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여섯 번째 책 : 에디터의 기록법
편집자들의 고민을 간접 경험해 볼 수 있는 책을 만났습니다. 한 권의 책에 총 8명이 쓴 글을 접했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 난해한 한 두 분의 글 때문에 힘들었습니다.
글쓴이 분들과 공감된 부분을 정리해봅니다. 결국 에디터의 기록법은 내가 책을 읽고 이곳 블로그에 글을 남겨 두는 것과 근본적으로 유사한 활동이었다는 것입니다.
여하튼 밑줄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과거에 빌 브라이슨의 《거의 모든 사생활의 역사>를 읽으며, 유럽 근대사의 서술과정에서 '하인'의 존재가 전등 밑 그림자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책에서 저자가 직접적으로 하인을 다룬 부분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두꺼운 책을 읽는 내내 아무리 가난한 집안이라도 '전일제 하인'을 한 명쯤 뒀으며 '18세기엔 런던의 젊은 여성 중 3분의 1이 하녀였다'라는 대목은 왠지 모르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왜 지금까지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스스로 의아할 정도였다. 이처럼 과거에 하인이 많았던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값이 쌌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일이 19~20세기 중반까지 지속됐다. 전쟁, 불경기 등을 거치며 살기 힘들어진 부모는 어린 여자아이를 돈 몇 푼 받고서 남의 집 식모로 팔아넘겼다. 여기서 오늘날 외국인 가사 노동자의 최저임금 관련 이슈가 따라붙는다. 가사 노동의 값을 덜 매겨 저렴하게 가사 노동을 '아래 인간(下人)'으로 떠 넘기겠다는 것은 정계가 강조하듯 '새로운 해법'이 아니라 정의롭지 않다는 이유로 폐기된 오래된 방식이라 볼 수 있다. 과연 내가 최신 뉴스만 들여다보고 있었다면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었을까?
두 명의 심리학 전문가가 저장 강박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책 《잡동사니의 역습>을 읽으면서는, 저장 강박자들이 인형이며 영수증, 카펫, 사진 앨범, 빈 우유 팩 등을 잔뜩...
에디터의 기록법 021
자조적인 농담으로 얼버무렸지만 사실 나는 에디터라는 직업을 무척 좋아한다. 일상을 관찰하고 그 안에서 재미있는 것을 찾아 이야깃거리를 만드는 일. 허무주의에 빠지거나 냉소하는 대신 기어코 의미를 만들어내는 일. 내가 하는 일이 그런 것이어서 좋다.
그러고 보면 에디터라는 직업은 일이라기보단 라이프 스타일, 습관에 가까운 것 같다. 퇴근하면 오프 모드가 되는 종류의 일은 확실히 아니다. 업무 시간이 아닐 때에도 항상 에디터 자아의 와이파이가 켜져 있어야 한다(사실 자동으로 켜진다). 주말에 누워서 넷플릭스를 보다가도, 성수동에서 데이트를 하다가도 이거 이야깃거리가 되겠다 싶으면 득달같이 채집해서 기록 주머니에 넣는다. 에디터에겐 '상관없는 일'이라는 것이 없다. 계속해서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기웃거린다. 그 반대인가? 아무튼.
무엇을 기록할 것인가
라이프 스타일이 이러하다 보니 웬만한 에디터 출신들은 어디서든 살아남을 수 있는 생활력을 갖추고 있다.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대략 알고 있고, 어떤 주제로도 대화가 가능...
에디터의 기록법 23
Q. 일상적인 것에서 출발하는데 일기장에 써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건 어떻게 다른가?
나 자신에게 일상적일 뿐만 아니라 되게 중요한 문제여야 하고, 그게 날들에게 얘기했을 때도 흥미를 가질 만한 무언가여야 된다. 또 과거에 남들이 많이 했던 얘기가 아니어야 하고, 이렇게 나름 세 가지 원칙이 있다.
