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가고 싶네요. 여행관련 책을 뚝딱 읽었습니다. 인생의 시간을 확장해주는 여행, 여행 시간 총량의 법칙이 지금 이순간 떠오릅니다. 이번 책은 가볍게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전에 채식주의자를 읽었거던요.
'원하는 데'보다는 '가봐야 할 데'가 먼저라는 점이다. 즉 일과 관련된 여행이 우선이다. 이러다보니 나의 여행지 패턴은 저절로 만들어진다. 이를테면 나에게는 시대적으로 고대문명에 가까운 공간일수록 후순위로 밀린다. 그래서 터키나 이집트, 중동, 남미 지역은 아직 제대로 여행해 본 적이 없다. 인간문명보다 자연이 우세한 지역도 후순위다. 일상과 너무나 다른 환상적인 리조트나 별 세계 같은 휴가지 역시 후순위로 밀린다. 가려 들면 갈 수도 있었겠지만 일이 바쁜 인생의 시기에는 아무래도 ‘여행 시간총량제'가 작용하게 마련이다.
그러니 내 통상적인 여행지 목록이 그리 흥미로울리가 없다. 이른바 잘 알려진 세계도시, 최근에 만든 도시가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시대적으로 말하면 르네상스 이후 특히 근대 이후에 크게 성장한 도시, 현대의 도시문제를 나름 해결한 도시들이 우선 대상이 된다. 그러니까 희귀한 맛이 덜 하거니와 아기자기한 맛도 덜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세계도시들은 많은 경우 역사도시이기도 해서 짬을 내 들러 볼 데가 많다는 점이다.
둘째 애로점이라면, 여행 자체가 일이 되어버리는 경우
50 1부 나
열여섯시간을 내쳐 걷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철통 같은 체력이라 하더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빠름 사이사이에 느림을 배치하는게 내 스타일이다. 하루에 세 번은 밥을 먹고, 세 번은 차를 마시고, 수없이 주전부리를 먹을 수 있음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식욕을 동원하는 쉼이야말로 가장 즐거운 쉼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여행 중 식욕이란 아주 고마운 쉽거리다. 여행 중에는 몸의 순환이 빨라지니 죄책감을 덜 느끼며 먹을 수 있고, 다리 쉬기에 좋고, 느긋하게 거리를 구경하기도 좋다. 도시의 먹거리를 이것저것 맛보는 즐거움뿐 아니라 요즘은 쿠킹 클래스에 참여하며 요리하는 과정까지 즐길 수도 있으니 일석다조다.
'빨빨거린다'는 표현에 대한 나의 정의는 '밖에서 시간을 보냄'이다. 호텔은 몸 씻고 밤에 눈 붙이는 곳일 뿐이다. 그래서 비싼 호텔에 묵을 필요가 전혀 없다. 아침 뷔페를 마음껏 채워 먹는 이점이 있지만, 그렇게 꽉꽉 채우다가는 하루 중 맛집 여행에 흥미를 잃을지도 모르니 뷔페가 훌륭한 고급 호텔에 갈 이유도 없다. 내가 도시여행을 즐기는 이유도, 종일 밖에서 시간을 보낼 만큼 체험거리가 넘쳐나는 공간이 도시이기 때문이다. 잠시라도 낮잠을 자지 않으면 비
64 1부 나
몽롱한 상태로 잠에서 깨다가, 하염없이 강물을 바라보다가, 마치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1992)에서와 같이 물보라가 햇빛에 반짝이는 장면에 감탄하며 멍때리는 시간 속에 있었다. 손에는 성석제의 소설 『단 한 번의 연애』(2012)가 들려 있었다. 이틀의 시간이 있어도 다 읽지 못했지만 느낌은 강렬했다. 가끔씩 읽은 몇 문단이 백일몽처럼 꿈에 나타났다. 포항 구룡포 앞바다에 나타났다던 고래들이 메콩강의 코끼리와 물소와 함께 어울려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지금도 가끔씩 멍때리고 있다보면, 고래가 나타나서 코끼 리처럼 '뿌우' 하고 소리를 내고는 사라진다. 오, 황홀한 멍 때림이여!
여행은 멍때리러 가는 시간.
멍때리며 시간을 잡는다.
느린 시간이 가장 오래 남는다.
느린 여행에 나를 묶는다 75
조각 앞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냈을까? 얼마나 많은 스케치를 했으면 이 어두운 지하공간에서 라오콘의 얼굴을 거친 목탄으로 벽에 고대로 그려냈을까? 고통 속의 라오콘에 얼마나 깊이 공감했을까? 라오콘의 얼굴에서 미켈란젤로의 얼굴이 보였다. 라오콘의 스케치에 내가 울먹였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고통에 잠긴 미켈란젤로가 고통의 아이콘인 라오콘을 스케치하면서 느꼈을 감정이 전해왔기 때문이다. 인간은 얼마나 약한가? 인간은 얼마나 스스로 위안을 찾고자 애를 쓰는가?
