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덮으면서 다시금 느낍니다.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것을. 빼 때리는 말들로 가득한데, 재미와는 거리가 있는 내용입니다. 당의정에서 단맛을 내는 껍질을 벗겨낸 책이라는 생각입니다.
"걱정하며 물질적인 욕구에 사로잡혀 지내는 듯하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주거 환경만이 아니라 먹고 입는 형편이 과거보다 훨씬 나아졌지만, 그 이후로도 먹고사는 문제는 나날이 극심해지며 우리 삶에서 큰 몫을 차지해왔다." - 작가의 글 중...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라는 문제가 먹을 것과 비를 피할 곳이 없어 내일을 걱정해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물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이 문제가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가장 단순한 형태로 제기되기도 한다.
약간의 물질적 풍요를 누리기 시작한 사람들을 살펴보면, 현재 소유한 것에 대한 만족감보다는 부족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더 큰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또 모든 면에서 호화롭게 살면서도 물질적인 장래를 걱정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면, 넉넉하게 살아가는 사람, 특히 부유한 사람을 지켜보면 된다. 옷이 한 벌밖에 없는 여인은 어떤 옷을 입을까 고민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당장에 먹을 것밖에 없는 사람은 내일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지 않는다. 욕구는 만족감에 비례해서 커진다는 법칙의 필연적인 결과에 따라 ‘인간은 더 많은 재물을 가질수록 더 많은 것을 원한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내일이 확실하게 보장되어 있을수록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더욱 고민하고, 자식과 자식의 자식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놓아야 하는지 걱정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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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제복을 입었다고 수사가 되는 것이 아니고, 군복을 입었다고 군인이 되는 것이 아니듯이 액자가 그림 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서 그림은 인간이다. 정확히 말하면, 의식과 성격과 의지 등 지극히 개인적인 면을 지닌 인간이다. 그런 데 액자를 정성스레 선택해 멋지게 꾸미는 동안 우리는 그림이란 존재를 잊고 무시하며, 심지어 훼손하기도 한다.
우리 삶은 외적으로는 좋은 물건들로 가득하지만 영적으로는 황폐하기 그지없다. 엄밀히 말하면 없어도 상관없는 물건들은 주변에 넘쳐흐르지만, 정작 반드시 필요한 것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비일 비재하다. 따라서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의식이 깊은 잠에서 깨어 나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사랑하고, 구체적으로 실현하려고 한다면, 마치 생매장당한 것처럼 괴로워할 수밖에 없다. 산더미처럼 쌓 인 하찮은 것들에 짓눌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햇빛도 제대로 받지 못할 것이다.
진정한 삶을 되찾아야 한다.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 깨닫고 정확히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을 본래의 자리에 되돌려놓고, 인간의 본질적인 진보는 정신의 성장에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무엇이 좋은 램프라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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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의 사다리에서 최하층에 있든 최상층에 있든 간에 상관없이, 즉 어떤 사회 계층에 속하느냐에 관계없이 단순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렇다고 단순함이 어떤 외적인 지표로는 나타나지 않고, 고유한 특징과 특유의 형식, 방향을 띠지 않는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누구라도 필요한 경우에 차용할 수 있는 겉모습과 단순함의 본질 자체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본질, 즉 근원은 내면적인 것이다. 단순함은 일종의 정신 상태이다. 단순함의 주된 존재 이유는 우리에게 활력을 주는데 있다. 따라서 인간다운 인간, 즉 진정한 인간이 되는 것이 최고의 목표인 사람은 단순하다.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게 쉽지 않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인간다운 인간이 된다는 것은 개인적인 열망과 행동을 존재의 법칙에 일치시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기를 원하셨던 절대자의 의도에 일치시키는 것이다. 꽃은 꽃, 제비는 제비, 바위는 바위여야 하듯이 인간은 인간이어야 하지, 여우 나 토끼, 맹금류나 돼지일 수는 없지 않은가. 그것이 전부이다.
이쯤에서 인간의 현실적인 이상에 대해 생각해보자. 삶을 살아가 는 매 순간, 우리는 어떤 목표를 향해 일정한 양의 에너지와 물질을 투자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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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적인 광채가 낮의 길이를 더해주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질이다.
물론 이런 경지에 오르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단순함이란 능력은 생물학적으로 물려받는 재산이 아니라 끈질긴 노력의 결과물이다. 바르게 산다는 것은 바르게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단순화하는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과학은 많은 사건이 복잡하게 뒤엉킨 세계에서 소수의 일반적인 법칙을 끌어내는 것이다. 그런 규칙을 찾아내려면 그야말로 무수한 암중모색이 있어야 한다! 수세기 동안 지루하게 계속된 탐구의 결과가 때로는 한 줄의 원리로 축약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도덕적인 삶은 과학의 일생과 무척 유사하다. 도덕적인 삶도 처음에는 혼돈 상태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자체를 실험 및 관찰 대상으로 삼아 탐구하며 때로는 실패하기도 한다.
인간은 행동하고, 그때마다 그 행동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진지하게 노력함으로써 삶에 대해 조금씩 더 깊이 알아간다. 삶의 법칙도 알게 된다. '당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실행하라!'는 법칙이다. 이 목표를 실현하는 데 열중하지 않고 다른 곳에 한눈파는 사람은 살아 있지만 삶의 존재 이유를 상실한 사람이다. 자기중심주의자, 향락 주의자, 야심만 가득한 사람이 여기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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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고, 그 때문에 우리는 꿋꿋하게 살아가며 삶의 가능성을 믿는다.
