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일곱 번째 책 : 한밤중에 잠깨어
이 책은 정약용의 강진 생활 때 그가 지은 한시와 그것의 설명을 달아놓은 책입니다.
그의 형인 정약전은 저 멀리 남해 바다 흑산도로 갔고, 동생 정약용은 그보다는 상대적으로 나은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되었습니다. 그 당시 큰 형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었죠.
200여 년 전 40~50대의 다산 정약용의 유배지에서 지은 시를 통해 그의 감정을 떠올려 오늘에 가늠해 봅니다.

장자의 봄꿈 自笑 10-8
불행히 곤궁해도 곤궁을 안 쫓으리 곤궁을 견뎌냄이 참으로 영웅일세.
재로 변한 한안국韓安國을 그 누가 돌아보리 강 건널 젠 언제나 여마동呂馬과 만난다네.
은총과 욕됨 모두 장자의 봄꿈이니 어질고 어리석음 두보의 취시가醉詩歌라.
지난밤 바다 위로 부슬부슬 비 오더니 숲 꽃들 나무마다 붉게 온통 피었구나.
不幸窮來莫送窮
成灰孰顧韓安國
寵辱莊生春夢裏
海天昨夜霏霏雨
固窮眞正是豪雄
臨渡常逢呂馬童
賢愚杜老醉歌中
雜沓林花萬樹紅
내 비록 곤궁하나 한유韓愈처럼 궁상을 몰아내겠다며 「송 궁문送窮文」을 짓지는 않겠다. 그 궁함을 오롯이 받아 그대로 견디겠다. 한안국도 권좌에서 물러나자 일개 옥리에게 치욕을 당했다. 달아나 오강烏江을 건너던 항우는 옛 친구 여마동의 배신으로 죽고 말았다. 지난날의 은총과 지금의 욕됨은 굳이 따져 무엇하리. 장자의 호접몽이려니 하겠다. 보라! 간밤 바다 위에 비가 내려 춥더니, 그 비 맞고 오늘은 꽃이 활짝 피었구나. 인생의 화복도 저와 같은 것이려니.
송궁送窮 궁함을 전송하다. 한안국韓安國 한나라 양효왕梁孝王 의 중대부中大夫. 권좌에 있다가 실세하자 옥리獄吏인 전갑田甲 이 한안국을 욕했다. 안국이 죽은 재도 다시 불붙는 수가 있다고 하자, 옥리는 불이 붙기만 하면 오줌을 싸버리겠다고 했다. 여마동呂馬童 항우項羽가 패해 오강을 건너려 할 때 항우의 옛 친구 여마동이 왕예王翳에게 저 사람이 바로 항우라고 가르 쳐주어 궁지에 몰려 자살하고 말았다. 잡답雜沓 잡다하게 뒤섞 인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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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희낙락 古詩 27-3
하늘땅 드넓어 가이없으니 만물로 능히 다 채울 수 없네.
이 작은 일곱 자 몸뚱이래야 사방 한 자 방이면 살 수가 있지.
아침에 일어나다 머릴 박아도 밤에 누워 무릎을 펼 수가 있네.
작은 곤궁 동정하는 벗이 있지만
큰 곤궁은 돌봐주는 사람이 없네.
희희낙락 들판의 저 백성들은 몸놀림이 어찌 저리 거리낌 없나.
二儀廓無際 萬物不能實
眇小七尺軀 可容方丈室
晨興雖打頭 夕偃猶舒膝
小窮有友憐 大窮無人恤
熙熙田野氓 動作何豪逸
드넓은 우주에 사람이 차지할 공간은 방 한 칸이면 너끈하 다. 귀양지의 삶이 초라해도 무릎 펴고 잠잘 공간이 주어진 것이 고맙다. 작은 곤경에는 내미는 손길이 있어도, 큰 환 난 앞에서 사람들은 등을 돌린다. 도와줄 엄두가 안 나고, 재기의 희망이 없다고 보는 것이겠지. 친한 벗들도 모두 내 게 등을 돌렸다. 탓할 생각은 없다. 저 들판에서 일하는 농 투성이 백성들을 보라. 힘들어도 그 몸놀림이 활기차 움츠 러듦이 없다. 지금 내가 불행하고 불편한 것은 내 것인 줄 알고 쥐었다가 놓친 것 때문일 터. 원래 가진 것 없는 저들 은 드넓은 천지를 제 집 삼아 구김살 없이 산다. 주눅 들지 않겠다. 남 탓하지 않겠다. 툭 터져 시원해지겠다.