장기하, <텐아시아》 인터뷰에서
2011년 인터뷰지만, 이 원칙을 보면 장기하의 에세이가 많이 판매된 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순히 많이 기록한다고 영양가 있는 건 아니다. 개인적인 기록이 아니라 SNS나 책으로 발행할 계획이 있다면 얼마나 대중의 마음을 끄는지도 신경 쓸 수밖에 없다. 내가 생각했을 때 많이 읽히는 콘텐츠는 신선하거나 재미있거나 둘 중 하나다.
첫째, 신선해야 한다. 신선함은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할 때 커진다. 그런데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앞서 말한 인풋이 만든 '관점'에서 나온다. 관점은 내가 어떤 고유한 이야기(글감)를 할 수 있을지 알려주며, 어떤 포맷(문체)으로 제작하면 좋을지 힌트를 준다. 그러므로 퍼스널 브랜딩이나 콘텐츠 기획을 목적으로 기록을 시작한다면, 남들이 쉽게 따라 하기 어려운 삶의 경험들을 추려보면 좋겠다.
내 SNS 프로필 소개글은 “금융에서 콘텐츠로”다. SBI 서울출판예비학교에 다닐 때 금융권에서 출판 업계로 넘어온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출판 업계 전체를 뒤져도 드물다. 기록자로서 퍼스널 브랜딩의 시작은 지나온 내 삶에서 남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을 찾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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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입에 올리면 움찔하기도 하는데, 보통은 '원고 청탁'보다 '부정 청탁'을 훨씬 더 자주 접하니 생기는 일이었다. 원고를 써달라고 '청'하고 부'탁'하는 일이 어떻게 기록이자 무기씩이나 될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청탁이 세상에 없는 것을 눈에 보이게 만들기 위한 최초의 단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나의 답이다. 나는 여기에 무한한 자유보다 좋은 제약을 더해 나만의 무기를 만들었다.
제약의 필요와 기능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 것은 창업한 회사에서 '초단편 소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부터였다. 일본에서는 손바닥만 한 짧은 이야기라는 의미로 손바닥 '장(掌)'자를 써서 '장편('長篇'이 아닌 '掌篇'이다)', 영미권에서는 'Short short story'라는 다소 파격적인 이름으로 불리는 이 장르는 국내에서 본격적으로 정의되고 활발히 다뤄진 사례가 없었다. 이걸 본격적으로 해보기로 하고 내노라하는 국내 작가들에게 원고지 10매, 글자 수로는 2000자 내외의 초단편 소설을 청탁했다. 보통 문단에서 통용되는 단편소설 분량의 10분의 1 수준에 해당하는 그 자체로 가장 강력한 제약에 나는 몇 가지를 더 덧붙였다. 영화도 마찬가지지만 소설은 장편이냐 단편이냐 하는 '길이' 자체가 아주 중요한 장르가 된다. 그리고 그 길이를 결정짓는 것은 '사건의 크기'다. 우리가 좋은 작품이라 부르는 것들은 대개 이야기의 길이에 알맞은 사건의 크기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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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치며 시장의 불안이 폭발했다. 도미노처럼 이어진 하락장이 그 결과였다.
결론적으로 당시 폭락했던 주가는 그 주에 대부분 반등 및 회복하며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결과일 뿐, 파도가 요동치는 바다 한가운데서 곧 잠잠 해질테니 무작정 배의 짐을 다 버리거나 무리하게 더 싣지 말고 차분히 기다리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각국의 중앙은행 정도가 '진정하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었다. 자고 일어나면 다시 혼란이 시작되고, 간밤에 정리한 뉴스와 정세는 금세 수명을 다할 거라는 걸 알아도 우리는 그날 그날 모든 뉴스와 리포트를 읽고 충실하게, 그리고 최대한 쉽게 풀어서 오늘 일어난 일을 전달할 의무가 있었다. 이때야 말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는 기록이 힘을 발휘할 때라고 생각했다.