위대한 신비주의 수도자로 지극히 단순하고 선량한 사람이었던 하인리히 조이제 Heinrich Seuse 에게는 가슴 뭉클한 습관 하나가 있었다. 길을 가다 여자와 마주치면, 연령이나 신분을 막론하고 예외 없이 정중하게 길을 양보했다. 그 때문에 발이 가시나무에 찔리거나 더러운 웅덩이에 빠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는 “성모마리아 님에게 경의를 표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라 말했다.
희망에도 이와 유사한 경의를 표하도록 하자. 우리가 마주치는 희망이 밭이랑을 뚫고 나온 밀의 새순과 같은 모습이든, 새끼를 부화하고 먹이를 먹이는 어미 새의 모습이든,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 비틀거리며 계속 길을 가는 상처 입은 가엾은 짐승의 모습이든, 홍수나 우박에 황폐화된 밭을 일군 후에 다시 씨를 뿌리는 농부의 모습이든, 서서히 상실감을 회복하며 상처를 치유해가는 어떤 민족의 모습이든, 여하튼 외형적으로 보잘것없고 초라한 행색을 띠더라도 희망에 경의를 표하자! 전설이나 순박한 노래 혹은 단순한 믿음에 서 만나더라도 희망에 경의를 표하자. 희망은 하나님의 딸처럼 영원히 죽지 않고, 소멸되지도 않으며 언제나 똑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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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다시 떠오르고, 대지에는 다시 꽃이 피며, 새들은 보금자리를 짓고, 어머니는 아기에게 자애로운 미소를 지을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라는데 용기를 갖고, 나머지는 별의 숫자를 헤아렸던 창조주의 뜻에 맡겨두자. 요즘 같은 환멸의 시대에 낙심 한 사람들에게 활력을 되살려줄 만한 말을 나에게 기대한다면, “용기를 북돋우고 희망을 잃지 마라. 대담하게 큰 희망을 품는 사람일 수록 거짓을 진실로 믿을 가능성이 떨어진다"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렇다. 순진하기 이를 데 없는 희망이더라도 가장 합리적인 절망 보다 진실에 더 가깝다.
인간이 걷는 길을 밝혀주는 또 하나의 빛은 선량함이다. 그렇다고 인간이 선천적으로는 완벽하게 착하지만 사회에서 살아가는 동안 타락한다고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악은 온갖 형태로 표현 되지만,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형태는 유전으로 전해지는 형태이다. 그러나 저급한 본능이나 핏속까지 스며든 악습에 조금씩 오염 된 바이러스, 즉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악폐에 우리가 사로잡히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가끔 이런 의문을 떠올린 끝에 찾아낸 답은, 다른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그 다른 무엇은 바로 선한 성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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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를 바탕으로 원인을 추적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경고가 무엇인지 알아보자. 과장해서 표현하는 습관에서 기대할 수 있는 좋은 점이 있을까? 과장된 표현은 본연의 감정을 엉터리로 해석한다. 과 장된 표현은 우리 자신의 마음 상태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마 음 상태까지 왜곡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과장해서 말하는 사람들과 는 상호 이해를 기대하기도 불가능하다. 격정적인 성격, 격렬하지 만 아무런 성과도 없는 논쟁, 신중하지 못한 성급한 판단, 심각할 정도로 극단적인 교육과 사회적 관계 등 이 모든 것이 ‘과장된 언어 표현'에서 비롯된 안타까운 결과물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단순하게 말하기'의 필요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어떻게 하면 '단순하게 말하기'라는 바람직한 결과를 얻어낼 수 있을까?
첫째로는 문학의 단순함이 필요하다. 문학의 단순함은 비상식적인 것에 시달리고 혹사당해 무감각해진 우리 영혼을 치유하기 위한 최선책의 하나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화합을 위한 확실한 수단이기도 하다.
둘째로는 예술의 단순함도 필요하다. 문학과 예술은 많은 교육을 받고 살림살이도 넉넉한 소수의 전유물이란 인식이 팽배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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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내 말뜻을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시인과 소설가와 화가에게 산꼭대기에서 내려와 산 중턱을 걸으며 평범한 것에 만족하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가 라는 뜻이다. 민중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흔히 '민중'이라 일컬어지는 사회적 계급의 취향에 맞춘다는 뜻이 아니다. 사회적 계급을 초월해서 모두에게 공통되고, 모두를 하나로 통합해주는 것이 진정으로 민중을 위한 것이다.
단순한 예술의 잉태를 돕는 영감의 근원은 우리의 깊은 내면에 있다. 그 깊은 내면은 끝없이 이어지는 삶이란 현실이며, 그런 현실 앞에서 우리 모두는 평등하다. 누구나 이해하는 민중 언어는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과 대략적인 운명을 단순하면서도 강렬하게 표현해주는 소수의 표현 방식에서 찾아내야 한다.
그 소수의 표현 방식에 진실과 설득력, 장엄함과 불멸성 등 모든 것이 있다. 이상적인 경우라면, 젊은이들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신성한 불길이 내면에서 활활 타오르는 걸 느끼며 측은지심에 사로잡혀, “나는 평범한 것 을 혐오한다 Odi profanum vulgus”라는 오만한 격언보다 “군중을 보시고는 그들을 측은히 여기셨다.misereror super turbam”란 한층 인간적인 말을 더 좋아하기 마련이다. 나는 예술에 문외한이지만, 예술적 재능을 하늘로부터 받은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목소리를 높여 말할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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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모호하기 이를 데 없는 문제로 극심한 다툼을 벌이는 경우보다는, 단순하면서도 명백한 의무를 수행하는 날들이 더 많다. 그런데 성대한 모임에서는 그럴싸하게 옷 을 갖추어 입으면서, 작은 행사에서는 뭔가를 빠뜨린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나는 “단순한 의무를 다하고 기본적인 정의부터 행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라고 말하고 싶다.