이의二儀 천지天地의 다른 표현. 소소渺小 아주 작다. 보잘것없다. 희희熙熙 환하게 기뻐하는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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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내 古詩 27-15
무늬 표범 숲 속에 엎드려 있자 까막까치 나무 위서 우짖어댄다.
긴 뱀이 울타리에 걸쳐 있으니 참새 떼 시끄럽게 알려주누나.
개백정이 올가미를 들고 지나면 사방에서 뭇 개들이 시끄럽다네.
새 짐승엔 성냄을 감추지 못해 알아챔이 참으로 귀신과 같지.
포학한 속내는 드러나는 법 어린 백성 어이해 속이겠는가.
사덕四德이 비록 모두 아름다워도 군자는 늘 인을 앞세운다네.
산 풀도 오히려 안 밟는다니 저 기린 참으로 훌륭하구나.
文豹伏林中 烏鵲樹頭噴
長蛇掛籬間 瓦雀噪報人
狗屠帶索過 群吠鬧四隣
禽獸不藏怒 其知乃如神
內虐必外著 何以欺愚民
四德雖竝美 君子每先仁
生草猶不履 賢哉彼麒麟
숲 속에 표범이 웅크리면 나무 위 까막까치가 먼저 시끄럽 다. 울타리에 구렁이가 올라앉자 참새 떼가 온통 난리다.
올가미를 든 개백정이 마을에 나타나니 동네 개가 먼저 위 협을 느끼고 한꺼번에 짖어댄다. 불온한 기운은 귀신같이 전염된다. 나쁜 생각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알아챈다. 남을 해코지하는 마음, 음험한 속내는 아무리 감춰도 드러나 게 마련이다. 참새 떼도 알고 까막까치도 알고, 동네 개도 다 아는 것을 어리석은 백성이라 해서 모를 리가 있는가? 입만 열면 인의예지를 되뇌면서, 속으로는 남을 거꾸러뜨 리지 못해 저렇게 안달들이다. 군자는 사덕四德 중에서도 인간을 늘 앞세운다고 했다. 그 정신을 이제 와서 어디 가 서 찾을까? 살아 있는 것은 풀조차도 밟지 않는다는 저 기 린을 보라. 사람의 어짊이 기린만도 못하다.
문표文豹 무늬 있는 표범. 진噸 시끄럽게 우짖다. 구도狗屠 개 잡는 백정. 내학內虐 내면이 포학함. 사덕四德 사람이 갖추어 야 할 네 가지 덕목. 인의예지仁義禮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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뽕나무 古詩 27-17
내 동산에 뽕나무가 한 그루인데 서루書機 기둥 근처 있어 고약하구나.
어린 종이 그 가지를 잘라버려도 새 가지가 더욱더 무성하다네.
손님이 줄기를 베어버려도 밑동에서 봄 되면 움이 돋는다.
해마다 자르고 베어버려도
해마다 저절로 생겨난다네. 그 고심苦心이 진실로 감동되길래 북돋워서 자라게끔 내버려 뒀지.
지난봄엔 말 먹이는 뽕잎이 되어 아웅다웅 다투는 일 면하였다네.
좋은 나무 마침내 못 버리는 법 가시나무 어이 감히 서로 겨루랴.
吾園一株桑 苦近書樓楹
小奴剪其枝 新條益暢榮
舍客伐其榦 槎藥又春萌
年年受剪伐 年年也自生
苦心良可感 培壅使其成
前春上馬桑 免使吳楚爭
良木不終棄 栻棘敢相嬰
공부방 기둥 곁에 바싹 붙어 자라는 뽕나무 한 그루. 벌레가 자꾸 꼬이고, 시야를 가려 성가시다. 아이를 시켜 밑동을 잘라내도 금세 또 자라고, 줄기를 베어내도 소용이 없다. 그렇게 죽이려고 해도 저렇게 살겠다고 애를 쓰니, 죽 이려던 마음이 살겠다는 마음 앞에 갑자기 민망하다. 네 멋대로 커봐라 하고 거름도 주고 흙도 북돋워 줬더니 제법 키가 커서 말에게 먹일 뽕잎이 거기서 다 나왔다. 서로의 영역을 인정해 주니, 평화가 찾아왔다. 저는 내게 말먹이용 뽕잎을 제공해 주고, 나는 저에게 당당한 제 생명을 구가할 권리를 부여해 주었다. 만약 저 나무가 뽕나무가 아니라 가 시나무 잡목이었다면 어떻게든 뿌리째 뽑아 없앴으리라. 나는 네가 쓸모 있는 자질을 타고났으되 바른 자리를 가 려 뿌리내리지 못한 것을 슬퍼한다. 그럼에도 시련에 주저앉지 않는 굳센 의지와 타고난 쓰임새로 인해 본연의 성품을 간직하게 된 것을 기뻐한다. 집 귀퉁이 뽕나무야, 내 너를 보고 느끼는 것이 참 많다.