나 역시 증권 계좌, ISA 계좌, 연금 계좌를 통해 주식에 투자하는 투자자다. 당시를 겪으며 가장 아찔했던 순간은 내가 가진 주식이 하루에 최대한으로 떨어질 수 있는 하한가를 꽉 채우며 폭락했을 때도 아니고, 이럴 때 맞춰 미리 사거나 팔지 못해서 막지 못한 손해나 얻지 못한 이득을 떠올렸을 때도 아니다. 지금처럼 꾸준히 경제 뉴스를 읽지 않았을 때 이런 상황을 맞은 나를 떠올리는 게 가장 아찔했다. 얼마 되지도 않는 주식을 모두 팔아치우고 끝났으면 그나마 양반이고, 역시 주식은 위험한 것이라며 투자에 관심을 끊고 더 나아가 경제 공부에 눈감는 좋은 핑곗거리로 삼았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빠르고 효과적으로 자산을 불릴 수 있을까 고민하던 미래에 대한 관심은 당면한 불안 앞에서 모두 뒷전으로 밀려난다. 하지만 미래는 결국 매 일매일을 기록하고 들여다보는 사람, 위기 상황에서 그 어느 때보다 '현재'에 대해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의 것이다. 우리는 현재에 관한 정확한 분석을 우리가 늘상 지향하는 대로 쉽게 전하면서도 불안만 증폭시키는 경마식 중계와 거리를 두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주식시장이 다시 평소 수준으로 회복하기까지 여러 날의 긴 하루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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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콘텐츠를 찾았다면, 자신의 언어로 기록하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좋은 콘텐츠를 찾았다면, 그다음 할 일은 '자신만의 언어'로 이를 정리하고 요약하는 습관을 가지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능력을 쉽게 과대평가하지만, 과학적으로 인간의 기억력은 그렇게 뛰어나지 않다고 한다. 심지어 그 기억조차도 시간이 지날수록 왜곡되고. 이런 빈약한 기억력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바로 '글(텍스트)'이다. 많은 인류학자가 '문명'은 인류가 필요한 정보를 뇌가 아닌 신체 밖에 저장하면서 시작되었다고 설명한다. 즉, 인류의 발전은 기록 위에서 이루어진 셈. 이는 한 개인에게도 마찬가지다. 모든 걸 암기하고, 머릿속에만 넣으려고 하면, 빈약한 기억력 때문에 늘 많은 손실과 손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뇌 밖에 기록하는 습관을 들이는 것은 자신의 삶을 발전시키는 가장 기초적인 방법일 수 있다.
따라서 콘텐츠를 보다가 너무 좋거나 인상 깊은 장면 또는 감동받는 순간이 있다면, 그걸 머리나 마음속에 담아두려고 하지 말고, 글로 써서 자신의 신체 밖에서도 존재할 수 있게 만드는 연습은 꼭 필요한 일이다. 머릿속의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지만, 글로 새겨둔 정보와 감정, 그리고 기억은 쉽게 변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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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검열관인 비평가를 무시하라, 당신이 쓰는 모든 글은 아름답다.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형편없는 쓰레기 같은 글을 쓸 권리가 있다. 쓸데없는 자책감과 열등감에서 벗어나라.
나탈리 골드버그,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내면에 있던 걸 끄집어내면 취할 부분과 버릴 부분이 보인다. 살릴 부분끼리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번호를 붙인다. 각 번호는 하나의 단락으로 발전시킨다. 한 단락에는 한 메시지만 담는다. 이런 글쓰기 과정에는 여덟 컷으로 나뉜 스토리보드 노트가 편리하다. 컷 하나를 하나의 단락으로 보고 핵심 메시지와 세부 내용을 적는다. 매끄러운 영상을 감상하듯 단락들끼리 유려하게 넘어가도록 개요를 짠다. 스 토리보드 노트가 없어도 된다. 적당한 크기의 메모지나 냅 킨을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작은 종이 하나에 하나의 메시지만 쓴 다음, 순서를 배치하면 된다.
다른 작가의 메모나 스케치를 보며 영감을 얻고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기도 한다. J. K. 롤링은 '글쓰기에 관하여 on Writing'란 인터뷰 영상에서 세계적인 히트작 '해리 포터'와 추리소설 '코모란 스트라이크' 시리즈 등을 어떻게 썼는지 밝혔다.