일반적으로 삶의 활력을 잃어버린 사람은 어려운 의무를 제대로 해내지 못했거나 불가능한 일을 완수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한 의무를 완벽하게 해내는 걸 등한시하기 때문에 활력을 상실 한다. 예를 들어 설명해보겠다.
사회의 최하층까지 내려가 보면 육체적이고 정신적으로 참담한 지경에 빠진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만나게 된다. 그들의 주변을 더 자세히 살펴볼수록 더 많은 상처가 눈에 띄고, 결국에는 그 비참한 사람들의 세계가 거대한 암흑세계로 보인다. 그 비참한 사람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지만 ‘그런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때가 정말 괴롭다. 절망감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이런 괴로움을 해소하려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런 사람들은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동정심이나 선의가 부족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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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그들은 잘못처신하는 것이다. 큼직한 선행을 베풀 만한 여력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더라도, 이런저런 이유에서든 작은 선행까지 등한시해도 괜찮은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작은 선행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것 말고도 할 일이 태산처럼 많다는 게 이유이다. 하지만 우리는 단순한 의무를 기억해야 한다. 이 경우에서 단순한 의무는 무엇일까? 우리가 개개인의 능력과 자원, 여유로운 시간을 활용하여, 혜택을 받지 못한 불우한 사람들과 이런저런 관계를 맺는 것이다. 권력자의 측근들에게 자신을 알리고, 국가 지도자들의 모임에 교묘히 파고드는 데도 약간의 의지만 있으면 된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필수품이 부족한 노동자들과 어울리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몇몇 가족에 대해 그들의 과거와 아픔과 어려움을 알게 되 면 우리는 각자의 능력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된다.
예컨대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지원의 형태로 형제애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물론 작은 선행을 베푼 것에 불과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의 능력 범위 내에서 가능한 일을 한 것이며, 다른 사람들에게도 각자의 능력 범위 내에서 가능 한 일을 해보라고 권유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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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는 가난과 음험한 증오, 불화와 반목이 득세한다는 걸 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당신의 작은 선행을 통해 이 사회에 작은 빛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을 흉내 내며 작은 선행을 베푸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늘어난다 면, 선행은 눈에 띄게 증가하고 악은 크게 줄어들 것이다. 설령 당 신만이 선행을 베풀더라도 당신이 합리적인 행동, 즉 당신에게 주 어진 단순하고 순수한 의무를 다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 다. 또한 당신은 그렇게 행동함으로써 올바른 삶의 비밀 중 하나를 깨닫게 된 것이다.
인간은 원대한 것을 꿈꾸지만, 큰일을 할 기회가 자주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설령 그런 기회가 주어질 때도 끈질긴 준비가 되어 있는 경우에만 확실한 성공이 가능하다. 작고 사소한 것에 충실할 때 큰일도 이루어낼 수 있는 법인데, 우리는 그런 진리를 잊고 살아간다. 힘든 시기를 맞거나 삶의 위기를 맞았을 때 반드시 알아야 할 진리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난파를 당했을 때 작은 나무판 하나에 의지해 목숨을 구할 수 있지 않은가. 삶의 과정에서 격랑을 맞아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난 것처럼 여겨지더라도 이 보잘것없는 작은 파편 들 중 하나가 우리를 구해주는 구명 튜브가 될 수 있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물론 하나를 붙잡았다고 나머지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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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당신이 파산했다고 해보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아픔을 겪고 있다거나, 오랫동안 노력해 얻은 결실이 눈앞에서 사라졌다고 해도 상관없다. 여하튼 당신의 재산을 되찾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되살리고 헛되이 사라진 것을 되돌릴 수는 없다. 이런 황망한 상황 앞에 당신은 낙담하여 집을 청소하지도 않고, 자식들을 제대로 돌보지도 않는다. 물론 자신에게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런 반응은 충분히 용서되며,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정말 위험한 짓이다! 이처럼 낙담하고 체념만 하고 있으면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이제 잃을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 바로 그런 생각 때문에 아직 당신에게 남아 있는 것까지 몽땅 잃게 된다.
당신에게 남아 있는 작은 부스러기들을 빠짐없이 모아라. 당신에게 남은 사소한 것을 소중히 생각하며 정성껏 간수하라. 오래지 않아, 그 작은 것들이 당신의 마음을 달래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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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을 게을리하면 그 대가를 호되게 치르게 되는 것처럼, 정성껏 노력하면 구원의손길이 당신을 향할 것이다. 가령 당신에게 몸을 겨우 기댈 나뭇가지 하나만이 남아 있더라도, 그 나뭇가지에 의지하라. 당신만이 외 롭게 남아, 곧 사라질 듯한 대의를 옹호하고 있더라도 무기를 버리고 도망치는 사람들과 함께하지 마라. 대홍수가 있은 후에는 외톨이가 되었던 사람들이 다시 땅의 주인이 된다. 목숨이 한 가닥의 실에 매달리는 경우가 있듯이, 때로는 미래가 한 사람의 머리에 의 존하기도 한다. 역사와 자연에서 배우고 영감을 얻어라. 역사와 자연이 힘겹게 지나온 과정을 통해 우리는 번영이나 재앙이나 지극히 사소한 것에서 시작되며, 하찮은 것이라고 소홀히 하는 것은 현명 하지 못한 짓이고, 무엇보다 끈기 있게 기다리며 다시 시작할 방법 을 알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될 것이다.