세간에 알려진 미켈란젤로는 거장으로 성공한 예술가이지만, 인간 미켈란젤로는 고통 속에 살았다. 그는 얼마나 못 생겼던가? 싸우다가 코뼈까지 주저앉았다. 그 못생긴 얼굴을 자신의 그림 속에 그려넣곤 했다. 「최후의 심판」에서 우그러진 그의 얼굴 그림은 미켈란젤로의 높은 자조적 자존감을 보여주는 듯하다. 성격이 괴팍하기 짝이 없어서 친구라곤 없었고 선배 다빈치를 무시하는 등 사교와는 담쌓고 살아서 예술계에서도 백안시되던 사람이다. 천재를 권력에 이용하려는 르네상스 군주들과 교황들에 의해 끊임없이 불려 나왔을 뿐이다.
최고의 인간을 만난다는 것 85
어릴 때 부부 동반 해외여행은 자제했지만, 아이들이 큰 후에는 '유서'를 써놓고 비행기에 오른다. 1년에 한 번씩 유서를 쓰는 것도 괜찮은 의식이다. 여행 중 불의의 사고에 대비하고, 우리 자신의 마음가짐을 다듬고, 주변을 정돈하고, 아이들의 독립심을 불러일으키는데에 크게 도움이 됐다. 우리의 커플여행이 우리의 인생 여행과 통하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커플여행은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이제 다 큰 아이들에게 유서를 써서 남기고 비행기에 오른다.
커플여행은 인생 여행과 통한다.
커플여행은 위험하다 133
인색한 분으로 악명이 높았는데, 어머님만의 절약 기법이었던 셈이다. 충분히 이해가 간다.
누구나 자신의 기준에서 사치를 부리는 일은 필요하다. 나의 대부분 여행은 가난한 여행의 범주에 들어가는 편이지만, 나는 어떠한 여행 속에서도 두 가지 사치를 부리는 원칙을 갖고 있다. 첫째는, 어떤 도시에서나 근사한 저녁 한 끼를 먹는 사치다. 최고 레스토랑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도시의 분위기가 스며든 식당을 고른다. 낮에 돌아다니며 마음에 드는 동네와 식당을 찾는다. 앱의 맛집 정보는 그리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경험치 다. 이왕이면 옷도 차려입는다. 치마만 입으면 되니까 간단하다. 내가 맛보고 싶은 것은 음식 맛보다도 그 도시의 저녁 분위기다. 가족이건 연인이건 비즈니스맨이건, 어떤 사람들이 어떤 차림으로 어떤 음식을 어떤 술과 함께 어떤 분위기를 만드는지 맛보고 싶다. 이렇게 근사한 저녁을 먹고나면 나도 그 도시 시민이 된 것처럼 스스로 근사하게 느껴지는 게 좋다.
둘째 사치는 추억을 자극할 물건을 꼭 사는 것이다. 그 도 시의 대표적 공예품을 사는 적이 제일 많다. 돌, 타일, 유리,
가난한 여행 vs 부자 여행 199
하나는 심상을 지키기 위해 가지 않았다. 그런데 가끔 혼자 궁금해한다. 내가 어렸을 때 그리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이 세 공간에 실제로 가봤더라면 무슨 일이 생겼을까? 나는 어딘가 변했을까?
그곳에 갔더라면
나는 어딘가 달라졌을까?
모를 일이다. 내가 정말 마추픽추에 갔더라면, 포탈라궁에 갔더라면, 에피다우로스 원형극장에 갔더라면 내 인생의 뭔가가 달라졌을까? 선배 건축가인 고 김수근이 마추픽추에 가서 "이제 완전히 새로운 김수근이 될 것이 다"라는 말을 했다고 들은 적이 있다. 그만큼 감흥이 컸다 는 뜻일 것이다. 그는 마추픽추에 다녀온 지 얼마 안 되어서 작고했다. 사람의 일은 정말 모른다.
'그 전과 그 이후의 인생이 달라졌다'는 말이 곧잘 들리는 걸 보면 인생의 어떤 체험에서 영향을 받는 것은 분명하다. 예컨대, 미켈란젤로가 「라오콘 군상」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의 후기 작품이 나올 수 있었을까? 하필 수천 년 동안 유적 속에 묻혀 있던 조각이 그때 발굴되었고, 교황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조각을 복원해서 대중에게 공개할 작심을 했고, 그래서 미켈란젤로가 「라오콘 군상」을 수없이 찾아가 스케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운명적 만남이라고 할 만하다.
「키스」로 유명한 빈의 화가 클림트는 어쩌다가 이탈리아에 일종의 연수여행을 떠난 적이 있는데, 그때 라벤나에 유독 원형이 잘 보전되어 있던 금으로 도색한 성화들에 매혹된 후에 자기 그림에 금칠을 시작했다. 그 이탈리아 여행이 없었더라면 클림트 그림의 유혹의 파워는 훨씬 더 약해졌을지도 모른다.