사얼槎蘗 나무를 베고 남은 그루터기 밑동. 배옹培壅 거름을 주어 북돋움. 상마상上馬桑 말에게 먹이려고 싣고 다니는 뽕 잎. 오초쟁吳楚爭 오나라와 초나라가 늘 아웅다웅하듯이 살려 는 뽕나무와 없애려는 어린 종의 실랑이가 필요 없게 되었다는 뜻. 이극械棘 가시가 많은 멧대추나무. 잡목의 의미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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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 古詩 27-19
일대일
0
만물은 저마다 분수 있으니 힘만으론 운명과 못 맞선다네.
청학은 높은 솔에 둥지를 틀고 참새는 갈대 위에 집을 짓는 법.
참새가 높은 솔에 둥지를 틀면
바람 불어 휩쓸려 부서진다오.
난쟁이는 짧은 옷을 받아야 하니
어이해 울근불근 근심 품을까.
화려한 집 부러울 일 무엇이리오 진창길을 스스로 즐거워하네.
萬物各有分 力命多不敵
青鶴巢喬松 黃雀巢葦荻
黃雀巢喬松 風吹遭蕩析
焦僥受短襦 胡為銜戚戚
藻稅何須慕 泥塗方自適
저마다 타고난 분수가 있으니, 힘만으론 운명과 맞설 수가 없다. 청학은 높은 솔 위에 살고, 참새는 갈대에 둥지를 얽는다. 제 깜냥도 모르고 참새가 높은 솔 위에 둥지를 틀면 바람을 못 견뎌 날려가 버린다. 난쟁이는 짧은 옷이 맞고, 꺽다리는 큰 옷이라야 한다. 내 몸에 맞고 안 맞고가 문제 지, 크기는 문제가 아니다. 기둥에 화려한 단청으로 꾸민 집을 부러워하지 않겠다. 현재의 이 진흙탕 길이 오히려 편 안하다. 나는 난쟁이다. 나는 참새다.
역명力命 힘과 운명. 역량과 운명이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 탕석蕩析 바람에 휩쓸려 갈라지다. 초요焦僥 난쟁이. 척 척戚戚 근심 겨운 모양, 조절藻稅 동자기둥에 그림을 그려 장식하다. 절稅은 들보 위에 세워 상량을 받치는 동자기둥. 그림을 그려 장식하는 것. 왕공귀인王公貴人의 화려한 거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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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양지의 여덟 위안 遷居八趣
바람 遷居八趣 8-1
서풍은 고향 집 지나서 오고
동풍은 나에게 들러서 간다.
바람 오는 소리를 듣기만 할 뿐
바람 이는 곳 어딘지 볼 수가 없네.
서풍이 분다. 고향 집을 지나서 온 바람, 가족의 더운 숨 이 그 한끝에 묻었으려니 하니 마음이 애틋하다. 봄바람 이 일어 고향 쪽으로 불어 간다. 이번엔 내 숨결을 실어 보 내마. 우리는 이렇게 안부를 나누자. 방 안에 홀로 앉아 바 람 소리를 듣는다. 어디서 오는 바람이냐, 어디로 가는 바 람이냐. 바람 속에 홀로 앉아 나는 길을 잃는다. 우왕좌왕한다. 미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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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회포 客中書懷
흩날리는 눈처럼 북풍이 날 불어와 남녘 땅 강진의 밥 파는 집까지 왔네.
그나마 남은 산이 바다 빛을 가려주고 대숲 둘러 세월을 보내게 됨 다행일세.
땅의 장기療氣 때문에 겨울옷 외려 얇고 근심 많아 밤중 되면 술을 더 마신다네.
나그네 근심을 녹여주는 한 가지는 섣달 전에 동백이 꽃을 피운 것이라네.