단순한 의무에 대해 말할 때마다 나는 군대 시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군대는 삶이란 위대한 전장의 투사들에게 많은 본보기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전투에서 패했다고 군복을 깨끗이 솔질하 지 않거나 총을 닦지 않고 규율을 등한시하는 군인이 있다면, 군인 의 의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래 봤자 무슨 소용 인가?"라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 봤자 무슨 소용이냐 고? 패전의 아쉬움에 절망과 무질서와 낙담을 더하는 게 정말 별것 이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괴로운 순간에는 아주 작은 용기가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된다는 걸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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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깨진 기와 지붕의 틈새로 빗물이 떨어지거나, 깨진 유리창 을 통해 바람이 불어닥친다고 해보자. 당신이라면 지붕이나 유리창 을 깬 범인을 찾아낸 후에야 기와장이와 유리장수를 찾아 나서겠는 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이 현실에서 자주 일어나고 있다. 어린아이들이 관련된 상황 이면 아이들이 화를 내며 “내가 던진 거 아니에요. 근데 내가 왜 주 워야 해요!"라고 소리칠 것이다. 대부분의 어른들도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 하기야 논리적인 생각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런 논리에 따 라 세상이 움직이지는 않는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 즉 우리 삶에서 매일 되풀이되는 현상에 따르면, 손해를 끼친 사람과 그 손해를 복구하는 사람이 다르다는 것이다. 파괴하는 사람과 다시 건설하는 사람이 다르다. 더럽히는 사람과 깨끗이 청소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 싸움을 선동하는 사람과 싸움을 말리는 사람이 따로 있다. 눈물을 흘리게 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슬픔을 위로해주는 사람이 있다. 부정하게 살아 가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있다. 가혹한 법이 시행되기에 구원이 필요하다. 이것도 역시 논리적이다. 하지만 현실의 논리 앞에서 이론의 논리는 무색해진다. 여기에서 얻어지는 결론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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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끌어낼 것이다.
해악한 행위가 행해지면 그 행위를 지체 없이 보상하는 게 중요하다. 범인이 보상에 기꺼이 동참하면 다행이지만, 경험에 따르면 범인의 협조를 기대하지 않는 편이 낫다.
아무리 단순한 의무라도 그 의무를 해낼 만한 힘이 있어야 한다. 그 힘은 무엇으로 이루어지고, 또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외부의 압력으로만 여겨지는 한 의무는 인간에게 적이고 귀찮은 것이다. 그래서 의무가 문을 열고 들어오면 우리는 창문으로 빠져나가고, 의무가 창문을 막으면 우리는 지붕을 뚫고 달아난다. 의무가 밀려오는 게 확실하게 보일수록 우리는 어떻게든 의무를 피해간다. 교활한 도둑은 언제나 경찰을 능숙하게 피해 다닌다는 점에서, 의무는 공권력과 사법기관을 대리 하는 경찰에 비유된다. 안타깝게도 경찰은 도둑을 체포하는 데 성 공하더라도 기껏해야 경찰서에 끌고 갈 수 있을 뿐이지, 그를 올바 른 길로 인도하지는 못한다.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수행 하려면,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이것을 피하라, 저것을 피하라, 여하튼 조심해!"라고 말하는 힘이 아닌 다른 힘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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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내적인 힘, 사랑이 필요하다. 자신의 직업을 싫어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시큰둥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지상의 어떤 힘도 그에게 그 일을 재밌고 활기차게 만들어줄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의 역할을 좋아하는 사람은 자발적으로 움직인다. 그에게 이렇게 일하라, 저렇게 일하라 간섭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며, 딴짓 을 하도록 그를 유혹하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다.
이 원칙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막연한 운명에서도 신성하고 영원히 아름다운 것을 느꼈다는 것이다. 또한 일련의 경험 을 통해 고통과 희망이 동시에 존재하기에 삶을 사랑하고, 불행한 존재이면서도 고결한 존재인 까닭에 인간을 사랑하며, 감성과 지성 과 영혼으로 인류의 일원이 되기로 결심하게 된 것도 중요하다.
바람이 돛을 지배하며 범선의 방향에 영향을 주듯이, 어떤 미지의 힘이 우리를 지배하며 연민과 정의가 있는 곳으로 끌어간다. 이 강력한 힘에 순응하며 우리는 “달리 방법이 없다. 나보다 훨씬 강한 힘 이다!”라고 말한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인간은 자신보다 훨씬 강하지만 자신의 내면에 있는 힘을 이런 식으로 표현해왔다. 그 한없이 고결한 것은 우리 내면에 존재하지만 우리를 초월하는 신비로운 힘의 표현으로 여겨진다.
사랑이란 그 고결한 감정은 위대한 사상이나 위대한 행위처럼 영감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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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모든 기본적인 역할에는 헌신과 희생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해관계를 철저히 따지는 사람도 계산 이외의 다른 것에 의지하지 않고는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없다. 푼돈을 꾸준히 모아서 큰돈을 만드는 데 능숙한 사람은 영리하다고 여겨 진다. 그러나 자세히 보라. 단순한 사람들의 헌신이 없었더라면 그 들이 큰돈을 벌 수 있었겠는가? 그들처럼 “돈이 있으면 귀신도 부린다!"라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는 영악한 사람들만을 만났더라면 과연 그들이 성공할 수 있었을까? 분명히 말하지만, 세상이 그럭저럭 유지되는 이유는 치밀하게 계산하지 않는 사람들 덕분이다.
가장 아름다운 봉사나 가장 힘든 사명은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거나 전혀 보상받지 못하는 게 일반적인 현상이다. 따라서 돈과 휴식과 삶을 희생하더라도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는 역할, 심지어 대가 라고는 고통밖에 없는 역할을 기꺼이 떠맡으려는 사람들이 항상 존재한다는 게 천만다행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맡겨지는 역할은 힘들 기 일쑤이고, 으레 실망감까지 더해주는 것이다. 자신이 과거에 행한 선행을 후회하는 경험담, 온갖 고생을 다했지만 결국 남은 것은 환멸뿐이었다는 서글픈 경험담을 누구나 한두 번쯤은 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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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성실하고 헌신적인 이유는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속에 단순함이란 보물을 간직하고 있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며 헌신하기 때문이다.
