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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두번째 책 : 고양이를 버리다-무라카미 하루키

by 마파람94 2022. 6. 29.


하루키 책은 보증수표, 만기가 자유로운 채권 같다는 생각입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한 번도 신뢰를 저버린 적이 없으니까요. 아직까지는요.

이번 책의 줄거리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면서도 자신에 대한 존재로 연결되어 글이 이어집니다. 버린 고양이가 다시 집으로 찾아왔을 때는 그의 아버지 마음이 무척 공감이 되었습니다.

한편으로 나도 한번 아버지를 떠올려 글을 써볼까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하루키처럼 세련된 글로 표현은 못하겠지만, 분량은 서너 배 정도로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마음이 저만 그럴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아마도 자식된 이들 모두가 그렇지 않을까 합니다.

책갈피입니다.


 

 

우리 어머니는 "네 아버지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서" 하고 내게 종종 말했다. 실제로 아버지의 머리가 얼마나 좋았는지는 모른다. 그때도 몰랐고 지금도 모른다. 아니, 그런 것에는 딱히 관심이 없다. 아마 나 같은 직업을 가진 인간에게 사람의 머리가 좋고 나쁘고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닐 것이다. 좋은 머리보다는 오히려 마음의 자유로운 움직임, 날카로운 직감 같은 것을 중요시한다. 그러니 '머리가 좋다 나쁘다' 하는 가치 기준을 축으로 인간을 가늠하는 일은 적어도 내 경우 거의 없다. 그런 부분은 아카데믹한 세계와 아주 다르다. 그러나 어쨌거나, 아버지의 학업 성적이 줄곧 우수했던 것만은 틀림없는 듯하다.

그에 비하면 나는 아쉽게도(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학문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해서 학교 성적이 늘 신통치 않았다. 좋아하는 일은 끝까지 열심히 물고 늘어지지만, 좋아할 수 없는 일에 거의 관심이 없는 성격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러니 당연한 일이지만,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나의 학업 성적은 그렇게 한심하지 않아도 절대 주위 사람들이 감탄할 정도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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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 아버지와 나는 그의 인생 마지막의 아주 짧은 기간이었지만 어색한 대화를 나누고 화해 비슷한 것을 했다. 사고방식과 세계를 보는 시각은 달라도, 우리 사이를 잇는 연 같은 것이 내 안에서 하나의 힘으로 작용했던 것은 분명하다. 아버지의 깡마른 모습을 보면서, 그 작용을 여실히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그 여름날, 같이 자전거를 타고 줄무늬 암고양이를 버리러 고로엔 해변에 갔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그 고양이에게 추월당했다. 뭐가 어찌 되었든, 우리는 멋지고 그리고 수수께끼 같은 체험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가. 그때 해안의 파도 소리를, 소나무 방풍림을 스쳐가는 바람의 향기를, 나는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해낼 수 있다. 그런 소소한 일 하나하나의 무한한 집적이 나라는 인간을 이런 형태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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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나는 나의 핏줄을 더듬는 식으로 아버지와 관계있는 사람들을 만나, 그에 대한 얘기를 조금씩 듣게 되었다.

이렇게 개인적인 문장이 일반 독자의 관심을 얼마나 끌 수 있을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나는 손을 움직여 실제로 문장을 쓰는 것을 통해서만 사고할 수 있는 인간이기에 (태생이 추상적, 관념적으로 사색하는 것에 서툴다) 이렇게 기억을 더듬고, 과거를 조망하고, 그걸 눈에 보이는 언어로, 소리 내어 읽을 수 있는 문장으로 환치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문장을 쓰면 쓸수록 그리고 그걸 되읽으면 되읽을수록 나 자신이 투명해지는 듯한 신비로운 감각에 휩 싸이게 된다. 손을 허공으로 내밀면, 그 너머가 아른하게 비쳐 보일 듯한 기분마저 들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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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버리다

 

만약 아버지가 병역에서 해제되지 않아 필리핀이나 버마 전선으로 보내졌다면…………… 만약 음악 교사였다는 어머니의 약혼자가 전사하지 그렇게 생각해가다 보면 정말 않았다면... 기분이 묘해진다. 만약 그랬다면, 나라는 인간은 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그 결과, 당연히 나라는 의식은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내가 쓴 책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면 소설가로서 이렇게 살아있는 나의 삶 자체가, 실체가 없는 덧없는 환상처럼 여겨진다. 나라는 개체가 지닌 의미가 점차 모호해진다. 손바닥이 비쳐 보인다 한들 이상할 게 없다.

 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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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이다.

나는 한 평범한 인간의, 한 평범한 아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차분하게 그 사실을 파헤쳐가면 갈수록 실은 그것이 하나의 우연한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점차 명확해진다. 우리는 결국, 어쩌다 우연으로 생겨난 하나의 사실을 유일무이한 사실로 간주하며 살아있을 뿐이 아닐까.

바꿔 말하면 우리는 광활한 대지를 향해 내리는 방대한 빗방울의 이름 없는 한 방울에 지나지 않는다. 고유하기는 하지만, 교환 가능한 한 방울이다. 그러나 그 한 방울의 빗물에는 한 방울의 빗물 나름의 생각이 있다. 빗물 한 방울의 역사가 있고, 그걸 계승해간다는 한 방울로 서의 책무가 있다. 우리는 그걸 잊어서는 안 되리라. 가령 그 한 방울이 어딘가에 흔적도 없이 빨려 들어가, 개체로서의 윤곽을 잃고 집합적인 무언가로 환치되어 사라져간다 해도, 아니,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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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집합 적인 무언가로 환치되어가기 때문에 더욱이

나는 지금도 때로 슈쿠가와 집의 마당에 서 있던 높은 소나무를 생각한다. 그 가지 위에서 백골이 되어가면서도, 사라지지 못한 기억처럼 아직도 거기에 단단히 매달려 있을지 모르는 새끼 고양이를 생각한다. 그리고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고, 저 먼 아래, 눈앞이 어질어질지 는 지상을 향해 수직으로 내려가는 어려움에 대해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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