北風吹我如飛雪 南抵康津賣飯家
幸有殘山遮海色 好將叢竹作年華
衣緣地瘴冬還減 酒為愁多夜更加
一事纔能消客慮 山茶已吐臘前花
밥 팔고 술 파는 주막집에 겨우 거처를 정했다. 서문으로 들어서서 읍내를 가로지르는 동안 아무도 나를 자기 집에 들이려 하지 않았다. 매몰차게 문을 닫고 돌아섰다. 북풍 은 휘몰아치는데, 지친 몸을 끌고 한 집 한 집 닫힌 문 앞을 지나오는 동안 나는 참 생각이 많았다. 저 캄캄한 바다 위 섬으로 귀양을 간 형님보다는 내 형편이 훨씬 낫겠지. 겨울인데도 장기瘴氣가 무서워 옷을 오히려 가볍게 입는다. 밤중에는 활활 타는 가슴을 식히려고 술 힘을 빌리곤 한 다. 섣달 전인데도 동백꽃이 붉게 피었다. 꽁꽁 언 눈 속에 핀 저 붉은 꽃에서 나를 추스릴 힘을 다시 얻는다. 내 인 생의 새봄도 저리 올까 싶어, 자꾸 그 붉은 꽃을 올려다보 곤 한다.
매반가賣飯家 밥 파는 집. 1801년 11월에 강진에 유배 와서 처음 거처로 정한 강진 동문 밖 주막집. 차遮 막다. 가리다. 총죽叢 竹 대나무 숲. 장 습하고 더운 땅에서 나는 나쁜 기운 재纔 겨우. 간신히. 산다山茶 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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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웃다 獨笑
곡식 있는 사람은 먹을 이 없고 아들이 많고 보면 배곯아 걱정.
지체 높은 벼슬아치 꼭 멍청하고 재주 있는 사람은 쓰일 데 없네.
집마다 온전한 복은 드물고 지극한 도리는 늘 쇠약하구나. 인색한 아비에 방탕한 자식 지혜로운 아내는 꼭 못난 서방. 달이 차면 구름과 자주 만나고 꽃 피자 바람이 그르쳐놓네.
사물이 모두 다 이와 같거니 홀로 웃음 아는 이 아무도 없네.
有粟無人食 多男必患飢
達官必惷愚 才者無所施
家室少完福 至道常陵遲
翁嗇子每蕩 婦慧郎必癡
月滿頻値雲 花開風誤之
物物盡如此 獨笑無人知
재산을 모아 먹고살 만한 사람은 함께할 가족이 없다. 막 상 그가 부러워할 아들이 많은 집은 양식이 떨어져 자식 배를 자주 꿇리는 것이 안타깝다. 조정의 높은 벼슬아치는 어쩌면 저렇게 무능한 자 들뿐이고, 재주 있는 선비는 그 재주를 펴볼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재야에서 썩고 있다. 서로 역할을 바꾸면 좀 좋을까. 두루 살펴봐도 모든 복을 다 갖춘 집은 하나도 없다. 말세가 되어가는 증거로구나. 아비가 구두쇠 노릇을 해서 한 푼 두 푼 아껴 모은 재산을 아들은 색주가에 한입에 털어 넣고 만다. 아내가 알뜰살 뜰 장만한 살림으로 못난 서방은 남 좋은 일만 시킨다. 보 름달 달구경 좀 하려 하면 이상하게 구름이 낀다. 꽃 피면 마음이 좀 환해질까 싶어 기다렸는데 밤사이 바람이 갓 핀 꽃을 진창에 떨궈버린다. 참 야릇도 하지. 세상일이 어쩌 면 이렇게 생각과 반대로만 갈까. 지나온 삶 돌아보다가 하 도 어이가 없어 혼자 피식 웃고 만다.
용우 바보 멍청이. 어리석고 용렬함. 능지陵遲 쇠퇴해 가는 모양. 색 인색하다. 탕 방탕하다.
강진 유배기의 한시/215
마음 憂來 12-9
마음이 육신에게 부림당함은 도연명도 직접 말을 한 적이 있네. 백 번을 싸워서 백번 다 지니 내가 봐도 얼마나 어리석은지.
以心為形役 淵明亦自言
百戰每百敗 自視何庸昏
내 마음은 번번이 내 몸뚱이에 휘둘린다. 나는 내 마음의 주인으로 살지 못하고, 육체의 종이 되어 살았다. 옳은 줄 알면서도 귀찮아서 외면했고, 해야 할 일인데도 피곤해서 밀쳐두었다. 배를 채우기 위해 못 하는 일이 없었고, 이익만 된다면 의로움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몸과 마음이 싸우면 늘 몸이 이겼다. 마음은 결과를 합리화하기 바빴 다. 나는 내 몸뚱이의 종이요, 하인이다. 이 어리석은 놈!
위형역爲形役 형상의 부림을 당하다. 도연명이 『귀거래사』에서 한 말이다. 용혼庸昏 용렬하고 어리석다.