'돈은 전쟁의 힘줄'이란 말은 어디에서나 흔히 들을 수 있다. 전쟁에 많은 돈이 드는 것은 분명하며, 우리는 그에 관련해 적잖은 것을 알고 있다. 그럼 국가가 부유하면 적으로부터의 공격을 방어하고 국가의 명예를 충분히 지켜낼 수 있다는 뜻일까?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인들에게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입증해 보였다. 그 후로도 그 사실은 역사에서 반복해 입증되었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돈이 있으면 군함과 대포와 말을 살 수 있지만, 군사적인 전략과 정치적인 지혜, 규율과 열정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다. 징병관들에게 거금을 쥐여주며 한 명의 뛰어난 지휘관과 상퀼로트* 처럼 용맹무쌍한 병사들로 구성된 1개 사단을 당신에게 데려오라고 지시해보라. 그럼 십중팔구 위대한 한 명의 지휘관 대신 100명의 지휘관과 1,000명의 병사가 당신 주변에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전쟁터에 보내봐야 당신이 돈을 제대로 썼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sns-culottes, 프랑스혁명의 추진력이 된 사회계층, 주로 수공업자, 소상인, 노동자 등으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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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어떤 집은 문을 열자마자 따뜻하고 자애로운 기운이 온몸을 감싼다. 흔히 벽에도 귀가 있다고 말 하는데, 나는 벽에도 목소리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 귀에 들리 지 않는 웅변이랄까? 이런 이유에서 어떤 집이든 집에 있는 물건들에서 집주인의 마음 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 혼자 사는 독신 남녀의 집에서도 이런 기운의 증거가 확인된다. 어떤 방에서는 나태함과 무관심과 세속성이 느껴지고, '어떻게 되든 나하고는 상관없어!'라 는 방주인의 인생관은 책이나 사진을 정돈하는 방법에서도 읽혀진다. 또 어떤 방에서는 삶의 즐거움과 활력이 느껴진다. 따라서 방문객은 방 안의 모든 것이 “잠시 이곳을 찾아주신 손님, 그대가 누구 이든 당신에게 복이 있길 빕니다. 평화가 당신과 함께하기를!" 하고 자신에게 말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가정생활의 힘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듯하다. 예컨대 창가에서 사랑받으며 자라는 꽃이나, 할아버지가 옛날부터 앉아 주름진 양손으로 손자들의 통통한 뺨을 어루만지던 오래된 안락의 자의 매력을 생각해보라. 하지만 지겹도록 옮겨 다니고 변신을 거 듭해야 하는 불쌍한 현대인들! 도시와 집, 관습과 믿음의 형태를 바꾼 까닭에 이제 우리가 머리를 대고 쉴 곳마저 잃어가고 있다. 가정 생활을 포기함으로써 그러잖아도 불확실한 우리 삶의 슬픔과 공허감을 더는 키우지 말자. 싸늘하게 식은 벽난로에 다시 불을 지피고,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안식처를 만들자. 아이들이 어른으로 성장하 고, 사랑이 은밀히 속삭여지는 따뜻한 보금자리를 만들자. 할아버 지와 할머니를 위한 휴식처가 되고, 기도의 제단이 되며, 조국을 위한 경배장이 되는 공간을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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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색과 형상에서 완벽에 가까운 단순함을 음미할 기회가 요즘에는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논리적으로 자명한 것이 머리에 강한 인상을 남 긴다면 그런 단순함은 우리 시선에 강한 인상을 남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름다운 작품에 담긴 이상적인 순수함을 반복해서 보는 과정을 통해 단련되어야 한다. 이상적인 순수함은 어떤 걸작에나 일 종의 성흔을 남기는데, 그 순수함에 담긴 한 줄기 광채가 호화로 운 전시물들을 전부 합해놓은 것보다 더 낫다.
하지만 여기에서 다루려는 것은 삶과 관련된 일상의 미학이다. 다시 말하면, 집과 우리 자신에 매력을 더해주려면 어떻게 꾸며야 하는지에 대해 말해보려 한다.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하지는 않지만 있으면 더 좋은 것에 관심을 갖느냐, 갖지 않느냐는 결코 간단히 넘 길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삶에 영혼을 담고 있느냐, 그렇 지 않느냐가 여기에서 구분된다. 나는 외적인 형태를 아름답게 꾸 미고 가꾸는 노력을 불필요한 짓이라 생각하기는커녕 가능하면 많 이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연이 그 본보기라 할 수 있다. 우 리가 짧은 하루를 위해 동원하는 아름다운 파편들을 경멸하는 사람 이 있다면, 하루살이 꽃을 치장하는 데도 영원불멸한 산을 꾸밀 때와 똑같은 정성과 사랑을 쏟은 창조주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 람일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아름다움과 이름뿐인 아름다움을 혼동케 하는 천박한 시험에 빠져서는 안 된다. 어떤 존재의 아름다움과 시적인 정취는, 우리가 그것에 부여하는 의미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집과 식탁과 옷차림에는 우리의 의도가 담겨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의도를 표현하려면 먼저 그 의도를 마음에 품어야 하고, 그 사람은 어떻게든 지극히 단순한 방법으로 그 의도를 겉으로 표현할 수 있다. 부자만이 집과 옷을 우아하고 매력적으로 꾸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미적 감각과 선의만 있으면 충분하다. 이쯤에서 우리 모두에게 무척 중요하지만, 일반적으로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문제를 다루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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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나 지역마다 서로 다른 다채로운 전통의상을 입고, 프랑스의 경우에는 과거에 동업조합들이 다른 조직과 차별화하 려고 입었던 고유한 의상이 그 증거라 할 수 있다.