그가 줄거리를 구상할 때 표를 활용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는데 챕터는 행으로, 이야기의 가닥은 열로 구분하며 이야기의 정보가 어디서 주어져야 하는지 기억하기 위해 붉은 청어 red herring(추리소설에서 주의를 딴 데로 돌리기 위해 쓰는 장치)나 주요 단서 등은 늘 파란색으로 표기한다고 말했다. 그의 손글씨로 빼곡한 표를 보면, 핵심 줄거리를 놓치 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대서사시의 개요를 세세히 썼는지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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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20년부터 2023년까지의 시간을 회고한 글 <마흔 즈음에 개요. 원래 염두에 둔 제목은 정재일의 노래 제목을 딴 '주섬주섬'이었으나 집필 과정에서 바꿨다. 글의 개요를 여러 차례 고치면서 지난 4년 동안 수집하고 기록한 메모 중 일부를 추려 본문에 덧붙였다. 위 이미지는 마지막으로 정리한 개요다. 총 아홉 단락과 열다섯 개 이상의 에피소드로 구성했다.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면서도 핵심 줄거리를 놓치지 않는 사람으로 영화감독 크리스토퍼 놀런도 있다. 영화 평론가 톰 손이 감독을 직접 인터뷰해 정리한 책 《크리스토퍼 놀런》에서도 놀런의 스케치를 볼 수 있다. '꿈속의 꿈'을 모티 브로 더 깊은 잠재의식을 촘촘히 안내하는 <인셉션>의 다층적인 스토리라인, 시간이 정방향으로 흐르는 인물들과 역방 향으로 흐르는 인물들이 서로 거울처럼 다투는 <테넷〉을 구상할 때 감독이 그린 다이어그램을 보면 내가 쓰는 글의 구조도 어떻게 하면 흥미로울지 고민하게 된다.
이런 방법들은 아직 시도에만 그치고 있다. 언젠가 다양 한 인물이 등장하는 소설을 쓸 기회가 생긴다면 유용할 것 같다. 주로 일상을 다루는 내 글은 선형적으로 흐르는 경우 가 많다. 글을 쓰는 내가 길을 잃으면 독자는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를 수도 있다. 따라서 핵심 줄거리라도 분명히 하자는 쪽으로 마음을 다잡는다.
J. K. 롤링과 크리스토퍼 놀런의 메모에서 또 하나 눈여겨본 것은 둘 다 '손으로 직접 썼다'는 사실이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키보드보다 손으로 글을 쓰는 걸 권 한다. 한글 키보드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만 입력 방향이 정해져 있어 의식의 흐름을 자유롭게 따라잡으며 두서없 이 적기에는 손이 낫다. 처음에 PC나 노트북으로 쓰기 시작했더라도 중간에 이를 종이로 출력해 소리 내 읽고 그 위에 다시 손으로 쓰거나 노트에서 재구성하는 과정을 거친다.
220 삶을 글로 지어내는
잔잔한 호수의 표면도 자세히 보면 미세하게 파도가 친다. 제아무리 잔잔하고 지루한 인생이라도 하루하루 불확실성으로 가득하다. 일이든 삶이든 상승과 하강이 존재한다. 그 안에서 자연히 균형이 맞길 바라는 건 헛된 꿈이다. 균형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깨달을 수 있는 삶의 후행 지표다.
앞으로 나아가는 자전거, 위태롭게 도는 팽이가 쓰러지지 않는 까닭은 계속 돌기 때문이다. 일과 삶, 돌봄과 양육, 일터와 삶터의 기쁨과 슬픔은 동시에 발생하거나 시차를 두고 반복된다. 그 요소들이 삶에서 끊임없이 돌고 돌며 나의 에 너지를 빼앗거나 채워준다. 삶에서 유독 에너지가 많이 드는 때가 있다면, 어쩌면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지나고 있다 는 증거인지도 모른다. 내 시간을 끌어당기는 대상에 더 관 심과 정성을 기울여본다. 결국 삶을 충실히 살아내는 수밖에 없다. 애쓰고 버티다 보면 간혹 균형이 절묘하게 맞아 보이는 순간이 온다. 그 찰나를 모으기 위해, 엉망진창인 내 삶을 사랑하기 위해 오늘도 글을 쓴다.
226 삶을 글로 지어내는