244 3부 여행
시간이 훅훅 지나간다. 아예 시간 개념이 없어지기도 한다. 낮인지 밤인지, 아침인지 저녁인지 모르고 빠진다. 방구석에서 나와도 스마트폰이라는 손바닥 세계까지 등장했으니 방구석은 어디로나 연장된다. 지하철에 들어서면 모두 귀에 이어폰을 끼고 스마트폰 화면에 눈이 고정돼 있다. '그래, 이것도 나쁘지 않아. 다들 피곤한 세상을 등지고 자기만의 세상에 빠질 수 있는 거잖 아?' 한동안 좋게 생각주던 나도 요즘은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취해 있는 좀비들이 가득 찬 지하철'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SNS로 수다 떨 때는 그나마 아직 타인과 연결되어 있다. 드라마, 게임, 영화, 유튜브에 흠뻑 빠진 사람들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잊은 듯하다.
아날로그 방구석 세계와 디지털 방구석 세계가 다른 점은 확실하다. 아날로그 방구석이 나가고 싶은 갈망을 키운다면, 디지털 방구석은 나가고 싶지 않게 만든다. 아날로그 방구석이 절절하게 외로움을 느끼게 만든다면, 디지털 방구석은 풍성한 도취감마저 준다. 온통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디지털 세계에서 자유자재로 세상을 주무르고 흔들고 누비며 나의 세계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디지털 방구석 여행의 축복과 저주 263
붙이지 않더라도 일상 속에서 오가는 시간을 여행의 시간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일상의 여러 순간들과 하루 중 일정한 시간을 여행처럼 만드는 습관을 들였다. '인생 자체가 여행'이라는 말과 통한다. 둘째는, 여행의 시간에서 느낀 체혐의 밀도가 높아서 기억 속의 시간이 무척 길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기억 속에서 더욱 빛나는 여행의 시간'이라는 경험치와 통한다.
여행의 시간은
인생의 시간을 늘린다
여행은 인생의 시간을 확장하는 효과가 뚜렷하다. 잠깐만 낮잠을 자도 하루에 '세컨드 윈드'second wind가 불며 기운이 나듯, 여행은 인생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준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흐르지만 어떤 에너지를 불어넣느냐, 어떠한 자극을 어떤 강도로 받느냐에 따라 바람의 향방과 세기가 달라지고 우리가 느끼는 시간감각도 달라지는 것이다.
여행을 떠나면 반나절 정도 지났는데도 완전히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 와 있음을 깨닫고 깜짝 놀라곤 한다.
276 3부 여행
집에 있었더라면 밥 먹고 차 한잔 마시고 스마트폰을 검색하거나 TV 채널을 돌리면서 소파 근처에서 빈둥대며 시간을 흘려보냈을 텐데 떠나니까 이렇게 다른 세상이 있구나, 귀중한 시간을 제대로 붙들었다는 느낌이 든다. 특히 여행 첫날은 왜 그리 길게 느껴지는지 모른다. 하루에 할 수 있는 경험이 이렇게 많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그런가 하면 여행길에서 돌아오는 날은 마치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처럼 순식간에 지나가버린다. 빠르다기보다는 마치 그 시간이 사라 져버린 듯하다.
기억 속에서 여행은 완전히 다시 태어난다. 마치 꿈을 꾼 것처럼, 마치 시간여행을 한 것처럼 말이다. 여행 속의 시 간감각마저 기억 속에서는 다시 태어난다. 왜 이렇게 긴시간으로 느껴질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왜 이렇게 '많은' 시간으로 느껴질까?
여행에서는 수없이 많은 사건들이 압축되어 하나하나가 특별한 시간으로 기억된다. 인상적인 기억은 우리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재생되면서 확장되고 증폭되기 때문일 것이다.
에필로그 277
영화를 처음 볼 때는 순식간에 100분이 지나가지만, 인상적인 영화를 머릿속에서 반복적으로 리플레이하면 영 시간이 아주 길게 느껴지는 것과 비슷하다. 영화 「인셉션」에서 꿈속의 꿈을 여러 단계 더 들어갈수록 시간의 길 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이론이 나오는데, 적어도 인식의 흐름에서는 맞는 이론으로 보인다.
우리가 진짜로 시간여행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는 여행과 비슷한 체험일 것 같다. 다른 시간대에 떨어져 낯선 환경, 낯선 인물, 낯선 사건을 겪고 돌아왔을 때 그 시간은 현재에서는 순간에 불과하지만 시간여행을 했던 그 시간은 자신의 인생에 덧셈이 되며 기억의 시간을 늘리는 것이다. 그래서 소설이나 영화에 나오는 시간여행자들이 그렇게 현명한 사람으로 그려지는지도 모른다. 경험의 폭이 넓으니 얼마나 많은 산전수전을 겪고,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겠으며,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하고, 얼마나 마음이 많이 흔들렸겠는가? 우리가 시간여행을 할 수는 없지만, 인생에서 여행의 시간을 보탬으로써 아주 조금이나마 시간여행의 맛을 볼 수 있다.
278 3부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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