여성의 몸단장도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말해준다. 몸단장에 많은 의미가 담겨 있을수록 그 가치가 높아진다. 몸단장이 진정한 아름다 움으로 여겨지려면 자기만의 참된 멋을 전해줄 수 있어야 한다. 세 상의 모든 돈을 쏟아붓더라도 그 몸단장이 당사자와 아무런 관계도 없다면, 자기만의 개성을 드러내지 못한 가면에 불과하다. 유행을 무분별하게 좋기만 하는 몸단장은 고유한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에 여성성의 주된 매력까지 없어진다. 따라서 가치가 담기지 않고 그저 예쁘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여성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해치는 데 그치지 않고, 남편이나 부모의 지갑에도 큰 타격을 준다.
어떤 젊은 아가씨가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데 정밀하게 잘 다 듬어진 표현을 사용하지만, 그 표현이 대화집의 표현을 그대로 모 방한 것에 불과하다면 그 아가씨에게 무엇이라 충고해주겠는가? 당 신이라면 그렇게 완전히 모방한 표현에서 매력을 느낄 수 있겠는 가? 몸단장도 마찬가지이다. 그 자체로는 아름답게 꾸몄더라도 다 른 사람들과 구분되지 않는다면 무슨 매력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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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프와 빗자루는 일의 구분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모든 것은 하프와 빗자루를 잡는 손과, 그 손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정신에 달려 있다.
시적인 아름다움은 사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시적인 아름 다음은 우리 내면에 존재한다. 조각가가 대리석에 자신의 꿈을 새 기듯이 우리는 사물에 시적인 아름다움을 부여해야 한다. 우리 삶 과 일이 외적으로는 화려한 데도 별다른 매력을 발산하지 못한다 면, 우리가 삶과 일에 어떤 시적인 아름다움도 더하지 못했기 때문 이다. 예술의 극치는 무기력한 것에 활력을 불어넣고, 야만적인 것 을 우아하게 길들이는 데 있다. 나는 우리 시대의 젊은 아가씨들이 영혼이 없는 것에 영혼을 불어넣는, 진정한 능력을 개발하는 데 노 력하기를 바란다. 말로 명확히 표현할 수 없지만 시인에게 '지붕이 즐거워하며 웃는다'라고 노래할 수 있게 하는 힘을 지닌, 뭔가를 가 정에 끌어올 수 있는 사람은 여성뿐이다. 요정은 없다고, 이제 요정 같은 사람은 없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요 정의 정확한 의미를 모른다. 시인들이 시로 풀어낸 요정의 원형原型 은 우리 주변의 사랑스러운 여인들이다. 밀가루 반죽을 힘껏 주무르고, 찢어진 곳을 얌전히 수선하며, 미소 띤 얼굴로 환자들을 돌보 고, 리본에 우아한 멋을 더하며, 튀김 요리에도 정성을 다하는 사랑 스러운 여인들에게서 시인들은 요정의 모습을 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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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당신이 지금 도덕적 빈곤에 놓여 얼마나 유치한 지경에 이른지 알게 될 테니까" 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자존심과 교만으로 인해 우리가 곧잘 빠 지는 몇은 정말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다. 우리를 이웃의 증오의 대 상이 되게 만들며, 우리의 맑은 정신까지 빼앗아가는 교만을 경계 해야 한다.
부유함을 뽐내는 사람이 망각한 또 하나는 어떤 의미에서 가장 중요한데, 소유에는 사회적 의무가 따른다는 사실이다. 개인의 재산은 개인의 존재와 자유만큼이나 정당하고 적법한 것이다. 재산 과 자유는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데다, 모든 삶의 기초를 이루는 요건들이기 때문에, 이런 요건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것은 많은 위 힘을 내포한 몽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개인은 모든 점에서 사회 적인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에 하나의 행동을 하더라도 전체를 고 려해야 한다. 따라서 소유는 자랑해야 할 특권이 아니라, 그 무게를 느껴야 할 책임이다. 사회적 기능을 완벽하게 해내기 위해 까다로운 수련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경우가 있듯이, 이른바 '부'라고 칭해지는 사회적 기능에도 수련 과정이 필요하다. 소유하는 것도 일종의 기술인데, 그것도 배우기 쉽지 않은 기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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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간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유하면 되는 대로 편안히 살면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이유에서 부자로 살아가는 법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이다. 마틴 루터 Martin Luther의 재밌으면서도 섬 뜩한 비유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에게 부는 당나귀에게 주어진 하 프와 같은 것이다. 달리 말하면, 부자들이 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 는지 전혀 모른다는 뜻이다.
따라서 부유하면서도 단순한 사람, 즉 재산은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을 다하기 위한 수단이라 생각하는 사람을 만나면 공손히 경의 를 표해야 마땅하다. 그는 온갖 장애물과 시련을 이겨낸 사람이며, 저속한 유혹만이 아니라 미묘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은 대단한 사 람인 게 분명하다. 또한 그는 머릿속이나 마음속에 든 것과 지갑에 든 것을 혼동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을 숫자로 평가하지 않는 사람 이다. 그는 의무를 완벽하게 해내려면 자신에게 무엇이 부족한지 절실히 깨닫고 있기 때문에, 예외적인 상황에 있음에도 교만하기는 커녕 겸손하게 행동한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는 항상 인간답게 행동한다. 또한 항상 상냥하고 언제라도 남을 도우려고 애쓰며, 자신의 재산으로 장벽을 쌓아 남들과 멀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재산을 남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수단으로 삼는다. 부자라는 지위가 오만하고 이기적인 많은 사람들에 의해 망가지고 왜곡되었지만, 위와 같은 부자는 정의에 무감각하지 않은 사람에게 결국에는 인정받고 존중 받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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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지금까지 말한 내용을 요약하고 결론을 내려보자.