258
담박 淡泊
담박을 즐기니 한 가지 일도 없어 타향의 살림살이 외롭지만은 않네. 손님 오면 꽃 아래로 시권詩卷을 가져오고 중 떠난 침상 곁엔 염주가 남아 있지. 한낮이면 채마밭에 벌이 한창 붕붕대고 따순 바람 보리 이삭 꿩이 서로 부르누나. 우연히 다리 위서 이웃 영감 만나 조각배 함께 타고 진탕 마실 약속했네.
淡泊為歡一事無 異鄉生理未全孤
客來花下攜詩卷 僧去牀間落念珠
荣莢日高峰正沸 麥芒風煖雉相呼
偶然橋上逢隣叟 約共扁舟倒百壺
잡다한 일 걷어내니 삶이 한결 투명해졌다. 욕심이 사라지 자 주변에 일이 없다. 그렇지만 나도 나름대로 바쁘다. 손 님이 찾아오면 꽃그늘 아래로 내려가 시권을 펼쳐놓고 함께 시를 짓는다. 운승해僧이 다녀간 자리에는 무심히 두고 간 염주가 놓였다. 내가 그 안에 있지만, 물끄러미 바라본 다. 봄이라 벌들은 붕붕붕붕 부산을 떨며 꿀을 빠느라 정 신이 없다. 봄바람이 보리 이삭을 쓸고 지나가면 그 속에 숨었던 새끼 꿩이 겁이 났던지 제 어미를 부르는 소리를 낸다. 늘어진 봄날의 산보가 길어져 다리께까지 나왔다. 지나던 이웃 영감이 반가이 알은체를 한다. "아이고, 선생님! 마침 잘 만났습니다. 이번 보름에 동무들하고 밤중에 뱃놀이를 놀 참인데, 함께 가시지요. 술은 억수로 많이 장 만해두었습니다."
휴攜 가져가다. 시권詩卷 시 두루마리, 채협榮莢 채소 꼬투리. 채마밭. 정비正沸 한창 부산스럽다. 맥망麥芒 보리 까끄라기.
강진 유배기의 한시/275
설날의 감회 元日書懷 庚午在茶山
마흔아홉의 심정 元日書懷 庚午在茶山2-1
하늘 끝서 세월은 말 달리듯 빠른데 해마다 봄빛은 약속한 듯 오누나.
아침상 넉넉하다 아홉 가지 부추 나물 늙은 나이 어느새 마흔아홉이 되었네.
지보支의 깊은 근심 뉘 함께 말해보리 소요부邵堯夫의 안락법을 세상은 모르리라.
차가운 산속이라 시내 온통 얼음 눈뿐 곧 피어날 홍매 가지 그것만 걱정일세.
天末流光疾若馳 只管紅梅早晚枝
朝盤未薄三三韭 年年春色到如期
支父幽憂誰共語 暮齒今齊七七蓍
一溪氷雪寒山裏 堯夫安樂世難知
어느새 1810년 정월이다. 긴 시간이 흘렀다. 올해로 내 나 이 마흔아홉이다. 거백옥은 50에 새 출발을 다짐했다는데, 내게도 그런 일이 가능은 할까?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천 하를 양위하겠다는 요순의 제안을 한마디로 거절했던 지 보의 그 마음을 내가 알 것만 같다. 저 소문산 아래 깊은 골짝으로 숨어들어 안락와安樂窩를 지었던 소강절邵康節의 삶이 새삼스럽다. 홍매의 제일 높은 가지가 이제 곧 꽃을 피우겠지. 내 걱정은 아직 추운데 저것들이 멋모르고 피었 다가 얼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것이다.
질약치疾若馳 빠르기가 마치 말이 내달리는 것만 같다. 미박未 薄 박하지 않다. 삼삼구三三韭 남조南朝 때 유고지庾果之가 밥상에 늘 부추로 만든 반찬 세 가지三韭만 놓았다는 고사에서 따 온 말. 삼삼크크은 9九이니 부추 구韭의 음과 같다. 칠칠시七七蓍 칠칠은 49이니, 나이가 49세라는 의미다. 춘추 시대 위衛나라 대부 거백옥蘧伯玉은 50세 때 인생을 돌아보곤 지난 49년간의 삶이 잘못되었음을 알았다고 한 고사가 있다. 지보支父 옛날 현자의 이름. 요堯와 순舜이 지보에게 천하를 양보하자, 지보가 "나는 지금 남 모르는 병을 앓고 있어 그 병을 다스리느라 천 하를 맡아 다스릴 여가가 없다"고 한 일이 있다. 요부堯夫 송宋 의 소옹邵雍의 자字. 소문산蘇門山에 은거하며 거처를 안락와安 樂窩라고 이름하고 자호를 안락선생安樂先生이라 하였다. 지관 只管 다만 신경 쓴다.
강진 유배기의 한시/2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