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상하게 북유럽에 대한 작가의 글이나 책을 연이어 접하게 됩니다. 아마도 최근에 읽은 북유럽 작가의 글에서 영향을 받은 듯 합니다. 연쇄 반응의 일환으로 이 책을 손에 잡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38세가 되던 해 화재로 커피 농장이 전소하고, 40세에는 남편과 이혼을 하게 된다.
그녀의 인생에서 최악의 상황은 마흔여섯 살이 되던 1931년에 벌어진다. 이상기후로 인해 커피 값이 폭락하여 젊은 시절 열정을 바친 커피 농장을 헐값에 팔아야 했고, 두 달 뒤에는 연인 데니스 핀치 해튼마저 비행기 사고로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난다. 한 순간에 커피 농장과 사랑하는 연인을 모두 잃은 그녀는 1931년, 18년 간의 케냐 생활을 모두 청산하고 덴마크로 쓸쓸히 돌아가게 된다.
카렌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슬픔이란 이야기를 지어내거나 그것에 관해 말할 수 있다면 견딜 만한 것이다" 카렌 블릭센은 자신의 험난한 경험을 이렇게 <아웃 오브 아프리카>라는 책으로 남겼으니 그녀의 슬픔은 견딜 만한 것이었나보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는 그녀의 탄생 100주년이 되던 해 영화로 만들어졌다. 영화계에서 내로라 하는 인물이 모두 참여한 이 영화는 1986년 작품상·감독상·각본상 등 아카데미상을 무려 7개나 휩쓸었 다. 우선 감독은 시드니 폴락이, 존 배리가 음악을 맡았다. 메릴 스트립과 로버트 레드포드가 각각 여자주인공과 남자주인공으로 출연했 으며, 이 영화에서 배경음악으로 깔린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은 클래식 음악으로는 공전의 히트를 쳤다.
카렌 블릭센이 작가로 활동했던 당시 북유럽 문단에는 리얼리즘이 우세했고, 사회적 분위기도 청교도적이었다. 따라서 이국적인데다가 유부녀의 불륜이라는 비도덕적 내용을 담고 있는 그녀의 작품은 덴마크에서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북유럽 이야기
그룹 해체 후에도 비욘과 베니는 작곡 활동을 계속했고, 아그네사와 아니 프리드는 솔로 활동을 이어 나갔지만 과거 그룹 시절의 인기와 영광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이렇게 그룹의 암묵적 해체로 인해 아바가 대중의 기억에서 사라져갈 무렵, 아바의 노래를 바탕으로 뮤지컬이 제작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1989년, 아바의 뛰어난 음악성에 주목한 뮤지컬 프로듀서 쥬디 크레이머는 아바의 기타 및 보컬을 담당했던 비욘 울바에우스에게 주옥 같은 아바의 히트곡들을 엮어 뮤지컬을 만들 것을 제안한다. 극 작가인 캐서린 존슨은 22곡의 주옥 같은 아바의 노래를 홀어머니와 사는 딸이 친아빠를 찾는다는 줄거리에 맞춰 기막히게 재배치하는 데 성공한다. 또 오페라와 연극에 풍부한 경험을 갖춘 필리다 로이드의 연출이 더해지며 팝 음악을 엮어 만든 뮤지컬이 지니기 쉬운 플롯의 허점을 보강했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아바의 노래로 만든 뮤지컬 <맘마미아>가 탄생하게 된다.
1999년, 런던 프린스 에드워드 극장에서 처음 무대에 오른 <맘마미아>는 관객들의 큰 갈채를 받으면서 대대적인 성공을 거둔다. 그리고 런던의 성공을 바탕으로 2001년 뉴욕 브로드웨이에 입성했는데, 마침 9·11 테러 사건이 발생하는 불운을 맞는다. 하지만 9·11 테러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관객 점유율 99퍼센트라는 신화를 낳으며 초토화된 미국 브로드웨이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우리나라에서는 공연기획사 신시뮤지컬을 통해 2004년에 무대에 올려진 뒤 지금까지도 공연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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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가로 소량만 제작하는 그의 철학이 과연 옳은 것인지 비판의 목소리도 많았지만, 핀 율은 쓰고 버리는 가구가 아니라 예술 작품으로 가구를 간직하는 것을 중시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은 현재까지도 희소성과 예술성 덕분에 많은 수집가들로부터 사랑 받고 있다.