우리 장점이 어떤 것이든 허영심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는 것 은 잘못된 것이다. 어떤 장점이든 그 장점을 지닌 사람에게 그것 은 일종의 책무이지, 자랑하고 뽐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물질적 인 부, 권력과 지식, 올곧은 마음과 정신이 오만한 허영심을 키우 는 데 사용되면 오히려 불화의 원인이 된다. 그런 덕목을 지닌 사 람이 겸손하게 행동하는 경우에만 그 덕목은 사회에 유익한 역할 을 할 수 있다. 많은 장점을 가졌다면 더욱 겸손해지자. 그것은 우 리가 많은 것을 빚졌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 는 것은 누군가에게 빚진 것이다. 그런데 그 빚을 확실히 갚을 수 있을까?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의 운명이 우리 손에 달려 있다면 더욱 겸손해지자. 명철한 정신을 지닌 사람이라면 그 처럼 중대한 역할을 맡기에는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식과 학식이 깊더라도 더욱 겸손해지자. 지식은 우리가 모르는 세계의 크기를 더욱 분명히 깨닫게 하고, 다른 사람들이 찾아낸 방대한 세계에 비교하면 우리가 직접 발견한 것은 지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걸 깨닫게 해주는 역할을 할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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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보다 두각을 나타내는 유일하게 참된 방법은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당신이 그 자체로 존중받아 마땅한 지위에 있는 까 닭에 실질적으로도 존중받고 싶다면, 먼저 당신이 그 지위에 적합 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그 지위를 증오하고 경멸하게 만드는 원흉이 된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이에 상호존중이 사라지고 있는게 분명하지만, 존중해야 할 사람을 표시하는데 적합한 장치가 없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일상의 의무를 준수하지 않아도 된다는 잘못된 편견에 그 원인이 있다. 우리는 승진해 높은 지위에 오르면 법의 규제에서 해방된다 고 착각한다. 따라서 사회적 지위가 올라감에 따라 순종과 겸손이란 의무도 더욱 커진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그 결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책임에 상응하는 존경을 요구할 뿐 그런 존경을 받 을 만한 노력은 게을리한다. 우리 사이에 상호존중이 나날이 줄어 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남들과 달라야 하는 유일한 것이 있다면, 남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는 의지이다. 더 나은 사람이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더 겸손해지고 더 상냥해지며, 그를 존경하 는 사람들과 한층 가까워진다. 이처럼 그가 가까운 사람들에게 속속 들이 알려지더라도 계급적 관계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오 만함을 버린 만큼, 그만큼의 존경을 주변 사람들로부터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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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체에 있어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곳에서는 악마가 내면에서 억눌려 있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겉으로는 질서 있게 보이지만 그 아래에는 비정상적인 삶에서 비롯되는 결함, 죽음과 같은 무기 력이 감추어져 있거나 소리 없는 저항이 일어나고 있다.
이런 결과를 낳는 교육법은 바람직하지 않다. 겉으로는 단순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온갖 복잡한 문제를 야기하는 교육법이다.
두 번째 경우는 정반대의 교육법으로, 아이 자신을 위해 아이들을 가르치는 방법이다. 달리 말하면, 아이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며 가르치는 방법이다. 여기에서는 역할이 뒤바뀌어 부모가 자식을 위 해 존재한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중심이 된다. 할아버지의 희끗한 머리와 아버지의 강인한 얼굴은 아기의 곱슬곱슬한 머리칼 앞에 서 굴복한다. 아이의 혀짤배기소리가 그들에게는 법이며, 아이는 작은 손짓만으로도 원하는 바를 얻는다. 아이가 한밤중에 요람에서 요란하게 울어대면 모든 식구가 피곤하더라도 벌떡 일어나야 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아이는 자신이 전능한 존재라는 걸 알아챈다. 그리고 걷기도 전에 권력의 맛에 도취된다. 시간의 흐름과 더 불어 권력은 더욱더 커져간다. 부모와 조부모, 가정부와 선생님 모 두가 아이의 지시에 따른다. 심지어 이웃까지 아이를 존중하고, 아이를 위해 희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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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단순함을 추구하는 교육의 원칙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 이다. 상대를 존중하는 자유로운 사람, 독립된 존재인 동시에 누군 가의 형제자매인 인간을 키워내는 것이 교육이다!
이 원칙이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살펴보자.
아이는 미래라는 사실에서도 아이와 과거를 이어주려는 경건한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새로운 세대를 위해서라도 강렬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는 실질적인 형태로 전통에 새로운 옷을 입혀야 한다. 이런 이유에서도 연장자와 함께 기념할 만한 것들, 더 나아가 가문의 역사가 교육과 가정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 특히 어떤 경우에나 조부모를 공경함으로써 자식 세대에 대한 우리 의무를 다해야 한다. 부모가 어떤 경우에나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존중하는 모습을 몸소 보여주는 것만큼 아이들에게 겸손함의 중요성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며, 그 심성을 키워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 교훈은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한 가정에서 이 교훈이 완벽한 효과를 발휘하려면, 어른들 간에 암묵적인 합의가 있어야 한다. 요컨대 교육적 효과를 떨어뜨리지 않으려면, 아이의 눈에 어른들은 서로 긴밀히 협력하고, 서로 존중하며 이해하는 존재로 보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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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낳은 건강한 나무(가족)로부터 떨어져 나오 면, 덧없는 야망이란 바람에 휩쓸려 낙엽처럼 땅바닥을 나뒹군다. 그런데 낙엽들은 결국 어떻게 되는가? 일정한 곳에 차곡차곡 쌓여 분해되고 썩는다.
