리면 시간이 흐를수록 상향하는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윤리라는 기준으로 볼 때 전혀 반대의 그래프가 그려진다. 떳떳하게 살고자 했던 한 맑고 순수했던 젊은이가 어둠의 세계에서 죄악을 저지르며 타락하는 이야기가 된다.
인생의 성패를 판단하는 곡선은 하나가 아닐 수 있다는 이야기다. 세속적 성공과 도덕적 파탄이 함께 올 수 있으며 사랑과 꿈이 엇갈릴 수 있다. 어쩌면 한두 개의 선으로 나타낼 수 없을 수도 있다. 삼각함수를 배울 때, 가장 신기했던 것은 건조한 수식으로 이루어진 방정식이 좌표상에서 꽃이나 나비 같은 아름다운 곡선으로 표현되는 부분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내 인생의 곡선은 어떤 모양으로 그려지고 있을까? 그 선들을 만든 함수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떤 충동과 어떤 운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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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고결한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은 운에 크게 좌우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범죄자가 되지 않고, 선량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칸트적 '선한 의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환경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끔 독자들로부터 좋은 이야기와 나쁜 이야기를 가르는 기준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 물론 내 나름의 여러 기준이 있지만 그런 자리에서 다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에 나는 지나친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딱 하나만 말한다. 나쁜 이야기에는 악인과 선인이 정해져 있다고. 예를 들어 특정 인종 또는 특정 지역 또는 특정 정치적 성향을 가진 이들이 악인이며,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는 그런 이야기들. 반대로 좋은 이야기에선 인물이 상황에 따라, 즉, '도덕적 운'에 따라 선인이 될 수도, 악인이 될 수도 있다. 안나 카레니나는 좋은 엄마였지만 매력적인 연하남을 만나 불륜에 빠지면서 나쁜 엄마가 된다(모스크바행 기차가 문제였다. 브론스키는 우연히 안나의 옆자리에 앉게 된 노부인의 아들이었다). 제이 개츠비는 밀주를 팔아 번 부정한 돈으로 옛 애인을 폭력적인 남편으로부터 구하고자 한다(개츠비는 중서부 가난한 소농의 집안에서 자랐고,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장교가 되었는데, 그러지 않았다면 우연히라도 만나기 힘들었을 부잣집 딸인 데이지와 엮인다). 장 발장은 빵 도둑이었으나 그를 절도범으로 만든 '도덕적 운'은 굶어 죽기 직전이었던 누이와 어린 조카 일곱이었다. 오랜 수감 생활로 세상에 대한 원한에 사로잡힌 그를 선량한 시장님으로 변화시킨 '도덕적 운'은 은식기를 도난당하고도 그를 감싸준 미리엘 주교와의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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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좋은 성질은 처음에 우러날까, 아니면 최후에 우러날까?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물의 참된 성격은 오직 시련을 통해서만 드러난다고 믿었고 그 믿음에 따라 그리스 비극을 만들었다. 그들이 믿었던 것처럼, 상황이 좋을 때, 우리는 모두 좋은 사람이다. 상황이 나쁠 때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문제다. 모든 이야기는 거기에 집중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도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공화정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시저를 암살한다. 그들의 음모는 실패하고 반역자로 몰렸지만 고결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공화국의 영웅이었던 시저는 독재자가 되었으나 죽음 앞에서 비겁하지는 않았다.
사람의 참된 모습을 보려면 충분한 시간과 적절한 계기가 필요하다. 그러니 첫인상은 전부가 아니며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최선과 최악이 공존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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