핀 율은 미국에서 덴마크 명품 가구 붐을 일으킨 장본인이자, 덴마크 왕실의 사랑을 한몸에 받은 디자이너로 유명하다. 핀 율은 “의자의 앞면은 어디인가"라는 의문을 던졌다. 그는 의자의 등판과 마주 보는 모습을 정면이라고 할 때, 누군가 의자에 앉게 되면 정면이 사라지는 모순이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모든 면에서 아름다운, 사람이 앉아 있을 때의 모습까지 고려한 의자를 디자인하고자 했다.
그는 여러 종류의 나무를 한 의자에 사용하고 소뼈로 고정부 마감을 만드는 등 다양한 소재를 조합해 아름다움을 배가시키는 작업을 했다. 이처럼 형태와 소재의 혁신적인 접근 덕분에 그의 작품들은 일명 '나무의 서커스'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실용적이고 안정적인 스칸디나비안 가구의 고유성을 지니면서도 독특한 특징을 지닌 핀 율의 가구는 소박함보다 화려함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고, 그 존재감이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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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이야기
일단 시작하긴 했지만 사람들은 밖에서 기웃거리기만 할 뿐, 안으로 들어오지 않아 식당에는 한 달 동안 손님이 전혀 없었다. 그러던 중, 사치에는 우연히 서점에서 만나 인연을 맺은 일본 여성 미도리(카타키리 하이리)와 함께 살게 된다. 또한 헬싱키 공항에서 짐을 잃어버린 마사코(모타이 마사코)까지 합류하여 모두 세 사람이 함께 가게를 꾸려 나간다. 이런 카모메 식당에 점차 하나둘 특이한 사연을 지닌 손님들이 모여들며 이야기는 전개되어 간다.
사치에는 다소 고지식하고 완고한 운영 방침을 가지고 있었지만,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기다리자 결국 원래 원하던 대로 손님들이 모이는 식당의 주인이 된 다. 영화의 제일 마지막 장 면에는 식당이 손님들로 꽉차게 되는데, 이 영화는 삶을 대단하게 바라보지 않고 그 속에서 소박한 삶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일본 영화의 특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2006년에 개봉된 이 영화는 일본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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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인 공헌을 한 사람에게 수여되는 상으로 현재까지 다양한 분야 의 사람들에게 수상되었다. 그렇다면 알프레드 노벨은 언제부터 '노벨상'을 염두에 두었던 것일까?
프랑스에 체류하고 있던 1888년 어느 날 아침, 알프레드 노벨은 신문에 실린 자신의 부고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란다. 기사의 헤드라인 은 '죽음의 상인, 죽다(Le marchand de la mort est mort,)'였고, 이어서 '전 보다 빨리 더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방법을 개발해 부자가 된 알프레드 노벨이 어제 사망했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는 자신의 형인 루드비히 노벨이 프랑스 칸느를 방문했다가 사망한 사실을 알프레드 노벨이 죽은 것으로 잘못 알고 내보낸 오보였다. 자신이 죽었다는 소식 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에 별로 슬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다이너마이트로 거부가 된 노벨의 죽음에 속 시원하다는 반응을 보인 사람도 있었다. 이런 반응에 놀란 알프레드 노벨은 자신의 이름이 보다 값지게 남기를 원하는 마음에 1895년 새로운 ALFR NOBEL 유언장을 작성한다. 내용은 자신의 재산 중 94퍼센트를 노벨 재단에 기부한다는 것이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지금의 노벨상이 만들어졌다.
각 수상자가 받는 노벨상의 상금은 우리 돈으로 약 12억 원이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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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마르쿠스 주니어의 주도로 SEB 은행과 경쟁사인 스칸 디나비스카은행의 합병이 성사되었다. 그런데 은행의 수장으로 오를 계획이었던 야콥이 스스로 자격이 없다고 비판하며 목숨을 끊는 사태가 벌어졌다. 야곱의 사망으로 4세대인 피터가 인베스터 수장을 맡게 되었고 발렌베리호라는 거대 산업체 선단을 지휘하게 된다.
스웨덴 사회민주당 정부의 비호 아래 발렌베리 가문의 위상이 비정상적으로 높아지자 독점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발렌베리는 그들 나름의 제도와 노력으로 이런 우려와는 달리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그룹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 발렌베리 가문이 존경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발렌베리는 가문의 2세들에게 경영권을 자동 승계하지 않았다. 가문 사람들이 기업 경영을 하지만 '혼자 힘으로 대학을 나오고 부모 도움 없이 해외 유학과 해군 장교 복무를 마친 자식들'만이 경영권 경쟁에 참여할 수 있다. 그룹 총수의 자녀라는 이유만으로 절대 검증 절차 없이 부와 경영권을 세습하지 않았다.