자연은 두서없이 움직이지 않고,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움직인다. 우리가 아이들의 삶을 준비해줄 때 자연의 방법을 따르면 어떨 까? 진보와 발전을 흔히 공중제비라 일컬어지는 격렬한 운동과 혼 동해서는 안 된다. 우리 아이들이 어떤 경우에도 아버지의 직업과 꿈 그리고 단순함을 경멸하지 않도록 키워야 한다. 그들이 언젠가 부자가 되더라도 부모의 가난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도록 가르쳐야 한다. 농부의 아들이 밭을 혐오하기 시작하고, 뱃사람의 아들이 바다를 떠나고, 노동자의 딸이 남들에게 큰 재산을 상속받을 외동딸로 보여지기를 바라며 성실한 부모와 팔짱을 끼지 않고 혼자 멀찌감치 떨어져 걷기를 바란다면, 그 사회는 크게 병든 사회이다. 반면에 모든 구성원이 부모의 직업을 물려받더라도 더 잘해내려고 노력하고, 더 나은 삶을 목표로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은 역할이라도 성심성의껏 해내는데 만족한다면 그 사회는 건전한 사회이다."
• 이쯤에서 전반적인 노동과, 노동이 교육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에 대해 다루어야 하겠지만, 이 문제 에 대해서는 Justice: Huit discours (1889), Vaillance (1893), Jeunesse(1895)를 참조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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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력을 키우는 훈련을 받게 하고, 심지어 궁핍한 삶을 견뎌내는 훈련도 받게 하자. 맛있는 음식과 안락한 침대를 만끽 하기보다는 맨바닥에 누워서도 피로를 견뎌내는 법을 가르치자. 이렇게 할 때 우리 자식들은 독립적이고 건실한 시민으로 성장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고, 작은 행복을 위해 자신을 팔지 않더라도 누구보다 행복한 삶을 꾸려갈 수 있을 것이다.
지나치게 안락한 삶은 우리를 일종의 무력증에 빠뜨릴 수 있다. 생기발랄해야 할 어린아이와 젊은이도 세상에 관심을 잃고 심드렁 하게 변하고, 환멸에 빠진 애늙은이가 되어 어떤 것에서도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요즘 이런 지경에 빠져 허우적대는 어린아이와 젊은이가 얼마나 많은가! 그들에게는 노화와 회의적인 태도, 나쁜 습관의 흔적이 더러운 곰팡이처럼 남겨졌다. 우리가 그들에게 옮겨 놓은 질병들이다. 이렇게 생기를 잃은 젊은이들이 우리 자신을 얼 마나 되돌아보게 만드는가! 그들의 이마에 새겨져 있는 섬뜩한 경 고문을 보라! 이 암울한 그림자들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말은, 우리가 자식들을 키웠던 방법과 완전히 다르다. 행복은 진정으로 살아 있는 사람이 되는데 있다고 말한다. 능동적이고 직관적이며, 정욕과 인위적 욕구와 병적인 자극에 구속되지 않은 사람, 한낮의 햇살과 호흡하는 공기를 즐기는 능력을 유지한 채 마음으로는 너그럽고단순하며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고 느끼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되는 데 행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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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에 미친 영향에 비교하면, 요즘의 기계에는 감당하기 힘든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따라서 그런 기계를 움직이는 역할을 어떤 식 으로든 부여받은 사람의 품성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 사람은 믿음직하면서도 융통성이 있어야 하고, 독립적인 존재인 동시에 형 제자매여야 한다는 삶의 기본 법칙에 충실한 사람이어야 한다. 이 법칙의 영향하에서 우리 안팎의 모든 것이 단순화되고 통일된다. 결국 우리의 기본적인 관심사는 상반된 것이 아니라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이 법칙은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고, 모두가 이 원칙을 기 준으로 행동해야 한다. 따라서 단순함이란 마음가짐을 함양할 때 우리는 공적인 삶을 더욱 결속력 있게 끌어갈 수 있을 것이다.
공적인 삶에서 분열과 해체에 따른 현상들은 동일한 원인, 즉 결속력과 응집력의 부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계급과 파벌 및 지연地緣이란 편협한 이해 집단의 승리, 개인적인 행복의 악착스런 추구가 사회의 행복을 방해하고, 결국에는 개인의 행복까지 무너뜨린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사회는 조직화된 무질서가 지배하는 사회이다. 타협할 줄 모르는 이기주의의 충돌에서 어떤 다른 결과를 기대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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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족에 명예를 더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족으로부터어떤 이득을 얻어내려 할 경우에만 가족을 앞세우는 사람이라 말해 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사회의 모든 계층에게 뭔가를 요구한다.
모두 자신이 채권자라고 주장하며, 자신이 채무자인 걸 인정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우리가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이유는 다정한 말투나 위압적인 말투로 빚을 갚으라고 그들을 다그치기 위해 서인 듯하다. 이런 마음가짐으로는 결코 바람직한 결과를 얻을 수 없다. 이런 태도는 근본적으로 특권의식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특권의식은 보편적 법칙의 영원한 적이고, 형제애적 상호이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기 때문이다.
1882년의 어느 강연에서 프랑스의 철학자 에르네스트 르낭 Ernest
Renan은 국민을 '영적인 가족'이라 정의하며, “민족의 본질은 모든 구성원이 많은 것을 공유하는 동시에 또한 모두가 많은 것을 망각했 다는 점이다"라고 덧붙였다.
과거에서만 아니라 하루하루의 일상적인 삶에서 무엇을 망각하고,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를 갈라놓는 것은 우리 기억 창고를 가득 채우지만, 우리를 하나로 이어주는 것은 잊혀진다. 우리는 누구나 각자의 기억 창고에서 가장 환한 부분에 자신의 부수적인 특징을 확실하게 간직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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