둘째, 발렌베리는 높은 수준의 소득누진세와 노조의 경영 참여를 적극 수용했다. 스웨덴 경영자연합이 한때 기업 이익금의 85퍼센트를 법인세로 내자고 결의했을 때 다른 재벌은 스위스로 탈출을 시도했지만, 발렌베리는 노벨 재단보다 더 큰 규모의 공익 재단을 세워 사회 공헌에 적극 나서는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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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55개 국가의 1,300여 개의 업체와 협력하는 이케아는 제품 중 거의 절반을 신흥국에서 조달하는 방법으로 가격을 낮추고 있다. 이케아의 설립자 칼 프라드는 누구나 만들 수 있는 3,000유로짜리 책상이 아니라 기능적이고 멋스러우면서도 200유로에 팔 수 있는 책상을 만드는 것을 이 케아의 핵심 가치로 여겼다. 실제로 이케아 제품은 경쟁 업체에 비해 평균 30퍼센트 이상 저렴하며 매장마다 내구성 실험 장치를 둘 만큼 품질에도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이케아가 강조하는 경영의 덕목은 무엇보다 절약이다. 이케아의 설립자 캄프라드는 이케아 매장에서 장만한 의자를 32년째 쓰고 있 으며, 1993년형 볼보 자동차를 지금껏 타고 다닌다. 또한 비행기를 탈 때에는 항상 이코노미 좌석을 이용하고 노인 우대카드로 열차를 탄다. 세계 최고 부자이면서 세계 최고 구두쇠인 캄프라드의 검약 정신은 자연스럽게 기업 문화로 연결된다. 기업의 비용 절감은 최저 가격을 가능하게 하고 이는 판매 증가로 이어져 결국 이케아 매출을 지속적으로 늘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놀랍게도 이케아는 아직까지 주식시장에 상장하지 않은 개인기업이다. 즉, 누구도 이케아의 주식을 거래소에서 살 수 없다는 이야기다. 이를 두고 많은 이들이 기업의 소유주가 누구인가를 궁금해 한다. 캄프라드 가문은 스티흐팅잉카 재단과 인터로고 재단을 통해 이케아를 지배하고 있다. 스티흐팅잉카 재단은 이케아의 직영 매장을 운영하고, 자체 가구 제조 기업인 스웨드우드를 보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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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은 혹한의 날씨와 거친 도로 조건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이런 악조건을 버틸 수 있는 튼튼한 자동차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베어링으로 유명한 SKF 그룹의 지원을 받아 새로운 자동차 제조를 시작한다. 불보는 라틴어로 '나는 구른다(I roll)'는 뜻을 가지고 있다.
볼보가 창업 초기부터 가장 중시한 핵심 가치는 안전이었다. 볼보 자동차는 '사고 제로'를 비전으로 삼고 있다. 아무리 속도가 빠르고 외관이 멋있고 승차감이 뛰어나도 안전하지 않다면 아무 쓸모가 없다고 믿는다. 그래서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하고, 불가피하게 사고가 발생했다 하더라도 상해를 최대한 줄일 수 있도록 하는 지능 안전 시스템을 장착했다. 이를 바탕으로 '볼보 = 안전'이라는 신화가 탄생할 수 있었다.
1999년, 스웨덴의 국민 자동차라고 할 수 있는 볼보의 승용차 부문이 미국 포드자동차 회사에 매각되었다. 볼보 그룹의 이런 처사에 당시 스웨덴 사람들은 스웨덴의 자존심을 팔았다고 화를 내기도 하고 매우 섭섭해했다. 그런데 2010년 포드자동차가 볼보자동차를 다시 중국의 지리자동차에 매각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스웨덴 사람들은 더 큰 아쉬움을 느꼈다. 지리 자동차에 인수된 볼보의 승용차 부문은 현재 저조한 매출을 보이고 있다. 볼보승용차는 1999년에 40 만 대를 약간 넘게 팔았는데 13년이 지난 2012년의 판매대수는 겨우 2만 대가 늘어난 42만 대였다. 매출이 급증한 다른 승용차 기업에 비 해 시장점유율이 크게 하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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